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타인위어 더비 (1)
<나와 아스날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이 많은데, 나는 아스날을 사랑한다. 프리미어리그에서 20번째로. - 로이 킨>
유스 출신이라면 당연히 잭과 요니를 뜻한다. 단 한 시즌만에 팀의 중심으로 자리 잡은 무서운 신예.
기량도 훌륭하고, 멘탈도 좋다. 게다가 둘 다 아직 젊어서 그런지 기동성이 아주 빼어나다. 우리가 하는 두 줄 수비와 역습 축구에서 가장 핵심적인 인재들이다.
공을 따내고 전달하는 역할은 톰슨과 페르난데스의 일이지만, 결국 역습을 위해서는 누군가 전방으로 달려 나가야 하기에.
“하긴, 잭과 요니는 팀의 핵심이죠.”
그러자 샐리가 날 물끄러미 바라보기 시작했다. 자세히 보니 입꼬리도 조금 올라갔다. 재미있다는 듯한 미소다.
어, 혹시 그 두 명이 아닌가? 유스 출신이 또 남아 있었나? 그럴 리 없을 텐데?
몇 년 사이 구단의 상황은 최악으로 치달았고, 쓸만한 유망주는 모조리 빼앗겼다. 잭과 요니만한 선수가 둘이나 남아 있는 것이 오히려 기적일 정도로.
샐리에게서, 맑은 웃음소리가 났다.
“두 명 더 있잖아요? 지금 여기에요. 뉴캐슬을 씹어먹지 못해 안달 난 선덜랜드 유스 출신 두 분.”
“아, 그러네요.”
“충성심 높고, 라이벌을 미워하는 유스 출신이야말로 더비 매치의 핵심이죠. 그런 의미에서··· 구단주님 아이디어부터 들어볼까요? 어떤 축구를 보고 싶으세요?”
뉴캐슬 상대로 어떤 축구를 보고 싶은지는 이미 정해져 있다. 90분 내내 두들겨 패다가 17대 0으로 이기는 축구. 기왕이면 한 골 정도는 골키퍼가 넣으면 좋겠고.
··· 뭐, 지금은 현실적인 이야기를 해야겠지.
“이번엔 평소보다 라인 올리고 조금 공격적으로 나갔으면 합니다.”
“이유를 들어볼까요?”
“사실, 프리미어리그의 다른 중위권 팀. 아니, 하위권 팀을 만났어도 이런 말 꺼내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이번은 더비 매치니까요.”
잠시 샐리와 브라이언을 번갈아 바라본 다음,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뉴캐슬이 우리보다 한 수 위라고 인정하는 그런 축구를 보고 싶진 않습니다.”
그러자 샐리가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흥미롭군요. 실은 저도 이번에는 라인을 조금 올렸으면 했어요. 아무래도 뉴캐슬산 전봇대가 신경이 쓰여서요.”
“전봇대? ··· 아, 캐롤 말이군요.”
캐롤, 한때 시어러의 재림 소리를 들었던 뉴캐슬의 간판 공격수로, 전형적인 타겟 스트라이커에 해당하는 선수다.
빅클럽에 비싸게 팔려나갔다가 처참한 실패를 겪으며 비싼 전봇대라는 비아냥도 들었다. 이후 여기저기를 전전하다 지금은 다시 친정 뉴캐슬에 돌아왔다.
이제 나이도 있고 기량도 떨어졌다는 평가를 받지만, 그래도 높이 하나는 여전히 위협적이다.
압도적인 헤딩 머신, 지금의 선덜랜드에겐 천적이다.
샐리가 쓴웃음을 지었다.
“골대 앞 버스 주차를 상대하는 방법론 중 가장 쉬운 건, 역시 타겟 스트라이커를 쓰는 거죠. 그런데 마침 공교롭게도, 우리의 넘버 원은 제공권에 약점이 있어요.”
“페르난데스는 골키퍼치고는 단신이니까요.”
“키가 더 큰 하퍼를 출전시키는 방법도 생각해 봤는데, 강팀과의 원정에서 내보내기엔 아직 불안해요. 그러니 라인을 평소보다 올려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샐리의 생각을 듣고, 브라이언도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은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원정 경기고, 상대는 더비 라이벌이야. 뉴캐슬 팬 오만 명의 함성 속에서 침착하게 수비하긴 쉽지 않아.”
하긴, 우리 선수들은 기본적으로 챔피언십이나 리그 원에서만 뛰었고, 지금까지 기껏해야 이만 석 전후 경기장을 쓰는 팀들만 상대했었다.
