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프로로 살아간다는 것 (1)
<폼은 일시적이지만 클래스는 영원하다 - 빌 샹클리>
12월 31일. 1년을 마무리하는 날이다. 이날은 스태프들과 간단한 종무식을 가졌다.
구단주가 된 지 반 년, 많은 일이 있었다.
망해가는 친정팀을 샀고, 그 구단에 돈을 퍼붓고, 선수를 두 명 데려왔고, 첫 번째 시즌을 치르는 중이다.
그리고 한때 모조리 실직 상태였던 스태프들은 지금 각자의 위치에서 구단을 더 좋게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CS팀장 린다가 보고를 시작했다.
“박싱 데이를 기점으로 관중 수가 폭증했고, 새해 첫 경기는 이미 전 좌석 매진입니다. 그 다음 경기는 예매 기준으로 사만 사천 석이 나갔어요.”
“페이스가 좋군요.”
“예년 같으면 1월은 관중이 조금 주는 편인데, 올해는 다르네요. 성적이 잘 나오기 때문 아닐까요?”
그 말대로, 현재 우리 팀은 현재 리그를 거의 독주하고 있고, 최소한 3부 리그에서는 적이 없어 보일 지경에 이르렀다.
[이 팀은 리그 원에 머무르기엔 지나치게 강력하다] 는 언론의 평가처럼, 우리는 아직 리그 무패다.
샐리가 입을 열었다.
“챔피언십 승격은 거의 확정적이죠. 사실 프리미어리그 기준이면, 우리는 우승 못 하는 게 이변일걸요? 크리스마스에 1위인 팀이 보통 우승하거든요.”
그러자 옆에서 브라이언이 슬쩍 끼어든다.
“헨도네 팀만 빼고.”
“그 팀도 결국 지난 시즌에 우승했잖아요?”
금방이라도 또 티격거리려는 샐리와 브라이언을 향해, 로저스 감독이 헛기침을 했다.
“그래도 방심은 금물이겠지. 끝까지 선수들을 잘 이끌 테니 안심하게.”
“믿고 있겠습니다.”
로저스 감독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내가 잘 안다. 끝까지 포기를 모르는 축구를 하고, 기강 유지와 리더십에 강점이 있는 감독이다.
적어도 우리 선수들이 느슨해지는 일은 없겠지.
다음은 시설관리팀장 조엘이 보고를 이어나갔다.
“메가스토어 건축은 차질없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여름에 완공되겠죠. 다음 시즌 개막 전까지 오픈할 수 있게 준비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제 1월이지만, 우리는 영입 계획이 없습니다. 선수들을 잘 지켜내고, 관중들을 더 모으고, 지금의 성적을 지켜내는 게 FC 선덜랜드의 목표입니다.”
박수를 치는 스태프들 사이에서, 리지가 환히 웃어 보였다.
“늘 하던 대로라는 거군요? 하핫, 힘낼게요!”
“하지만··· 리지는 조금 바빠지겠는데요.”
“네?”
눈을 동그랗게 뜨는 리지를 향해 차분히 설명했다.
“새해에는 아카데미를 개선할 생각이거든요.”
아카데미 오브 라이트, 우리 팀의 유소년 교육 시설이자 프로 훈련장을 겸하는 시설이다.
전체 면적은 220에이커에 달하며, 축구 관련 시설만 따져도 60에이커인 대규모 시설이다.
단지 넓기만 한 게 아니라, 시설의 수준 또한 카테고리 1, 최고 등급의 훈련장으로 인정받고 있다.
맨시티가 자랑하는 돈지랄의 결정체, 에티하드 캠퍼스와 비교해도 규모로 따지면 손색이 없다.
다만, 기본적으로 오래된 연습장이다 보니 개선이 필요한 부분도 있었다.
“챔피언십에 돌아가기 전까지 연습용 그라운드를 지금의 두 배로 늘리고 싶군요.”
“두 배라고요?”
리지 뿐 아니라, 로저스 감독을 비롯한 코칭스태프들 또한 흥미롭다는 시선을 보냈다.
“수중전, 눈, 그 밖에도 여러 가지 다양한 상황을 미리 세팅해 둔 상태로 훈련하고 싶으니까요.”
그러자 리지가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그렇다면 잔디 종류나 토질은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와 동일하게 맞출까요?”
