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타인위어 더비 (3)
내가 선덜랜드 소속으로 치르는 첫 번째 타인위어 더비는, 무승부로 끝났다.
[선덜랜드 2 - 2 뉴캐슬]
옆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났다. 경기 볼 때 익스클루시브 박스에 같이 들어오는 사람은 희주뿐이니, 당연히 지금의 소리도 희주 거다.
“화장 번지겠다.”
“괜찮아. 워터프루프야.”
한참 동안 눈가를 문지른 다음, 희주가 조금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우리, 지지 않은 거지? 탈락 안 한 거지? 연장전도 없는 거지?”
“그래, 재경기야. 우리 홈에서.”
다양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프리미어리그 팀과의 FA컵 경기, 그것도 더비 매치의 재경기다.
구단주로서는 어쩌면 승리보다 더 달콤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승패를 떠나 일단 경기를 한 번 더 한다는 것만으로도 하부 리그에서는 어마어마한 수입이 발생하니까.
내겐 푼돈이지만, 구단 재정에는 소중한 수입원이다. FFP 걱정 없이 쓸 수 있는 돈이거든.
그런 한편으로, 선수단의 상태가 염려된다.
한 명 부족한 상태로 싸운 우리 선수들은, 오늘 모든 힘을 쏟아냈다. 기념사진이라도 찍으면 곧바로 광탈 플래그로 이어질 정도로.
극적인 동점 골을 성공시킨 요니는 세레머니는커녕 제 발로 서 있지도 못할 만큼 지쳤다.
덕분에 크리그가 요니를 부축해야 했는데, 사실 크리그의 컨디션도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노장 페르난데스도 평소보다 훨씬 피곤해 보였다.
그나마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선수는 톰슨 뿐이다. 경기장을 빠져나가기 전, 스탠드의 팬들을 향해 두 손을 흔드는 모습. 빅클럽 출신답게 팬서비스가 습관처럼 뱄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톰슨의 손놀림이 평소보다 조금 둔하다. 자본주의 손도 쌓인 피로를 어쩌지는 못하는 모양이다.
리그와 컵 대회를 병행하는 건, 아직 스쿼드가 얇은 우리에겐 꽤 가혹한 일정이다.
거기에 재경기까지 붙었으니, 고생하는 선수들을 생각하면 웃음이 나오지 않는다.
아니, 그게 아니지.
나는 머리를 흔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건 내일부터 고민하면 된다. 오늘은 축구 보는 날, 더비 매치 데이니까.
오늘은 선덜랜드의 모두와 같이 웃고, 같이 울어야지.
***
세인트 제임스 파크를 떠나려는데, 폰이 연속으로 울렸다. 희주가 재빨리 메시지를 확인했다.
“오빠, 잭··· 이 안 보인다는데? 브라이언 씨랑 요니가 메시지 보냈어.”
“내가 챙긴다고 해. 어디 있을지 알 것 같으니까.”
차에 오르며, 조엘과 리지에게 각각 연락을 남겼다. 혹시 잭이 훈련장에 나타나면 메시지 좀 달라고.
- 왔어요!
- 왔습니다.
50분쯤 지나서, 두 사람이 동시에 메시지를 보냈다.
***
훈련장에 가자, 공을 걷어차는 잭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어째 훈련이라기보다는 마구잡이로 공에 화풀이하는 것 같았다.
“그건 훈련이 아닌데?”
잭은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네, 화풀인거 알고 있슴다. 저는 머저림다. 병신같이 거기서···.”
아직도 분이 안 풀렸는지, 잭은 몇 번쯤 공을 더 걷어찬 다음에야 뒤를 돌았다.
“저 때문에 질 뻔했슴다. 뭐라고 안 하심까?”
“이제부터 하려고. 일단 너, 주급 1주 정지 먹을 거다.”
“네.”
순순히 징계를 받아들이는 잭의 모습이, 꼭 사고 친 강아지 같다.
“징계 사유는 뭔지 알아?”
