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베리 메리 크리스마스 (4)
소년 팬, 짐 하워드는 팀에 멋진 크리스마스 선물을 남기고 돌아갔다. 팀의 골키퍼 두 사람을 나란히 그린 그림이었다.
아이다운 서투름이 남아 있는 크레파스 그림 속에서 1번과 12번, 하퍼와 페르난데스가 나란히 어깨동무를 하고 있었다.
보는 사람도 흐뭇해지는 모습이었지만, 특히 골키퍼 두 사람이 대만족 상태가 되었다.
“이건 누구 라커에 걸지?”
“음, 가운데 두시면 어떨까요? 액자에 넣어서.”
“그거 아주 좋겠군.”
마치 그림에 나온 장면처럼, 하퍼와 페르난데스는 다정한 친구, 혹은 피를 나눈 형제처럼 정답게 드레싱룸으로 향했다.
아, 물론 표현이 그렇다는 거지 실제로 피를 나눈 형제자매는 그다지 다정한 사이는 아니다. 누구보다 내가 잘 알지. 암.
두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샐리가, 특유의 부드러운 억양으로 말했다.
“아이들이 큰 힘이 된 것 같군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분석실에 틀어박혀 나올 생각이 없었는데, 아이들이 돌아가고 나니 언제 그랬냐는 듯 활발히 돌아다닌다.
마치 집에 손님 오면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나중에 슬그머니 나타나는 고양이 같은 모습이다.
“저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지만, 골키퍼들에게는 저런 위안거리도 필요하겠죠. 골키퍼는 정신 건강에 해로운 직업이니까요.”
“그래서, 경기 준비는 잘 되어갑니까?”
“물론 언제나처럼 완벽해요. 다음 상대는 세컨볼을 잘 쓰는 경향이 있어서, 억누르기 위한 대책까지 마련해 왔죠.”
샐리의 보고에, 브라이언이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본적으로 브리스톨 전과 같은 포맷이겠군. 상대를 앞뒤로 찢어놓는 방식.”
고양이가 한 마리 더 있었네. 수컷으로. 오늘은 종일 집무실에서 버틸 줄 알았는데.
이후의 대화는 평소처럼 우리 팀의 전술가 두 사람의 이심전심 키워드 맞추기로 흘러갔다.
“다음 경기는 톰슨이 쉬어야 할 테니, 좀 더 깊이 끌어들이면 어떨까 싶은데요.”
“페르난데스의 스로인?”
“네, 그는 전형적인 올드스쿨 키퍼니까요. 요즘 기준으로는 빈말로라도 킥이 좋다고 불릴 선수는 아니지만, 볼 핸들링은 지금도 수준급이죠.”
“하긴, 전성기와 비교해도 스로인 비거리는 거의 줄지 않았지. 그렇다면 모처럼 갬블링 윙어를 쓸 기회겠어.”
“그게 합리적이죠? 제 생각에 가장 적합한 선수는···.”
“잭이겠지.”
“요니가 아니고요!?”
이심전심으로 시작한 두 사람의 전술 담론은, 서로 코웃음 치며 돌아서는 모습으로 끝났다. 시즌 몇 번째 파국인지 이제 셀 수 없을 정도다. 대충 20번쯤 깨졌겠지.
그렇게 우리는 박싱 데이를 맞이했다.
***
선덜랜드 vs 애크링턴.
박싱데이 경기 당일, 선수 입장 전에 미리 경기장에 모습을 비췄다. 그러자 마치 선수가 입장하기라도 한 것처럼 열렬한 환성이 터졌다.
아마도 며칠 전, “돈 때문에 선수 뺏길 일은 절대 없다.” 고 단언했기 때문일 것이다.
환호, 박수, 그리고 휘파람 사이에서 누군가의 굵직한 외침이 들렸다.
“썬! 기왕이면 유니폼 입고 나오지! 유니폼 진짜 잘 어울리던데!”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봐주십쇼. 이제 현역 선수가 아니라서, 이 날씨에 유니폼 차림이면 얼어 죽습니다.”
왁자지껄한 웃음을 들으며, 나는 일부러 툴툴거렸다.
“물론 여러분은 안 추우시겠죠. 여러분들 의자에 열선 놔 드렸으니까요.”
관중석 전 좌석 열선 설치. 팬들을 위해 준비했던 내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다.
정작 팬들이 원했던 선물은 좀 다른 것이었지만.
“아, 그라운드에도 열선 깔려 있습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제가 잔디가 아니라 별 혜택을 못 보겠네요. 그래서 정장 입고 나왔으니 양해 바랍니다.”
또다시 터져 나오는 웃음을 배경삼아, 나는 관중석을 둘러보았다.
빈 자리는 보이지 않았다.
“물론 지금 이 시간, 여러분이 가장 원하는 선물이 뭔지 압니다. 팀의 승리. 하지만 그건, 제가 아니라 저희 선수들이 드려야 할 선물이죠.”