“일부만요. 나머지는 원정 경기의 잔디 세팅을 모방할 수 있는 환경을 원합니다.”
어느 팀이나 홈에서 더 강한 건 마찬가지지만, 우리 팀은 유난히 홈에서 강한 선수가 많다.
홈 팬들의 환호를 연료로 삼는 잭이나, 잔디에 민감한 크리그 같은 선수들이 대표적이다.
3부 리그에서는 우리가 압도적 강팀이라 상관없지만, 2부 리그부터는 원정에서 발목 잡힐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최소한, 잔디라도 미리 대비하고 싶었다.
리지가 침을 삼켰다.
“그건··· 꽤 보람 있는 일이 되겠네요.”
“공사 같은 부분은 조엘이 전적으로 도와줄 겁니다. 하지만 잔디와 그라운드 세팅에 대한 판단은, 일임하겠습니다.”
늘 명랑하던 리지의 얼굴이 굳어졌다.
무리도 아니다. 잔디 관리 책임자가 된 지 겨우 반년, 경력에 비하면 꽤 부담스러운 역할을 맡게 된 셈이었으니.
“썬, 아니··· 구단주님, 예산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부담을 덜어 주려는 의도였는데, 어째 리지의 얼굴은 더 딱딱하게 굳기만 했다. 하긴, 돈 쓰라고 진짜로 질러 버리는 타입의 인재는 세상에 퍽 드물지.
다행히 우리 팀에는 그런 인재가 이미 존재한다.
“예산 문제는 희주가 도와줄 겁니다. 그리고, 고문님의 조언을 들어도 되고요.”
그러자 리지의 표정이 가까스로 펴졌다.
마지막으로, 희주가 명랑하게 외쳤다.
“그리고 내일은 신년 기념 파티니까 참고하세요! 해피 뉴 이어!”
****
새해, 1월 1일에는 FC 선덜랜드 가족 모두가 함께하는 조촐한 파티를 열었다.
“갑부 오라버님··· 이 아니라, 구단주님, 연설문 초안을 준비해 봤는데요.”
희주가 종이를 내밀었다.
[여러분이 입은 유니폼, 신발, 먹고 마시는 어느 것 하나 구단주의 피와 땀이 아닌 게 없다. 겨우 승격이 힘들면···.]
“기각. 하다못해 팬들의 피와 땀이라고 했어야지.”
그리고 이거 원본은 유명한 주작이고. 이럴때 보면 희주 얘가 축구를 아는지 모르는지 헷갈릴 때가 있다니까.
희주가 반발했다.
“그렇다고 ‘해피 뉴 이어’ 는 너무하잖아. 그건 오프닝 멘트가 아니야. 그냥 인사라고.”
“식전 연설은 짧을수록 좋은 거야. 식사 테이블 앞이면 더 그렇고.”
결국 타협 끝에 ‘해피 뉴 이어,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로 정했다.
물론 FC 선덜랜드 직원이나 선수들 대부분은 영국인이고, 새해 복 받으라는 인사말을 알아듣는 사람은 다섯 명을 넘지 못했다.
우리 남매를 제외하면, 로저스 감독과 에이미였다.
“한국식 인사군요? 나중에 SNS에 올릴까요? 선수들이 해주면 한국 팬들이 좋아할 것 같은데요.”
“부탁합니다.”
좋은 착안점이다. 나는 생각 못 했는데.
해외 팬에 대해서는 염두에 두지 않았었다. 어차피 선덜랜드는 당분간 유럽 대회에 나갈 수 없으니까.
다만 구단주가 한국인이고 한국 선수들이 거쳐간 팀이니만큼, 홍보 방식에 따라서는 한국에 인지도를 쌓을 수 있다.
한국어 새해 인사, 써먹을 가치가 있겠다.
한편 파티에 참석한 선수들, 그리고 스태프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밝았다.
일단 좋은 성적이 가장 큰 이유겠지만, 지금처럼 선수와 구단 스태프가 한 자리에 섞여서 파티하는 것도 의외로 신선하다는 반응이었다.
로저스 감독이 모처럼 인자하게 웃었다.
“구단주가 먼저 제안했고, 내가 찬성했다. 누가 너희들 뒤를 받쳐주는지는 알고 뛰어야지.”
잭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다 알고 있슴다. 구단주님 왼쪽부터 애니 팀장님, 린다 팀장님, 닥터 버드, 포터 부팀장님, 에이미 씨···.”
