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팀을 떠받치는 재료 (4)
아카데미 오브 라이트의 잔디는 13년 전과 똑같이 푸르렀고, 그 위의 축구공 너머로 보이는 풍경 또한 13년 전과 똑같았다.
왼쪽 하프스페이스에서, 지키는 이 없이 텅 빈 골대를 노려보았다.
다음 순간, 몸이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오른발 아웃프런트로 공을 크게 밀어내고, 그대로 공을 따라 파고들면서 슛. 윙포워드들에게는 매크로나 마찬가지인 동작이다.
나 또한 유소년 시절 매일같이 연습했던 기술이다. 그래서일까. 벌써 13년이나 지났는데도 아직 몸이 기억하는 모양이다.
헛발질하지도, 슛이 빗나가지도 않았다. 내 오른발을 떠난 공은 골대의 파 포스트를 빠듯하게 꿰뚫었다.
그래도 만족스럽진 않다.
“공이 착착 감기지 않는 느낌인데.”
현역 시절이었다면 조금 더 날카로운 궤적을 그렸을 텐데, 어째 영 밋밋해 보인다.
짐작 가는 원인은 많다. 13년간의 공백, 고장난 무릎, 정장에 구두 차림도 기여했겠지.
그래도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다. 우리 연습장 잔디는, 13년 전과 분명히 밟는 느낌이 달라졌다는 걸.
역시, 잔디 관리인을 다시 데려와야 한다. 그것도 최고의 잔디 관리인을.
떠올릴 수 있는 후보는 한 명뿐이었다.
‘샘 아저씨’, 샘 윌리엄슨. 지난 시즌까지 무려 27년간 FC 선덜랜드의 잔디를 지켜왔던 잔디 관리인.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가 23년 전에 세워졌으니, 그의 근속연수는 지금의 홈 구장보다도 훨씬 오래된 것이었다.
마치 팀의 살아있는 역사와도 같은 인물.
그런 샘 아저씨는 전임 구단주에 의해 쫓겨났고, 이후 지금까지 복직을 거부하는 중이었다.
***
구단주실로 돌아오자, 미리 샘 아저씨의 인사 기록을 살펴보던 희주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오빠, 샘 윌리엄슨 씨 말인데, 27년간 쉰 적이 딱 두 번밖에 없으시네? 잔디 관리인은 생각보다 빡센 직업이었구나.”
“보통 그 정도는 아니야. 샘 아저씨가 특수한 거지.”
그나저나 이쯤 되면 그런 철인을 쉬게 만든 사유가 궁금한데.
눈이 마주치자 희주가 묻기도 전에 냉큼 대답했다.
“첫 번째는 24년 전, 사유는 아들 결혼식. 두 번째는 18년 전··· 아들 부부 장례식··· 이네.”
나도, 희주도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이쯤 되면 복귀를 완강히 거부해도 이해가 된다. 팀에 대해 배신감과 상처를 느낄 만한 일이다.
희주가 혀를 찼다.
“세상에, 이런 분을 쫓아냈던 거야? 본인이 원할 때까지 남아 계시게 하고, 떠날 땐 성대한 은퇴식을 열어 드렸어도 모자랄 판에···.”
그러게, 로널드 이 개자식.
나도 반성 중이다. 이런 분을 고작 전화 몇 통으로 다시 데려오려고 했다니.
당연히 내가 직접 찾아가서 그랜절 박고 모셔와야 마땅한 사람이었는데.
“차량 준비해. 지금 바로 찾아갈 거야.”
“오케이··· 그런데 오빠, 인사 기록엔 주소가 안 나와 있는데?”
희주가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자세히 보면 눈빛은 전혀 곤란하지 않아 보였다. 찾아낼 방법 몇 가지쯤은 이미 떠올리고 있는 거겠지.
예컨대 희주는 샘 아저씨의 집 전화번호를 안다. 그러니 국번을 보면 거주지를 꽤 좁힐 수 있을 거다.
탐정 모자라도 하나 안겨주면 마치 츄르 받은 고양이처럼 신나서 찾아내겠지.
다만, 나는 훨씬 간단한 방법을 안다.
“아마 브라이언이 댁 위치를 알 거야.”
츄르 뺏긴 고양이처럼 시무룩한 표정으로, 희주는 브라이언과 운전기사를 번갈아 호출했다.
***
샘 아저씨의 집은 경기장에서 차로 20분정도 떨어진 곳이었다.
별로 크지 않은 단독 주택. 일단은 담벼락이 있긴 하지만 별로 높지 않아서인지 정원이 들여다보이는 구조였다.
