소설리스트

투자의 신이 키우는 축구단-32화 (32/422)

32화 팀을 떠받치는 재료 (3)

애니 피터슨.

내 눈에 보이는 가치는 약 삼십억 원으로, 지금까지 내가 만난 언론인 중에서도 상위권이며, 직접 현역으로 뛰는 기자 중에서는 단연 첫 손에 꼽힌다.

그런데도 줄곧 지역 일간지, 선덜랜드 데일리의 편집장으로 일하는 중이니, 자신의 가치에 비해 무척 초라한 커리어를 지닌 셈이다.

지금의 회사와 관계가 돈독할 것임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어쩌면 사장하고 친할 수도 있고.

돈을 좇는 타입도 아닐 거다.

세상 물정 모르는 신인이면 혹시 또 모르지만, 애니 정도 연차의 기자라면 세상에는 자기가 쓰는 방식보다 훨씬 더 잘 팔리는 기사가 있다는 걸 모를 리가 없으니까.

이 시대의 참 언론인이긴 한데, 그녀를 영입하려는 입장에선 영 곤란한 요소이기도 하다.

돈다발로 때려도 아무 타격이 없다는 뜻이거든.

애니를 직접 설득하면 씨알도 먹히지 않을 게 분명하다. 그래서 사장에게 연락하기로 한 거다.

희주는 곧바로 미팅 약속을 잡아냈고, 차량을 준비했으며, 언제 만들었는지 회사소개서까지 내밀었다.

그렇게 나는 그날 오후 선덜랜드 데일리의 사무실 앞에 섰다.

엘리베이터도 없는 5층짜리 낡은 건물의 4층에, 선덜랜드 데일리의 간판이 초라하게 매달려 있었다.

사무실에 들어가자 자판 두드리는 소리가 온 사방에 가득했고, 그야말로 정신없이 글을 쓰는 기자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애니 역시 그중의 하나였다.

남들보다 조금 큰 책상을 흔히 말하는 팀장 각도로 돌려놓긴 했지만, 그 외에는 다른 기자들과 별반 차이가 없어 보였다. 비품의 질이며, 하는 업무까지.

내가 온 줄도 모르고 기사 작성에 열중하는 애니를 슬쩍 불렀다.

“애니 씨, 안녕하세요.”

목소리가 들리자 애니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녀가 퀭한 눈으로 날 바라보며 웃었다.

“썬? 맥도날드 밖에서 보는 건 처음이네··· 그런데 혹시, 우리 인터뷰 약속이 있었던가?”

“아뇨. 왜냐면 오늘은 사실 애니 씨를 찾아온 게 아니라서요.”

“그래? FC 선덜랜드 담당은 난데···.”

“여기 사장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약속은 되어 있으니, 도착했다고 말씀 좀 전해 주시겠어요?”

그러자 맞은 편, 애니와 비슷한 규모의 책상에서 고개가 하나 쑥 하고 올라왔다

중년의 여성이었는데, 애니와는 여러모로 좋은 승부가 될 것처럼 보였다. 퀭한 눈가부터, 핏기없는 입술까지.

그런데도 표정 하나는 끝내주게 밝았다.

“아, 오셨군요! 제가 여기 사장 리타에요.”

“반갑습니다. 선덜랜드 구단주 이희성입니다. 편하게 썬이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반가워요, 썬. 아무 데나 편히 앉으세요··· 아쉽게도 편한 의자 같은 건 없지만요.”

손님용 의자는 커녕, 사장실도 따로 없는 영세한 사무실이었다. 접견실 같은 게 따로 있을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다른 직원들이 가득한 것만으로도 회담하기에 좋은 조건은 아니었는데, 심지어 그 직원들이 전부 기자라면 이야기를 나누기엔 좀 그렇다.

하다못해 근처 카페가 훨씬 낫겠지.

“괜찮으시면 잠깐 나갔으면 하는데요.”

리타가 재미있다는 듯 키득거렸다.

“제가 십오 년만 젊었으면 데이트 신청인가 싶어서 두근거렸겠지만, 아쉽네요··· 업무 이야기라면, 혹시 애니도 필요한가요?”

“그러면 좋겠는데요.”

잠시 후 우리는 근처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업무가 무척 바쁘신 것 같아서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귀사의 애니 피터슨 편집장을 스카웃하고 싶습니다.”

