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자의 신이 키우는 축구단-35화 (35/422)

35화 첫 번째 시즌 (1)

<선수의 잠재능력을 꿰뚫어보는 방법은, 언제나 상대의 장점을 발견해나가는 것이다. - 아르센 벵거>

마일즈 우즈는 생각했다. 뭔가 조짐이 좋지 않다고.

경기장에 처음 도착할 때는 마냥 심장이 뛰었고, 입장할 때는 정중한 대우에 감격했다.

14년간 선덜랜드를 응원해온 지난 세월이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것 같아서, 입가에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같이 온 브렌든 뿐 아니라 근처 다른 팬들의 선망과 질투 어린 시선을 받았을 때는 은근한 뿌듯함마저 느꼈다.

이번 시즌은 다를 거라고 믿었다. 정말로 최고의 프리시즌을 보냈으니까.

그러니 오늘은 직전 시즌 승격에 재를 뿌린 상대, 브리스톨을 처참히 응징해줄 거라고 믿었다.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를 가득 메운 사만 구천 명의 관중 앞에서.

그래야 했는데···.

아직 경기 초반이긴 하지만 선덜랜드는 변변한 공격조차 하지 못했다.

크리그 혼자 최전방에 고립된 채 오지 않는 공을 기다리는 동안, 나머지 열 명의 선수들은 후방에서 계속 브리스톨에게 얻어맞는 중이었다.

“아무리 브리스톨 선축이었다지만, 그래도 10분 내내 공도 못 만지는 건 좀 아니지 않나?”

옆에서 브렌든이 그렇게 까불거릴 때도 반박할 말이 없었다.

레바뮌 3연전 때는 상대가 상대니까 이해할 수 있었다. 만일 레바뮌 상대로 3부 리그 팀이 라인을 올리는 만용을 부렸다간 곧바로 무참한 학살로 응징당했을 테니.

하지만 오늘의 상대는 브리스톨이고, 여기는 선덜랜드 홈이다. 그런데도 라인을 내리고 수비에 급급한 모습이, 마일즈의 해묵은 트라우마를 자극했다.

작년에도 이러다가 두 골쯤 얻어맞은 것 같은데···.

“맞다. 그러고 보니 지난 시즌에도 쟤한테 얻어맞지 않았어?”

마치 메시처럼 신나게 중원을 휘젓는 브리스톨의 10번부터, 어째 신이 난듯 깐죽거리는 브렌든까지.

“시끄러워. 응원이나 해.”

불안감을 억누르기 위해 목소리를 높이며, 마일즈 우드는 기도하는 심정으로 빌었다.

제발, 오늘만은 다르기를.

***

조짐이 매우 좋다. 나는 경기장을 내려다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샐리의 철저한 분석 끝에 우리는 브리스톨의 포메이션부터 선발 멤버 열한 명의 목록까지 예상한 상태로 이번 경기를 준비했다.

그리고 브리스톨의 경기 준비는 우리의 분석을 벗어나지 못했다.

“오빠, 크리그가 고립된 거 같은데···?”

“괜찮아. 지금은 우리 공격 상황도 아니니까. 고립된 건 오히려 저쪽 센터백들이지.”

최근 2시즌 간 부진했다지만, 그래도 크리그는 한 방이 있는 공격수다. 몇 년 전에는 3부리그 득점왕이던 스트라이커였고, 지금도 판을 잘 깔아주면 천하의 뮌헨 상대로도 점수를 뽑아낼 정도는 된다.

그런 크리그를 경계한, 브리스톨 센터백은 그다지 전진하지 못했다. 지금은 자기들 공격인데도.

얼핏 보면 우리 선덜랜드가 얻어맞는 장면처럼 보이겠지만, 실제로는 브리스톨에게 훨씬 치명적인 상황이다. 축구는 본질적으로 머릿수 싸움이니까.

물론 세상에는 수비 두세 명을 혼자 찢어버리는 괴물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런 선수는 예외 중의 예외에 불과하다. 결국 축구는 근처에 자기 선수가 더 많을수록 유리한 종목인 것이다.

우리는 전방에 크리그 하나를 던져준 것만으로 브리스톨 수비 셋을 묶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지금 상대보다 두 명 많은 상태로 수비중이다.

