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자의 신이 키우는 축구단-41화 (41/422)

41화 등 뒤에 서는 이유 (3)

하퍼는 그 뒤로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저 물끄러미 그라운드를 내려다보기만 했을 뿐.

그의 옆모습에서 복잡한 심경이 전해졌다.

익스클루시브 박스에서 내려다보는 그라운드의 전경은, 그가 평소에 선수로서 풍경과는 퍽 다르니까.

비록 사이드라인 바깥의 벤치에 머물지라도, 그래도 얼마 전까지는 선수들과 같은 그라운드에 서 있던 하퍼였지만, 지금은 관중의 눈높이.

그 시선의 차이마저 현역 선수에게는 무척이나 낯선 경험이기에, 하퍼의 표정은 썩 밝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하퍼가 팀의 패배를 바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세상에는 자기가 출전하지 못한 경기에 조금도 관심을 두지 않는 선수도 있다지만, 하퍼는 그런 타입은 아니다.

그렇게 이기적인 선수였다면, 선덜랜드의 암흑기를 3년간 함께했을 리 없다.

하퍼는 줄곧 묵묵히 경기를 내려다보았고, 우리 선수들이 멋진 플레이를 선보일 때마다 무릎 위에 올려두었던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기도 했다.

그날 선덜랜드는 플릿우드를 1-0으로 제압하며 EFL컵 4라운드 진출을 확정 지었다.

4라운드 상대는 리즈였다.

***

“리즈? 리즈시절의 그 리즈?”

“그 리즈 맞아.”

희주의 의문에 나는 순순히 대답했다.

리즈, 한때의 명문 구단. 약 10여 년간 리그 상위권을 유지하며, 유럽 대회에서도 돌풍을 일으켰던 팀이다.

그랬던 리즈는 재정 파탄으로 몰락했고, 3부리그까지 굴러떨어졌다.

어떤 의미로는, 우리 선덜랜드의 롤모델일지도 모른다.

두 팀 모두 나름대로 역사 있는 명문 구단이면서, 1부에서 3부까지 추락했던 아픔을 공유하고 있으니까.

차이가 있다면 우리는 아직 3부리그 팀이고, 리즈는 부활에 성공했다는 정도겠지.

지금의 리즈는 당당한 프리미어리그 팀이다.

샐리가 웃었다.

“리즈시절? 한국에선 그런 표현을 쓰는군요. 영국에선 리즈했다고 하는데요. 돈 많이 쓰고 실패하는 사례의 대명사로 유명하죠.”

과거의 리즈는 유명 선수들을 마구잡이로 사들였고, 심지어 회장실엔 최고급 금붕어 어항까지 설치했었다. 어항 관리비가 아마 이십오만 파운드였던가?

“어, 그거 중간까지만 들으면 마치···.”

희주가 불안하게 눈을 굴렸고,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뭐, 우리가 실패하면 그렇게 되겠지. 선덜랜드했다고.”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 두진 않을 거지만.

고개를 돌려 샐리와 브라이언을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컵 대회 상대가 리즈라니,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나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샐리가 미소를 지었다.

“4라운드쯤 올라가면, 1부리그 팀을 피하기는 힘들어요. 그중에서 리즈 정도면 오히려 운이 좋다고 해야겠죠.”

브라이언도 한마디 보탰다.

“리즈하고 우리면, 성향 차이가 너무 극명해서 일단 중립 팬들은 신나겠는데···.”

“성향 차이요?”

“레이디, 요 몇 년 사이 리즈는 엄청 공격적인 축구를 하거든요. 그 팀 감독이 괜히 광인이라고 불리는 게 아닙니다. 정말 미친놈처럼 공격해요.”

리즈 감독 비엘사, 일명 엘 로코로 불리는 인물. 여러모로 광인이라는 소리를 들을 만한 감독이다.

지난 시즌, 챔피언십을 화력으로 평정하고 승격을 달성한 것은 물론, 프리미어리그에 올라간 다음에도 공격 축구를 포기하지 않았다.