“뭐라고?”

당황하는 애니와 달리 리타는 침착했다.

“축구 식이죠? 원 소속팀에게 먼저 말하고, 팀이 동의하면 선수와 협상한다··· 재미있네요. 마음에 들어요.”

“리타!”

“조용히 해··· 지금 구단주님하고 이야기 중이잖아? 흠흠, 그래서, 이적료라도 듬뿍 얹어줄 생각이신가요?”

“비슷합니다. 돈은 아니지만요.”

“지금 사주신 커피보단 알찼으면 좋겠는데요.”

나는 무심코 리타가 주문한 음료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샷까지 추가한 그란데 사이즈의 커피, 산더미처럼 얹은 크림과 초코 시럽이 눈에 들어왔다.

저게 아인슈페너인가. 아무리 봐도 곱빼기 같은데.

덕분에 하나 배웠다. 세상에는 희주가 즐겨 마시는 무슨무슨 프라푸치노 못지않은 칼로리 폭탄이 있다는 걸.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홀짝인 다음, 준비한 카드를 꺼냈다.

“귀사에서 오랫동안 일해온 편집장이 FC 선덜랜드의 프레스 팀장이 되는 겁니다. 이보다 더 완벽하게 특종을 독식할 방법이 있을까요?”

그러자 리타는 만면에 웃음을 가득 띤 채 커피잔을 들어 올렸다. 꼭 건배라도 할 것 같은 기세다.

“쟤 성격상 그렇게까지 편파적이진 않겠지만, 확실히 괜찮은 제안이네요. 좋아요, 당장 데려가세요.”

그러자 옆에서 애니가 투덜거렸다.

“아니, 대체 내 의사는 묻지도 않고 자기들끼리 뭐 하는 거야?”

“애니 씨 의사는 이제부터 확인할 겁니다.”

소속팀 허가가 떨어진 모양이니까 말이지.

“저는 애니 씨 기사를 좋아합니다. 정직하고, 축구 보는 눈이 있고, 선수에게 해가 될 내용은 절대로 다루지 않죠. 정말로 공정하고 좋은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애니가 한숨을 쉬었다.

“내 기사가 좋으면, 그냥 계속 여기서 일하게 놔둬. 괜히 찾아와서 여기저기 들쑤시지 말고.”

“들쑤실 겁니다. 왜냐면 애니 씨 스타일로 이 업계에서 빛을 볼 수 있을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거든요. 스포츠 지면에 어울릴 내용은 아니니까요.”

잠재가치가 삼십억 원에 달하는데도, 지금까지 사회적 성공과는 줄곧 거리가 멀었던 언론인을 바라보며.

“선수의 결점 대신 장점만을 다루고, 불필요한 가십은 건드리지도 않는 기사··· 그건 구단의 프레스 팀장에게 어울리는 스타일이죠. 아닙니까?”

나는 그렇게 덧붙였다.

애니에게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 침묵에 만족하며, 나는 회사소개서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업무에 대해 최대한의 재량과 모든 지원을 보장합니다. 긍정적인 답변 기다리겠습니다.”

***

리타도 애니도 아무 말이 없었다. 이희성이 먼저 떠나가고, 두 사람이 선덜랜드 데일리 사무실로 돌아갈 때까지.

침묵이 깨진 건, 애니가 사무실 문을 열려는 찰나였다.

리타가 한숨처럼 내뱉었다.

“가버려. 그게 우리로서도 이득이거든.”

문손잡이를 돌리려던 애니의 손이 멈췄다.

“신나서 내쫓네? 내가 그렇게 기사를 못 써?”

“네가 그랬잖아? 선덜랜드는 반드시 프리미어리그에 갈 팀이라고. 우리 같이 영세한 지역 일간지가 1부 리그 팀하고 관계를 맺을 기회를 날릴 순 없지.”

손잡이에서 손을 뗀 애니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만일 프레스 팀장이 되면, 선덜랜드 데일리에만 특혜를 줄 수는 없어.”

“특혜는 바라지 않아. 네 성격 아니까. 그저 우리가 얼마나 공정한 기사를 쓰는 언론사인지를, 네가 기억해 주기만 하면 돼.”

“······.”

“그리고 사실 썬의 말대로, 네 스타일엔 구단의 프레스 책임자가 훨씬 잘 어울려. 선수들이 얼마나 노력하는지, 경기를 어떻게 준비했는지··· 그런 글이 특기잖아?”

