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자의 신이 키우는 축구단-36화 (36/422)

36화 첫 번째 시즌 (2)

후반전은 더욱 일방적인 양상으로 흘러갔다.

브리스톨 중원은 톰슨을 살살 피해 다녔다. 드리블 돌파는 꿈도 꾸지 못했고, 심지어 톰슨이 지키는 쪽으로는 공도 돌리지 않을 정도였다.

나름대로 합리적인 선택이기는 했다.

넓은 시야와 강력한 킥, 그리고 뛰어난 수비 실력까지 자랑하는 톰슨 근처에서 공을 돌리기는 아무래도 부담스러웠을 테니.

실제로 전반, 브리스톨이 허용한 두 골은 모두 톰슨의 발이 만들어낸 장면이었다.

그러니까 브리스톨도 이제 슬슬 눈치챈 거겠지. 괜히 톰슨 근처에서 공 돌리고 까불거리다 인터셉트라도 당하면 곧바로 날카로운 카운터 롱패스로 얻어맞는다는 걸.

경기를 내려다보던 희주가 냉담하게 말했다.

“쟤들도 꽤 똑똑하네. 톰슨 선수 근처에도 안 가겠다는 거지?

“맞아. 톰슨은 실력은 출중하지만, 딱 봐도 기동성이 좋은 타입은 아니거든.”

톰슨의 무릎에 폭탄이 달린 거야 우리 팀 관계자 일부만 아는 사실이지만, 발이 느려진 건 누가 봐도 뻔하다.

그렇다고 톰슨만 피해 다니겠다는 브리스톨의 대책 또한 너무 뻔하지만.

축구 잘 모르는 희주조차 한눈에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의 대책이니, 축구 보는 눈이 좋은 브라이언이나 샐리에게는 너무 뻔한 움직임이었다.

이미 대비는 되어 있다.

“오빠, 우리 혹시 아픈 데를 찔린 거야?”

“그 반대지.”

톰슨 쪽으로 공을 돌리지 않겠다는 건, 바꿔 말하면 톰슨 혼자 브리스톨의 패스 루트를 상당히 줄여버릴 수 있다는 의미가 된다.

이미 크리그 덕분에 두 명의 이득을 본 상황. 톰슨이 다시 패스 루트를 줄여버리니, 브리스톨의 패스는 밖에서 보기에도 너무 뻔한 상태가 되고 말았다.

곧바로 잭이 패스를 끊어냈다. 터져 나오는 환성 속에서 최전방의 크리그가 다시 몸을 돌려 수비를 등졌고, 요니는 재빨리 달려 나갔다.

인터셉트, 텅 빈 공간에 날아드는 롱 패스, 2선 침투에 이어지는 마무리. 이미 우리가 두 골을 만들어낸 카운터 패턴이다.

브리스톨 선수들이 요니를 향해 몸을 돌린 것은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잭의 발이 공을 걷어찰 때까지도, 브리스톨 선수들은 공을 뺏기 보다는 요니를 어떻게 따라잡을지, 크리그에게 향하는 패스를 어떻게 막을지만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다음 순간 잭의 몸이 쏘아져 나갔다.

허를 찔린 브리스톨 선수들의 반응이 한 걸음 늦었고, 잭은 세 명 사이를 그대로 뚫고 달리기 시작했다.

“직접 돌파!?”

마치 비명 같은 새된 목소리 위에, 홈 팬들의 열광적인 외침이 덮였다. 그 함성을 배경 삼아, 잭은 그야말로 미친 듯 달렸다.

“가라! 달려! 확 제쳐버려!”

목 놓아 외치는 희주, 홈 팬들의 열광적인 함성, 마치 방금 경기가 시작된 것처럼 누구보다 빠르게 달려 나가는 선덜랜드의 사냥개, 18번 잭 맥그리거.

별다른 개인기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공을 차고, 달리고, 다시 공을 찼을 뿐. 그런데도 잭의 모습은 마치 푸른 잔디 위를 가로지르는 붉은 선처럼 보였다.

축구라는 스포츠가 만들어질 때부터 존재했던 가장 원초적인 플레이, 치고 달리기.

