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자의 신이 키우는 축구단-40화 (40/422)

40화 등 뒤에 서는 이유 (2)

경기 시작 전,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의 홈팀 드레싱룸.

선덜랜드의 골키퍼 두 사람이 눈을 마주쳤다.

“들었나, 하퍼?”

“네.”

“네 그림이었다더군. 꽤 마음에 들었었는데···.

“네.”

“뭐해? 안 가져가고.”

페르난데스가 내민 그림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하퍼는, 잠시 고민한 후 입을 열었다.

“조금만 더 가지고 계시면 안 되겠습니까? 제가 골마우스에 서는 날 돌려받겠습니다.”

그러자 페르난데스가 미소를 지었다.

“그래, 남자라면 그 정도 패기는 있어야지. 그래도 너무 늦지는 마라. 내 은퇴식 날까지 못 가져가면, 그냥 집에 챙겨갈 테니까.”

하퍼는 고개를 끄덕였고, 페르난데스는 다시 미소지으며 그림을 자신의 라커에 집어넣었다. 조심스럽게, 하지만 능숙한 손길로.

두꺼운 골키퍼 장갑을 끼고 있는데도 마치 맨손인양 행동하는 페르난데스를 향해, 하퍼가 불쑥 물었다.

“저기··· 안 불편하세요? 장갑이요.”

“익숙해져야지. 시합 내내 끼고 있어야 하는 건데. 골키퍼는 장갑을 벗고 있으면 더 힘들어져. 그렇게 되어야 해.”

상상도 못 한 대답에, 하퍼는 한 방 맞은 기분이 되었다.

‘내가, 과연 되찾아올 수 있을까? 이 사람에게서?’

구단을 떠나는 선택도 있었다. 원한다면 보내주겠다는 제안도 들었다. 하지만 하퍼는 결국 이곳에 남았다.

페르난데스의 등 뒤에 서는 건, 하퍼 자신의 선택이었다. 리빙 레전드의 플레이 하나하나를 배우고, 따라잡으려.

그렇게 매 경기, 그의 등 뒤를 영상으로 지켜봤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페르난데스가 얼마나 강력한 골키퍼인지를.

문득 구단주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것 같았다.

[당신이 말하는 헌신이, 챔피언십 골키퍼가 리그 원에서 3류 수비진의 뒤치다꺼리를 해왔다는 걸 의미하는 겁니까? 하퍼,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 적 없습니까?]

그렇게 생각했던 시절도 있었지만, 이제는 안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음을.

지난 시즌, 리그에서만 32점을 내주었던 선덜랜드 수비진은, 올 시즌 리그 9경기에서 단 3점만을 허용했다. 페르난데스를 등 뒤에 세운 선덜랜드의 수비진은 그야말로 뚫을 수 없는 철벽이었다.

그저, 골키퍼 한 사람이 바뀌었을 뿐인데.

꼬마 팬의 그림, 선덜랜드의 1번 유니폼, 골마우스··· 그중 어느 하나도 되찾아올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그라운드로 향하는 어두운 통로를 비척비척 걸으며, 하퍼는 그저 고개를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서만 목에 힘을 주었다.

[휘슬이 길게 세 번 울리기 전까진 죽어도 멈추지 마라. 고개를 떨어뜨리지 마라. 끝까지 싸우고 와라.]

로저스 감독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었다. 잘 아는데, 다 아는데도 자꾸만 마음이 꺾일 것만 같다.

통로 끝, 빛이 보이는 저 앞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짐과 페르난데스였다.

“다음엔 아저씨도 그려 줄게요!”

“그거 고마운걸.”

때로는 악의 없는 천진난만함이, 가슴을 푹 찌를 때가 있다. 하퍼는 마침내 고개를 떨궜다.

그날도 변함없이 페르난데스는 강력했고, 수비진을 완벽하게 통솔했으며, 가끔은 손수 기적을 만들었다.

선덜랜드가 리그 10연승을 달성한 날. 환호하는 동료들과 열광하는 관중들을 바라보며.

하퍼는 처음으로, 팀의 승리가 마냥 기쁘지만은 않다고 느꼈다.

***

경기장 전체가 축제 분위기였다.

[고오오오오올! 후반 79분! 리그 10연승을 자축하는 축포가 터집니다! 득점은 우리의 자랑스러운 22번! 크리그!]

장내 아나운서의 흥겨운 멘트에, 관객들의 환호가 뒤따른다.

“온 파이어!”

경기장 밖에서도 축제 분위기는 이어졌다.