페르난데스나 톰슨을 제외하면, 오만석 규모의 원정 경기장을 경험해본 선수는 없다. 그러니 차라리 몰아치는 축구가 나을 것이다. 승산을 떠나, 일단 정신적으로는 훨씬 편하니까.
맞불을 놓을 정도까진 아니더라도, 적어도 리즈를 상대할 때처럼 바짝 내려앉진 말자고 결정했다.
“팀의 큰 흐름은 정해졌군요. 그럼 디테일에 대해서는···.
무섭게 눈을 빛내기 시작하는 샐리를 향해, 브라이언이 쓴웃음을 지었다.
“시간이 부족하다고 말하던 사람치고는 꽤 많이 준비했는데?”
“그야, 선덜랜드에서 월급 받아먹으려면 언제든지 뉴캐슬 상대할 준비는 되어 있어야죠?”
어느새 디테일한 전술 토론을 벌일 태세에 들어간 브라이언과 샐리를 바라보며, 나는 미소를 지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적어도 전술과 경기 준비에서 뉴캐슬에 밀리진 않을 테니까.
그게 프로 전술가, 브라이언과 샐리의 일이다.
그리고 현장에서는 언제나처럼 로저스 감독이 선수들을 잘 지휘해 줄 테고.
따라서 내 일은, 경기 외적인 준비에서 밀리지 않도록, 모든 지원을 다 하는 것이다.
타인위어 더비. 그날의 그라운드로 향하는 길을 최대한 붉게 물들일 수 있도록.
***
“팀장님, FA컵 말인데요. 직관하실 거죠?”
마일즈 우드는 잠시 수잔 베일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자네도 가려고? ··· 우스운 질문을 했군. 그러니 반차를 내는 게지.”
대답하면서도, 마일즈의 마음은 썩 편치 않았다.
수잔은 올해 처음으로 축구를 보기 시작한, 일종의 초보 축구 팬이다. 요즘 들어 꼬박 경기장에 다니고는 있지만, 아직 원정 경기에 따라간 적은 없다.
수잔은 아직 모른다. 더비 매치가 얼마나 치열하고 뜨거운지, 그리고 오늘의 축구장이, 원정 팬에게 얼마나 가혹한 곳인지를.
‘양팀 팬들 사이에서 몸싸움이 벌어질 가능성까지 생각하면··· 아니, 그건 너무 나갔나.’
그래도 대비해서 나쁜 건 없다. 마일즈는 겉으로는 최대한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럼 같이 가지. 마침 세인트 제임스 파크 잘 아는 친구 놈도 한 명 있거든. 이따가 내 차로···.”
수잔이 웃었다.
“팀장님. 버스 있는데요.”
“버스?”
어리둥절한 마일즈를 향해, 수잔이 기사를 내밀었다.
[FC 선덜랜드, 뉴캐슬 원정 경기를 직관하는 팬들을 위해 버스 백 대 준비해.]
[선덜랜드 시즌권 보유자, 멤버십 회원, 혹은 이번 FA컵 4라운드 뉴캐슬전 티켓 보유자는 누구나 무료로 버스를 이용할 수 있다. 버스는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 동문 주차장 앞에서 출발하며···.]
[타인위어 더비 당일, 시티 오브 선덜랜드의 모든 펍에서는, 선덜랜드 레플리카를 입은 고객에게 맥주 한 잔을 무료로 제공할 계획이다.]
기사 내용을 확인한 마일즈가 피식 웃었다.
“세게 부르네. 한 잔씩만 마셔도 돈이 얼만데.”
“아마 구단주 사비겠죠? 구단 재정으로는 감당 안 될 것 같은데요.”
“그렇겠지.”
더비 라이벌 상대로, 기세에서 절대 눌리지 않겠다는 강경한 의지 표명이다.
‘이건 고맙군.’
세인트 제임스 파크는 결코 원정 팬에게 상냥한 장소가 아니고, 특히 선덜랜드 팬들에게는 무척이나 가혹한 경기장이다.
Howay the Lads. Howay the Lads. Howay the Lads. Howay!
경기 시작 전부터 뉴캐슬의 챈트가 귀를 찢을 것처럼 울리는 북동부에서 가장 뜨거운 적진. 선덜랜드 팬 혼자서 들어가기엔 꽤 용기가 필요한 장소다.
그렇지만 오늘은 조금도 무섭지 않았다.
선덜랜드 팬으로 가득한 버스에 올라, 온 사방에 가득한 붉은 버스들을 바라보며, 마일즈는 그렇게 생각했다.