우리가 점수를 내줄 가능성은 없다. 확신할 수 있다.

“점유율이 벌어지고 있는데? 정말 괜찮은 거야?”

“괜찮아. 어차피 아무 의미 없는 공격이니까. 기스도 제대로 못 낼걸?

파이널 서드는 커녕, 바이털 에어리어까지도 제대로 들어오지도 못하는 브리스톨 공격진을 보면서, 나는 가볍게 웃었다.

괜히 프리시즌 상대로 레바뮌을 불러온 게 아니거든.

물론 연습시합 한두 경기만으로 선수들의 기량이 급상승하는 일은 없지만, 심리적 효과는 기대할 수 있다.

메시에게 6인 돌파도 당해봤고, 크로스와 카세미루에게 중원을 내줘도 봤으며, 뮐러의 공간 침투도 맞아봤다.

세계 최고의 선수들을 만난 직후에 3부 리그 브리스톨을 상대하는 거니까, 얼마나 만만하겠어?

지난 시즌에는 무슨 메시처럼 보이던 브리스톨 공격수의 드리블이, 오늘 다시 보니 봉산탈춤 같고 그런 거지. 우리는 진짜 메시를 만나봤으니까.

그러니 고작 브리스톨 상대로 점수를 내줄 리가 없다.

희주가 웃었다.

“아하, 알았다! 지금 일부러 얻어맞고 있는 거구나?”

“일부러라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반쯤은 맞아. 우리가 준비한 수비가 얼마나 단단한지 실전에서 확인하고 싶었거든.”

“나머지 반은 브리스톨을 끌어내기 위한 거고?”

“그렇지. 브리스톨은 지금 자기들이 뭘 당하고 있는지도 모를 거야.”

절묘한 거리를 유지한 채 물러나는 톰슨과 잭의 모습, 그리고 일방적으로 공격 중이라는 상황은 브리스톨에게는 거부하기 힘든 미끼가 되었다.

그렇게, 마침내 브리스톨 미드필더 전원이 하프라인까지 올라오고 말았다.

즉, 브리스톨 수비진과 중원 사이가 텅 비었다는 뜻이다.

***

‘오늘은 시작부터 조짐이 아주 좋은데.’

브리스톨의 센터백, 딕슨은 그렇게 생각했다.

처음엔 긴장했었다. 선덜랜드는 브리스톨보다 빅클럽이고, 심지어 올 시즌엔 갑부 구단주까지 얻었으니까.

톰슨과 페르난데스라는, 3부 리그에서 뛰는 모습이 상상조차 안가는 거물급 네임드를 둘이나 데려왔다. 프리시즌에는 무려 레바뮌을 상대하는 기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하필이면 리그 첫 상대로 그런 선덜랜드를 만난다. 심지어 선덜랜드의 홈에서.

그래서 브리스톨 선수들은 생각했다. 오늘은 그냥 비기기만 하자고.

그런데 선덜랜드는 의외로 무력했다. 피터 톰슨은 아직 팀에 녹아들지 못했는지 계속 겉돌았고, 중원은 계속 브리스톨의 차지였다.

당황했는지 선덜랜드는 계속 움츠러들기만 한다.

이제 조금만 더 몰아붙이면 점수를 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선제골만 넣으면 뭐, 승점 3점이지. 선덜랜드 공격수는 빌 크리그니까.’

2시즌 내내 골 다운 골도 넣지 못했던 무득점 스트라이커, 크리그를 바라보며, 딕슨은 슬쩍 도발을 시작했다.

“너는 수비도 하러 안 가냐? 이러다 끝나고 샤워도 안 하겠다? 뭐, 덕분에 나도 땀 안 빼도 되니까 좋긴 한데.”

크리그에게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딕슨은 만족했다.

스트라이커는 보기보다 민감한 존재고, 특히 크리그처럼 오랜 기간 부진한 공격수라면 더욱 예민해진다.

사소한 도발로도 흔들릴 만큼.

“하긴, 수비하러 가도 별 도움도 안 되겠네. 너는 골 넣는 것밖에 못 하는 얼간이니까. 요즘은 그나마도 못하는 모양이지만. 너, 훈련에서도 통 못 넣는다면서?”

그러자 크리그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표정을 들키지 않으려는 모양이다.

