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프로로 살아간다는 것 (2)
메가스토어 건설 현장.
가림막 안에서 한창 뚝딱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원래는 끔찍한 공사 소음일 텐데, 내 귀에는 마치 경쾌한 음악처럼 들렸다.
아무래도 가림막에 선덜랜드 엠블럼이 붙어서 그런 것 같긴 한데, 이래서는 잭을 나무랄 처지가 아니다.
사람들이 다들 신나게 일하고 있기 때문이겠지. 그런 거로 해두자.
“보시다시피 현장 분위기는 아주 좋습니다.”
시설관리팀장, 조엘이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지시하신 것처럼 선덜랜드 지역 업체에서 자재와 인력을 공급받고 있으며, 건축가도 지역 출신을 우대했습니다. 덕분에 현장 사람들은 죄다 선덜랜드 팬입니다.”
“그거 다행이네요.”
고개를 끄덕이는 내 곁에서 희주가 속삭였다.
“경기부양책이지?”
“그렇게까지 거창한 건 아니지만.”
앞으로 내가 추진할 모든 건설 프로젝트는, 선덜랜드 지역 사람들을 고용하는 형태로 진행할 생각이긴 하다. 결국 지역 팬들 살림이 윤택해져야 구단의 기반도 튼튼해지는 법이니까.
그 사이에도 조엘의 보고는 계속 이어졌다.
“일정을 맞추기 위해 부분적으로 모듈러 공법을 도입했습니다. 저층 건물이기 때문에 내구성 문제는 없으리라 판단됩니다. 그리고···.”
··· 전문 용어 한가득.
전혀 모르겠으니 매우 가만히 있어야겠다고 생각하자, 옆에서 희주도 똑같은 표정을 지었다.
“전혀 모르겠어. 오빠, 우린 여기 왜 온 걸까···.”
“그래도 얼굴은 비춰야지.”
실무자들의 작업을 방해할 마음은 없다. 섣부른 말참견도 하지 않는다. 괜히 현장 일을 모르는 티만 날 테니까.
그러니 보고를 받고, 감명 깊은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는 것이면 족하다.
중요한 건, 돈을 대는 사람이 정기적으로 현장을 살펴본다는 사실 그 자체다.
현장이 느슨해지지 않고, 적당한 동기부여가 될 정도면 충분하겠지.
가끔 얼굴을 비추고, 새참 삼아 음식 좀 돌리고, 그 외의 실무는 조엘에게 맡겨두면 충분할 것이다.
“요약해서 말씀드리면, 당초 목표보다 한 달 정도 일찍 개장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수고했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합니다.”
***
한편, 아카데미 그라운드 증설 현장은 생각보다 엉망이었다.
원래는 가볍게 생각했었다. 땅을 사는 것도 아니고, 이미 있는 땅을 갈아엎어서 잔디밭으로 만드는 작업이니, 건물 짓는 공사에 비하면 훨씬 간편할 거라고.
그런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자갈부터 깔아주셔야 하는데요.”
“아니 누가 잔디밭 아래 자갈을 깔아? 잔디 죽이려고 작정했어?”
“아···.”
입술을 깨무는 리지의 표정이, 멀리서 보기에도 좋지 못하다. 희주와 눈짓을 주고받은 다음 재빨리 현장에 다가갔다.
“무슨 일 있습니까?”
내가 다가가자 리지의 표정은 눈에 띄게 밝아졌지만, 현장 인력의 반응은 퉁명스러웠다.
“뉘슈? 여기 함부로 들어오면 안 되는데.”
그러자 옆에서 다른 사내가 팔꿈치로 옆구리를 찌르기 시작했다.
“미친놈, 눈 삐었냐? 썬이잖아.”
“썬? 그게 누구··· 가만, 선덜랜드 구단주?”
표정이 바뀌기 시작한 현장 인력을 향해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선덜랜드 구단주 썬입니다. 여기선 여러분 고용주이기도 하죠. 보아하니 무슨 트러블이 있는 것 같던데요.”
“아니, 그게··· 사실 우리도 선덜랜드 팬입니다. 지역 사람이면 당연하죠. 그래서 도와주러 온 건데. 이 아가씨가 자꾸 이상한 소리를 해서요.”
고개를 끄덕인 다음, 이번엔 리지에게 시선을 건넸다.
“리지, 어떻게 된 거죠?”
“그게···.”