***
세인트 제임스 파크, 원정팀 드레싱룸.
Toon! Toon! Black and White Army!
드레싱룸에 새어드는 뉴캐슬 챈트에, 로저스 감독이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더럽게 시끄럽군. 이 놈들은 방음 공사도 안 하나.”
방음 문제라기보다는 오만 명 뉴캐슬 팬들의 미친듯한 함성이 그만큼 거세기 때문이겠지만, 로저스 감독은 일부러 설비를 탓했다.
원정 드레싱룸의 조악한 시설을 비웃을 겸, 그리고 선수들의 긴장을 풀어줄 목적이었다.
그의 의도와 달리, 선덜랜드 선수들의 표정은 그다지 밝지 않았다. 빅클럽에서 뛰어 본 페르난데스나 톰슨 같은 선수들은 태연했지만, 나머지는 딱딱하게 굳어졌다.
더비전의 긴장 때문일 것이다.
선수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로저스 감독이 불쑥 물었다.
“오만 명 관중이 그렇게들 무서운가?”
로저스 감독의 눈짓에 따라, 곧바로 브라이언이 빔 프로젝터를 틀었다.
잠시 후 벽면에 익숙한 풍경이 비쳤다. 시티 오브 선덜랜드의 축구 펍, 그 안에 가득한 붉은 유니폼들이.
화면이 점차 분할되기 시작했다. 두 곳, 네 곳, 여덟 곳··· 어느새 화면은 모자이크처럼 빽빽하게, 수십 군데의 펍을 띄웠다.
We are Sunderland. Say we are Sunderland.
그 안에서, 선덜랜드 선수들은 낯익은 얼굴을 찾아냈다. 언제나 홈 경기장을 찾던 팬들의 모습을.
잠시 후 화면이 바뀌었다.
선덜랜드 레플리카를 입고, 응원 도구를 챙긴 채 진짜 적지인 세인트 제임스 파크의 관중석으로 향하는 팬들의 모습으로.
“그래, 이곳은 분명 적지다. 세상에서 선덜랜드에 가장 적대적인 장소지. 하지만 이 적지에서, 너희가 상대하는 건 고작 열한 명의 뉴캐슬 선수들 아닌가?”
“팬들은 다르다. 이 적진에 던져질 사람들, 오만 명 사이에서 싸울 이들은 너희가 아니라, 너희를 따라온 삼천 명의 서포터들이다.”
“그 팬들이 너희를 보고 있다. 시티 오브 선덜랜드의 모두가 너희를 보고 있다. 그런데도 무섭나?”
천천히 고개를 흔드는 선수들을 바라보며, 로저스 감독이 나직히 일갈했다.
“겁먹지 마라. 물러서지 마라. 끝까지 싸우고 와라. 너희 가슴에 달린 엠블럼을 위해서, 시티 오브 선덜랜드의 모두를 위해서, 언제나처럼 선덜랜드의 축구를 하고 와라!”
***
경기는 시작부터 뜨거웠다.
모두의 예상과 달리 선덜랜드는 초반부터 적극적인 공세에 나섰다.
톰슨이 중원을 장악하고, 잭과 요니는 평소보다 높은 위치에서 좌우 측면을 수시로 위협했다.
애초에 리그 원의 생태계 교란종이라 불리던 3부 리그 최대의 빅클럽, 선덜랜드의 공세는 매서웠다.
허를 찔린 뉴캐슬은 초반의 주도권을 뺏긴 채 움츠러들었고, 삼천 명 선덜랜드 서포터는 그야말로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Sunderland 'til I die. I'm Sunderland 'til I die.
하지만 뉴캐슬의 당황은 그리 길지 않았다. 지금의 뉴캐슬은 선덜랜드보다 훨씬 거대한 클럽이고, 선수단의 질 역시 훨씬 훌륭하기에.
혼란을 수습한 뉴캐슬이 맞불을 놓으면서, 경기는 급격히 뜨거워졌다.
We are the Geordies. The Geordie Boot Boys.
오만 명 뉴캐슬 팬들의 목소리가, 삼천 명 선덜랜드 팬들의 함성을 지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목소리에 비례해, 경기의 기세 또한 뉴캐슬 쪽으로 조금씩 기울었다.
전반 28분, 마침내 뉴캐슬이 선제골을 넣었다. 세트피스 상황에서의 실점, 선덜랜드의 코치진이 가장 경계하던 캐롤의 헤더였다.
[선덜랜드 0 - 1 뉴캐슬]
단숨에 뉴캐슬 팬들이 끓어올랐다.
