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자의 신이 키우는 축구단-34화 (34/422)

34화 팀을 떠받치는 재료 (5)

아카데미 오브 라이트는 고요했다. 아직 선수들도, 스탭들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이른 새벽이기에.

새벽 어스름 너머로 골대를, 그리고 공을 잠시 바라본 다음, 그대로 몸을 움직였다.

아웃프런트를 이용한 드리블과 슛, 일명 윙 포워드 매크로다. 어제와 똑같은 동작인데도 공의 궤적이 어제보다 훨씬 예리한 느낌이 든다.

역시 우리 잔디는 이래야지.

잠시 만족스러운 얼굴로 그물을 흔드는 공을 바라보고 있었더니,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나이스 슛!”

돌아보니 리지가 웃고 있었다.

“아직 현역이라고 해도 믿겠는데요?”

정말로 내 팬이긴 했었나 보다. 고작 이 정도로 현역 운운하는 걸 보면.

“진짜 선수들이 들으면 비웃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없을 때 한번 차보고 가려던 거였는데···.”

“하핫, 그러다 저한테 딱 걸리신 거군요? 잔디 관리인의 아침은 빠르니까요.”

하긴, 업무 특성상 리지도 부지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선수들이 연습장에 들어오기 전까지 모든 준비를 끝마쳐야 하는 게 잔디 관리인의 일이니까.

부드럽게 웃던 리지가,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괜찮으세요?”

“네, 아주 마음에 드네요. 13년 전하고 느낌이 거의 같아요. 선수들도 분명 좋아할 겁니다.”

처음엔 잔디 상태를 물어보나 싶었다. 그녀는 이제 선덜랜드의 잔디 관리 책임자니까.

하지만 리지의 관심사는 내 예상을 벗어난 것이었다.

“아뇨, 무릎이요.”

“이 정도는 괜찮습니다. 운동선수가 되는 게 불가능해졌을 뿐이죠.”

그러자 리지의 표정이 금방 환하게 밝아졌다.

“다행이네요!”

“신경 써 주는 건 고마운데, 잔디에 대한 소감부터 물어봐야 하는 것 아닙니까? 리지 씨는 이제 잔디 관리 책임자니까요.”

그러자 리지가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안 그래도 확인하려고 했어요. 오늘 연습 끝나고 선수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려고요. 예고를 좀 더 세심하게 맞추고 싶거든요.”

“예고?”

“잔디 길이요. 물론 감독님이 지시해 주시긴 하지만, 몇 밀리로 깎을지까지 세세히 지정하진 않거든요.”

하긴, 감독의 요구는 기껏해야 평소보다 잔디를 짧게 해달라거나, 반대로 길게 세팅해 달라는 정도로 끝난다. 짧은 게 몇 밀리이고, 긴 게 몇 밀리인지는 리지의 판단으로 정해야 한다.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 리지도 감으로 처리하겠지만, 팀에 온 지 얼마 안 된 상태이니 지금은 선수들의 반응을 세심하게 살펴서 대응하려는 모양이다.

좋은 자세다.

“하긴, 현역 선수들 반응이 중요하겠죠. 나 같은 아마추어 말고요.”

“그, 그런 게 아니라요··· 일이니까요. 어쩌면 딱 1밀리 차이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조금이라도 더 좋은 느낌으로 세팅해주고 싶어서요.”

“압니다. 밖에서 해줄 수 있는 건 그런 정도니까요.”

로저스 감독의 입버릇처럼, 사이드라인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건 선수들뿐이다. 일단 킥오프를 알리는 휘슬이 울리고 나면 감독은 물론, 스태프와 구단주도 아무것도 도와줄 수 없으니까.

그러니 휘슬이 울리기 전에, 선수들에게 아주 작은 것 하나라도 더 해주려 노력할 수밖에 없겠지.

“어디 보자, 그럼 연습까진 여유가 좀 있겠네요.”

“그렇··· 죠?”

“잠깐 시간 좀 내줄 수 있습니까?”

그러자 리지의 눈동자가 급격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써, 써, 썬, 저 지금 옷이 엉망인데요.”

“왜요. 우리 직원용 유니폼인데.”

“그게, 화장도 제대로 안 했고···.”