그 안에서는 누군가 부지런히 잔디깎이를 돌리는 중이었다.
요란한 기계 소리에 묻히지 않게 목소리를 높였다.
“계십니까?”
그러자 잔디깎이 소리가 뚝, 하고 멈췄다. 잠시 후 별로 높지 않은 담벼락 위로 머리가 쑥 하고 올라왔다.
정확히는 머리 같은 거라고 표현해야 할 것 같다. 캡모자를 푹 눌러써서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었거든.
“누구세요?”
“FC 선덜랜드에서 나왔습니다. 샘 윌리엄슨 씨를 만나고 싶은데요.”
“저희 할아버지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담벼락에서 떨어진 캡모자가 안채 쪽으로 후다닥 달려가다가 우뚝 멈췄다.
“썬?”
“저를 아십니까?”
“네, 선덜랜드 유스였잖아요! 지금은 구단주죠?”
“잘 아시네요.”
“할아버지 일하는거 구경 갔다가 몇 번 봤거든요. 아 참, 내 정신좀 봐. 일단 안으로 들어오세요”
캡모자는 곧바로 대문을 열고 우리를 안으로 맞이했다.
안내받는 와중, 브라이언이 내게 속삭였다.
“유전이라는 게 진짜 무섭긴 하네. 저렇게 어린데도 잔디 진짜 잘 깎잖아.”
“어리다고?”
“변성기도 안 왔잖아. 목소리 못 들었어?”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실감했다.
브라이언은 정말로 축구밖에 모르는 놈이라는 걸.
***
13년만에 만난 샘 아저씨는 기억 속의 모습보다 훨씬 늙어 보였다. 예전에는 그래도 장년 축에 들었다면, 지금은 확연히 노인이다.
몇 마디 인사를 나눈 후, 복직을 권하자 샘 아저씨가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이제 늙어서 힘들다고 몇 번이나 말했지 않나? 그런데 뭘 굳이 집에까지 찾아와. 옳거니, 늙은이가 심통 부리며 버티나 싶었겠구먼?”
“전임 구단주가 샘 아저씨를 대한 방식은 그야말로 최악이었으니까요. 팀을 원망해도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샘 아저씨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야 처음엔 화도 났지. 근데 어쩌겠나··· 반평생 몸담은 직장 상대로 얼굴 붉힐 수도 없고, 그냥 내가 짐 싸야지.”
“잘못된 일이었습니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바로잡고 싶습니다. 돌아와 주십시오.”
“아닐세, 예전부터 쉬려던 참이었거든. 늙어서 몸도 예전 같지 않고, 3년 전부턴 손도 맘대로 못 쓰겠더라고. 그때 바로 은퇴할까 싶었는데···.”
“강등된 팀을 차마 버리지 못하셨던 거군요.”
“누군가는 겨우 잔디라고 하겠지만, 잔디도 선수들의 경기력에 영향을 주는 요소니까. 그래서 꾹 참고 3년을 버텼으니까, 이젠 쉬어도 되지 않겠나?”
이렇게까지 말한다면, 억지로 현역 복귀시키는 게 오히려 실례가 될 것 같다.
일종의 고문 같은 역할을 부탁하는 게 가장 적당하겠지.
다만 3년이라는 키워드가 조금 마음에 걸린다.
아무리 초인적인 의지력이라도 육체의 한계까지 초월할 수는 없다. 그런데도 3년간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의 잔디에는 어떠한 문제도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니, 아마 지난 3년간 그의 손발 노릇을 해준 사람은 따로 있었을 것이다.
마침 짐작이 가는 사람이 한 명 있긴 한데···.
그때, 캡모자가 거실에 쏙 하고 들어왔다.
“마실 것 좀 드세요.”
캡모자가 가져온 음료는 유리컵에 담긴 콜라 두 잔, 그리고 뜯지도 않은 제로콜라 캔이었다. 캡모자는 마치 당연하다는 듯 제로콜라를 내 앞에 내려놓았다.
“그냥 콜라는 안 드시죠?”
“선수 시절에는 그랬지만, 지금은 주는 대로 먹습니다. 일부러 따로 사오실 것까진 없었는데요··· 그래도 잘 아시네요.”
“팬이었거든요. 방에 9번 마킹 유니폼도 있어요. 데뷔할 때 사인 받으려고 했던 건데··· 어머, 죄송해요! 그런 뜻이 아니라.”
“괜찮습니다. 필요하시면 사인 정도는 해드릴 수 있고요.”