“10연승 축하 기념이다! 에라, 오늘 남은 핫도그 떨이로 싹 다 푼다! 다들 맥주라도 구해서 한잔해!”

당연하게도 나도, 코칭스태프와 함께 기쁨을 만끽했다.

“이 정도 연승은 드문 일인데. 혹시 팀 레코드던가?”

감정을 억제하려 애쓰면서도 자꾸만 입꼬리를 올리는 로저스 감독을 향해, 샐리가 환한 미소를 지었다.

“1부리그 13연승 기록이 있긴 한데요.”

“언제였지?”

“1891년이요.”

1981년이라도 오래 전 일인데, 1891년이면··· 대략 130년 전이다. 숫자를 헤아리던 희주가 몸을 파르르 떨었다.

“으아, 심지어 대한제국도 아니고, 조선 시대였어.”

“나름 대단한 거예요. 1부리그 단일 시즌 13연승은 한때 영국 최다 기록이었거든요. 125년쯤 유지되었죠. 요즘은 맨시티와 리버풀이 차례로 깨버렸지만요.”

단일시즌 13연승. 느낌이 좋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3부라서 좀 아쉽긴 하지만, 이번에 한번 클럽 레코드 경신해볼까요? 14연승으로.”

“팀의 부활을 알리는 좋은 신호탄이 될 것 같군.”

“그러게요. 지금 기세로는 13연승 재현까지는 어렵지 않을 것 같아요. 이어지는 경기가 MK던스, 플릿우드, 덩커스터니까요. 특별한 어려움은 없을 것 같은데요.”

“던스가 제일 위험하겠지만, 큰 어려움은 없겠지.”

“14라운드째의 버턴이 조금 까다롭긴 하겠네요. 지난 시즌 EFL컵 4강의 기적을 만들어낸, 단판 승부의 강자잖아요?”

말은 저렇게 하지만, 샐리의 표정은 태연했다. 우리가 버턴에게 잡힐 거라고는 1그램도 생각하지 않는다는 태도다.

로저스 감독과 샐리가 차례로 미소짓는 와중, 오직 브라이언만이 침착했다.

“EFL컵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EFL컵 걱정이나 먼저 하죠. 3라운드가 코앞이잖아요.”

EFL컵 2라운드에서, 우리는 4부 리그 팀 해로게이트 타운을 만나는 행운 끝에 손쉽게 3라운드에 진출했다.

컵 대회 3라운드 상대는 공교롭게도 플릿우드였다.

브라이언이 달력을 손으로 짚었다.

“어쩌다 보니 일정이 겹쳐요. 플릿우드와의 2연전이 되거든요. 그것도 사흘 간격으로요. 14연승을 노리기 전에 선수들 체력부터 걱정해야 할 겁니다.”

일리 있는 이야기에, 로저스 감독과 샐리가 차례로 숙연해졌다. 나도 마찬가지고.

유일하게 명랑했던 사람은, 희주였다.

“오빠, 그럼 우리가 유리하지 않아? 메디컬 스태프도 우리가 훨씬 좋고, 설비도 우리가 더 좋잖아? 체력 싸움이 되면 질 리가 없을 텐데?”

브라이언이 대신 대답했다.

“레이디, 플릿우드가 체력 싸움을 해주진 않을 겁니다. 아마 플릿우드는 둘 중 한 경기에만 힘을 실을 테니까요.”

“아···.”

납득하는 희주의 옆에서, 샐리가 차분하게 덧붙였다.

“아마 컵에 무게를 실을 거예요. 플릿우드는 리그 중위권 팀이라, 딱히 리그에 걸린 게 없거든요. 반면, 컵 대회는 포기하기 너무 달콤하고요.”

비록 EFL컵의 우승상금은 그저 그렇다지만, 경기 입장료를 서로 나눠 갖는 대회 특성상 하위권 팀에게는 가뭄의 단비같은 존재였다.

혹시라도 16강, 8강에서 빅클럽을 만난다면 짭짤한 수익을 기대할 수 있고, 혹시라도 4강쯤 가면 그야말로 잭팟이다.

소문으로는 버튼이 작년 4강전 입장료 수입만으로 연 운영비의 절반을 벌어들였다는 이야기가 나돌 정도다.

조금 시무룩해진 희주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러면 우리는 컵 대회에 로테이션을 내보내고, 주전은 리그에 내보내면 되는 건가요?”

로저스 감독이 빙긋 웃었다.

