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타인위어 더비 (2)
물론 대가가 따랐다. 상의 탈의 세레머니는 경고 대상이고, 잭은 얄짤없이 옐로 카드를 받았다.
그래도 심판은 분위기를 파악해, 세레머니할 시간 자체는 충분히 줬다.
덕분에 잭은 최대 라이벌에게 유니폼 세레머니를 먹여주는 쾌감을 만끽했고, 우리는 충성스러운 로컬 보이가 더비 라이벌을 침묵시키는 모습을 즐겼다.
젠장. 당분간 제로 콜라 안 마셔도 되겠다. 탄산이 과해서.
옆에서 희주가 혀를 내둘렀다.
“쟤는 진짜··· 스타 기질이 있나 봐.”
“천성이겠지.”
세상에는 감정을, 열정이라는 이름의 힘으로 바꿀 수 있는 선수들이 존재한다.
사랑하는 팬들이 적진에서 고립되어 애처롭게 흔들리는 모습에 피가 끓고, 팀을 조롱하는 챈트에 분노하는 그런 감정.
더비 매치에서 유스 출신이 강한 이유다. 그리고 그들의 열정적인 플레이는, 팀과 경기장 전체로 전염되기 마련이니까.
동시에 희미한 불안감이 들었다.
더비 매치는 가뜩이나 끓어오르기 쉬운 경기다. 그리고 누구보다 열정적인 잭은, 동시에 어느 누구보다 감정적인 선수라는 뜻이 된다.
옐로카드를 받은 선수는, 바로 잭이다.
***
발아래에서 바스락거리는 잔디의 느낌마저 아주 친숙하다. 잭은 그렇게 생각했다.
문득 선덜랜드의 잔디 관리인, 리지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길이와 습도까지는 똑같이 맞춰주지 못할 거에요. 경기 전날 바꾸면 그만이니까요.]
그래도, 그 이외의 요소는 최대한 비슷하게 맞춰주겠다며 웃던 잔디 관리인은, 자신의 말을 충실히 지켰다.
비슷한 정도가 아니다. 거의 똑같다. 잭은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
‘팀이 달라졌어.’
올 시즌 전까지만 해도 선덜랜드의 상태는 최악이었다. 중요한 경기마다 이기지 못했고, 구단의 지원도 기대하기 어려웠다.
유스 시절을 함께 보낸 동료 중, 조금이라도 재능이 있는 유망주는 모조리 다른 팀으로 떠나갔다.
[야, 솔직히 계속 남아 있으면 머저리 아니냐?]
이젠 상황이 바뀌었다. 아직 3부리그에 머무르고 있지만, 지금의 선덜랜드는 어느 구단보다 유망하다.
‘이제 누가 머저리지?’
부유한 구단주와 열성적인 스태프를 가졌고, 팀을 사랑하는 팬들이 있다.
We are Sunderland. Say we are Sunderland.
여전히 그라운드를 가득 메운 소음 사이로, 선더랜드 팬들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린다.
‘왜, 더 짖지?’
유니폼 세레머니 덕분에 조금쯤은 조용해진 걸까? 눈에 띄게 기세가 꺾인 뉴캐슬 팬들을 흘끗 올려다보며, 잭은 어금니에 힘을 주었다.
‘계속 짖어 봐. 너희가 조롱한 바로 그 팀에게 홈에서 지는 얼간이로 만들어줄 테니까. 짖으라고.’
오늘은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것 같다. 잭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 생각이 바로 실수를 부른다는 걸, 그때의 잭은 몰랐다.
***
선덜랜드 쪽으로 기울었던 분위기가 흔들린 건, 경기 후반, 56분째의 일이었다.
우리의 오른쪽 측면을 파고든 뉴캐슬 윙어가 날카로운 크로스를 올렸다.
그 궤적 끝에 보이는 뉴캐슬의 7번, 캐롤의 모습을 본 순간, 나는 무심코 자리에서 일어나고 말았다.
이건, 위험하다.
공중볼 경합에 일가견이 있는 190센티의 거한. 그에 맞서는 페르난데스는 182센티의 단신 골키퍼다. 결국 페르난데스는 공을 쳐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흘러나온 공은, 하필이면 뉴캐슬 선수 쪽으로 굴렀다.
“막아!”