“퇴장 아님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무단이탈. 선수가 퇴장당하는 게 뭐 어떻다고 징계까지 줘. 네가 누구 조인트를 깠냐, 아니면 다리를 분질렀냐?”
하다못해 거친 플레이로 다이렉트 레드를 먹고 왔으면 당연히 징계 먹였겠지만, 잭은 옐로 두 장이다.
“쓸데없는 짓을 했슴다. 괜히 흥분해서 유니폼 벗다가 경고나 먹고···.”
“잘했어. 만일 네가 거기서 유니폼을 벗어 들지 않았으면··· 무너졌을지도 모르거든.”
“구단주님, 우리 선수들 그런 겁쟁이들 아님다.”
눈을 동그랗게 뜬 잭을 향해, 나는 차분히 대답했다.
“아니, 선수 말고 우리 팬들. 오만 명 더비 라이벌들에게 짓눌리기 직전이었거든. 넌 오늘 우리 서포터의 자존심을 지킨 거야. 그리고 그 서포터들이 선수들을 지킨 거고.”
“······.”
잭의 콧잔등이 조금 붉어졌다. 눈시울도.
“그러니까 다음에도 얼마든지 유니폼 벗어. 대신 경고 두 장째를 먹지는 말고. 처음엔 실수지만,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면 진짜 머저리야. 그렇지?”
“맞는 말씀임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잭을 향해, 이번엔 엄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거랑 별개로 감독과 코치의 지시 없이 무단으로 이탈한 건 징계감이다. 며칠 내로 징계 나갈 거야.”
“네!”
주급 정지 먹고 좋다고 웃는 놈은 처음 봤다. 그래서 나도 그만 웃고 말았다.
뭐, 웃어야지. 뉴캐슬 홈에서 한 방 먹여준 날인데.
***
뉴캐슬 드레싱룸의 분위기는 참담했다.
쿵- 라커를 두들기는 소리가 났다. 주장 라셀스였다.
“이게 무슨 망신이야!”
홈에서 비겼다. 퇴장 먹고 10명이 싸운 상대에게. 그것만으로도 실망스러운 결과인데, 하필이면 선덜랜드 로컬 보이에게 유니폼 세레머니까지 당했다.
뉴캐슬 주장으로서는, 참기 어려운 굴욕이었다.
그런 라셀스를 향해 누군가 볼멘 소리를 냈다. 뉴캐슬의 로컬 보이, 션이었다.
올해 스물셋. 선덜랜드의 잭과 요니 듀오보다는 두 살이 많지만 큰 차이는 아니다. 마침 포지션도 미드필더, 여러모로 경쟁심을 느낄 만한 조건이었다.
션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우리가 진 것도 아니고, 재경기잖아요? 유니폼 세레머니, 그까짓 게 뭐라고··· 재경기 날 쟤들 홈에서 되갚아주면 되는 거 아닙니까?”
“야, 지금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냐?”
“주장. 설마 제가 그 애송이처럼 정신 못 차리고 치즈 두 장 받을까 봐 그러세요? 에이, 저는 조심하죠. 나이가 몇 갠데.”
“아직도 정신 못 차렸네.”
라셀스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다시 으르렁거렸다.
“쟤들 지금 어딨어? 리그 원이잖아! 챔피언십도 아니고 리그 원! 3부 리그 상대로, 그것도 한 놈 퇴장당한 것들한테 홈에서 비기고 재경기 가는 것도 쪽팔린 판국에 뭐? 유니폼 세레머니를 갚아줘?”
“아···.”
그제야 표정이 굳어지기 시작한 션을 바라보며, 라셀스가 한숨처럼 내뱉었다.
“재경기 간 시점에서, 이번 더비는 우리가 진 거나 마찬가지야. 두고 봐라. 이제 내일 되면 언론에서 아주 난리일걸?”
실제로, 언론 기사는 라셀스의 예상대로 흘러갔다.
[뉴캐슬, 10명이 뛴 선덜랜드와 무승부··· ‘충격’]
[169번째 타인위어 더비. 뛰는 리그는 달라졌어도 라이벌의 뜨거움은 같았다.]
