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자의 신이 키우는 축구단-42화 (42/422)

42화 등 뒤에 서는 이유 (4)

리즈의 브리핑 룸은 분석팀원들로 가득했다. 감독의 호출이 있었기 때문이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비엘사는 상대 팀 선덜랜드에 대한 완벽한 분석 자료를 요구했다.

“이번 시즌의 전 경기, 그리고 지난 시즌 전체의 영상을 돌려 봐.”

리즈의 분석관은 당혹한 표정을 지었다.

“감독님, 지난 시즌 자료가 필요하십니까? 선덜랜드 코치진은 올여름에 싹 물갈이되었는데요?”

“코치진은 그렇지. 선수단은 딱 두 명 바뀌지 않았나?”

“그렇긴 하지만, 겨우 3부 팀 따위에 그렇게 공을 들이실 필요가···.”

“겨우?”

비엘사의 눈썹이 꿈틀거렸고, 리즈 분석관은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리그 원에 있긴 지나치게 강력하다는 평가를 듣는 팀이지. 현재 연승 중이야. 그러니 전력으로는 챔피언십 수준으로 봐야 해. 게다가 좋은 전술가가 있는 모양이니까.”

“하긴, 요새 기세가 좋죠··· 좋은 전술가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팀 코칭스태프 구성이 어떻게 되지?”

곧바로 스태프 한 명이 화면을 조작했다.

“감독은 조니 로저스입니다. 프로 무대에서는 첫 데뷔입니다. 과거에는 선덜랜드 유스팀의 감독이었죠.”

“선수 육성에 강점이 있겠군.”

어쩌면 스태프의 육성에도 강점이 있을지도 모른다. 비엘사는 그렇게 생각하며 안경을 치켜올렸다.

스태프의 보고가 계속 이어졌다.

”네, 당시 키워낸 선수들의 퀄리티를 보면 어린 선수 육성에는 일가견이 있는 인물입니다. 올 시즌에도 잭과 요니라는 걸출한 유망주를 둘이나 키워냈고요.”

작년까지는 그다지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던 선덜랜드의 영건 듀오는, 올해는 아주 물이 올랐다.

리즈가 가장 경계해야 할 선수들이다.

비엘사가 고개를 끄덕이는 동안, 스태프는 화면에 브라이언의 얼굴을 띄웠다.

“수석 코치는 브라이언입니다. 현재 선덜랜드 전술을 짜고 있다고 추측되는 인물이죠.”

“젊은 친구군. 이런 친구들이 축구를 바꾸는 법이지.”

“그리고 분석팀장 샐리 퀸··· 이 친구도 젊은데요. 알려진 경력은 전혀 없습니다. 일종의 얼굴마담 역할이 아닐까 싶군요. 모델 같은 미인이긴 하니까요.”

아일랜드 출신의 퀸이, 다른 팀도 아니고 선덜랜드에서 일하는 거라면 절대 얼굴 보고 뽑았을 가능성은 없다. 그런데도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는 자신의 스태프를 돌아보며, 비엘사는 생각했다.

‘이놈들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상대는 진작에 감 떨어진 노장, 애송이 코치, 그리고 여자 분석관입니다. 셋 다 무명이고요. 그런데 도대체 뭘 그렇게 염려하시는지 모르겠군요.”

비엘사는 한숨처럼 내뱉었다.

“최근 선덜랜드 구단주가 돈을 물 쓰듯 퍼붓는다고 들었는데.”

“네, 엄청나게 쓴다더군요. 요즘은 메가스토어도 새로 짓는다던데···.”

“그런 구단주가 코치진에 돈을 아낄 리가 없지. 따라서 저들은 선덜랜드 구단주가 데려올 수 있는 가장 좋은 코칭스태프였다는 소리야. 안 그런가?”

“네, 투자자 출신이니까요. 축구계에 다른 인맥이 없어서···.”

“정확히는 투자의 신이라 불리는 투자자라던데··· 자네들은 진심으로, 그런 사내의 사람 보는 눈이 나쁠 거라고 믿나?”