자세가 무너진 채 필사적으로 외치는 페르난데스. 골대까지 완전히 열려버린 코스. 단두대처럼 내려치는 뉴캐슬 공격수의 발···.
주마등처럼 흘러가는 장면. 그사이에 끼어드는 붉은 유니폼의 18번.
과감한, 그리고 조금 깊은 슬라이딩 태클이 공을 걷어냈다. 희주가 옆에서 깡총깡총 뛰기 시작했다.
“꺄악! 막았어! 막았다고!”
하지만 나는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심판이 달려오고 있었기 때문에.
‘제발.’
심판이 천천히 옐로 카드를 들어 보였다. 두 번째 치즈. 이윽고 심판이 다시 붉은 카드를 고쳐 꺼냈다.
잭의 퇴장이다. 빌어먹을!
“편파 아니야!? 매수, 심판 매수 아니냐고!”
희주의 난동을 시작으로, 경기장이 단숨에 다시 들끓기 시작했다. 눈엣가시같던 로컬 보이를 몰아낸 뉴캐슬 팬들의 환호와, 선덜랜드 팬들의 탄식으로.
“짜증나! 우리도 매수하자, 응? 아니다. 그냥 내 용돈으로 살게! 얼마면 돼!?”
빌어먹을.
***
사이드라인을 넘어 천천히 물러나면서, 잭은 관중석을 올려다보았다.
또다시 미쳐 날뛰기 시작한 오만 명의 홈 팬들과, 그 사이에서 또다시 애처롭게 고립된 원정 서포터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삼천 명의 원정 팬들이 모두 자신을 원망 섞인 시선으로 노려보는 것 같아서, 잭은 힘없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두 번 다시 울리지 않겠다고 했는데.’
풀죽은 잭의 귓가에 목소리가 들렸다.
오만 명 홈 팬들의 환호 사이에서, 가늘지만 힘있게 울려 퍼지는 선덜랜드 팬들의 목소리가.
We're Black Cats supporters.
Loyal through and through.
Over and over, We will follow you.
다음 가사를 잭은 이미 알고 있었다.
Stand up if you hate Newcastle.
마치 그를 배웅이라도 하듯, 하나둘씩 일어나는 선덜랜드 팬들의 모습이 자꾸만 눈에 밟혀서, 잭은 눈을 감았다.
문득, 울음소리가 들린다고 생각했다. 울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들릴 리 없는 소리인데. 삼천 명 선덜랜드 팬들 중, 눈물을 보이는 이는 아무도 없는데.
‘내가 우는 거구나.’
잭은 천천히 얼굴을 가린 채 걸었다.
그런 잭의 등 뒤에서, 뉴캐슬의 키커가 프리킥을 꽂아 넣었다.
[선덜랜드 1 - 2 뉴캐슬]
***
퇴장, 그리고 추가 골까지 얻어맞은 선덜랜드 벤치의 반응은 기민했다.
“이제부터 쓰리백이다. 톰슨이 센터백으로 내려갈 거다. 풀백 둘은 전부 전진할 거고. 무슨 소린지 알겠나?”
잭이 퇴장당한 상태에서 톰슨까지 아래로 내려간다면, 선덜랜드의 중원은 그 시점에서 텅 비게 된다.
그걸 굳이 요니 자신을 불러 말하는 이유는 명확했다.
‘나 혼자 중원을 지키라는 소리구나.’
선덜랜드는 이제 로컬 보이를 잃었다. 충직한 사냥개, 경기장 전체를 누비던 믿음직한 미드필더를 잃었다. 어린 시절부터 요니와 줄곧 함께해온 친구가, 얼굴을 감싼 채 울면서 경기장을 떠났다.
점수는 한 점 뒤졌고, 사람은 한 명 적다.
‘할 수 있을까?’
로저스 감독과 눈이 마주쳤다. 순간, 요니는 지시의 의미를 이해했다.
입버릇처럼, ‘휘슬이 세 번 울리기 전까지는 절대 멈추지 말라’ 고 말하던 늙은 노장은 아직 경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가장 피지컬이 좋은 톰슨을 센터백으로 내려보내 위협적인 체격을 가진 캐롤을 전담시키고, 대신 풀백을 올려 전방에서의 밀도를 유지하겠다는 의도다.