“괜찮습니다. 지금도 보기 좋은데요.”

아무튼, 나는 여동생을 키워본 남자다.

따라서 여자들이 얼굴에 뭘 찍어 바르기 시작하면 시간이 금방 녹아버린다는 정도는 잘 알고 있다.

그나마 화장 기술이라도 좋으면 좀 낫겠지만, 평소 꾸미지 않는 리지 같은 타입은 꾸미는데 정말, 정말 오래 걸리겠지.

어쩌면 오늘 연습 시작까지 맞추지 못할지도 모른다.

나는 가볍게 리지를 잡아끌고 클럽하우스 로비로 향했다.

그리고 대기하던 촬영팀에게 리지를 인계했다.

“자, 리지. 카메라를 보고 간단히 인사해 주시겠어요? 구단 직원들은 다 하는 겁니다.”

정말이다. 오늘 아침부터 생긴 규정이지만.

“네? 아, 네···.”

안도와 아쉬움이 공존하는 표정으로, 리지는 잠시 목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카메라를 똑바로 응시했다.

“시설관리팀 소속, 잔디 관리 책임자 리지 윌리엄슨입니다.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선덜랜드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이렇게요?”

***

그날 연습은 무척 가볍게 이루어졌다. 경기가 코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에, 컨디션 조절에 들어간 것이다.

“고생하셨습니다!”

연습이 끝나자마자 스태프들이 부산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메디컬 팀은 선수별로 각각 이온 음료나 프로틴 쉐이크 같은 것을 세심하게 구분해서 내놓았고, 심박 데이터에 따라 천천히 쿨다운을 진행했다.

리지 또한 부산하게 움직였다.

“잔디 밟는 느낌은 어떤가요? 공 굴러가는 정도는요?”

“좋슴다. 완벽함다!”

활기차게 대답하는 잭의 곁에서, 톰슨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쟤는 돌바닥에서 뛰어도 완벽하다고 할 놈이니까 믿지 말고, 내 생각엔 조금 더 길어도 괜찮겠는데··· 감독님도 긴 잔디를 주문하시지 않았나?”

“맞아요. 그런데 잔디를 너무 길게 하면 아무래도 체력을 뺏기는 경향이 있는데요.”

리지의 염려스러운 시선을 받은 톰슨은 히죽 웃었다. 그리고는 턱짓으로 잭과 요니 쪽을 가리켰다.

“괜찮아. 나는 많이 안 뛰니까. 뛰긴 쟤들이 뛰지. 근데 쟤들보다 팔팔하고 잘 뛰는 선수는 리그 원에 없거든. 하물며 브리스톨 애들은 어림도 없지.”

“그 가정이라면 지금보다 2밀리 길게··· 알았어요! 감독님과 상의해볼게요.”

“개막전 일정에 맞출 수 있겠어? 자르는 건 쉬워도 기르는 건 어려울 텐데.”

음, 그건 나도 좀 궁금하다. 잔디용 영양제라도 대량으로 뿌리려는 건가? 27년간 선덜랜드의 잔디를 지켜온 윌리엄슨 가문이니만큼 뭔가 비법 하나쯤은 있을 법도 한데.

주위를 둘러보니 다들 말은 안 하지만, 리지와 톰슨 쪽으로 호기심 어린 시선을 잔뜩 보내는 중이다. 선수들은 물론, 메디컬 팀 스태프들도.

리지가 웃었다.

“그야 경기장 잔디는 아직 손대지 않았으니까요.”

아, 그러네.

호기심 어린 시선은 순식간에 흩어졌다.

그 사이 나는, 크리그에게 접근했다.

“오늘은 느낌이 어땠습니까?”

“네?”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크리그에게 슬쩍 잔디를 가리켜 보였다.

“신경 쓰고 있지 않았습니까?”

“아아, 그거요. 오늘은 아주 좋았습니다. 솔직히 뭐가 달라진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공차는 느낌은 편안하네요.”

“다행이네요. 공격수는 여러모로 민감하니까요.”

팀의 스코어러는 사람들의 생각보다 훨씬 민감한 존재다. 약간만 세팅이 틀어져도 부진에 빠지고, 그러다가 한번 영점이 잡히면 귀신같이 골을 몰아 넣기 시작한다.