“누굴 내보내고 누굴 온존할지는 감독의 권한이오. 다만, 둘 중 어느 경기가 더 중요한지 판단하는 건 보드진의 몫이겠지.”

나는 샐리 쪽을 바라보았다.

“샐리, 플릿우드가 컵에 올인할 확률은 얼마 정도 됩니까?”

“지금이라면 75% 정도로 보고 있어요. 주말에 11라운드 경기를 치르고 나면 99% 단언할 수 있게 되겠죠. 컵인지, 아니면 리그인지.”

지금 상태로 컵에 올인할 확률이 75%라··· 샐리는 근거 없는 발언을 하는 성격이 아니다.

플릿우드는 컵에 올인이다. 그렇다면, 선덜랜드는 컵과 리그 중 무엇을 골라야 할까?

“우린 리그 올인이지? 브로, 14연승 한번 해보자면서?”

“맞아요 구단주님. 승격은 우리에게 중요하지만, 컵 대회는 우선순위가 밀려요. 우리는 입장료 수입이 절실하지 않은 팀이니까요.”

브라이언과 샐리를 번갈아 바라본 다음, 나는 곧바로 대답했다.

“다음주엔 컵 대회를 중시했으면 좋겠습니다. 감독님.”

“알겠네.”

로저스 감독은 별말 없이 수긍했지만 샐리와 브라이언의 반응은 사뭇 달랐다.

브라이언은 표정관리에 실패하고 말았고, 샐리는 노골적으로 되묻기 시작했다.

“도박꾼의 발상인가요? 컵에서 한탕을 노리는?”

“그보다는 욕심쟁이의 발상입니다.”

“욕심쟁이요?”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플릿우드라면 당연히 리그와 컵중 하나를 골라야겠지만, 우리가 대체 왜 플릿우드 상대로 하나만 골라야 합니까?”

주전 대 주전, 후보 대 후보로 붙으면 우리가 절대적으로 유리할 것이다. 우리가 유일하게 불리할 시나리오는 우리 로테이션 멤버들이 플릿우드 1군을 상대하는 경우지만···.

샐리의 단언처럼, 플릿우드는 결코 컵 대회를 포기하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플릿우드 주전은 컵 대회에 나온다.

“알뜰하게 뽑아먹겠다는 뜻이시군요. 구단주님.”

피식 웃으며, 나는 로저스 감독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선수들을 갈아 넣을 생각은 없습니다. EFL컵 4라운드 진출, 14연승 클럽레코드 경신조차 선수들의 부상에 비하면 사소하니까요.”

“알았네. 선수 인선은 맡겨 두게.”

로저스 감독이 진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목요일 EFL컵과 다음주 리그 플릿우드 홈 경기를 대비해서, 이번 던스 원정부터 로테이션을 돌릴 것이다.”

로저스 감독의 선언에, 하퍼는 생각했다. 마침내 이번 시즌 첫 출전 찬스가 왔다고.

아무래도 컵 대회가 있으면 일정이 너무 빡빡하다. 사흘 간격으로 두 경기를 치르게 되니까.

골키퍼의 체력 소모는 필드 플레이어 대비 적은 편이지만, 그래도 페르난데스는 은퇴를 앞둔 노장이다.

포지션 경쟁자의 강력함에, 마음이 꺾이기 직전까지 몰렸던 하퍼에게는 좋은 기회였다.

하퍼는 훈련장에서 평소보다 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머저리들! 정신 똑바로 안 차려? 크리그만 막아! 잭의 중거리는 내가 막는다··· 아니, 잭은 내버려 둬도 된다고 했잖아!”

그럴수록, 로저스 감독의 눈초리는 점점 싸늘해지는 것만 같았다.

로테이션 선언에도 불구하고, 주말 MK던스 원정의 주전 골키퍼 역시 페르난데스로 정해졌다.

이대로는 컵 대회 출전 기회도 뺏기게 될 것이다. 다급해진 하퍼는 감독을 찾아가 어필했다.

“제가 팀을 다음 라운드로 데려가겠습니다. 그러니 한 번만 기회를 주십시오. 컵 대회 아닙니까? 아니면 주말 플릿우드 리그전도 좋습니다만···.”

로저스 감독의 눈초리는 싸늘하다 못해 냉혹한 수준에 이르렀다.

“출전 시간이 부족하다는 불만이야 기꺼이 받아들이겠지만, 그렇다고 자넬 언제 기용할지 간섭하는 건 선을 넘은 것 같은데? 자네가 우리 팀 감독인가?”

“감독님, 그게···.”