무려 디펜딩 챔피언 상대로도 맞불을 놓고 난타전을 벌였을 정도다.

비록 졌지만, 그날의 리즈는 정말 매서웠다.

“아하, 수비축구를 모티브로 삼은 우리와는 일단 정반대라고 할 수 있겠군요.”

브라이언의 설명에 희주가 이해한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내 쪽을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

“오빤 계획이 다 있구나? 이래서 레바뮌을 불러다 우릴 두들겼던 거지? 공격 축구 대비!”

그러자 브라이언은 물론, 심지어 샐리까지 표정이 바뀌었다.

아니, 그건 우연이라고. 이번 시즌에 곧바로 컵에서 리즈 만날 줄 알았으면, 내가 투자의 신이겠어?

그냥 신이지.

어차피 설명해도 믿어주지 않을 것 같아서 입을 다물었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은 죄다 바보들이거든. 축구밖에 모르는 바보 두 명. 그리고 축구도 모르는 바보.

“리즈 감독은 다른 쪽으로도 축구 광인이에요. 상대 팀 분석에 엄청나게 공을 들이거든요.”

“맞아. 훈련장에 직원을 보내거나, 드론을 띄우거나 하지. 지금은 훈련장 염탐은 금지됐지만, 그래도 경기 영상 분석쯤은 하겠지. 누구 씨가 매일 하는 것처럼.”

샐리가 쓴웃음을 지었다.

“네. 아마 경기 당일의 그는, 선덜랜드에 대해 세상에서 세 번째로 잘 아는 감독이 되어 나타날 거예요.”

“당연히 1위는 알겠는데, 2위는 누굽니까?”

혹시라도 아직 감독이 되려는 야망을 포기하지 않았나 싶어서 물어봤더니,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라일 파커가 들어가겠죠.”

아, 그 인간. 여러 의미로 입맛이 쓰다.

샐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희주가 눈을 깜빡였다.

“어디 가세요?”

“그야 당연히 분석실이죠? 시간이 별로 없어요. 비엘사만큼 꼼꼼한 전술가를 상대하는 거라면, 경기당 최소 네 시간 정도는 영상을 돌려 보고 싶으니까요.”

브라이언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괜히 쓸데없는 생각 말고, 그냥 영상 대충 정리해서 나한테 넘겨.”

“코치님은 다음 경기 구상이나 하시죠. 사흘 뒤가 플릿우드 원정이니까요.”

“그건 진작에 끝냈지. 감독님께도 보고드렸어.”

“카운터프레스?"

“맞아. 톰슨을 쉬게 해줄 타이밍이니까.”

하긴, 우리에게도 있었지. 축구에 미친 전술가가.

그것도 둘이나.

대화를 주고받으며 분석실로 향하는 브라이언과 샐리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희주가 나를 올려다보며 눈을 깜빡였다.

“오빠도 분석실 가려고?”

“아니, 내가 거기 따라가서 뭐 해. 괜히 방해만 되게. 그러니까 나는 내 일이나 잘해야지.”

“오빠 일? 돈 쓰는 거?”

“뭐, 비슷해.”

EFL컵 4라운드, 상대는 무려 프리머어리그 팀. 그것만으로도 이번 시즌 우리 팀이 맞이하는 최고의 빅매치다.

분위기를 잔뜩 달구고, 팬들을 가득 끌어모아야지.

***

[과거의 두 명문, 3년만의 재회]

선덜랜드와 리즈의 가장 마지막 만남은 3년 전, 2부 리그 챔피언십에서였다.

당시의 리즈는 하위리그를 전전하며 생존을 위해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던 중이었고, 선덜랜드는 프리미어리그로의 복귀를 꿈꾸던 팀이었다.

당시의 리즈는 선덜랜드를 올려다보는 입장이었다. 그렇지만, 경기가 끝나고 미소지은 팀은 리즈였다.

그 해, 선덜랜드는 리즈에게 한 번도 이기지 못했다.