물론 그 기복이 적으면 적을수록, 영점이 쉽게 틀어지지 않고 꾸준할수록 좋은 골잡이겠지.

아무튼, 크리그가 지금의 잔디 세팅이 마음에 든다면 다행한 일이다. 그는 여러모로 민감한 공격수 포지션이고, 예전의 우리 잔디를 몸으로 기억하는 선수이기도 하니까.

내 마음에 들고, 크리그 마음에 든다면 우리 잔디 상태에 대해서는 크게 흠잡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앞으로는 리지에게 맡겨두면 되겠지.

잔디에 대한 크리그의 반응을 확인한 시점에서 오늘 연습을 참관한 목적은 이뤘다. 그래서 슬슬 빠져나가려고 했더니, 크리그가 쓴웃음을 지었다.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저 때문에 잔디 관리인을 새로 데려오신 모양이군요.”

“계기는 그랬지만, 꼭 크리그 선수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어차피 데려올 인재였거든요. 보다시피 리지는 일 잘하는 관리인이고요.”

“그럼 이제는 저만 제 일 잘하면 되겠군요.”

크리그의 표정은 담담했지만, 눈빛 한구석에서는 미처 감추지 못한 불안함이 묻어났다.

뮌헨전에서 득점에 성공하면서 자신감이 붙길 바랐지만, 아직 부족했던 모양이다.

하긴, 그는 지난 두 시즌 내내 부진했던 선수다. 프리시즌에 딱 한 골 넣은 것만으로 자신감이 붙을 리는 없다.

“잘할 겁니다.”

크리그의 얼굴, 이마의 숫자 60을 응시하면서 나는 힘주어 다시 말했다.

“잘할 겁니다. 내 안목은 빗나간 적이 없으니까요.”

사람의 가치가 숫자로 보이는 시점에서, 적어도 재능에 대한 내 평가는 결코 빗나갈 리가 없다.

그런 치트키를 쓰는 주제에 안목을 운운하자니 쑥스럽기도 하지만, 그래도 내가 좀 쑥스럽고 마는 게 낫다.

어차피 밖에서 해줄 수 있는 건 이런 것들에 불과하니까.

선수를 최상의 상태로 경기장에 내보내기 위해, 좋은 감독과 코치를 쓰고, 메디컬 팀을 보강하고, 잔디관리인까지 새로 구했다.

격려 정도로 해결된다면야, 열 번이라도 해줄 수 있지.

사이드라인 밖에서 팀을 지탱하는 게, 구단주의 일이니까.

그렇게 나는 선수들을 격려하고, 스태프와 소통하며, 팀에 부족한 부분을 계속 채워나갔다.

그 사이에도 시간은 계속 흘러갔고, 마침내 구단주로서 치르는 첫 공식전을 맞이하게 되었다.

악연의 상대, 브리스톨과의 개막전을.

***

리그 원 개막전, 선덜랜드 대 브리스톨과의 경기에는 예년 이상의 관중이 몰려들었다.

프리시즌의 기대감이 이어진 영향이었다. 승격을 노리는 팀으로서는, 올해는 다르다는 기대감을 주는 게 가장 중요한 요소다.

그 점에서 선덜랜드의 프리시즌은 합격점을 받을 만했다. 전직 뉴캐슬 팬, 브렌든은 그렇게 생각했다.

뉴캐슬 팬이던 자신마저 개막전 관중으로 끌어들일 정도였으니.

- 이봐, 브랜든. 개막전 보러 갈 거야, 말 거야?

예전 같았으면 이웃 마일즈의 문자를 가볍게 일축했을 것이다. 프리미어리그 팬이 뭐하러 3부따리 경기를 보겠느냐고, 그냥 같이 뉴캐슬 경기나 보러 가자고.

하지만 이번 시즌은 다르다.

뉴캐슬 프런트보다 선덜랜드 프런트가 훨씬 일 잘한다는 사실은 이번 프리시즌 3연전을 통해 증명되었고, 페르난데스와 톰슨의 영입을 보면 자금력 또한 검증되었다.

