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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자의 신이 키우는 축구단-46화 (46/422)

46화 베리 메리 크리스마스 (3)

신이 나서 산타 모자를 휙휙 돌리는 희주를 바라보고 있으니, 나도 모르게 목소리에 힘이 빠졌다.

“영 미덥지 못한 느낌인데.”

그러자 CS팀의 얼굴마담, 에이미가 옆에서 키득거렸다.

“이해해요, 구단주님. 남매란 그런 거죠.”

“알아주시니 다행입니다. 역시 CS팀이 자랑하는 에이스답네요.”

에이미는 물론 스태프 피규어로 만들어질 정도의 미인이기도 하지만, 고객의 표정만 봐도 기분을 알아차린다는 소문이 있는 섬세한 접객 솜씨가 일품인 직원이었다.

VIP 고객을 위한 자필 카드와 티타늄 시즌권 아이디어를 제안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에이미가 환한 미소를 지었다.

“물가에 내놓는 것처럼 염려스럽고 조마조마하고··· 그만큼 동생분을 아낀다는 거니까요.”

저기, CS팀의 에이스 아니셨습니까?

“전적으로 오해입니다. 뭐, 적재적소라고는 생각하지만요··· 애가 애를 볼 수는 없으니까요.”

오늘 같은 날, 희주는 외근을 나가는 게 훨씬 낫다.

퉁명스럽게 대답하자, 에이미가 쿡쿡 웃었다.

“너무 걱정 마세요, 구단주님. 제가 잘 챙길게요.”

산타 모자를 뒤집어쓴 에이미가 경례를 하고는, 차량에 올랐다.

희주, 그리고 CS팀 직원들은 오늘 일일 산타 노릇을 하게 되었다.

크리스마스 이브를 맞아 근처의 복지시설에 생필품을 기부하는 한편, 겸사겸사 <구단주 산타에게 바란다> 이벤트 당첨 팬들에게 굿즈 선물을 배달하는 역할이다.

슬슬 출발하려나 싶었더니, 차량이 멈췄다. 잠시 후 희주가 달려왔다.

“뭐 빠뜨렸어?”

“그게 아니고··· 이건 오빠가 배달 좀 해 달라고.”

“내가?”

“보면 알아.”

품목명을 보니 [구단주 피규어] 라고 되어 있다. 확실히 이 품목이라면 내가 전해주는 걸 제일 좋아할 것 같긴 하다.

슬쩍 주소를 확인하는 내게, 희주가 빠르게 덧붙였다.

“여기서 차로 20분 정도 걸리는데, 오늘은 도보가 빠를 거야.”

“그야 그렇겠지. 크리스마스 이브니까.”

무슨 당연한 소리를 하고 있나 싶어서 바라봤더니, 희주가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주소를 잘 보세요, 오라버님.”

아, 자세히 보니 확실히 걷는 게 빠를 것 같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내가 이따 배달할게.”

그러자 희주는 환히 웃고는, 기운차게 CS팀 차량 쪽으로 달려갔다. 언제나처럼 부산한 발걸음으로.

***

스타디움 라이트 또한 부산했다. 막바지 손님맞이 준비로.

시설관리팀은 입구에 현수막을 걸고, 곳곳에 크리스마스 장식을 달기에 여념이 없었다.

오늘, 크리스마스 이브는 팀에 어린이 팬들을 초청하는 날이었다.

원래는 조금 망설여졌다. 크리스마스 이브는, 영국의 축구인들에게는 경기 이틀 전이라는 용어로 쓰이니까.

12월 26일, 일명 박싱데이에 반드시 축구 경기를 치르는 영국 특유의 문화 때문이다.

아무리 우리가 팬 서비스를 중시하는 구단이라지만, 경기 이틀 전에 선수들을 차출하고 싶지는 않았다. 혹시라도 경기력에 악영향을 받을 수도 있으니까.

그렇다고 선수 없이 팬 이벤트를 할 수도 없어서 그냥 넘어갈까도 생각했는데, 의외로 로저스 감독이 이벤트 추진을 적극 주장했다.

[괜찮아. 그 정도는. 올해 박싱데이는 한가한 편이잖나.]

박싱데이에 반드시 축구를 하는 영국의 특성상, 때로는 이틀이나 사흘 정도의 빡빡한 간격으로 경기를 펼치는 최악의 사태가 생기게 된다.

하지만 올해는 박싱데이가 주말로 잡히면서 일정에는 여유가 있는 상태였다.