“야, 우리가 그러면 반칙이지.”
요니가 핀잔을 줬고, 잭이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하긴, 잭과 요니 정도면 구단 직원들 대부분을 이미 알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다.
페르난데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항상 선수단을 성실히 뒷받침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스태프 여러분 덕분에 정말 축구에만 집중하는 중입니다.”
인터뷰 경력이 풍부한 레전드이니만큼, 파티 자리에서의 인사도 능숙하다. 하긴, 그는 빅클럽과 국가대표팀 양쪽 모두에서 주장을 맡았던 선수다.
페르난데스를 향해 웃으며 잔을 들어 보였다.
“건배사는 안 하십니까?”
“그건 구단주님이 해야···.”
“주장이 하시죠.”
그러자 페르난데스가 천천히 잔을 들어 올렸다.
“있어야 할 자리, 그곳으로 돌아갈 우리 모두를 위하여.”
그의 건배사를 신호로, 선덜랜드의 신년 파티가 시작되었다. 호화로운 음식이 쏟아져 나오자 선수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가장 먼저 잭이 환호했다.
“우와, 이거 정말로 먹어도 되는 검까!?”
“주접.”
언제나처럼 잭에게 핀잔을 주면서도, 요니의 표정 또한 무척이나 흐뭇해 보였다.
반면, 표정이 미묘해 보이는 사람도 몇 있다. 우선 마이너스 식성의 소유자, 브라이언이 대표적이었다.
“장어 젤리는 없는 것 같네···.”
그 외에도 페르난데스와 톰슨, 크리그와 하퍼같이 자기관리가 철저한 선수들의 표정이 대체로 어두웠다.
“맛있어 보이긴 하지만···.”
뒷말은 뻔하다. 아직 시즌 중이고, 당장 며칠 뒤에 경기를 앞둔 몸이니 식단 관리가 필요하다는 거겠지.
웃으며 설명했다.
“메디컬 팀의 엄격한 체크를 거쳤고, 오늘을 위해 쉐프가 따로 연구한 레시피입니다. 남의 접시를 욕심내지만 않으면, 영양적으로 문제는 없을 겁니다.”
***
사실 오늘의 음식에는 나름의 사연이 있었다.
기왕 신년 파티를 하기로 한 김에 음식에 힘을 좀 주자는 의견이 나왔고,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나는 곧바로 유명 쉐프의 섭외를 지시했다.
몇 군데 전화를 돌린 희주가 슬픈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어··· 올리버 말인데, 이미 맨시티랑 계약 중이라는데?”
“마르코는?”
“마찬가지.”
알아보니 이미 모 구단이 싹 쓸어간 느낌이다. 쉐프도 로스터 제한에 포함시키자고 나중에 건의라도 해야지.
결국 남은 유명 쉐프는 한 명뿐이었다. 고든, 음식 솜씨만큼 화려한 욕설을 자랑하는 요리인.
컨설팅 계약을 맺고, 그가 자주 하는 식당 개선 방송과 유사한 형태로 식당 메뉴를 돌봐 주기로 했다.
덕분에 구내식당 운영팀이 바짝 긴장했고, 레스토랑 팀 역시 얼어붙었다.
고든의 반응은 예상보다 훈훈했다. 구내식당을 점검하고 음식을 확인한 그가 곧바로 엄지손가락을 들었다.
“미식이라고 부르진 못하겠지만, 이곳에서 매일 식사하는 직원들을 위한 음식으로는 최상일 것 같군요. 아무것도 조언할 게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레스토랑에 대한 반응 역시 나쁘지 않았다.
“좋은 요리군요. 이쯤 되면 구단주님이 지나치게 우려하는 게 아닌가 싶은데요. 나라면 이 정도 레스토랑에 대해 외부인의 조언을 구하려고 생각하진 않을 겁니다.”
신년 파티 메뉴를 점검한 고든은 만족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간이 좀 약한 게 아쉽지만, 이 정도면 취향 차이로 넘길 범위라면서.
유명 쉐프의 칭찬에, 레스토랑 팀은 뛸 듯이 기뻐했다. 쉐프 카일이 대표로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우리 선수들도 기뻐하겠군요.”
그러자 상황이 바뀌었다. 고든의 표정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선수들? 이 팀의 축구선수들? 그러니까 지금 이 기름 덩어리가 축구선수용 음식이라고? 왜, 공차다가 미끄러지라고 고사라도 지내고 싶나?”