“이봐, 하퍼. 내 고용주도 그런 소리는 못 해. 알겠나? 썬도 나한테 어느 경기에 누굴 내보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고.”

로저스 감독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눈빛은 흉흉했다. 당장이라도 하퍼를 잡아먹을 듯한 시선이었다.

“EFL컵 3라운드, 그날은 벤치에 들어오지 않아도 좋다. 아예 출전 명단에서 빼겠다. 밖에서 경기를 지켜보도록.”

***

EFL컵 3라운드, 선덜랜드 대 플릿우드.

벤치에서 쫓겨난 하퍼를 익스클루시브 박스에 데려왔다.

“잘됐네요, 휴가잖아요? 기분도 전환할 겸, 주급 루팡 찬스라고 생각해요. 참고로 내 오랜 꿈인데요. 사장 등골 브레이커.”

희주가 애써 명랑한 목소리를 냈지만, 분위기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하퍼는 더 침울해졌고, 마침내 희주까지 시무룩해지고 말았다.

“아니, 사람이 이 정도로 드립을 치면 조금쯤은 받아 줘야죠.”

하퍼가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이 상황에서 기뻐할 선수가 있는지 여쭙고 싶은데요.”

나는 곧바로 대답했다.

“솔직히, 그 정도면 충분히 차분하게 대처하고 있다고 봅니다. 나 같으면 하다못해 연습용 콘이라도 걷어찼을 테니까요. 아, 물론 감독님 몰래요.”

“이미 락커를 때려 부쉈습니다··· 죄송합니다.”

고개를 숙이는 하퍼를 향해, 희주가 상냥한 목소리로, 하지만 전혀 상냥하지 않은 내용으로 위로했다.

“괜찮아요. 수리비는 급료에서 까면 되니까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오늘도 변함없이 안정적인 선방을 과시하는 페르난데스를 한참 동안 바라보던 하퍼가, 깊은 한숨을 쉬었다.

“구단의 장기 계획에 제가 있다는 건 압니다. 아니라면 페르난데스가 아니라, 조금 더 젊은 골키퍼를 구했겠죠. 저를 완전히 대체할 수 있는 선수를요.”

“이해한다면 다행이군요.”

“그렇다면 저에게 왜 이러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컵 대회 상대가 무슨 맨시티나 리버풀이라면 저도 욕심부리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상대는 고작 플릿우드 아닙니까?”

“하퍼, 혹시 예전에 내가 해준 말 기억합니까? 페르난데스가 젊었을 때 뭐라고 말했었는지 찾아보라고.”

“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골키퍼는 공을 막는 게 아니라고. 팀의 패배를 막는 거라고요. 무슨 차이인지 알겠습니까?”

“······.”

“하나만 덧붙이고 싶습니다. 전성기의 페르난데스조차, 심지어 야신이 살아 돌아와도 팀을 이기게 만들 수는 없어요. 그저 패배로부터 지킬 수 있을 뿐이죠.”

하퍼가 로저스 감독에게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이미 전해 들었다. 팀을 4라운드에 데려가겠다고, 그러니 부디 자길 출전시켜 달라고 호소했다는 이야기를.

그건, 어떤 골키퍼에게도 불가능한 일이다.

축구에서, 혼자 힘으로 팀의 패배를 막아낼 수 있는 유일한 포지션이 있다면 그건 아마 골키퍼일 것이다. 실점하지 않으면, 절대 지지는 않으니까.

동시에, 혼자서는 절대로 승리할 수 없는 유일한 포지션 역시 골키퍼다. 승리에는 반드시 점수가 필요하기에.

뒤늦게 얼굴을 붉히는 하퍼를 바라보며, 나는 차분히 덧붙였다.

“공이 아니라 팀의 패배를 막는 겁니다. 골마우스가 아니라 동료들을 지키는 겁니다. 동료들이야말로 골키퍼를 승리로 이끌어줄 유일한 존재니까요.”

지나치게 강력한 포지션 경쟁자에게 심적으로 짓눌렸다는 것도, 그래서 초조해졌다는 것도 이해하고 있다.

우리 수비진 상대로 연습에서 막말을 퍼부은 건 어디까지나 그의 실수였음을 안다. 하퍼가 바뀌려 노력하고 있다는 것도 안다.

다시 말하면, 하퍼는 아직 완전히 바뀌지는 않았다.

로저스 감독이 지금까지 그를 기용하지 않았던 이유다.

“모두의 등 뒤에 선다는 건 그런 의미라고,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