리지가 머뭇거리자, 현장 인력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아래쪽에 자갈을 깔라고 해서, 그렇게는 못 하겠다고 말하는 중입니다. 귀찮아서가 아니라,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소리잖습니까?”
이제 좀 상황을 알 것 같다.
리지는 잔디에 대해서는 아주 잘 알지만, 겉보기에는 그렇지 않다. 나이가 어리고, 여자니까 얕보이기 딱 좋다.
그런 리지가, ‘자갈을 깔라.’고 지시해도 억센 사내들이 순순히 따를 리는 없을 것이다.
“리지, 왜 자갈을 깔라고 지시했죠?”
“물 빠짐 때문에요. 배수관 위에 자갈을 깔아서 물 빠짐을 좋게 해야 하거든요. 안 그러면 비 오는 날은 도저히 축구장으로는 쓸 수 없는 상태가 되죠.”
“그렇군요. 그런데 자갈을 깔아버리면 그 위에선 잔디가 못 자랄 것 같은데요.”
“자갈 위에는 왕사를 덮고, 그 위 식재층에는 세사를 쓸 거예요. 보습 기능을 확보하고,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요.”
“알겠습니다. 그럼 맨 아래엔 자갈을 깔아야겠군요.”
담담하게 대답하면서, 현장 직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번 일은 약간의 오해 같으니, 별말 안 하겠습니다. 하지만 우리 잔디관리인은 아무리 나이가 어려도 프로입니다. 여러분도 프로답게 행동해주시길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구단주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따라야죠··· 이봐! 흙 도로 다 파내! 자갈부터 깔라고 하신다!”
안도하는 리지를 향해,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앞으로도 이런 트러블이 생기면 조엘에게 조언을 구하세요. 저 사람들 관리는 조엘이 하니까요.”
“네···.”
“그나저나 고문님은 오늘 안 계십니까?”
그러자 리지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와 계세요. 지금은 안에서 홍차나 드시는 중이지만요.”
***
시설관리팀 고문이자 전직 잔디관리인, 샘은 리지 말대로 한가롭게 홍차를 마시는 중이었다.
일부러 원망 섞인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전혀 도와주실 생각이 없으신 거군요. 리지 씨가 불쌍하지도 않으십니까?
그러자 홍차를 홀짝거리던 샘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직무유기라고 말하고 싶으신 게요?”
“그건 아닙니다. 실무는 리지 씨의 몫이죠. 멀리서 뒷짐 지고 서 계셔도, 혹은 나오지 않으셔도 직무유기라고는 하지 않을 겁니다.”
“그건 고맙구려.”
“다만 고문님께서 가만 계시는 데는 나름의 생각이 있으신 게 아닌가 해서요.”
이번에 그라운드를 늘리기로 결정한 건, 반쯤은 샘을 믿고 내린 결정이었다. 아무리 리지가 재능이 있다고는 하지만, 정식 잔디관리인 경력은 이제 겨우 반 년이니까.
반면 샘은 선덜랜드에서만 27년간 일한 잔디 관리인이고, 그 경력은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보다도 길다.
바꿔 말해, 눈앞의 노인은 선덜랜드의 경기장과 훈련장 공사에도 전부 관여한 경력이 있다.
“챔피언십 승격 전까지만 준비하면 충분하다고 들었소. 그렇다면 아직은 넉넉하지. 그래서 조금 두고보려 했소이다.”
“그게 전부입니까?”
홍차를 호로록 들이킨 다음, 샘이 낮은 목소리로 털어놓았다.
“손녀라서 싸고 돈다는 소리를 듣고 싶진 않았소. 그리고 고문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잔디 관리인이라면, 프로라고 불릴 자격이 없을 테지요.”
“알겠습니다.”
지금까지는 두드러지지 않은 문제였다. 리지는 그동안 주로 우리 시설관리팀 정직원들과 일했으니까.
시설관리팀장 조엘은 유능하고 의욕적인 인물이며, 구단에 제법 오래 있어서 샘과도 친분이 있다. 샘의 손녀인 리지가 어리고 경력이 없다는 이유로 무시할 사람은 아니었다.
덕분에 지금까지 리지는, 오직 잔디 가꾸는 실력만으로 평가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 현장에서는 리지에게 조금 다른 역량이 필요해졌다.
그리고 샘은, 공사가 실패 직전까지 몰리기 전에는, 자기 손녀를 감쌀 마음이 없다고 선언했다. 마치 자기 새끼를 절벽 아래로 던진다는 사자처럼.