딕슨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크리그는 오늘 끝났군.’

그때 전방의 움직임이 부산해졌고, 경기장의 함성이 거세졌다. 선덜랜드의 피터 톰슨이 공을 빼앗은 것이다.

곧바로 빨랫줄 같은 롱 패스가 그라운드를 갈랐지만, 딕슨은 당황하지 않았다.

기세는 좋지만 의미 없는 패스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금 이 자리엔 브리스톨 센터백이 셋이나 남았고, 선덜랜드 선수는 크리그 혼자. 심지어 그 크리그는 지금 딕슨에게 붙들려 있다.

아무도 패스를 받아줄 선수가 없었어야 했는데···.

“저게 뭐야.”

딕슨은 무심코 눈을 깜빡이고 말았다. 브리스톨 미드필더가 전부 끌려나가며 생긴 공간, 진작에 텅 비어있던 그 공간에 무언가가 갑자기 나타났던 것이다.

붉은 유니폼, 19번··· 요니 뮐러.

“미친··· 요니가 갑자기 왜 저기서 튀어나와!”

요니도 크리그도, 딕슨의 질문에 대답해주지는 않았다.

크리그는 그대로 딕슨을 등진채 버티기 시작했고, 덕분에 요니는 어떠한 방해도 없이 텅 빈 그라운드를 질주했다.

‘빌어먹을! 저 19번 꼬맹이가 저렇게 빨랐다고!?’

크리그의 몸싸움 시도를 버텨내며, 딕슨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요니의 의도가 슛일지 패스일지에 대해서.

선덜랜드의 19번은 도저히 감정을 읽기 힘들 만큼 무표정했고, 달려오는 자세에서도 특별한 의도를 찾아내기는 어려웠다.

‘젠장, 저 녀석, 정말로 스물한 살 맞아? 어린놈이 뭐 저렇게 침착해!’

덕분에 딕슨은 망설였고, 요니는 완벽히 아크서클 앞까지 진입했다.

‘이대로라면 눈 뜨고 당하겠군.’

마침내 딕슨이 결단을 내린 시점은, 요니가 최종 수비라인을 빠져나가기 직전이었다. 딕슨은 곧바로 몸을 돌려, 자신의 곁을 스치듯이 빠져나가는 요니를 추격했다.

그것은 센터백에게는 본능이나 마찬가지였다. 코앞에서 당장이라도 슛을 날릴 것만 같은 상대 선수를 향해 슬라이딩 태클을 시도하는 것은.

순간 딕슨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그런데 이 녀석은 왜 내 쪽으로 왔지? 주위에 공간이 이렇게나 넓은데?’

이번에도 요니는, 딕슨에게 생각을 정리할 시간 같은 건 주지 않았다.

툭, 건조한 소리가 났다.

요니의 발을 떠난 공은 슛이라기엔 조금 힘없이 옆으로 흘렀고, 이미 슬라이딩 태클에 들어간 딕슨은 어떠한 저항도 하지 못한 채 그저 공을 따라 시선만을 옮겨야 했다.

푸른 잔디, 그 위를 구르는 공, 패스의 끝에서 기다리는 선덜랜드 22번, 빌 크리그.

“골 넣는 것밖에 못 하는 얼간이? 그거 참 고마운 표현인데.”

딕슨은 뭐라 대답하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공을 향해 휘둘러지는 크리그의 오른발이 마치 처형인의 도끼처럼 보여서, 딕슨은 그만 눈을 질끈 감아버리고 말았다.

다음 순간, 뜨거운 함성이 스타디움 전체를 메웠다.

***

완벽한 컷백 플레이가 만들어 낸, 완벽한 찬스였다.

마음에 쏙 들 때까지 몇 번이고 고친 잔디의 질감, 수비와 멀어진 순간을 놓치지 않고 전해진 패스, 위치는 아크서클 바로 앞.

이 조건에서 골을 넣지 못할 공격수라면, 결코 몸값 육십억 원이라는 숫자가 이마에 붙을 리가 없다.

크리그의 슛은 브리스톨 골키퍼에게 반응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날카로운 궤적을 그리며 날아든 공이 네트 오른쪽 상단에 꽂혔다.

“꺄악! 들어갔어! 일 대 영!”

