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자의 신이 키우는 축구단-50화 (50/422)

50화 프로로 살아간다는 것 (3)

세상에는 절대로 질 수 없는 상대라는 게 존재한다.

만일 우리 팬들이, 맨시티나 리버풀 상대로 지지 말아 달라고 요구한다면 나는 ‘기다려 달라’ 고 대답할 것이다.

지금 당장 1부리그의 강팀과 대등하게 싸우는 건 불가능하다고, 시간을 달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코칭스태프의 반응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맨시티를 어쩌라고? 브로, 요즘 많이 피곤해? 그런데 밤은 내가 새는데···.]

[구단주님. 아무리 공이 둥글다고 해도, 그건 좀 선 넘은 요구인데요.]

아무리 우리가 3부 리그의 생태계 교란종 취급이라지만, 1부 리그에서는 먹잇감 수준에 불과하다. 아직까지는 그만한 전력 차이가 난다.

하지만 우리 팬들이 뉴캐슬 상대로 이겨달라고 외친다면?

내 대답은 정해져 있다. 음, 지극히 맞는 말이라고. 나도 동감이라고.

아마 브라이언과 로저스 감독도 기쁘게 동의할 것이다. 샐리는 아마 불가능이라고 쏘아붙일 것 같지만.

리지는 뭐라고 할까?

“어머, 보람 있는 일이 되겠군요!”

우리 잔디 관리인의 얼굴 가득히 웃음꽃이 피었다.

조금 전까지도 리지는 웃고 있긴 했지만, 그 미소는 프로 잔디 관리인으로서의 자긍심이나 업무의 보람, 혹은 식물을 기르는 즐거움의 표현에 가까웠다.

지금은 다르다. 출정을 앞둔 전사의 미소. 그러고 보니 리지는 선덜랜드 지역 토박이, 뉴캐슬에 대한 적개심은 나 못지않을 사람이다.

“허락만 해 주시면 아예 그라운드 한 개쯤은 가상 세인트 제임스 파크로 고정하고 싶은데요.”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미리미리 대비해야죠. 가뜩이나 원정 대우 더럽기로 유명한 팀인데.”

“최대한 빨리 준비할게요.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는데요.”

리지가 머뭇거리기 시작했다.

“뭐죠?”

“그 팀 그라운드를 재현하려면 들어가 봐야 하는데요. 스타디움 투어를 신청해야 할 것 같은데···.”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우리 직원의 피 같은 돈이 ‘그 팀’ 재정에 들어가는 건 싫으니까요.”

그러자 잠시 망설이던 리지가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우리 팀 경비가 ‘그 팀’ 재정에 들어가는 것보단 낫죠. 저 월급 많이 받아요.”

“아뇨, 내 사비로 처리할 겁니다.”

그래도 차마 내 손으로 카드를 긁자니 생리적 거부감이 들어서, 결제는 희주에게 시키기로 했다.

***

희주의 반응은 떨떠름했다.

“너무 성급한 거 아니야? 당분간 만날 일도 없는 팀인데.”

하긴, 그렇긴 하다.

뉴캐슬은 1부, 우리는 3부에 있다. 걔들이 강등이라도 당해주면 내년에 챔피언십에서 만나겠지만, 아쉽게도 뉴캐슬의 강등 가능성은 희박하다.

따라서 리그에서 만나려면 최소 2년을 기다려야 한다.

그 전에 컵 대회에서 만날 가능성이 있긴 하지만, 높은 확률은 아니었다.

리즈를 이기고 올라갔던 EFL컵 5라운드에서, 우리는 토트넘을 만나 탈락했다.

올 시즌에 남은 기회는 FA컵인데, 여기서 만날 가능성이 존재하긴 한다. 우리도 뉴캐슬도 둘 다 4라운드 진출했으니.

다만 확률로 보면 1/32에 불과하다. 아니, 32강에는 우리도 들어 있으니까 1/31이어야 맞는 걸까?

어느 쪽이든 3% 정도, 큰 차이는 아니겠지.

“뭐, 신청하라면 하겠지만··· 어차피 별로 비싸지도 않고.”