[오히려 선수들의 경기력에도 도움이 될 수 있지. 사기가 오르거든. 플레이어 에스코트로도 재미 많이 봤잖나?]

감독이 그렇게 말해주는 이상 망설일 필요는 없었다. 꼬마 팬들을 경기장에 부르고, 선수들이 직접 맞이하기로 했다.

그렇다고 선수들에게 사전 준비를 거들게 할 수는 없으니 자연히 직원들이 바빠진 것이었는데···.

“요니?”

“네, 구단주님.”

사다리 하나 걸쳐 놓고 트리에 올라가 있는 요니를 발견한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거기서 뭐 하는 거지?”

“보시다시피 트리 장식 중인데요. 다들 바빠 보이셔서···.”

“혹시 가장 황당한 부상 사유 랭킹에 들어가고 싶은 거 아니면, 당장 내려와.”

요니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내려왔고, 나는 곧바로 브라이언에게 연락해 요니를 연행했다.

그리고 느긋한 걸음으로 그라운드 쪽으로 향했다.

***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의 그라운드에서는, 이틀 뒤 경기에 대비한 마무리 작업이 진행되는 중이었다.

꼼꼼히 잔디를 점검하는 리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썬? 잠시만요! 거의 다 끝나가요!”

눈이 마주치자 리지가 손을 흔들어 보이길래, 괜찮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천천히 해도 됩니다.”

그러자 리지는 안심한 표정으로 작업을 마무리했다.

신중한, 하지만 빠른 솜씨로. 도저히 올해 새로 채용된 잔디관리인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숙련된 손놀림이었다.

하긴, 그러니까 십오억 원의 가치가 붙은 거겠지.

게다가 3년간 정체를 숨긴 채 할아버지 밑에서 일하기도 했으니, 따지고 보면 초보는 아니다.

“죄송해요. 기다리셨죠?”

“괜찮습니다. 빠르신데요. 부탁하는 처지고요.”

그러자 리지가 웃었다.

“하핫, 별말씀을요. 저도 구단 직원인데요.”

CS팀이 일일 산타로 차출되면서 오늘 손님을 맞이할 인력이 부족해졌다. 그래서 손이 비는 스태프 몇 명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리지 역시 그런 스태프 중 하나였다.

“그리고 사실 저도 애들 엄청 좋아해요.”

“다행이네요. 샐리는 질색하던데요.”

본인은 아니라고 하지만, 분석실에 틀어박혀서 나올 생각이 없는 모습을 보면 뻔하다.

“샐리 씨는 워낙 바빠서 그런 거겠죠··· 그러면 산타 복장 입고, 선수들 조수 노릇 해주면 되는 거죠?”

“그렇습니다··· 리지, 메리 크리스마스.”

그라운드를 거의 빠져나올 때쯤, 품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 리지에게 건넸다. 희주가 맡겨둔, 구단주 피규어다.

즉, 이번에 구단주 피규어를 맨 처음으로 제안한 사람은 리지였다는 뜻이다.

리지의 얼굴이 붉어졌다.

“고마워요. 그런데··· 어떻게 아셨어요?”

“전에 가본 적 있는 주소고, 예전에 내 팬이었다고 말해 줬으니까요.”

“네, 그래서··· 어쩌면 저도 자격이 되는 게 아닐까 생각했었던 건데···.”

“됩니다. 그러니까 주는 거죠.”

“··· 고마워요. 보물로 할게요.”

리지는 정말로 무슨 가보라도 되는 것처럼 조심스러운 손길로 피규어를 갈무리했다. 잔디를 다룰 때와는 퍽 다른 느낌이다.

리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스태프 피규어 세트요. 저는 빼면 안 되나요?”

“왜요? 예쁘게 나왔던데.”

모델 같은 샐리는 애초에 논외로 치면, 스태프 피규어 중에선 리지가 제일 잘 뽑히기는 했다. 혹시 제작자의 사심이 들어가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그런데도 리지는 물색없는 소리를 했다.

“예쁘긴 샐리 씨가 예쁘죠. 아니면 여동생분이···.”

“장담하는데 비서 피규어는 악성재고 될 겁니다.”

단호하게 말한 다음, 나는 조금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달랬다.

“피규어 정도는 괜찮잖아요? 팬서비스가 우리 경영 신조니까, 팬들이 좋아하면 해줘야죠.”

“그런가요?”