그 순간이 교차점이었다. 리즈는 위로 올라갔고, 프리미어리그의 팀이 되었다. 그리고 선덜랜드는 3부리그로 떨어져, 이제 오히려 리즈를 올려다볼 처지가 되었다.

그런 두 팀이 EFL컵에서 다시 만난다.

객관적인 전력은 리즈가 앞선다.

리그 원에서 뛰기는 지나치게 강력하다는 지금의 선덜랜드조차, 지난해 2부 리그 챔피언이자 올 시즌 프리미어리그에서 뛰는 리즈의 전력에 비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언제나 위에서 내려다보는 자가 승리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그만큼 공은 둥글다는 걸.

다름 아닌 리즈가 3년 전에 선덜랜드를 상대로 증명해 보인 사실이다. - 리타@선덜랜드 데일리

***

리타 명의로 나간 기사지만, 글 자체는 애니가 썼다.

포장 솜씨가 좋다.

둘 다 1부에서 3부리그까지 떨어진 아픔이 있다는 점, 그리고 과거의 경기까지 끌어오니, 마치 우리와 리즈가 운명적인 맞수처럼 보인다.

이래서 애니를 팀에 데려온 거지.

애니는 곧바로 다른 언론사들에도 비슷한 기사를 살포했고, 사람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리즈 측에서도 떡밥을 물었다.

다음날 곧바로 리즈 단장의 인터뷰 영상이 풀렸다.

[선덜랜드의 역사는 존중받아 마땅합니다. 우리 리즈 역시 역사 있는 명문으로 자부하지만, 선덜랜드에 비할 바는 아니죠.]

슬쩍 우리를 띄워주는 것처럼 굴던 리즈 단장이 곧바로 본색을 드러냈다.

[우리의 마지막 리그 우승은 30년 전이지만, 선덜랜드는 90년 전이죠. 네, 세 배입니다. 선덜랜드는 정말로 역사가 긴 구단이죠.]

화면 너머에서 싱긋 웃으며, 리즈 단장이 친절하게 덧붙였다.

[하나만 더 조언하자면, 돈으로는 성공을 살 수 없습니다. 우리 리즈가 한번 실패했던 길이라 아주 잘 알죠.]

구단주실 스크린에 인터뷰 영상을 틀어주면서, 희주는 아주 부들부들 떨었다. 하지만 나는 태연했다.

바로 이런 반응을 기대했거든.

나는 곧바로 맞불을 놓았다.

[돈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우리는 나름 알뜰하게 쓰고 있습니다. 일단··· 우리 구단주실엔 금붕어 어항은 안 놨거든요. 어항보다는 차라리 드론이 낫죠.]

[우리도 드론 많이 샀습니다. 아, 그래도 안심해도 좋습니다. 우리 드론은 우리 훈련장에만 띄우거든요.]

리즈의 양대 흑역사, 재정파탄과 스파이게이트를 교묘하게 비아냥거리며 긁었더니··· 이번엔 리즈 감독, 비엘사까지 설전에 끼어들었다.

[프리미어리그 팀이 고작 3부리그 상대로 드론까지 띄울 필요는 없죠. 경기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선덜랜드의 모든 걸 알고 있거든요.]

영상 너머의 비엘사는 무척 차분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원한다면 선덜랜드 출전명단을 읊어줄 수도 있습니다. 하긴, 별로 어렵지 않은 일이죠. 선덜랜드는 워낙 변화가 없는 팀이라서요.]

인터뷰를 바라보던 샐리가 투덜거렸다.

“나도 읊어줄 수 있는데.”

샐리의 몰골은 엉망이었다.

늘 찰랑거리던 화사한 금발은 엉망으로 헝클어졌고, 화사한 얼굴에는 피로만이 가득하다. 요 며칠 새 잘 시간도 줄여가며 분석실에 틀어박힌 후유증이었다.

아름다운 푸른 눈 곳곳에 핏발을 세운 채, 샐리는 낮게 으르렁거렸다.