문득, 잭과 처음 만났던 지난 7월, 프리시즌의 일이 떠올랐다. 나를 팬으로 착각해, 곧바로 사인부터 해주려던 모습이.

[지금은 팬들한테 해줄 수 있는 게 사인밖에 없잖슴까?]

아니잖아, 바보야. 훨씬 더 많은 걸 해줄 수 있잖아. 피가 끓게 할 수 있잖아. 심장을 뛰게 할 수 있잖아.

행복하게 할 수 있잖아.

오늘따라 시리도록 맑은 하늘, 푸른 잔디, 그 위를 가로지르는 선덜랜드의 18번,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날뛰는 관중석의 붉은 물결.

어쩐지 가슴 한 구석이 먹먹해지고, 뿌듯해져서, 나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잠시 후 오늘 들어 가장 커다란 함성이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를 가득 메웠다.

쐐기골이었다.

***

경기 종료를 알리는 휘슬이 길게 세 번 울리자, 옆에서 희주의 속삭임이 들렸다.

“축하해, 오빠. 공식전 첫 승리네.”

“공식전 첫 승리?”

유소년 시절에는 많이 이겨 봤는데? 잠시 고민하던 나는 희주가 말한 ‘첫 승리’ 의 의미를 깨달았다.

“하긴, 구단주로서는 첫 승리긴 하네.”

그러자 희주가 고개를 젓고는, 부드럽게 웃으며 덧붙였다.

“아니, 축구인으로서··· 프로 축구 첫 승리잖아?”

빌어먹을. 이제는 여동생까지 날 울리려고 들어. 축구를 보는 것만으로도 감정이 벅차오르는데.

나는 눈을 깜빡이며 그라운드를 내려다보았다.

관중들을 향해 자랑스럽게 손을 흔드는 붉은 유니폼, 선덜랜드 선수들의 모습, 유소년 시절부터 줄곧 꿈꾸던 풍경을.

결국 프로는 되지 못했고, 여전히 나는 사이드라인 안쪽에는 들어갈 수 없다. 그래도 마냥 좋았다. 선수는 아니지만, 그래도 나는 선덜랜드의 가족이니까. 구단주니까.

어릴 때부터의 꿈이 조금쯤은 이루어진 것 같아서···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지금의 장면을 줄곧 기억할 수 있도록.

***

경기가 끝나고 믹스드존을 빠져나오는 로저스 감독을 맞이했다.

“감독님, 첫 승 축하드립니다.”

“음? 예전에 자네하고 브라이언 데리고 많이 이겨봤는데?”

“성인 팀 감독으로서는 첫 승리시니까요.”

“그렇게 되나.”

로저스 감독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나도 축하해야겠군. 구단주로서의 첫 승리를, 그리고 브라이언의 정식 코치 데뷔 이후 첫 승리도 함께 축하해야겠지.”

브라이언에게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평소같았으면 요, 브로를 외치며 피스트 범프라도 시도했을 녀석인데.

브라이언은 줄곧 고개를 숙인 채였다. 자세히 보니, 어깨가 조금 떨리는 중이다.

“아니, 너 갑자기 왜 우냐?”

“믿기지가 않아서.”

“뭘 믿기지 않아. 네 전술대로 완벽하게 요리해 놓고.”

“그냥, 바에 갇혀서 아무도 읽지 않는 전술 보고서를 끄적이던 생각이 나서 그래.”

울먹이는 브라이언을 끌어안고 등을 두드려 주었다.

오늘은, 오늘 하루는 울어도 되는 날이니까.

팀의 가장 힘든 시절을 경험했던 사람들은, 오늘의 승리에 눈물 흘릴 권리가 있을 테니까.

***

마일즈 우드는 느릿한 걸음으로 천천히 경기장을 빠져나왔다.

현실감이 없다. 아직도 믿기지가 않는다.

개막전부터 이렇게 시원하게 이기는 모습을 본 게 몇 년 만인지, 이제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혹시,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닐까?’

브렌든의 조롱에 너무 시달려서 꿈을 꾸는 걸지도 모른다고, 마일즈는 그렇게 생각했다.

응원하던 유소년 선수가 갑부 구단주가 되어 돌아온 것도, 레바뮌을 홈으로 불러들인 것도, 브리스톨을 시원하게 발라버린 것도 혹시 전부 다 꿈은 아닐까?