“왜 그런 눈으로 보시오?”
“아뇨, 고문님도 선덜랜드 사람이구나 싶어서요.”
선덜랜드의 엠블럼 옆에는, 사자가 그려져 있다.
***
“너무하시는 거 아니에요?”
구단주 이희성이 돌아가자마자 들이닥친 손녀를 바라보며, 샘은 대답 대신 찻잔을 들어 올렸다.
호로록, 홍차 마시는 소리를 내면서.
그러자 리지가 분통을 터트렸다.
“할아버지도 월급 받고 계시잖아요!”
“썬이 그러더구나. 나는 고문이라 놀아도 된다고.”
“그래서, 뒤에서 구경만 하시는 게 프로다운 행동인가요?”
“그러면 너는 프로답게 굴고 있는 게냐?”
순간적으로 허를 찔린 손녀를 바라보는 샘의 눈빛과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정작 대화 자체는 그다지 부드럽지 않았다.
“아까 일은 썬이 중재해 줬지만, 원래는 네가 할 일이었다. 너도 프로니까.”
신랄한 질책에, 리지의 얼굴이 붉어졌다.
“말이 통해야죠. 그 사람들은 제 이야기도 듣지 않으려고 해요. 제가 어리고, 여자라서 그런 거잖아요.”
“다 각오하고 시작한 거 아니었느냐? 여자 잔디 관리인은 흔치 않으니까.”
“······.”
“손녀라서 좋게 보는 걸지도 모르겠다만, 너는 재능이 있는 편이야. 세심하게 잔디를 다루고, 손도 제법 빠르지. 체력이야 남자들보다 떨어지겠다만, 기계가 메꿔줄 수 있을 테고.”
“······.”
“그런 요소를 색안경 없이 봐줄 사람은 아주 드물기는 해. 그 드문 사람 중 하나가 네 고용주니까 일할 기회를 잡은 거겠지만··· 기회를 잡았으면 투정 부리지는 말아야지.”
입술을 깨무는 리지를 향해, 샘의 질책은 계속 이어졌다.
“말을 듣지 않는다고 배수로 위에 그대로 흙을 덮게 내버려두진 말았어야 했어. 하다못해 조엘이라도 불렀어야 하는 게 네 일 아니냐?”
“조엘 아저씨··· 아니, 팀장님한테 보고했으면 그 사람들 전부 잘렸을 거예요.”
“그래서, 동정한 게냐?”
“조금은요.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어요. 현장을 통솔하지 못하면, 결국 제 책임으로 돌아올 일이니까요.”
“그렇다고 정말 현장을 통솔하지 못하면 훨씬 더 큰 책임이 될 텐데?”
입술을 꾹 깨물며 고개를 숙이는 리지를 향해, 샘은 조금 부드러운 목소리로 고쳐 말했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한번 생각해보려무나. 다행히, 썬이 좋은 힌트를 주고 간 것 같으니까.”
***
노인은 아침잠이 없고, 잔디관리인의 아침은 빠르다. 따라서 샘의 아침 역시 남들보다 무척 빠른 편이었다.
이른 새벽, 경기장과 훈련 잔디를 돌아보는 것은 그의 일과였다. 손녀 리지에게 실무를 넘겨준 다음에도, 27년간 몸에 밴 오랜 습관은 쉽게 없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이제는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한쪽 무릎을 천천히 꿇으며, 샘은 조심스럽게 잔디를 쓰다듬었다.
‘잔디는 이렇게나 잘 다루는데.’
리지에게 말해주진 않았지만, 지금의 잔디 상태는 예전보다도 훨씬 좋다.
구단주가 바뀌면서 최신 설비와 비싼 영양제가 아낌없이 투입되긴 했지만, 잔디 관리인의 실력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무용지물일 것이다.
잔디에만 한정하면, 리지는 이미 훌륭한 관리인이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겠지만···.
“일찍 나오셨네요. 고문님.”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샘은 천천히 일어나서 몸을 돌렸다.
빙긋 미소짓는 페르난데스와 눈이 마주쳤다.
“일찍 일어나셨구려.”
“직업병이죠. 선수니까요. 듣자니 우리 구단주님도 예전에 이 시간에 러닝을 했다던데요.”
“그랬지요. 페르난데스 선수도 너무 무리하지 않았으면 좋겠소이다.”
“저는 돌바닥에선 절대 안 뜁니다. 잔디 위에서만 뛰죠.”