“할 수 있나? 못 하겠다면 전술을 바꾸겠다.”
대답하기 전, 요니는 잠시 망설였다. 충동적으로 대답할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내가 정말 할 수 있을까?’
We are Sunderland. Say we are Sunderland.
처절하게 소리치는 선덜랜드 팬들의 함성에, 문득 다른 소리가 섞였다.
[스스로 정하는 거지. 요나스 뮐러, 너는 뭐지? 이방인이야?]
I know I am. I’m sure I am.
그날 분명히 대답했었다. 자신은 선덜랜드 선수라고. 그렇게 정했다고.
I’m Sunderland ’til I die.
가슴이 뜨거워지고, 꾸욱 저며온다. 엠블럼이 붙어 있기 때문일까. 요니는 가슴팍을 움켜쥐며 대답했다.
“해보겠습니다. 아니, 해내겠습니다.”
***
잭의 퇴장으로 비롯한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우리 선수들은 놀라울 정도로 분투하고 있었다.
경기의 주도권을 가져오고, 무섭게 몰아쳤다.
누가 보면 한 명 퇴장당한 팀은 우리가 아니라 뉴캐슬이라고 착각이라도 할 것처럼.
그 중심에는, 중원을 혼자 지켜낸 요니의 맹활약이 있었다.
희주가 무심코 박수를 쳤다.
“진짜 잘한다!”
잘하지. 타고난 재능만 놓고 보면 톰슨 이상이니까. 괜히 쟤 가치가 이백칠십억 원이 아니거든.
프리시즌에서의 레바뮌 3연전에서도 요니는 인상적인 모습을 여러 차례 선보였다. 레알전에서는 무려 크로스를 마크했고, 뮌헨전에서는 키미히를 상대했다.
대등하게 겨뤘다고 한다면 너무 편파적인 감상이겠지만, 그래도 순간적인 센스와 재능의 편린 정도는 확실하게 보였다.
하지만, 뮌헨전의 요니조차 오늘만큼 나를 놀라게 하지는 못했다. 그만큼 오늘의 요니는 무척이나 대단했다.
특유의 축구 지능과 위치선정으로, 한 명 부족한 공백을 완벽하게 메꿨다. 자신이 어디 있어야 할지를 순간적으로 판단하고, 그 위치를 향해 최단 거리로 달린다.
요니의 맹활약 덕분에 우리는 계속 주도권을 유지한 채, 뉴캐슬을 두들기는 중이다.
하지만, 그 대가로 잃어버리는 게 있다.
선수의 체력.
어쩌면 지금의 국면은 양 팀 사이의 암묵적인 합의이기도 했다. 이미 한 골 앞서 있는 뉴캐슬은 무리할 필요가 없으니까.
더비 라이벌을 더 큰 점수 차이로 밟아놓고 싶은 심정도 있겠지만, 사납게 날뛸 때 잘못하면 물린다는 계산 정도는 하고 있을 것이다.
게다가 사실 뉴캐슬은 결코 수비가 약한 팀이 아니었다. 오히려 수비적인 운영은 뉴캐슬의 특기에 가깝다.
우리 상대로는 1부리그와 3부리그의 격차를 과시하지만, 프리미어리그에서는 기본적으로 중하위권, 언더독 상황을 수없이 경험했을 팀이다.
일방적으로 얻어맞으며 버텨본 경험은 지금의 우리보다 몇 배는 많을 것이다.
어차피 우리가 인원이 한 명 적으니, 차분히 막아내다 보면 언젠가 기세가 꺾일 거라 믿는 거겠지.
아마 가장 먼저 지쳐 쓰러지는 선수는 요니가 될 것이다.
요니는 장점이 많은 선수이지만 지구력이 뛰어나지는 않고, 지금 요니가 하는 플레이는 명백히 오버워크에 가까우니까.
그런데도, 단 한 걸음도 물러설 생각이 없는 요니에게··· 라인 밖에서 해줄 수 있는 건 딱 한 가지뿐이었다.
We are Sunderland. Say we are Sunderland.
오만 명 홈 팬들의 목소리가 비하면 아주 작고 미약한 외침이겠지만, 그래도 끝까지 외칠 거다.
휘슬이 세 번 울리기 전까지, 아무것도 멈추지 않는 것.
그게 선덜랜드의 축구니까.