마일즈는 무심코 품속에서 자신의 시즌권을 확인했다. 새로 받은 VIP 시즌권을.

금속 재질 특유의 차가운 존재감이, 꿈이 아님을 어렴풋이 깨닫게 했다.

그때 옆구리에 가벼운 충격이 느껴졌다. 브렌든이었다.

“고맙군, 브렌든. 덕분에 꿈이 아닌 걸 확실히 알겠어.”

“마일즈, 그게 문제가 아니라··· 저거 잭 아니야?”

다시 봐도 정말로 잭이었다. 경기장을 빠져나가는 팬들과 사진을 찍거나 사인을 해 주는 중이었다.

흠뻑 젖은 유니폼 차림 그대로다.

“보통 드레싱룸에서 씻고 옷 갈아입고 나오지 않나?”

“잭은 가끔 저래. 씻고 나오면 팬들 다 집에 가버린다면서.”

팀의 코칭스태프라면 질색할 행동이기에 매 경기 볼 수 있는 모습은 아니었다. 모종의 이유로 코치진이 눈을 뗄 때만 아주 드물게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오늘은 여러모로 운이 좋은 모양이네. 마침 쟤 마킹도 넣었으니까, 사인받아야겠다.”

약삭빠른 브렌든이 재빨리 잭에게 접근했다. 그리고는 웃으며 자신의 등을 내밀었다.

“우와! 제 마킹 넣으셨슴까? 감사함다! ···옆에 분도 사인 안 필요하심까?”

마일즈는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어, 필요하지. 당연히 필요하죠.”

“레플리카 없어도 괜찮슴다. 수첩 같은 거 없으심까? 손에 그거 뭠까?”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잭의 목소리에, 마일즈는 반사적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잭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거, 혹시 저희 VIP 시즌권 아님까?”

“맞아요. 오늘 주더군요.”

“자격이 최소 5년 이상일 텐데··· 언제부터 보셨슴까?”

“14년 전인데···.”

그러자 잭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천천히 자신의 유니폼을 벗었다.

그 광경에 주위가 소란스러워졌다.

천하의 레알 상대로도 유니폼을 안 바꾼 선덜랜드의 로컬 보이가, 자신의 유니폼을 누군가에게 내미는 풍경은 정말로 보기 드문 것이었으니.

그래서 마일즈는 생각했다.

‘이건 꿈일 거야. 그러니까 이렇게 눈앞이 뿌연 거겠지.’

하지만 손에 전해지는 유니폼의 감촉은 틀림없이 지금 일이 꿈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고 있었다.

“왜, 왜 울고 그러심까? 혹시 땀 냄새가 심해서 그러시는 거면, 그냥 새 걸로 드림까?”

“아니··· 너무 좋아서, 좋아서 우는 겁니다.”

“으윽, 그건 또 무슨 특수한 취향임까. 암튼 울지 마십쇼. 저 팬들이 우는 거 싫어함다.”

“앞으론 웃을 겁니다. 그러니까 오늘만···.”

마일즈는 줄곧 생각했었다. 이 팀이 프리미어리그에 돌아가면 좋겠다고.

그날 외칠 생각이었다. 선덜랜드를 응원해온 세월이 정말 기쁘고, 행복하다고.

하지만, 팀의 승격이라거나 하는 그런 조건은 이제 필요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너무나 기쁘고 행복하기에.

한 손에 잭의 유니폼을, 다른 손에 VIP 시즌권을 든 채, 마일즈는 하염없이 눈물 흘리며 웃었다.

***

이후로도 우리는 거침없는 승리를 이어나갔다.

2라운드, 옥스퍼드 상대로는 3-0 승리. 3라운드에는 피터버러에 2-0 승리를 거뒀다.

연승행진은 컵 대회에서도 이어졌다.

리그 컵 1라운드에선 헐시티 상대로 2-1의 승리를 따냈고, FA컵 1라운드에선 질링엄에게 1-0으로 이겼다.

컵 대회의 경우, 사실 시원시원한 승리는 아니었다. 헐시티도, 질리엄도 전부 우리 상대로 라인 내리고 버텼으니까.