샘은 고개를 끄덕였다.
구단주 본인의 아픈 경험 때문에, 선덜랜드의 메디컬 팀은 선수의 부상 문제에 대해서는 편집증적일 정도로 관리하는 편이었다.
그리고 잭이나 요니 같이 어린 선수라면 모를까, 서른아홉까지 현역으로 뛰는 페르난데스가 자기 몸 관리를 잘못할 가능성은 없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고생하시구려.”
가볍게 인사를 주고 받은 다음, 페르난데스가 천천히 달리기 시작했다. 그 뒷모습은 언제나처럼 흔들림이 없었다.
요즘 페르난데스를 따르는 선수들이 부쩍 늘었다고 들었다. 정확히 말하면, 선수들은 아마 저 뒷모습을 따르는 거라고 생각했다.
20년간 프로로 살아온 베테랑의 등은, 말 이상으로 많은 의미를 전할 수 있는 법이다.
‘다음 세대에게 보여줘야 하는 건, 저런 등이겠지.’
샘에게도 27년간 잔디 관리인으로 일했다는 자부심이 있다. 그중 3년간은 손녀와 함께 일했다.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는, 이미 보여줬을 것이다.
새벽 어스름 저 너머에서, 부지런히 잔디를 살피는 리지의 모습을 바라보며···.
샘은 자신의 굽은 등에 힘을 주었다.
***
며칠 뒤, 한 차례 더 그라운드 공사 현장이 시끄러워졌다. 다가가 보니, 이번에도 리지와 현장 인부들이었다.
다만, 오늘의 분위기는 예전과는 꽤 달랐다.
“아니, 정말로 이것만 보고 구분할 수 있다고?”
“네. 1번 그라운드죠?”
한 삽 정도 크기로 떠온 잔디밭 샘플을 보자마자 리지는 그렇게 단언했고, 인부들이 입을 쩍 벌리기 시작했다.
내 기준에선 그렇게 놀랄 일은 아니었다. 저 정도는 선수들도 어느 정도 구분할 수 있는 조건이니까.
아카데미의 1번 그라운드는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와 완벽히 똑같은 환경으로 조성한, 일종의 표준 세팅이다.
“그럼 이건?”
“습도가 높으니 3번, 수중전 세팅··· 처럼 보이네요. 하지만!”
리지가 장난기 어린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것도 1번 그라운드죠? 가져오면서 위에 물을 뿌렸네요?”
슬슬 표정이 바뀌기 시작한 현장 사내들을 향해, 리지가 간곡히 부탁하기 시작했다.
“보시다시피 잔디에 대해서는 제가 제일 잘 알아요. 그러니까 부탁드릴게요. 최고의 그라운드를 선수들에게 줄 수 있도록, 저를 도와주세요.”
그날부터였다. 현장 인력이 리지의 요구를 군말 없이 따르기 시작한 건.
하긴, 현장 사람들은 원래부터 선덜랜드 팬이라고 밝혔고, 리지의 지시에 태클을 걸었던 것도 특별히 악의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자기들 눈에 리지가 미덥지 못하게 보였을 뿐이다. 능력을 입증하기만 한다면, 말을 듣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나저나···.
“좋은 생각을 떠올렸군요. 능력을 보여주고 따르게 만든다.”
칭찬이 멋쩍었는지, 리지의 뺨이 조금 붉어졌다.
“별말씀을요. 며칠 전에 알려주신 방법이잖아요? 제가 프로라는 걸 보여줄 수만 있으면, 저 사람들은 제 지시를 따른다고요.”
“능력을 보여준 다음에도 말을 안 들으면, 잘랐겠죠.”
“그러지 마세요. 겪어보니 나쁜 분들은 아닌 것 같으니까요.”
부드럽게 고개를 저은 다음, 리지가 표정을 고쳤다. 평소처럼 명랑한 얼굴, 씩씩한 목소리로.
“여름까지 그라운드 열 여섯 개를 더 만들 수 있어요! 혹시 필요하다면, 한두 개 정도는 당장 원하는 사양으로 세팅할 수도 있고요.”
“그거 다행이네요.”
“하핫, 맡겨두세요. 어디를 재현해 볼까요? 안필드? 에티하드? 핫스퍼 스타디움?”
나는 고개를 저었다.
“리지 씨가 최우선적으로 재현해야 할 그라운드는, 세인트 제임스 파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