입으로는 투덜거리면서도, 희주의 손은 착실히 뉴캐슬 홈페이지에서 스타디움 투어 신청 넣고 있다.

“그런데 왜 두 자리 신청하냐?”

희주가 웃었다.

“나도 가려고. 적진에 리지 씨만 보내긴 미안하잖아.”

아, 그건 그렇네.

덕분에 스타디움 투어 인원이 부쩍 늘었다. 네 명으로.

멤버는 희주와 리지, 그리고 조엘에 에이미가 추가되었다. 전적으로 희주가 미덥지 못한 탓이다.

“그 마굴···.”

한숨을 내쉬는 조엘을 부드럽게 달랬다.

“이해합니다. 나는 안 가면서 직원들만 보낸다고 원망해도 좋습니다. 하지만 조엘, 그 팀 시설이 우리 팀보다 좋다는 소문이 있던데··· 그냥 넘기기 어렵군요.”

“알겠습니다. 그 정도는 참을 수 있죠. 저도 프로니까요.”

그리고는 조엘은 혼자 뭐라 뭐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들어보니 기도 같다.

“주여, 제가 오늘 지옥에 걸어 들어가나이다. 지옥불에 바짝 튀겨 마땅할 마귀 놈들의 소굴에서 저를 보호하시고···.”

반면, 에이미의 표정은 밝았다.

“저는 좋아요. 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그 팀’ 에 눈빛만 보고도 고객의 마음을 아는 CS 직원이 있다더라고요. 진짜면 좀 배우고 올까 하는데요.”

“에이, 에이미 씨. 무슨 만화도 아니고, 세상에 그런 게 어딨겠어요.”

희주가 깔깔거리기 시작했고, 이어서 조엘과 리지도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역시 CS팀의 에이스, 적당한 농담으로 분위기를 푸는 솜씨는 정말 훌륭하다.

다만 나는 웃어넘길 기분이 아니었다. 세상에는 이마빡을 보면 사람의 가치가 보이는 투자자가 있거든.

쓴웃음을 짓는 나를 향해, 에이미가 슬쩍 눈웃음을 보냈다. 시선이 마주치자 그녀의 눈동자가 슬쩍 옆으로 굴렀다.

희주 쪽이다.

맞는데, 어디까지나 미덥지 못해서 그런 거다. 걱정하는 게 아니라고!

“근데 오빠는 안 가?”

“나는 못 가지. 투어가 아니라 정찰이니까.”

얼마 전까지는 아무 상관이 없었을 것이다. 투자의 신 소리를 들을 만큼 유명해지긴 했어도, 딱히 얼굴 드러내놓고 활동하진 않았으니까.

그러니 사람들은 내 이름은 알아도, 얼굴은 절대 알아보지 못했었다.

그런데 이제는 상황이 좀 바뀌었다.

올 시즌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에서만 두 번이나 그라운드에 올랐고, 팀 홍보 방송에도 직접 출연했다. 즉, 요즘은 나도 제법 얼굴이 팔렸다는 뜻이다.

그런 내가 동행하는 순간, 뉴캐슬에 대놓고 선포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지금 선덜랜드에서 정찰하러 왔다고.

희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변장하면 간단한 거 아닌가?”

어, 그러네.

***

“굳이 변장 안 하고 오셔도 괜찮습니다. 선덜랜드의 썬 리 구단주님. 저희는 프로니까요.”

투어 시작부터 입구에서 딱 들켰다. 아무래도 눈빛만 봐도 고객의 마음을 안다는 그 CS팀원에게 딱 걸린 모양이다.

하긴, 유능해 보이긴 한다. 이마의 숫자는 무려 9, 우리 CS팀 에이스 에이미와 대등한 가치를 지녔으니까.

뉴캐슬의 투어 담당, 제니퍼가 상냥한 영업용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리고 3부리그 구단이 상위 구단을 모니터링하는 행동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고, 모범적인 구단 운영 방침이라고 생각합니다.”

몸값이 비싸서 그런지 사람 먹이는 법도 잘 아네. 뭐, 정찰 나온 더비 라이벌팀 스태프 상대로 이 정도 대응이면 애교나 마찬가지다.

제니퍼의 안내로, 스타디움 투어가 시작되었다.