내가 줄 수 있는 선물은, 설비에 투자하고, 선수를 지켜내고, 팀이 더 나아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뿐이다.
박싱데이를 맞아 평소보다 많이 경기장을 찾아 준, 사만 구천 명의 관중들을 바라보며, 나는 또박또박 힘주어 덧붙였다.
“선덜랜드의 미래. 잭 맥그리거, 그리고 요나스 뮐러가 5년간의 재계약에 사인했다는 소식을 전해 드립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베리 메리 크리스마스!”
경기장이 떠나갈 것 같은 함성을 들으며, 나는 천천히 그라운드를 떠났다.
이제 이곳에서 싸울 열한 명의 붉은 전사들을 위해서.
***
애크링턴의 미드필더, 이안은 생각했다.
‘잭 저놈은 틀림없이 저능아야.’
물론 잭의 축구 실력 하나는 확실하다. 3부리그에서 뛰기 아까운 선수고, 언젠가 반드시 위로 올라갈 게 틀림없는 유망주다.
경기 평균 11km 이상을 소화하는 활동량과, 몸싸움을 조금도 피하지 않는 터프함을 가졌다. 발도 빠르다. 개인기가 썩 뛰어난 선수는 아니지만, 슛 하나는 수준급이다.
한마디로 잭은 공수 양면으로 활약하는 박스 투 박스 미드필더이면서, 강렬한 한 방까지 갖춘 선수라는 뜻이다.
이안은 생각했다.
‘잘 크면 포스트 제라드 소리 들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잭이 정말로 포스트 제라드가 될 선수라면 이 나이까지 국대에도 못 불려가고 3부에서 구를 리는 없다. 그렇다고 실력이 나쁘진 않으니, 아마 지능 문제일 것이다.
이안은 그렇게 생각했다.
‘아니, 리버풀이 부르면 가야지.’
디펜딩 챔피언의 관심을 일언지하에 잘라 버린 것은 물론, 그 외 프리미어리그 팀들과의 루머도 단칼에 끊었다.
심지어 거절한 방식도 악질이었다.
[엠블럼에 펜쇼 모뉴먼트와 위어마우스 브릿지를 넣을 것.]
선덜랜드 팬들은 환호했을 발언이었고, 아마 선수 자신도 선덜랜드 이외의 팀에서는 뛰지 않겠다는 확고한 의사 표명 이외의 의미를 담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에 따라서는 고깝게 들을 수도 있는 발언이었다. 지금 엠블럼 떼버리고, 시티 오브 선덜랜드의 상징물을 넣으라는 소리처럼 들리니까.
즉, ‘선덜랜드 위성 구단이 되면 뛰어줄게’ 같은 느낌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이런 방식으로 거절하고 나면, 정말로 선덜랜드 이외의 팀에서는 뛸 수 없다.
‘하긴, 머리가 나쁘니까 자리도 못 지키고 엉뚱한 데 가 있는 거겠지.’
미드필더로 출전한 잭은, 지금은 어째 윙 포워드 자리까지 슬금슬금 올라갔다. 덕분에 선덜랜드 중원은 무주공산이 되어버렸다.
‘이봐, 애송이. 메짤라 흉내는 너희가 공 가졌을 때 해야지.’
파트너로 출전한 요니가 고군분투했지만, 그렇다고 요니 혼자서 애크링턴 중원을 상대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덕분에 애크링턴 선수들은 편하게 전진했다.
‘철벽의 선덜랜드라더니, 톰슨 하나 빠지면 구멍투성이군.’
만일 피터 톰슨이 출전했다면, 애크링턴은 절대 지금처럼 전진하지 않았을 것이다. 톰슨 상대로 함부로 전진하다가 무슨 꼴을 당하는지는 개막전의 브리스톨부터, 수많은 리그 원 팀이 이미 몸으로 보여줬다.
하지만 그 톰슨은 오늘 없다. 철벽이라던 선덜랜드의 수비는, 애크링턴의 조직적인 공세 앞에 무력화되었다.
수비라인 뒤로 파고든 애크링턴 공격수가 날카로운 슛을 날렸고, 페르난데스가 필사적으로 막아냈다.
다이빙 캐치.
이안은 목소리를 높여 동료들을 격려했다.
“아까웠어! 하지만 아무리 페르난데스라도 몇 번이고···.”
순간, 이안은 페르난데스의 오른팔이 뒤로 움직였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귓가에 뭔가가 스쳤다.
‘바람?’
마치 투창이라도 던지듯 앞으로 내뻗어진 페르난데스의 팔을 본 다음에야, 이안은 간신히 깨달았다. 자신의 얼굴을 스쳐 지난 게 축구공이었음을.
“역습? 톰슨도 없으면서!?”
반사적으로 돌아보자, 애크링턴 진영을 파고드는 선덜랜드 선수의 모습이 이안의 눈에 들어왔다.
등번호 18, 잭 맥그리거.
“빌어··· 먹···!”