애니가 한숨을 쉬었다.

“알다시피 나도 처음부터 그런 기사를 썼던 건 아니었어. 기자 생활 시작할 땐 선수들 까고, 전술을 씹고, 난리도 아니었지.”

“알아. 맥도날드에 다녀온 다음이었지? 축구선수가 어떤 노력을 거쳐 만들어지는 존재인지 느꼈다고 말했던 날부터. 그래서 하는 말이야.”

리타가 애니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애니를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선덜랜드에 가. 언론인으로서의 네 원점을 찾아가. 그곳에서, 네가 가장 쓰고 싶었던 글을 써.”

“정말로 내가 없어도 되겠어?”

“너 하나 없다고 무너질 회사면, 그건 회사도 아니야. 그러니까, 빨리 가.”

애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애니의 손이 손잡이를 돌렸다. 사무실 안으로 달려간 그녀는 자기 책상의 물건을 종이박스에 모조리 쓸어담기 시작했다.

그리 많은 짐은 아니었다. 기껏해야 노트북과 텀블러, 그리고 인터뷰 나갈 때 쓰는 화장품 세트 정도에 불과한 비품들이었기에, 정리는 순식간이었다.

자신의 짐을 끌어안은 애니가 사무실을 빠져나가기까지는 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사무실 입구에서 줄곧 애니를 바라보던 리타가, 손으로 미간을 지그시 눌렀다.

“그래도 오늘 원고는 써놓고 가야지. 못된 년.”

한숨을 내쉬며, 리타는 천천히 사무실에 발을 내밀었다.

그녀가 처음 입사했을 때와 변함없이 영세한, 그리고 이제는 줄곧 함께해온 친구도 없어져버린 사무실로.

“축하해, 애니.”

그리고 리타는 조용히 자신의 자리에 앉아 다시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

[리그 원에서 보내는 세 번째 여름, FC 선덜랜드의 프리시즌에 대하여]

팀의 모습이 확실히 달라졌다. 선수들에게서도, 프런트에게서도 의지가 느껴진다.

레바뮌이라는,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상대를 홈으로 불러들여 팀을 담금질하고, 부족한 퍼즐은 영입으로 채웠다. 전직 프리미어리거와 스페인의 레전드라는 거물을.

스태프의 보강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식당부터 메디컬 팀, 심지어 프레스 담당자까지 새로 뽑았다.

더는 리그 원에 머무를 생각이 없다고, 온몸으로 선언하는 듯한 여름이었다.

이제는 결과로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팀이 달라졌음을.

마침 개막전 상대는 브리스톨로 정해졌다.

선덜랜드에게는 지난 시즌, 승격을 가로막았던 악연의 상대다. 과연 그들이 어떻게 개막전을, 복수전을 준비하고 있을지 기대해본다. - 리타

***

개막전을 앞둔 우리는, 막바지 경기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선수들이 실전 감각을 유지할 수 있도록, 매일같이 A, B팀으로 나뉘어 연습에 돌입했다.

가장 큰 변모를 보인 선수는 골키퍼 하퍼였다.

“크리그 들어온다, 막아! 그리고 잭, 너는 요니 따라다녀.”

“하핫, 문제없슴다!”

아직 하퍼의 콜이 완벽하다고 볼 수는 없었다. 썩 간결하지도 않고, 판단적으로도 아쉬운 부분이 보인다.

그래도, 얼마 전까지는 그라운드 위에서 아무 말도 안 하던 하퍼가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는 것만으로도 팀의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했다.

원래부터 선방 능력 하나는 출중했던 하퍼가, 주위 동료와 소통을 시작한 것만으로도 안정감이 달라진 느낌이다.

잭 또한 한 꺼풀 벗었다.

구단에 대한 애정과 충성심이 넘치는 로컬 보이로서는, 팀이 나아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신이 나서 견딜 수 없는 모양이다.

“브리스톨 놈들, 감히 우리 팬분들을 울려? 곱게 보내나 봐라.”

··· 약간은 다른 동기도 섞여 있는 것 같지만.

하지만 이 경기장에서 가장 목소리가 큰 사람은, 하퍼도 잭도 아니었다.

“요니! 밥 굶고 나왔냐! 발 멈추지 마!”

페르난데스가 목에 핏대를 세웠다.