[재경기는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에서 열흘 뒤에 벌어져···.]
그리고 열흘 뒤.
선덜랜드는 FA컵 4라운드에서 탈락했다.
스코어는 0-0. 연장전, 그리고 승부차기까지 이어진 혈투의 결과였다.
***
“살다 살다 내가 승부차기 실축을 다 해보네. 빌어먹을··· 아, 나는 마티니. 젓지 말고 흔들어서.”
“아, 그럼 나도 마티니!”
톰슨과 브라이언을 차례로 바라보며, 나는 한숨을 쉬었다.
“브라이언은 그렇다 치고··· 톰슨, 너는 좀 전에 경기 마친 선수가 술 마셔도 되는 거야?”
그러자 톰슨은 언제나처럼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런 날 술 안 마시면 그게 더 해롭다. 더비였잖아.”
뜻밖의 기습에, 바로 말을 잇지 못했다.
누가 보면 선덜랜드 성골 유스인 줄 알겠다. 스탬포드 브릿지에 놔두고 온 심장 찾으러 갈 거라고 노래 부르던 놈인데. 심지어 톰슨의 친정 팀은 유니폼도 푸르다.
물론, 프로답게 굴어줄 거라는 기대는 했다.
아마 지금 당장 첼시와 싸우더라도, 톰슨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친정팀의 골문에 골을 꽂아넣을 선수다. 골 세레머니 대신 눈물을 흘리긴 하겠지만.
그래도 선덜랜드의 더비 매치에 자기 일처럼 나서줄 줄은 몰랐다.
그때 블랙캣츠 바텐더가 마티니 두 잔을 가져왔고, 우리의 대화가 자연스럽게 잠시 끊겼다.
둘 다 마티니인데 어째 색깔부터 퍽 다르다. 젓지 말고 흔들라는 톰슨의 주문 때문인지, 아니면 브라이언의 전설적 식성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바텐더가 싱긋 웃었다.
“구단주님도 한잔 드릴까요?”
“네, 적당한 거 부탁합니다.”
“콜라 좋아하시죠? 쿠바 리브레는 어떠십니까?”
“괜찮겠네요.”
바텐더는, 내 칵테일에는 일부러 제로 콜라를 쓰는 친절함을 보였다··· 음, 맛있네.
“솜씨 좋네요··· 이기고 마셨으면 더 좋았을 텐데요.”
“그랬으면 제 솜씨가 필요 없으셨겠죠? 그럼, 좋은 시간 되십시오.”
바텐더가 멀어진 다음, 톰슨에게 물었다.
“더비라서 일부러 나갔냐? 오늘은 쉬는 날이었을 텐데.”
선수 기용은 전적으로 감독의 재량에 맡기지만, 그래도 구단주로서 내가 주장하는 한 가지 원칙은 있다. 절대로 선수를 혹사하지 말 것.
특히 톰슨같이 관리가 필요한 선수는 출전시간과 휴식을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다.
톰슨이 피식 웃었다.
“왜, 수당 아깝냐?”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오늘 네 수당이 아까우면 구단주 하지 말아야지.”
잭의 출전 정지, 그리고 요니의 체력 방전으로 우리 중원은 무주공산 상태였다.
그 와중에 홀로 중원을 지킨 톰슨은 정말로 훌륭했다. 프리미어리그 팀이라는 뉴캐슬의 미드필더진 상대로도 조금도 손색없이 싸웠다.
하긴, 톰슨은 빅클럽 첼시에서 10년을 주전으로 뛰었던 대선수. 뉴캐슬 미드필더 세 명을 합쳐도 관록으로는 밀리지 않을 선수다.
연전의 피로가 쌓인 상태에서도, 톰슨은 군소리 없이 연장까지 풀타임을 소화했다. 승부차기에서의 실축은 아마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리에 힘이 빠졌을 테니까.