이안은 죽도록 달렸지만, 거리가 쉽게 좁혀지지 않았다.
잭의 드리블은 거칠고, 볼 컨트롤 솜씨는 고작 3부에서도 섬세하다는 소리를 듣기 힘든 수준이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필요한 능력은, 공 다루는 기술보다는 달려 나가는 속도다.
스피드를 앞세운 잭의 직선 돌파는 위력적이었고, 총공세에 나섰던 애크링턴 선수들이 대응하기엔 너무 빨랐다.
경기장이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We are Sunderland. Say we are Sunderland.
막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이안은 필사적으로 외쳤다.
“막아!”
그런 이안의 목소리는, 홈 팬들의 열광적인 함성에 묻히고 말았다.
Sunderland 'til I die. I'm Sunderland 'til I die.
***
처음부터 레프트 윙포워드 자리를 차지했던 잭의 질주는 매서웠다.
“미리 앞에 나가 있었던 거지? 역습하려고.”
“맞아. 갬블링 윙어 역할로.”
잭과 요니, 둘중 누구를 갬블링 윙어로 쓸지에 대해서는 피 튀기는 설전을 벌였지만, 샐리와 브라이언은 갬블링 윙어라는 대전제까지는 순식간에 합의를 끝냈다.
톰슨이 없어도, 페르난데스라면 역습 한 방쯤은 주도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상대팀 입장에서는 좀 더 숨막힐 것이다. 톰슨은 그래도 피할 수라도 있지, 골키퍼인 페르난데스가 없는 쪽에서만 공을 돌리면 절대 점수로는 이어지지 않으니까.
그 사이 잭은 무사히 어태킹 써드에 파고들었고, 팬들의 함성은 더욱 더 뜨거워졌다.
I know I am. I’m sure I am. I’m Sunderland ’til I die.
잭의 발이 크게 휘둘러졌다. 그의 발을 떠난 공이 완만한 포물선을 그렸다.
오른쪽 사이드를 파고든, 요니 쪽으로.
“나이스 패스!”
2선에 좀 더 적합한 요니 대신 잭을 갬블링 윙어로 기용하기로 결정한 건, 그의 스타성 때문이었다. 남의 시선을 끌어들이기에는 요니보다 잭이 훨씬 나으니까.
관중들은 잭의 플레이에 열광하고, 얼마 안 되는 애크링턴 수비는 잭에게 끌려나갔다. 덕분에 잭이 시도한 사이드 체인지는 저항 없이 요니에게 이어졌다.
We are Sunderland. Say we are Sunderland.
더욱 뜨거워진 경기장, 팬들의 함성 속에서 마침내 요니가 박스 앞까지 파고들었다.
골라인 앞에 남은 애크링턴 선수는 골키퍼, 그리고 센터백 뿐이었다.
자신을 가로막는 애크링턴 센터백을 피하려는 듯, 요니는 왼발 아웃프론트로 공을 밀어냈다.
윙포워드 특유의 매크로, 선덜랜드 공격진이 무척 애용하는 동작에 애크링턴 센터백이 거칠게 응수했다.
“매크로질!? 한두 번도 아니고, 매번 속겠냐!?”
애크링턴 센터백은 속지 않겠다는 듯 무게중심을 옮겼지만, 요니의 플레이에 대응하지는 않았다.
왜냐면, 요니가 하려던 건 매크로 돌파가 아니었으니까.
아웃프런트 패스. 요니의 발을 떠난 공이 아크 정면으로 흘렀다. 골키퍼 이외의 수비가 아무도 남지 않은 공간으로.
공을 따라 달리는 선수는 한 명뿐이었다.
당장이라도 숨이 끊어질 듯 헐떡이면서도, 조금도 발을 멈추지 않는 선덜랜드의 18번.
Sunderland 'til I die. I'm Sunderland 'til I die.
미친 듯 외치는 팬들의 함성 속에서, 잭이 공을 향해 몸을 날렸다.
[고오오오오오올! 완벽한 클래식 카운터! 우리의 사냥개가 다이빙 헤딩을 작렬시켰습니다! 선물을 가져온 선수는 바로 잭 맥그리거!]
We do what we want. We do what we want.
크리스마스이기 때문일까.
팬들의 마지막 외침은, 평소와 조금 달랐다.
All I want for christmas is you!
그 목소리에 화답하는 것처럼, 잭 또한 평소와는 다른 세레머니를 선보였다.
잭이 자신의 유니폼 상의를 슬쩍 끌어당겼다. 마치 연인의 손을 다루는 듯한 조심스러운 손길로.
뭘 하려는지 눈치챈 우리 팬들이 휘파람을 불었고, 환호했고, 눈물을 흘렸다.
잠시 후 선덜랜드의 로컬 보이가, 엠블럼에 입을 맞췄다. 사만 구천의 열광이, 시티 오브 선덜랜드 전체로 퍼져나갔다.
오직 선수만이 줄 수 있는 선물. 선덜랜드의 모두에게 보내는 최고의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