“정말요!? 그럼 유니폼 꺼내올게요.”
명랑하게 웃으며 일어나려는 캡모자를 만류했다.
“잠시만요. 괜찮으시면 잠깐만 같이 이야기 좀 하시죠.”
“네? 네.”
당황하면서도, 캡모자는 자리에 엉거주춤하게 앉았다.
캡모자의 앞에 제로콜라를 슬쩍 밀어놓은 다음, 나는 자신감 있는 목소리로 샘 아저씨를 설득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면, 실무에 복귀해 달라고 하진 않겠습니다. 고문 역할은 어떠십니까?”
“고문? 괜히 팀에 짐만 되는 거 아닌가? 요즘 젊은 친구들이 늙은이 말을 듣기는 하고?”
“잘 들을만한 실무자를 구하겠습니다.”
나는 곧바로 캡모자 쪽으로 몸을 돌렸다.
“초면은 아닌 것 같지만, 그래도 인사드리겠습니다. 선덜랜드 구단주 이희성입니다··· 당신을 채용하고 싶습니다.”
“네!?”
캡모자에게서 새된 소리가 새어 나왔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직책은 잔디 관리인입니다. 단, 고문의 지시를 충실히 따른다는 제약이 붙겠지만요.”
그러자 이번엔 옆에서 브라이언도 당황하기 시작했다.
“브로, 아무리 그래도 아직 변성기도 안 온 꼬마한테···.”
캡모자가 발끈했다.
“아니, 꼬마는 아니거든요!?”
브라이언이 눈치채지 못하는 게 신기할 정도다. 캡모자는 유소년 시절의 나와 만난 적이 있고, 심지어 팬이라고 말했으니까.
최소로 잡아도, 사춘기는 진작에 지나고도 남았을 나이.
그러니 목소리 톤이 높은 이유는, 변성기가 오지 않을 만큼 어리기 때문이 아니라···.
“모자를 잠깐 벗어 주시면 저 친구의 오해를 푸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은데요. 어떠십니까?”
그러자 잠시 망설이던 캡모자가 천천히 모자를 벗었다.
도톰한 입술, 주근깨 박힌 뺨, 활달한 느낌을 주는 푸른 눈동자, 둥그스름한 이마와 약간 곱슬거리는 스트로베리 블런드가 차례로 모습을 드러냈다.
“엘리자베스 윌리엄슨입니다. 리지라고 부르셔도 괜찮아요.”
브라이언이 경악했다.
“여자였어?”
“보면 모르세요?”
“그게··· 굴곡 없이 평평해서···.”
아, 무덤 팠네. 저 놈.
리지의 얼굴이 마치 가을 단풍처럼 붉게 물들었다.
“리지 씨가 헐렁한 작업복을 입어서 그렇겠죠.”
옆에서 지원사격을 가했지만, 한 발 늦었다. 경쾌한 소리와 함께 브라이언의 얼굴 역시 붉게 물들고 말았다. 마치 단풍잎 같은 형태와 빛깔로.
붉은색은 항상 전염되는 법이다.
음, 이거 우리 팀 캐치 프레이즈로 쓸 수 없으려나? 마침 우리 유니폼도 붉으니까.
손을 주무르면서, 리지가 새침한 얼굴로 쏘아붙였다.
“자업자득이니까 한 대 정도는 참으세요.”
“물론이죠. 그나저나 엄청난 미인···.”
“꼬마라면서요? 이제 와서 아부해도 소용없어요··· 그래서 썬, 저를 잔디 관리인으로 채용하시겠다고요?”
“네, 해본 적 있죠?”
그러자 브라이언이 옆에서 끼어들었다.
“해본 적이야 있겠지. 좀 전에도 잔디 깎고 있더만. 솜씨는 엄청 좋던데··· 그래도 가정집 정원하고 그라운드는 규모가 너무 다르잖아.”
축구밖에 모르는 브라이언의 말을 슬쩍 무시하며, 나는 리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라운드 위에서도 해본 적 있을 텐데요.”
“네?”
리지는 마치 보란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지만, 소용없다.
“왜냐면, 샘 아저씨가 가끔 불렀다는 알바는 바로 리지 씨였을 테니까요.”
“무슨 근거로 그런 말씀을 하시죠?”
“리지 씨 옷차림을 보면 대충 알죠. 특히 모자요.”
“안 쓰면 피부 상해요. 저, 피부가 좀 신경 쓰여서요.”
리지는 천연덕스럽게 둘러댔지만 나는 안 속는다.