강팀이 하는 역습 축구의 부작용인 셈이었다. 대놓고 같이 내려앉으려는 팀들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자 언론의 반응 역시 적대적으로 돌아섰다. 물어뜯기 좋은 먹잇감을 발견한 것처럼.

리그 원에서는 빅클럽에 속하는 팀이고, 갑부 구단주까지 있는데도 수비축구나 한다며, 확실히 물어뜯기 좋은 소재긴 하지.

“요즘 우리보고 안티풋볼이라는 비난이 시작된 모양인데요.”

그러자 애니가 빙긋 웃었다.

“괜찮아요. 잘 대처하고 있으니까요.”

“새삼스럽게 왜 또 그러십니까?”

“음, 우리 구단주님한테 월급 받는 중이라서요?”

“그냥 하던 대로 하시죠.”

월급에 용돈까지 따로 주는데도 존댓말이라고는 가뭄에 콩 나듯 쓰는 희주 같은 사례도 있는 판국인데, 뭘 또 새삼스럽게.

내 반응을 확인한 애니가 키득거렸다.

“오케이. 안티풋볼 이야기라면 너무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아. 우리 축구를 좋게 봐주는 펀딧들도 많거든. 전술적 완성도가 높은 축구니까.”

“그러고 보니 타인위어 스포츠가 우릴 옹호하는 기사를 썼던데, 어떻게 하신 겁니까? 거긴 우리 까는 언론사였잖아요.”

애니가 몸담았던 선덜랜드 데일리라면 또 모르지만, 타인위어 스포츠는 우리와 앙숙으로 유명했던 언론이다. 선덜랜드에 부정적인 기사라면 루머까지 싹싹 긁어다 뿌리는 편이었는데···.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구단주의 은밀한 사생활 루머··· 정어리 파이에 장어 젤리 비벼먹는 기분이었지.

“아, 걔들? 그거 관심 좀 달라고 보채는 거야. 소재가 없어서 그러는 거니까, 적당한 기삿거리 던져 주면 얌전해지거든.”

“그래서 관심 많이 좀 주셨습니까?”

“굶어 죽지 않을 정도로만. 왜 기레기처럼 굴었는지 안다고 해서, 기레기 짓에 동의하는 건 아니거든.”

잠시 살기 어린 눈빛을 지어 보인 애니가, 표정을 부드럽게 고쳤다.

“아무튼 안티풋볼 운운하는 분위기는 내가 잘 컨트롤해볼게. 좋은 축구에만 신경 써 줘.”

“감사합니다. 믿고 있겠습니다.”

“근데, 잠깐 괜찮아? 오히려 난 다른 게 신경 쓰이던데.”

“뭡니까?”

애니가 미리 스크랩 해둔 기사를 내밀었다.

[찰턴 감독, 선덜랜드 공략법 있어]

***

찰턴 이야기를 꺼내자, 로저스 감독과 브라이언의 표정이 동시에 미묘해졌다.

“찰턴이라··· 승격전에선 만나기 싫은 상대긴 한데.”

백투백 강등 직후, 처음으로 치른 승격 플레이오프 최종전의 상대가 찰튼이었다. 바꿔 말해, 찰턴은 2년 전 우릴 떨어뜨리고 챔피언십으로 승격한 팀이라는 뜻이다.

이번 시즌에는 도로 리그 원으로 강등당한 모양이지만.

“연장전 끝나기 직전에 극장골을 먹혔었지. 그거 아마 다큐멘터리로도 나왔을 거야.”

우울한 목소리를 내는 브라이언의 곁에서 로저스 감독도 첨언했다.

“덧붙이자면, 20년쯤 전··· 승격 플레이오프 결승전에서도 승부차기로 우릴 이기고 올라갔었지. 그땐 프리미어리그 진출을 두고 싸우던 중이었는데.”

어찌 보면 브리스톨 못지않은 악연인 셈이었다. 마침 언론에서도 그렇게 엮으려는 모양인지, 아주 신나게 떠드는 중이다.

[자이언트 킬링, 찰턴이 해내나?]

[축구단에도 DNA가 존재한다면, 찰턴에게는 선덜랜드를 가장 중요한 장면에서 무너뜨리는 DNA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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