“잭하고 친구라서 빡세게 못 뛰겠어? 친목질 하고 싶으면 당장 클럽하우스로 꺼져!”

그라운드 전체에 페르난데스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공격에 나선 동료들에게까지 전해질 정도로.

“뛰어! 생각할 시간에 일단 뛰어! 너희 뒤엔 내가 있다! 그러니까 올라가! 더 뛰라고··· 나이스, 크리그! 방금 슈팅 아주 좋았어!”

득점에는 실패했지만, 날카로운 슈팅을 시도한 크리그를 향해 페르난데스가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그런 페르난데스의 팔에는, 주장 완장이 매달려 있었다.

크리그가 직접 내려놓은 것이었다.

원래는 톰슨을 차기 주장으로 낙점했지만, 본인이 고사하면서 주장 완장은 현재 페르난데스에게 넘어갔다.

처음에 주장을 달아 주기엔 조금 망설여졌던 것도 사실이었다. 지금의 페르난데스는 밖에서 굴러온 돌이기도 하고, 그가 뛰는 건 1년 정도니까.

하지만 결국 로저스 감독이 용단을 내렸고, 페르난데스는 자신에 대한 감독의 기대에 보답하는 중이다.

코치진의 준비도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브리스톨은 지난 시즌 27경기를 3-4-2-1로 나섰죠. 하부리그 팀이 대부분 그렇듯이 드라마틱한 보강은 거의 없었고, 이번 시즌에도 주로 쓰리백을 쓸 거에요.”

자신있게 설명하는 샐리의 얼굴은 변함없이 화사했지만, 자세히 보니 평소보다 화장이 짙었다. 아마 피로한 기색을감추려는 목적이었을 것이다.

브라이언이 샐리 쪽으로 심술궂은 미소를 보냈다.

“요 며칠 분석실에 틀어박히더니, 겨우 그게 다야?”

“설마요. 이 정도는 3분이면 파악하는 거죠. 이번 경기에선 크리그를 평소보다 높은 위치로 올리길 추천드리고 싶은데요.”

“톰슨은 상대 미드필더보다 조금 아래쪽에 머무르게 하고··· 그렇지?”

“톰슨을 자유롭게 두는 건 자살 행위죠. 따라서 브리스톨 중원은 물러나지 못할 거에요.”

“그렇게 하면 미드필더와 센터백이 서로 멀어지고, 요니에게 공간이 생기겠지.”

“브리스톨 따위에게 점수를 내주지 않을 자신은 있지만, 결국 승리에는 득점이 필요하니까요.”

“맞아. 그리고 이번에 점수를 따낼 열쇠는 요니와 크리그의···.”

브라이언과 샐리가 눈을 마주쳤다. 두 사람의 눈동자에는, 어느새 부드러운 기류가 감돌고 있었다. 마치 연인을 바라보는 듯한 표정으로.

둘은 대화의 방점을 찍었다.

“오프 더 볼이죠.”

“온 더 볼이 아니고!?”

응, 시즌 두 번째 파국이네.

“분석관 따위에게 전술적 안목을 기대한 내 잘못이지. 가서 그냥 데이터나 뽑아.”

“아 진짜! 구단주님, 상사 좀 바꿔 달라니까요? 축구 잘 아는 사람으로요!”

나로서는 솔직히 온 더 볼이든 오프 더 볼이든 점수만 잘 내면 좋은 거 아닐까 싶긴 하다. 어차피 공격수에게는 둘 다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고.

“브로, 브로는 어떻게 생각해?”

“전술 문제는 둘이 알아서 해야지. 내가 더 잘 판단할 것 같으면 뭐하러 코치를 쓰고, 분석관을 쓰겠냐? 다만.”

“다만?”

“한 가지는 알겠어. 개막전 전까지, 스태프 한자리를 더 채워야 한다는 것.”

그러자 샐리와 브라이언이 눈을 빛냈다.

“제대로 된 코치를 데려오시려는 거군요! 역시 구단주님, 믿음직스러워요.”

“인성 교육 담당자 맞지? 얘는 인성 교육 다시 받아야 해.”

“아니, 잔디 관리인인데.”

득점에 실패한 직후, 미묘한 표정으로 오른발을 몇 번이나 다시 고쳐 내딛던 크리그의 모습을 보며··· 나는 그렇게 확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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