패션과 미용에 관심이 많은 여동생을 하나 키워본 덕분에, 나는 여자들이 진짜로 피부를 신경 쓰기 시작하면 무슨 일이 생기는지 잘 안다.
눈치도 있다. 따라서 내 입에서 “설마, 그랬으면 지금보단 주근깨가 적었겠죠.” 라는 함정 키워드가 튀어나오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나는 여동생을 키워 본 남자니까.
아무튼, 리지에게 모자는 절대 햇빛을 가릴 용도로 쓰는 물건이 아니다. 남의 시선을 가릴 목적이지.
“햇빛 대책이라면 얼굴을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모자를 꾹 눌러써야 할 필요는 없겠죠.”
“모자 눌러쓰는 건 그냥 습관인데요.”
“바꿔 말하면 당신은 잔디를 깎을 때마다 모자를 그렇게 눌러쓰는 습관이 붙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작업복도요.”
정말로 단순한 작업복이라면 몸매조차 알아보기 어려울 만큼 펑퍼짐한 옷을 입을 이유는 없다. 이 정도로 헐렁하면 오히려 움직이기 불편할 테니까.
불편한 작업복, 푹 눌러쓴 모자, 무의미한 키워드에 샘 아저씨의 건강이 3년 사이 부쩍 나빠졌다는 사실을 더하면 조금 다른 의미가 나오게 된다.
“일반적으로 잔디관리 알바는 여자에게 시킬 업무는 아닙니다. 누군가 이상하게 보고 캐묻는다면, 손녀라는 사실이 들통나겠죠.”
마침 리지는 여자치고는 키가 꽤 큰 편이다. 헐렁한 옷으로 몸의 곡선을 감추고, 모자를 푹 눌러쓰면 얼핏 남자처럼 보이지 않을 것도 없다.
그렇게 3년쯤 보내다 보면 집에서도 모자를 꾹 눌러쓰고, 일할 땐 헐렁한 작업복을 선호하는 습관이 붙어도 이상하지 않다.
“할아버지 손녀라는 사실을 제가 숨겨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특혜처럼 보일까 봐서요?”
“그런 건 아니었겠죠. 알바비 얼마나 한다고요. 하지만 손녀를 데려와서 일을 돕게 시킨다는 게 알려질 경우, 자칫하면 샘 아저씨의 건강 상태가 같이 알려졌겠죠.”
그러자 리지가 한숨을 쉬었다.
“꼭 탐정 같네요.”
“직업 특성이죠. 이 정도 눈썰미도 없으면 투자자로는 먹고살기 힘듭니다.”
“어··· 투자는 사업 전망이나 시장 상황 같은 거 분석하는 직업 아니었나요?”
“사기꾼은 걸러야 하니까요.”
나는 사람의 몸값이 보인다는, 투자자로서 엄청나게 유리한 능력을 가졌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건 아니다.
사람의 직업까지 보이는 건 아니거든.
몸값만 보고 재능있는 사업가인줄 알고 투자했더니, 사실은 재능있는 사기꾼이었다는 결말은 피하고 싶다.
리지가 쓴웃음을 지었다.
“저기, 마음은 감사해요. 그렇지만 동정심으로 일자리를 받고 싶진 않아요. 그저, 가시기 전에 유니폼에 사인이나 좀 해 주시면···.”
사실 동정이라기보다는 감사에 가까울 것이다. 샘 아저씨의 27년은, 그 손녀에게 무조건적인 채용을 보장하는 것 정도로는 도저히 갚지 못할 헌신이었으니.
하지만, 단지 그뿐이었다면 리지를 굳이 잔디관리인으로 고용하려고 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녀가 일할 수 있는 적당한 다른 부서에 투입했겠지.
“최고의 잔디 관리인을 데려오고 싶은 것뿐입니다. 지난 3년간,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의 잔디에 문제가 생겼던 적은 없으니까요··· 없지, 브라이언?”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는 브라이언을 곁눈질로 확인한 다음, 나는 최대한 여유있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두 분이 함께 일하는 한, 우리 잔디에는 아무 문제가 안 생긴다는 뜻이 됩니다.”
유일한 불안 요소라면, 언젠가는 샘 아저씨가 완전히 은퇴해야 한다는 것, 그때부터는 리지가 혼자 잔디를 맡아야 한다는 점이겠지만···.
나는 리지를 빤히 바라보았다.
불그스레한 뺨, 조금 촉촉한 눈동자를 차례로 지나, 조금 둥그스름한 이마에 시선을 옮겼다.
정확히는, 그 이마에 선명하게 보이는 숫자 15쪽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