“세인트 제임스 파크를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입구에 보이시는 매장이 뉴캐슬의 오피셜 스토어입니다. 이웃의 모 구단 매점과는 열다섯 배 정도 차이가 나죠.”

“우리도 새로 짓는 중이야.”

조엘이 으르렁거렸지만, 제니퍼는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옆에 보이는 펍은 뉴캐슬어폰타인 최대의 펍, ‘나인’ 입니다. 물론 저희는 블랙캣츠와 달리 맛있는 칵테일만 취급합니다.”

희주가 속삭였다.

“아무리 봐도 쟤들은 이미 우리 정찰 끝낸 것 같은데?”

그리고 정찰했다는 사실을 친절하게 알려주는 중이고. 칵테일의 맛을 운운하는 걸 보면, 브라이언이 바를 맡고 있을 무렵에도 다녀갔다는 뜻이다.

“이곳은 세인트 제임스 파크가 자랑하는 드레싱룸입니다. 영국에서 가장 호화로운 드레싱룸이죠.”

마사지룸에 스파까지 딸려 있다. 뉴캐슬이라면 이를 가는 조엘조차 한숨을 내쉴 만큼.

“이 설비는··· 인상적이군요.”

이번 시즌 끝나면 우리도 드레싱룸 싹 뜯어야겠다고 생각하는 사이, 희주가 번쩍 손을 들었다.

“가이드님. 그런데 원정팀 드레싱룸은 언제 보여 주시나요?”

제니퍼가 웃었다.

“조금 전에 보셨잖아요? 홈팀 드레싱룸 직전에요.”

잠깐, 콘크리트에 못 열댓개쯤 박아놓은 거기? 거기가 원정팀 드레싱룸이라고?

원정팀 드레싱룸이 거지같은 거야 축구계의 상식이라지만, 여긴 정도가 심하다.

나중에 뉴캐슬용 드레싱룸을 따로 만들던가 해야지.

그렇게 다양한 설비를 둘러본 다음, 우리는 마침내 그라운드로 향했다.

이제부터는 리지의 시간이다.

물론 리지 정도면 알아서 잘 하겠지만, 그래도 노골적으로 잔디를 정찰하는 티를 내서 좋을 건 없다. 주의를 끌기 위해 슬쩍 가이드에게 말을 걸었다.

“사이드마다 관중석 높이가 다른 것 같은데요. 의도적인 설계입니까?”

“여러 차례 증축했으니까요. 인근 주민들의 일조권을 침해하지 않도록, 두 스탠드만 높였습니다. 가장 높은 구역의 이름은 레벨 7, 천국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죠.”

“죽기 좋은 곳이란 소리겠지.”

조엘의 으르렁거림은 이번에도 무시당했다.

“원정팀 서포터석은 어딥니까?”

“보통 티켓 배정에 따라 약간의 변동이 있지만, 존 홀 스탠드의 3층을 씁니다. 원정팀 티켓은 보통 삼천 석 정도 제공되는 편이고요.”

나는 무심코 입술을 깨물고 말았다.

원정석과 그라운드를 아예 갈라놓고, 오만 명의 홈팀 서포터들 사이에 내던지겠다는 뜻이니까.

괜히 이곳이 원정팀의 지옥으로 불리는 게 아니라는 걸, 새삼 실감했다.

잠시 후 리지가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안내 감사합니다.”

“오히려 저희가 감사합니다. 이렇게 방문해 주셔서요. 세인트 제임스 파크는 타인 위어, 아니 노스이스트 잉글랜드 전체에서도 최고의 시설만을 갖춘 경기장임을 자부하고 있습니다.”

‘지금’ 은 최고겠지. 물론, 말로 꺼내기엔 촌스러운 이야기지만.

“세인트 제임스 파크를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선덜랜드 여러분, 정식으로 다시 찾아와 주실 날을 뉴캐슬의 모두와 함께 손꼽아 기다리겠습니다.”

정중하고 공손한 인사였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희주가 무심코 말을 건넸다.

“가이드님은 선덜랜드 별로 안 싫어하시나봐요?”

그러자 제니퍼의 얼굴에 화사한 영업용 미소가 피어났다.