나는 웃으며 그라운드를, 정확히는 그 위의 관중석을 가리켰다. 경기가 없는 오늘은 텅 빈, 사만 구천 석의 관중석을.

“가득 채우고 싶으니까요. 매 경기마다.”

“사만 구천명을요? 매 경기마다? 욕심도 많으셔라.”

“언젠간 증축도 할 겁니다. 그 팀 수용인원이 오만 명이 넘는다더라고요. 역전해야죠.”

“하핫, 그건 기대되는데요?”

그때, 볼에 차가운 게 닿았다. 올려다보니 눈발이 가늘게 흩날리는 중이었다.

리지가 환호했다.

“화이트 크리스마스네요!”

“괜찮습니까? 잔디 관리인으로선 피곤할 텐데요.”

“그래도 크리스마스는 역시 눈이 좋으니까요.”

리지가 눈처럼 폭신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썬, 손님맞이 준비를 하러 가 볼까요.”

아이들이 도착한 건, 그로부터 한 시간 뒤였다.

***

늘 냉철하던 피터 톰슨은, 보기 드물게 당황하는 중이었다.

“자, 어린이 팬 여러분. 오늘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를 찾아 주셔서···.”

집에서 몇 번쯤 연습하고 오긴 했지만, 아무래도 영 어색하다.

옆에서 지켜보던 페르난데스가 혀를 찼다.

“더럽게 못 하네. 그래서 어디 나중에 애는 키우겠냐?”

“그러시는 주장님은···!”

발끈해서 반론하려던 톰슨이 입을 다물었다.

톰슨과 페르난데스, 팀에서는 나란히 고참 취급을 받는 선수들이지만, 고참끼리도 분명히 서열은 존재한다.

톰슨이 유스로 뛸 때 페르난데스는 이미 유로 트로피를 들었을 정도의 차이가 난다. 게다가 지금은 아이 둘 가진 아빠이기도 하니, 애들을 못 다룰 리는 없다.

페르난데스가 웃었다.

“연습한다고 생각해. 내년부턴 다 네가 알아서 해야 할 일이잖아.”

톰슨은 잠시 페르난데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기적의 사나이, ‘세인트’ 페르난데스는 원래 지난 시즌 말 곧바로 은퇴했어도 이상하지 않은 선수였다.

구단주 이희성의 설득으로 선수 생활을 연장하면서 선덜랜드에 합류했지만, 다음 시즌까지 함께해주진 않을 모양이었다.

“알겠습니다. 어린이 팬 여러분. 오늘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를 찾아 주셔서···.”

페르난데스가 다시 혀를 찼다.

“애들 상대로는 너무 진지해도 재미없어.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는 빼. 그리고 목소리는 잭하고 요니 다그칠 때나 깔고, 지금은 한 톤 높여.”

영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에 울상을 지으면서도, 톰슨은 묵묵히 페르난데스의 지시를 따랐다. 잠시 목소리를 가다듬은 톰슨이, 거의 가성에 가까울 정도로 톤을 높였다.

“어린이 팬 여러분.”

그때였다. 대기실 문이 벌컥 열리고 아이들이 쏟아져 들어온 건.

“네에에에!”

하필이면 구단 촬영팀까지 따라왔다. 즉, 방금의 가성이 카메라에 생생히 담겼다는 뜻이다.

늘 냉철하던 톰슨의 얼굴이 붉어진 진풍경을, 촬영팀은 놓치지 않았다.

***

유니폼 위에 산타 모자를 눌러쓴 선수들을 향해 아이들이 환성을 보냈다.

“우와아아! 톰슨이다! 사인해주세요!”

“난 크리그!”

“요니 형! 잭 아저씨! 멋있어요!”

“페르난데스 아저씨가 더 멋있지, 바보야.”

보란 듯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는 페르난데스와 히죽거리는 요니의 옆에서, 잭이 억울하다는 듯 하소연을 시작했다.

“아니, 왜 요니는 형이고 나는 왜 아저씨야. 사실 쟤가 나보다 생일도 빠른데.”

“억울하면 이 기회에 헤어스타일부터 바꾸시든가.”

그런 모습을 잠시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더니, 누군가 내 바짓가랑이를 흔들기 시작했다.

내려다보니 내 앞에도 꼬마 팬들이 한가득이다.

“왜 썬 아저씨는 유니폼 안 입고 왔어요?”

“응? 오늘은 선수들만 유니폼 입는 날이거든.”

“선덜랜드의 비밀 병기라고 들었는데!”

“그건 훈련 땜빵해준다는 의미로···.”