서서히 표정이 변하기 시작한 분석팀을 바라보며, 비엘사가 일갈했다.

“당장이라도 망할 것 같은 회사, 유명하지 않은 기업가에 투자해서 큰돈을 벌어들인 인물이 발탁한 ‘무명’ 코치진이다. 이래도 저들이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나?”

분석팀 전원이 천천히 고개를 젓기 시작했다. 그 반응에 만족하며, 비엘사는 빠르게 덧붙였다.

“알아들었으면, 지난 시즌 전 경기를 분석해 와. 밤을 새워서라도 해내. 기왕이면 조니 로저스의 유스팀 경기 자료도 찾아보고.”

팀으로서, 고작 컵 대회 4라운드에 리즈의 모든 힘을 쏟을 수는 없었다. 베스트 일레븐을 내보냈다가 괜히 리그 경기에서 발목 잡힐 수는 없으니.

하지만 온존하는 건 주전 선수들뿐, 스태프의 노력과 정성을 아낄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비엘사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창밖을 내다보았다. 북쪽의 하늘을.

‘아마, 선덜랜드의 스태프 또한 내게 대비하고 있겠지.’

리즈의 홈, 엘런드 로드로부터 북쪽으로 백마일 떨어진 곳에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가 있다.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거리이지만, 비엘사는 마치 선덜랜드 코치진과 눈이 마주친 듯한 기분을 받았다.

‘서로 최고의 수싸움을 해 보세나. 선덜랜드 친구들.’

축구 광인, 엘 로코라 불리는 세계적 명장은 그렇게 다가올 경기를 준비해 나갔다.

***

브리핑 룸에 나타난 샐리는 평소보다 차분했다.

“비엘사가 방심할 가능성은 없어요. 베스트 11을 내보내진 못하겠지만, 그 이외에는 할 수 있는 모든 준비를 다 하겠죠.”

“그 사람은 집요하니까.”

“로테이션 멤버라 해서 팀 컬러까지 바꾸진 않을 거예요. 그 안에서 디테일만 바꿔서 나타나겠죠.”

“맨 마킹에 근거한 전방압박, 후방 빌드업, 상대적으로 느슨한 중원.”

“따라서 우리는 비엘사가 절대 맨 마킹하지 않는 두 포지션을 활용해야겠죠?”

“그렇지. 우리 포백라인 깊은 곳까지 끌어들이고···.”

“톰슨의 롱 패스로 결판을 내는 거죠.”

평소였다면 이맘때쯤 한번 트러블이 날 법도 한데, 이번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지금처럼 둘의 의견이 완벽하게 일치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아마 결론을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겠지. 매번 같은 추론과정을 거쳐, 서로 미묘하게 다른 결론을 내놓는 두 사람이니까.

로저스 감독이 쓴웃음을 지었다.

“자네도 짐작하겠지? 저 두 친구가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은 결론을.”

“대충은요.”

그러자 옆에서 희주가 좌우로 시선을 애처롭게 옮겼다. 남매니까 표정이 닮았다는 이론에 따르면, 우리끼리만 알아듣지 말고 자기에게도 좀 알려달라는 뜻이다.

로저스 감독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설명했다.

“서로의 수를 완벽하게 이해하는 두 전술가가 각자 최선의 수만 둔다면, 그 결말은 높은 확률로 무승부겠지. 그런데 컵 대회에선, 누군가는 위로 올라가야 하거든.”

그리고 그때부터의 축구는, 전술가들의 손을 떠난 영역이 된다. 11미터의 러시안 룰렛으로.

희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감독님. 이제 이해했어요.”

희주를 향해 로저스 감독이 자상한 미소를 지었다. 아마 선수들은 절대 볼 수 없는 표정일 것이다.

괜히 교관님이라고 불리던 게 아니니까.

잠시 후, 로저스 감독은 교관님으로서의 면모를 되찾았다.

“손 쓸 수 없는 영역이라 해서 아예 손을 놓아버릴 순 없지. 그 부분에 대해서도 미리 대비해야 할 게야.”