“리즈는 아주 변화가 많겠죠. 베스트 11을 못 낼 테니까요. 우리 상대론 마치 저승사자라도 된 것처럼 굴지만, 따지고 보면 리그에선 언더독이잖아요?”

“네, 리즈는 컵보단 리그 경기에 힘을 주고 싶겠죠.”

잔류가 최우선, 갓 승격한 팀에겐 상식이다. 하부리그의 스몰 클럽에게는 컵 대화가 그야말로 꿈의 제전이자 기회의 장이라지만, 프리미어리그쯤 되면 잔류하는 것만으로도 경제적 이득이 어마어마하니까.

“그나저나, 공교로운 타이밍에 불러낸 것 같군요.”

사실 특별한 용건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요 며칠 샐리가 커피와 에너지드링크를 물처럼 마시며 버틴다는 제보가 있어서, 보다 못해 끌어낸 상황이었다.

근데 하필이면 이 타이밍에 리즈 감독 인터뷰가 뜰 줄은 몰랐지. 그것도 분석관의 자존심을 긁는 내용의 인터뷰가.

샐리가 씩 웃었다.

“알아요. 일부러 사람들 관심을 끌려고 이런다는 걸요. 덕분에 벌써 전 좌석 매진이라면서요? 겨우 EFL컵 4라운드인데.”

대답 대신 웃자, 샐리가 덧붙였다.

“리즈도 반쯤은 공범이겠죠. 컵 대회 입장료는 나눠 가지니까요. 관중이 잔뜩 모이는 상황은, 리즈에게도 절대 나쁜 일이 아니죠.”

아마 비엘사까지 언플에 참전한 건 구단 차원의 판단이었을 거라고, 샐리는 그렇게 추측했다.

맞는 말이다··· 리즈의 의도에 대해서는.

“리즈 구단주나 단장은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르지만, 내 의도는 그게 아닙니다.”

“네?”

핏발 선 눈을 깜빡이는 샐리를 향해, 웃으며 덧붙였다.

“입장료 수익··· 네, 물론 중요하죠. 하지만 우리는 애초에 3부리그에서도 사만 명 관중을 부르는 팀입니다.”

내가 가만있었어도 관중은 모였을 것이다. 지금처럼 전 좌석 매진까진 아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최소 사만 오천에서 사만 팔천 명은 모여들었을 것이다.

가만 내버려 둬도,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의 최대 수용 인원에 거의 근접한 관중이 모인다.

심지어 원정팀 리즈와 수익을 나눠야 하는 판국에, 겨우 티켓 일이천 장 더 팔려고 언플까지 할 이유는 없다.

“돈은 내 관심사가 아닙니다. 팀의 승리가 가장 중요하죠.”

클럽 경기에서, 홈팀의 특권은 기껏해야 잔디를 마음대로 세팅할 권한과 원정 팀에게 거지 같은 드레싱룸을 내주는 정도의 심술에 그친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팀들은 홈에서 무척이나 강한 모습을 보이고, 명문 구단일수록 더욱 강하다.

전적으로 홈팀 관중의 힘이다. 관중의 함성이야말로 홈팀이 가진 최대의 어드밴티지고, 원정팀을 상대할 최고의 무기니까.

“마침, 우리는 연승을 달리고 있습니다. 당분간 질 것 같지 않으니, 리즈와 만날 때쯤엔 14연승 기록을 경신한 다음이겠죠.”

내 목표는, 프리시즌 뮌헨과의 경기를 재현하는 거였다.

축구장을 가득 메우고도 모자라, 근처의 축구 펍에 팬들이 몰려들었던 그날을.

“선수들의 사기는 최고일 거고, 프리미어리그 팀을 상대로도 조금도 무서워하지 않을 겁니다. 그 위에, 관중의 함성을 얹고 싶습니다.”

크리그의 득점에, 시티 오브 선덜랜드 전체가 함성으로 가득하던 날. 그날처럼 사람들을 끓어오르게 할 수 있다면, 도시 전체를 붉게 물들일 수 있다면.

리즈를 잡아낼 수 있을 테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