***
“팀장님, 더는 못 보겠어요.”
마일즈는 수잔을 흘끗 바라보았다. 아직 축구 관람에 익숙하지 않은 수잔은,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아니, 자세히 보니 눈가엔 이미 눈물이 고였다.
“쯧쯧. 이래서 여자들이란.”
옆에서 브렌든이 못마땅한 듯 혀를 찼다. 마일즈는 재빨리 브렌든의 옆구리에 팔꿈치를 찔러넣었다.
“수잔, 그러고 보니 자네는 우리가 이기는 경기만 봐왔지? 아니면 가끔 비기거나.”
“네.”
“작년까지는 그렇지 않았어. 이길 때도 있었지만, 많이 비기고, 자주 졌지.”
쓴웃음을 지으며, 마일즈는 차분하게 덧붙였다.
“어쩌면 자네도 내년부터 보게 될 모습일지도 몰라. 우린 내년부턴 챔피언십에서 뛰게 될 테니까.”
“그러니까, 패배에 익숙해지라는 건가요?”
수잔이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마일즈를 노려보았다. 하긴, 그가 아는 수잔은 꽤 당찬 성격의 부하였다.
“수잔, 자네는 오늘 여기 왜 왔나?”
“직장 상사가 그랬거든요. 축구를 보면 인생이 조금 나아진다고요.”
“축구를 그저 보기만 할 거라면 사실 펍에 갔어도 그만이야. 하지만 우리는 선수들과 함께 싸우러 여기 온 거야.”
“저는 그냥, 선수들이 너무 힘들어 보여서···.”
마일즈는, 한숨 쉬는 수잔에게서 고개를 돌려 그라운드를 바라보았다.
팀에서 유일하게 한 사람에게만 허락된 자리, 테크니컬 에어리어. 그곳에서 로저스가 목에 핏대를 세우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만일, 자네가 감독이라면 말할 수 있겠나? 이제 충분하다고, 1부 리그 팀 상대로 분전했으니까 이제 그만해도 괜찮다고. 이제 그냥 다음 경기나 준비하자고.”
“······.”
“그렇게 말할 수 있겠어?”
“어떻게 그렇게 말해요! 다들 저렇게 열심히 뛰는데!”
“그러니까 우리가 할 일은 응원하는 거야. 목소리가 끊이지 않도록. 우리는 그러려고 여기 와 있는 거야.”
Sunderland ’til I die. I’m Sunderland ’til I die.
***
불리한 전황은 나아지지 않았고, 시간은 자꾸만 흘러갔다. 선수들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둔해지기 시작했다.
특히 후반 들어 명백히 무리했던 요니는 제대로 몸도 가누기 힘든 것처럼 보였다.
We are Sunderland. Say we are Sunderland.
하지만, 발을 멈춘 선수는 아무도 없었다.
경기장의 시계가 89분을 넘어 90분으로 향할 때에도, 심판이 인저리 타임을 알리는 팻말을 들어올리는 순간에도.
우리 선수들은 프리미어리그 팀, 뉴캐슬 상대로 단 한 걸음도 물러섬 없이 싸웠다.
I know I am. I’m sure I am.
경기 종료 직전, 마지막 코너킥에는 톰슨은 물론, 페르난데스까지 올라와 공격에 가담했다.
아크서클 위로 떠오른 공을 향해, 톰슨의 몸이 솟구쳤다. 마치 날개라도 달린 것처럼.
I’m Sunderland ’til I die.
톰슨의 머리에 맞아 비틀려 흐르는 공을, 크리그의 오른발이 그대로 포착했다. 강렬한 슛이 뉴캐슬 골키퍼의 발끝에 걸렸다.
Sunderland ’til I die.
흘러나오는 공을 향해 몸을 날리는, 붉은 유니폼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등번호 19, 요나스 뮐러. 선덜랜드에서 태어나지 못했지만, 대신 자기 발로 우리 팀을 선택한 또 한 명의 유스.
[선덜랜드 선수입니다. 그렇게 정했습니다.]
잠시 후, 요니의 몸이 공과 함께 골라인을 넘었다. 라스트 미닛 골, 동점골이다.
경기장을 뒤덮는 오만 개의 탄식과 삼천 개의 환호에, 내 목소리를 얹었다.
Sunderland ’til I di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