미친듯한 팬들의 함성, 옆에서 깡총깡총 뛰어오르기 시작한 희주를 바라보며, 나는 짧게 말했다.

“아직 경기 안 끝났다.”

“뭘, 오빠도 입 찢어질 것 같은데.”

그건 그렇지. 줄곧 사랑하는 팀, 그 팀의 유니폼이 골을 넣고 포효하는 순간, 심장이 멋대로 뛰기 시작하니까.

그 맛을 알아버리면 축구를 끊을 수가 없다.

선제골을 넣은 이후에도 우리 선덜랜드 선수들은 멈추지 않았다.

전반 39분, 톰슨의 로빙 스루패스가 브리스톨 미드필더와 수비 사이에 떨어졌다.

요니가 줄곧 경계 당하고 있었기에, 이번에 패스를 따라잡은 선수는 잭이었다.

잭은 그대로 브리스톨의 오른쪽  측면을 파고들었고, 수비 둘 사이로 크리그에게 횡패스를 전달했다.

순간, 오른쪽 무릎에 반사적으로 힘이 들어갔다. 마치 내가 현역이라도 된 것처럼.

***

크리그는 생각했다.

‘그야 훈련에선 못 넣지. 내가 훈련장에서 상대하는 건 페르난데스 아니면 하퍼니까.’

두 사람 모두 리그 원에서는 적수를 찾기 어려운 골키퍼들.

덕분에 크리그는 최근 훈련에서 도무지 골 맛을 보지 못했고, 개막전 직전엔 자신감이 바닥까지 떨어지기도 했다.

어쩌면 뮌헨 상대로 골을 넣은 게 너무 운이 좋았던 거고, 자신은 3부리그 팀의 훈련에서조차 골 맛을 보지 못하는 형편없는 선수라고.

SNS에서 매일같이 떠드는 것처럼, 지금 당장 방출당해도 할 말이 없는 3류 공격수라고.

공격수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골을 넣는 이미지가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은 지도 꽤 오래된 일이었다.

무리도 아니다. 2시즌 연속으로 줄곧 득점에 실패해 왔으니.

하지만, 그런 크리그를 끝까지 믿어주고 지지해주는 사람이 있었다.

톰슨을 사오면서까지 요니를 올리고, 심지어 잔디까지 고쳐 세팅해준 사람, 구단주 이희성.

‘내가 구단주였으면, 그냥 다른 공격수를 사 오고 말았을 텐데.’

자신에게 날아드는 잭의 패스를 보며, 크리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미 한 골을 넣은 뒤였음에도, 여전히 이번 패스를 골로 바꾸는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는다고.

떠오르는 건, 그저 새벽 어스름의 풍경. 아무도 없던 훈련장에서 공을 걷어차던 남자의 뒷모습뿐이었다.

“너, 작년 시즌 내내 한 골이었지? 그런 놈한테 한 경기에 두 골이나 내주는 수치를 당할 줄 알고!?”

거친 숨소리도, 도발적인 조롱도, 어깨에 전해지는 묵직한 중량감도, 크리그에게는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 순간, 크리그의 관심사는 딱 하나였다.

[잘할 겁니다. 내 안목은 빗나간 적이 없으니까요.]

처음으로 빗나간 사례가 되고 싶진 않았다.

본능처럼, 무엇에 홀린 것처럼, 크리그는 기억 속의 풍경처럼 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잭의 패스가, 크리그의 오른발에 닿았다.

아웃프런트였다.

***

잭의 패스를, 크리그는 오른발 아웃프런트로 처리했다.

그 동작은 마치 트래핑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공을 밀어내는 것처럼 보였다.

순간, 가슴이 거칠게 뛰기 시작했고, 무릎에 다시 힘이 들어갔다.

동시에 크리그의 몸이 수비를 피해 오른쪽으로 움직였다. 윙포워드들에게는 매크로나 마찬가지인 기술, 13년이나 지난 지금도 내 몸이 기억하는 어느 동작처럼.

크리그의 오른발이 불을 뿜었고, 팬들은 거친 함성과 뜨거운 환호로 응답했다.

팀의 두 번째 골.

기분 탓인지, 동료들에게 끌어안긴 크리그와 눈이 마주친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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