특유의 형형한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로저스 감독은 단호하게 선언했다.

“골키퍼들에게는 미리 이야기해야겠지만, 나머지 선수들에겐 말하고 싶지 않군. 처음부터 무승부를 노리는 자세로는 절대 자이언트 킬링을 해낼 수 없지.”

“동감입니다.”

그러자 희주가 재빨리 메모를 시작했다.

“골키퍼들은 승부차기를 대비, 그렇지만 다른 선수들은 몰라야 한다··· 그렇다면 비밀 특훈이겠군요? 도와줄 사람을 섭외할게요.”

로저스 감독이 고개를 저었다.

“외부 채용은 하지 않는 게 좋겠소. 리즈 분석팀은 어마어마하게 꼼꼼하다고 들었거든. 이 시기에 사람을 채용하면 우리 패를 들킬 게야.”

“어? 그러면 키커 역은 누가 해요? 선수들에겐 비밀이라면서요?”

희주가 눈을 동그랗게 뜨는 사이, 브라이언은 무척이나 미안하다는 시선을 내게 보냈고, 샐리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나는 한숨처럼 대답했다.

“조금이라도 의미 있는 훈련이 되려면 리지와 상의해야겠군요. 페널티 스팟을 앞으로 옮겨야 할 테니까요.”

그것도 아주 많이.

***

EFL컵 4라운드 당일. 시티 오브 선덜랜드는 들끓고 있었다.

지역 언론은 매일같이 축구 이야기를 했고, 시내의 축구 펍에는 어김없이 검은 고양이 인형이 놓였다.

심지어 도시 곳곳에 애드벌룬까지 떴을 정도니,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였다.

그래서 회사원 수잔 베일리는 생각했다.

오늘은 조퇴하고 싶다고.

어렵사리 구한 티켓이었다. 그러니 직관은 상식이지만, 퇴근 시간을 고려하면 도저히 경기장에 갈 자신이 없었다.

망설이던 그녀는 상사의 앞에 섰다.

“팀장님, 오늘 반차를 써도 괜찮을까요?”

“자네까지? 마침 나도 쉬려던 참인데···.”

그러고 보니 그녀의 상사 마일즈 우드 역시 축구 팬이었다. 원래 축구장 앞에서 팔던 푸드트럭 핫도그를 수잔에게 소개한 장본인이다.

당연히 마일즈 또한 축구를 보러 반차를 낼 게 뻔했다.

“꼭 오늘 쉬려는 이유라도 있나? 내가 쉬는 마당에 이렇게 말하긴 조금 미안하지만, 나하고 자네가 둘 다 동시에 빠지면 주니어급만 남게 되잖나?”

“그게···.”

수잔은 잠시 망설이다가, 그냥 솔직히 대답하기로 했다.

“축구를 보고 싶어서요.”

“축구? 혹시 EFL컵?”

“네.”

그러자 마일즈의 표정이 조금 바뀌었다.

“뭐, 우리 둘이 빠진다고 문제가 생길 것 같으면 그건 회사가 아니라 구멍가게지. 반차 써. 혹시 차편은 구했나?”

“아뇨.”

“그럼 같이 가지.”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덕분에 수잔은 반차는 물론, 경기장까지 갈 교통편까지 확보했다.

경기장으로 향하는 길은 이미 온통 붉게 물들어 있었다. 선덜랜드 레플리카를 입은 팬들이 도시 곳곳에서 쏟아져 나왔으니까. 그들이 일제히 경기장을 향해 걷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문득, 수잔은 이 인원이 다 들어갈 수 있기나 하는 건지 궁금해졌다.

“전에는 사람이 이렇게 많지 않았는데요.”

“오늘은 정말로 빅매치니까··· 솔직히 말하면, 벌써 프리미어리그 팀과 싸우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거든.”

비록 마일즈의 설명을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오늘 경기가 아주 중요하다는 정도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럼 핫도그 먹고 힘내서 응원해볼까요? 근처까지 태워주셨으니 간식 정도는 제가 살게요.”

마일즈가 웃었다.