“질질 짜는 꼴 잘 봤다! 다큐멘터리 화질 끝내주더라!”
“오늘은 안 우냐!? 방송국 불러 줘?”
잠시 후, 뉴캐슬 팬들의 함성이 합창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선덜랜드 팬들에게는 이미 악명 높은 조롱으로.
You get a free season ticket in a happy meal.
Sunderland's a massive club.
***
‘시끄러워 죽겠네.’
킥오프를 준비하면서, 잭은 생각했다.
미쳐 날뛰기 시작한 뉴캐슬 팬들의 목소리 사이에서, 선덜랜드의 응원이 무척이나 희미하게 들렸다.
그라운드에 닿지도 못하는 3층 스탠드 구석에 갇혀, 애처롭게 흔들리는 붉은 응원단의 모습을 바라볼 때마다, 피가 끓어서 견딜 수 없었다.
잭은 내뱉듯이 말했다.
“저, 이따 치즈 한 장 먹어도 되겠슴까? 좀 닥치게 하고 싶슴다.”
잠시 잭을 응시하던 톰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해버려. 주장한텐 내가 말해둘게. 근데, 자신은 있고?”
“죽기살기로 해보겠슴다.”
***
“빈 좌석이 이만 칠천 개나 있었다고!? 선덜랜드 진짜 빅클럽이네!”
아무리 핏대를 세워 목소리를 높여도, 오만 명의 함성을 이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귀를 찢을 듯한 뉴캐슬의 함성, 온 사방에서 쏟아지는 적대적인 목소리.
“홈에서 우리 잡는 데 28년 걸렸지? 우와! 선덜랜드 참 빅클럽이야!”
나는 비교적 태연했지만, 희주는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하긴, 울고 싶어 해도 이상하진 않다. 선제골 얻어맞았지. 상대팀 팬들은 미쳐 날뛰지. 덕분에 응원은커녕, 대화조차 나누기 힘든 상황에 갇혔으니까.
심지어 챈트마저 악질이다. 선덜랜드에 대한 조롱으로 가득한.
“오빠, 괜찮아? 화나지 않아?”
나는 괜찮다. 프로 구단의 관계자라면 마땅히 감수해야 할 일이니까.
그저 저 너머, 3층 스탠드에 갇힌 우리 팬들이 안타까울 뿐이다.
쏟아지는 조롱 사이에서 응원을 멈추지 않는 삼천 명의 팬들. 그 가느다란 목소리가.
Sunderland 'til I die. I'm Sunderland 'til I die.
그때, 요니의 패스가 크리그에게 날카롭게 전해졌다. 크리그가 곧바로 발리 슛을 날렸다.
“제발!”
새된 소리와 함께 희주가 손을 모았고,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크리그의 슛은 크로스바를 때렸다. 삼천 명 선덜랜드 팬들의 환호가 탄식으로 바뀌었다.
“으아! 아까워!”
아깝긴 하다. 어찌나 잘 맞았는지 크로스바에 맞은 공이 그대로 아크서클 앞까지 날아갈 정도의 강슛이었으니까.
그때, 흘러나온 나온 공 앞에 붉은 유니폼이 나타났다. 번호는 18번, 잭이다.
트래핑할 생각도 없어 보였다. 마치 부모의 원수, 혹은 더비 라이벌의 얼굴이라도 걷어차는 듯한 킥, 온 체중을 싣고, 달려온 기세까지 더한 통렬한 중거리 슛.
입술이, 주먹이, 몸이 멋대로 움직였다.
푸른 그라운드 위를 선명하게 가로지르는 하얀 선. 흔들리는 뉴캐슬의 골 네트. 득점을 알리는 심판의 휘슬. 스탠드를 향해 달려오기 시작한 선덜랜드의 18번.
[선덜랜드 1 - 1 뉴캐슬]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나 포효하고 있었다. 두 주먹을 꾹 움켜쥔 채.
문득, 잭과 눈이 마주쳤다고 느꼈다.
잠시 후, 선덜랜드의 로컬 보이가 유니폼을 벗었다. 그리고 등번호가 보이게 내밀었다.
[No. 18. 맥그리거]
축구의 신이 산티아고 베르나베우를 침묵시킨 날 했던, 그리고 신의 라이벌이 캄 노우에서 되갚아준 바로 그 유니폼 세레머니.
순간, 나는 세인트 제임스 파크가 무척이나 고요하다고 느꼈다. 잭의 플레이에 침묵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통제를 벗어나 미친듯이 뛰기 시작한 심장 소리에 묻혀버린 걸까.
뉴캐슬 팬들의 응원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