옆에서 리지가 히죽거리며 옆구리를 찔렀다.

“자, 팬들이 바라는 건 뭐든지 해야 한다고 했죠? 유니폼 정도는 괜찮잖아요? 팬서비스가 우리 경영 신조니까요.”

조금 전, 리지에게 했던 이야기 그대로다.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럼 잠깐만. 금방 갈아입고 올게.”

문틈 사이로, 아이들과 리지의 목소리가 쉼없이 울렸다.

“하핫, 밖에서 공차고 싶다고? 눈 그치면 운동장 나가기로 하고, 지금은 여기서 찰까?”

“정말요? 안에서 공차면 엄마한테 혼나는데··· 유리 깬다고···.”

“괜찮아. 페르난데스 선수가 다 막아 주실 거야!”

“우와아···.”

“요니의 드리블을 배우고 싶어? 요니, 빨리 이리 좀 와 봐요. 거기서 소시지 그만 빼먹고요.”

무심코 입가에 맴도는 웃음을 삼키며, 나는 천천히 홀을 떠나 탈의실로 향했다.

***

아이들의 체력은 어른들의 생각보다 훨씬 강했고, 나도, 선수들도 정신없는 반나절을 보냈다.

선물을 주고, 같이 공을 차고, 사진을 찍고··· 준비한 음식을 나눠 먹다 보니 시간은 금방 흘러갔고, 어느새 오늘의 마지막 이벤트만을 남기고 있었다.

리지가 환한 미소와 함께 현수막을 펴들었다.

[선덜랜드 선수들에게 바라는 소원]

그러자 아이들이 차례로 떠들기 시작했다.

“크리그! 새해에는 꼭 해트트릭 해 주세요!”

“물론이지.”

“저는, 잭이 월드컵에서 뛰면 좋겠어요.”

“당근, 다음 월드컵에서 뛸 거야.”

“요니! 제발 다른 팀에 가지 말아 주세요.”

그러자 요니가 피식 웃었다.

“아니, 이적설은 내가 아니라 잭인데.”

“그치만 잭은 약속했잖아요. 아무 데도 안 간다고요.”

잠시 잭을 바라보던 요니가 씩 웃었다.

“네가, 나만큼 클 때까지는 떠나지 않을게.”

선수 수명을 생각하면 사실상 종신 선언이나 마찬가지인데도, 꼬마 팬은 불만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잭을 가리켰다.

“제가 저 나이가 될 때까지 떠나지 마세요.”

주위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고, 잭은 억울하다는 듯 가슴을 탕탕 두드렸다.

“아니, 내가 그렇게 겉늙어 보임까!?”

***

그 모습을, 짐 하워드는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어린 애들 사이에서 골키퍼는 결코 인기 포지션이 아니다. 그렇기에, 골키퍼를 맡는 아이들은 남보다 조숙한 경우가 많았다.

짐 하워드 역시 또래보다 훨씬 조숙한 소년이었다.

그랬기에 짐은 알고 있었다.

자기가 너무나 좋아하는 선덜랜드의 두 골키퍼는 결코 그런 약속을 해줄 수 없다는 걸.

페르난데스는 당장 내년에 그만둬도 이상하지 않은 나이고, 하퍼 또한 선수로서 이미 전성기를 맞이한 상태다.

그러니까, 자기가 어른이 될 때까지 팀에 남아 달라는 그런 소원은 절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단 1년만이라도 더 있어달라고··· 말해도 되는 걸까?’

그때 짐의 머리에 부드러운 손길이 닿았다. 무심코 올려다보자, 담담한 미소와 함께 그를 내려다보는 페르난데스와 눈이 마주쳤다.

“이제, 그날보다 훨씬 골키퍼 같은걸.”

“네, 저는 골키퍼니까요.”

“그래도, 오늘은 참지 않아도 괜찮은데.”

“정··· 말요?”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니까.”

잠시 망설이던 짐은, 골키퍼가 아닌, 소년 팬답게 굴기로 했다.

“그럼, 선덜랜드에 조금만 더 계셔 주세요.”

물끄러미 짐을 내려다보던 페르난데스가 부드럽게 웃었다.

“메리 크리스마스.”

페르난데스는 그렇게만 말했지만, 소년 짐은 알 것 같았다. 아마 같은 골키퍼이기 때문일 것이다.

내년 크리스마스에도, 그를 볼 수 있을 거라고.

그래서 짐은 대답했다.

“베리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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