180도 태세전환에, 당연히 카일은 반발하고 나섰다.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닙니까?”
“이봐, 간 좀 싱겁게 하면 그게 선수용 식단이 되나? 시즌 중에 선수에게 이런 걸 먹이려는 놈이 어디 있어!”
마침내 카일이 폭발했다.
“아는 척 적당히 좀 하쇼. 말끝마다 선수, 선수··· 누가 보면 선수 생활 해본 줄 알겠네.”
고든이 히죽 웃었다.
“12살까진 레인저스 유스였는데.”
“하, 유스? 그래봤자 프로 못 된 축알···.”
말실수를 깨달은 카일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별말 안 했지만, 카일은 조용히 자신의 입에 오븐용 장갑을 쑤셔 박았다.
그 시점에서 카일은 완벽히 주도권을 잃었고, 고든의 식당 개선이 시작되었다.
“날 것 내놓지 말라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나? 더 익혀! 소화 잘되는 조리법만 쓰고, 기름기 더 줄이라고!”
“아니, 그건 환자식 아닙니까?”
“맞아, 환자식이지. 먹어본 적 있나?”
“더럽게 맛없죠.”
고든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더럽게 맛없지. 그래서 요리사가 필요한 거야. 더럽게 맛없는 재료와 더럽게 맛없는 조리법으로 더럽게 맛없는 음식을 만드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거든.”
카일은 말이 없었다. 잠시 후, 고든이 진지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자네는 프로 쉐프지? 그렇다면 한정된 조건에서도 맛있는 음식을 만드는 게 자네 일 아닌가?”
***
그런 과정을 거쳐 완성된 메뉴를, 메디컬 팀의 철저한 검증까지 거쳤음을 설명하자, 선수들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그렇다면야 안심이군요.”
“하긴, 다른 건 몰라도··· 쟤는 몸 관리 하나는 예전부터 엄청 철저했지. 유스에서 맞붙어봐서 잘 알아.”
크리그와 톰슨을 시작으로 선수들이 하나둘씩 자기 접시를 알뜰하게 비웠다.
유일하게 음식을 남긴 사람은 페르난데스였다.
그는, 자신의 접시에 손도 대지 않았다.
***
“혹시 입맛이 없습니까?”
파티가 끝나고 슬쩍 묻자, 페르난데스가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건 아닙니다. 요리사가 엄청 노력했다는 것도 알겠습니다. 다만, 경기를 앞두고 루틴을 깨고 싶지 않았습니다.
설명하면서, 페르난데스는 낮게 덧붙였다. 나이가 나이다 보니 신경쓸 게 많다고.
하긴, 그의 나이에 폼을 유지하긴 쉽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골키퍼의 수명이 긴 편이라지만, 페르난데스는 골키퍼 중에서도 노장에 속하는 선수다.
“그렇다고 굶는 건 곤란한데요.”
“걱정 마시죠. 안 굶습니다.”
들고 있던 손가방에서, 페르난데스가 플라스틱 쉐이커를 꺼냈다.
“그게 뭡니까?”
“쉐이크입니다. 물과 닭가슴살만 들어갔죠.”
“어 그건···.”
비리겠다. 장어 젤리만큼. 유소년 시절의 기억이 스멀스멀 올라와서 입맛이 나빠졌다.
페르난데스가 웃었다.
“네, 비립니다. 그래서 일반 요리는 가급적 안 먹으려 합니다. 다른 음식의 맛을 알아버리면 쉐이크 먹기 더 힘들어지거든요.”
“미안합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 괜히 모셔서···.”
금식 중인 사람을 불러다 만찬상 앞에 앉힌 꼴이다. 황급히 사과하자, 페르난데스가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고 안 불러 주셨으면 오히려 서운했을 겁니다.”
서른아홉 살, 이제 머지않아 마흔이 될 노장은 코를 막고 쉐이크를 원샷했다. 그리고는 뒷맛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인상을 찌푸렸다.
“앞으로 딱 반년만 더 참으면 될 줄 알았는데···.”
조금 더 프로로 머물겠다는 선언, 분명 나와 선덜랜드로서는 무척이나 기쁘고 고마운 이야기다.
그런데도, 쉽게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그가 앞으로 걸어야 할 길이 얼마나 고생스러울지 짐작하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