“물론 끔찍하게 싫죠.”

“그런 것 치고는 정말 정중하게 응대하시던데···.”

“프로니까요.”

“그게, 그게 아니라···.”

희주는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지만, 녀석이 뭘 궁금해 하는지는 알 것 같다. 남매니까 표정이 닮았다는 이론에 따르면 말이지.

“일반적인 스타디움 투어에서는 언급하지 않을 부분까지 말해주셨죠. 그건 혹시 단순한 스포츠맨십, 페어플레이 정신이었습니까?”

“아뇨. 그저 더비 라이벌은··· 우리 손으로 밟아놓고 싶은 게 당연하잖아요?”

제니퍼의 단정한 얼굴에 화사한 미소가 피어났다.

“프리미어리그에 돌아오세요. 다시 한 번 타인 위어 전체를 검게, 붉게 물들여야 하니까요. 누가 진정한 노스이스트의 주인인지 가려야죠.”

그때, 우리는 당장 두 팀이 마주치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리그 등급은 두 단계나 차이나고, EFL컵에선 두 팀 모두 사이좋게 탈락했으며, 유일하게 서로 살아남은 FA컵 4라운드에서 만날 확률은 고작 3%니까.

그러니 제니퍼의 발언은 어디까지나 몰락한 더비 라이벌에 대한 예우였으며, 우리로서도 2년 뒤를 기약하자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라이벌은 어떻게든 만나기에 라이벌인 모양이다.

FA컵 4라운드 추첨 결과, 우리는 뉴캐슬을 상대하게 되었다.

경기 장소는 세인트 제임스 파크로 정해졌다.

***

FA컵 추첨 결과를 확인한 샐리가 한숨을 쉬었다.

“뉴캐슬 투어 다녀오신 분들을···.”

“원망하고 싶어졌습니까? 부정 탔다고요.”

그러자 샐리가 빠르게 덧붙였다.

“저는 전력분석관이고, 제가 믿는 건 데이터 뿐이죠. 미신 같은 건 조금도 믿지 않아요. 어디까지나 다녀오신 분들을 칭찬해드리려는 거였는데요. 선견지명이 있었다고요.”

브라이언이 데퉁거렸다.

“이봐, 내가 따라갔으면 어쩌려고 그런 소릴 해?”

“그랬으면 미신을 믿게 되겠죠?”

빙긋 웃어보인 샐리가, 이번에는 보란 듯 한숨을 내쉬었다.

“경기까지는 딱 18일 남았군요. 1부 리그 중위권 팀을 상대할 준비를 하기엔 시간이 너무 부족해요. 이번에는 마음 비우시죠.”

브라이언이 고개를 저었다.

“아직 몰라. FA컵 경기는 목요일이니까.”

“앞뒤로 경기 있어서 힘들 거라고요?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인데요.”

“아냐. 다르지. 우리는 높은 확률로 1위 확정이거든. 혹시 리그 원 우승 트로피를 포기해도 된다면 더 쉽지. 앞뒤 두 경기 다 로테이션 돌리면 그만이니까.”

하긴, 2위까지는 플레이오프 없이 곧바로 승격이다. 3부리그 우승 트로피를 탐내지 않는다면, 2위도 썩 나쁘지 않다.

애초에 2패한다고 2위로 굴러떨어지지도 않을 성적이지만.

브라이언이 곧바로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브로, 리그 원 우승 트로피와 더비전의 승리. 둘 중 하나만 골라야 한다면?”

“무슨 말 같지도 않은 걸 묻고 있어. 당연히 더비에서 이겨야지.”

세상에는 질 수 없는 경기라는 게 존재하고, 더비 라이벌전은 당연히 그 목록에 들어간다.

샐리가 쓴웃음을 지었다.

“두 분은 아무래도 제대로 싸울 생각 만반이신 모양이네요. 저 같으면 그냥 버리고 리그에 집중할텐데요.”

“브라이언도, 그리고 나도 로저스 감독님께 축구를 배웠거든요. 그리고 아시다시피 우리 감독님은 포기하지 않는 축구를 하죠.”

우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샐리가, 툭 던지듯 말했다.

“그렇다면 유스 출신들이 열쇠가 되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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