비록 프리시즌 세 경기는 전패였지만, 상대가 레바뮌이라는 걸 고려하면 나쁘지 않은 경기력이었다.

FC 선덜랜드에 대해 특별한 애정까지는 없었지만, 그래도 어쩌면 몰락한 옛 명문이 부활하는 현장을 직접 지켜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브랜든은 그렇게 생각했다.

브렌든은 곧바로 가겠다고 답장을 보냈고, 경기 당일에는 선덜랜드 레플리카까지 챙겨 입는 정성을 보였다.

18번, 잭 맥그리거의 마킹이 들어간 레플리카였다.

마일즈가 웃었다.

“거, 보기 좋구만. 그런데 기왕 새로 살 거면 19번이 낫지 않았어? 요니 엄청 잘하던데.”

“요니보단 잭이 훨씬 핫하지. 잭은 로컬 보이잖아. 차기 주장 확정이나 마찬가지고. 투자는 이렇게 하는 거야.”

브렌든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티켓을 제시하고 게이트를 통과했다.

마일즈가 그런 브렌든의 뒤를 이었다. 마일즈가 내민 시즌권을 받아든 직원이 친절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마일즈 우드 고객님 본인 맞으신가요?”

“그렇소만.”

그러자 직원의 표정이 조금 변했다.

“오랜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마일즈 우드 고객님. 저희 스태프가 자리까지 직접 안내 도와드리겠습니다··· VIP 고객님 들어가십니다. 마일즈 우드.”

먼저 게이트를 통과한 브렌든도, 입구의 마일즈도 아직 상황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한 와중에, 유일하게 움직이는 인원은 선덜랜드의 CS팀 스태프뿐이었다.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지난 14년간의 변함없는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잰걸음으로 달려 나온 CS 직원이 마일즈를 정중히 자리까지 안내했고, 그가 착석하길 기다렸다가 공손한 태도로 붉은 봉투를 내밀었다.

“이게 뭐요?”

“오늘부터 사용하실 새 시즌권입니다.”

마일즈가 받은 ‘새 시즌권’ 은 꼭 VIP 등급 신용카드처럼 생긴 물건이었다. 무광 티타늄으로 만든 재질부터가 무척 고급스러워 보였다.

앞면에는 마일즈의 이름과, 처음으로 시즌권을 구입한 날짜가 음각으로 새겨져 있었고, 친필로 작성된 메시지 카드도 동봉되어 있었다.

“그럼 예전 시즌권은 반납하는 거요?”

“아닙니다. 기존 시즌권 역시 기념으로 보관하실 수도 있고, 계속 사용하셔도 괜찮습니다. 앞으로도 저희 FC 선덜랜드를 잘 부탁드립니다.”

정중한 인사와 함께 물러나려는 스태프를, 브랜든이 황급히 불러세웠다.

“이봐요, 아가씨. 저거 시즌권만 사면 다 받을 수 있는 겁니까?”

“아뇨, 5시즌 연속으로 시즌권을 구매하신 VIP 고객님을 대상으로 하는 서비스입니다.”

브렌든은 입맛을 다셨다. 만일 내년부터 당장 시즌권을 사도 5년 후에나 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브렌든의 시선을 눈치챈 마일즈가 낄낄거리기 시작했다.

“투자는 이렇게 하는 거야, 임마.”

“그래서 뉴캐슬 놔두고 선덜랜드 고르셨어?”

곧바로 마일즈가 옆구리를 찔렀고, 자신의 실언을 눈치챈 브렌든은 손으로 입을 막았다.

여기는 선덜랜드 홈이고, 주위의 관중들은 전부 선덜랜드 팬이다. 지금 뉴캐슬 운운하는 건 썩 똑똑한 행동이 아니었다.

안 그래도 주위의 시선이 따갑다. 브렌든은 손으로 입을 막은 채 퉁명스럽게 우물거렸다.

“서비스가 뭐 중요해. 축구팀은 축구를 잘해야지.”

그러자 마일즈가 웃었다.

“잘할 거야. 올 시즌은 틀림없이.”

잠시 후, 킥오프를 알리는 휘슬이 길게 울렸다.

시즌 첫 번째 경기, 선덜랜드와 브리스톨의 1라운드 경기가 마침내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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