“그럼 부탁하지. 오늘은 엄청 소리 질러야 할 것 같거든. 열렬한 함성은 홈 팬들의 의무이자, 우리가 선수들의 등 뒤에 서는 이유니까.”

그래서 수잔은 평소 점잖은 자신의 상사가, 경기장에서는 엄청나게 뜨거운 관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선덜랜드의 VIP 고객이라는 정보는 덤이었다.

하지만, 그날 수잔을 가장 놀라게 한 건 따로 있었다.

“저··· 팀장님? 톰슨 선수의 위치가 평소와 아주, 아주 많이 다른데요?”

***

“톰슨을 수비수로 썼단 말이지!? 저 친구들 준비 제대로 해 왔군!”

비엘사는 무심코 무릎을 쳤다.

톰슨을 포어리베로 역할로 기용하는 전술은, 비엘사 본인 또한 검토했던 가능성이었다.

선덜랜드가 쓸 수 있는 최상의 수를 고민하면 그런 결론에 도달하게 되니까.

다만 따로 대비하지는 않았다. 분석 결과 현실성이 없는 시나리오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피터 톰슨은 지금까지 한 번도 센터백으로 출전한 적 없는 순혈의 미드필더였고, 로저스 또한 한 번도 쓰리백을 쓴 적이 없는 감독이었다.

이런 큰 경기에서, 선례 없는 행동을 두 개나 보여줄 거라고는 도저히 믿기 어려웠다.

“한 방 먹고 시작하는군.”

호승심을 느끼며, 비엘사는 사납게 웃었다.

***

톰슨의 포어리베로 기용은, 우리가 이번 경기를 위해 준비한 비장의 한 수였다.

톰슨은 센터백을 봐도 될 정도로 당당한 피지컬을 가진 선수고, 오랫동안 수비형 미드필더로 활동했기에 수비력 또한 준수한 편이었다.

[비엘사는 절대 센터백을 압박하지 않지. 자기쪽 최종수비진에 인원 여유를 남겨두고 싶어하는 타입이거든.]

즉, 톰슨을 센터백으로 내릴 경우, 비교적 자유롭게 롱 패스를 보낼 수 있다는 장점이 생긴다.

천하의 비엘사도 지금의 국면을 예상하지는 못했는지 테크니컬 에어리어에서 쓴웃음을 짓는 중이다.

그렇다고 리즈가 일방적으로 얻어맞은 건 아니었다. 우리 벤치의 모습을 보면 확신할 수 있다.

브라이언이 한창 머리를 쥐어뜯는 중이니까.

마치 환청이 들리는 것 같다.

[펄스 나인? 로테이션 데리고!? 도대체 선수를 얼마나 갈아 넣어서 준비한 거야!?]

이미 검토했던 수였다. 우리 상대로 리즈가 쓸 수 있는 최상의 수일 거라고.

다만 우리는 그 가능성을 대비하지는 않았다. 지난 토요일의 프리미어리그 경기를 분석해 보면, 리즈가 로테이션 멤버를 내보낼 것은 자명했기에.

로테이션 선수 데리고 저렇게 세련된 펄스 나인을 보여주리라고는 꿈에도 몰랐었다.

역시 비엘사 정도 되는 감독이면, 브라이언과 샐리도 쉽게 허를 찌를 수 없는 모양이다.

그렇게 두 팀은 전술적으로 최상의 선택을 했고, 경기의 양상은 ‘선혈의 사투’ 를 예상한 전문가들의 의견과는 사뭇 다르게 흘러갔다.

톰슨이 날카로운 롱 패스를 날려 보낼 때마다, 리즈는 요니에게 순간적인 압박을 가해 위기를 넘겼다.

반대로 리즈의 파상 공세는, 페르난데스가 지휘하는 우리 수비진이 침착하게 끊어낸다.

마치, 서로 체스라도 두는 듯한 전술 싸움이 후반까지 이어졌고, 그 결말은 우리 코치진이 예상한 대로 흘러갔다.

11미터의 러시안 룰렛, 승부차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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