바꿔 말하면, 우리는 오늘 뉴캐슬 상대로 승부차기까지 끌고 갈 정도로는 버텼다는 뜻이다.
“덕분에 팀의 현 위치를 알았어. 우리 베스트 일레븐은, 당장 챔피언십에 올라가도 충분히 통한다는 것도 확인했고.”
EFL컵에선 리즈와 비겼고, FA컵에선 뉴캐슬과 재경기까지 끌고 오는 접전을 펼쳤다. 뉴캐슬도 리즈도 로테이션 멤버를 내보내긴 했겠지만, 이만하면 훌륭한 성과다.
칵테일을 쭉 비운 톰슨이 내 쪽으로 특유의 진지한 눈빛을 향했다.
“그래서, 설마 여름에도 영입은 없다는 건 아니지?”
“그 반대지. 이번에 드러났잖아. 우리 스쿼드는 엄청 얇다는 걸.”
핵심 선수 몇 명은 매우 훌륭하지만, 그 외의 나머지 선수들은 조금씩 부족한 상태. 덕분에 우리는 주전과 후보의 격차가 무척 크다.
특히 시급한 포지션은, 역시 센터백이었다. 오죽하면 첼시에선 줄곧 미드필더로만 뛰었던 톰슨이, 우리 팀 와서는 벌써 두 번이나 센터백으로 뛰었을 정도다.
페르난데스의 공중볼 부담, 하퍼의 수비 조율 문제를 덜어줄 수 있는 강력한 수비수를 갖고 싶다. 우승과 거리가 멀던 헨도네 팀을 싹 바꿔준, 반다이크 같은 수비수를.
그렇다고 정말로 반다이크급 선수가 와줄 리는 없으니, 챔피언십의 반다이크 같은 선수를 데려오는 정도로 만족해야겠지.
기왕이면, 프리미어리그까지 통할 만큼 잠재력도 뛰어난 유망주면 더 좋겠고.
스쿼드 이야기를 들은 톰슨과 브라이언의 표정이 바뀌었다.
“그럼 무자비한 쇼핑인가? 너 돈 엄청 벌었다며.”
“돈은 있지만, 그렇게 하면 선수단이 망가져. 여름엔 딱 두세 명만 데려올 거야. 그 대신 정말 확실한 선수로.”
매년 그렇게 조금씩 늘려나갈 거라고 설명하자, 톰슨이 웃었다.
“안심했어. 제대로 된 리빌딩이네.”
“아, 참고로 선수 말고 다른 쪽으론 쇼핑 엄청 할 거니까 기대해.”
이번 더비전을 계기로 느꼈다.
선덜랜드의 설비와 스태프는 리그 원에서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압도적인 최고지만, 그래도 영국 최고와는 아직 거리가 있다.
더비 라이벌의 홈, 세인트 제임스 파크의 설비는 우리 것보다 훨씬 훌륭했다. 심지어 그 세인트 제임스 파크조차 영국 최고라기엔 손색이 많다.
시설 이야기가 나오자 브라이언과 톰슨이 신나서 떠들기 시작했다.
“하긴. 핫스퍼 스타디움은 진짜 장난 아니더라.”
“에티하드 스타디움도 끝내줘.”
“헨도가 그러더라. 안필드는 용광로라고.”
“스탬포드 브릿지는 철옹성이고.”
나이 서른 먹은 것들이, 하는 짓은 마치 장난감 자랑하는 애들 같다.
누가 그랬던가? 남자는 나이가 몇 살이 되어도 장난감이 필요하다고. 축구밖에 모르는 두 사람이지만, 축구장 시설이나 설비에는 관심이 많은 모양이다.
두 사람을 바라보며 선언했다.
“우리도 그렇게 만들 거야.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를.”
이번 타인위어 더비를 치르면서 깨달았다. 우리는 아직 뉴캐슬에 미치지 못함을.
단판 승부라면 한번 해볼 만 하지만, 경기 수를 늘리면 결국 팀의 체급 차이가 드러나고 만다.
하지만, 결코 손 닿지 않는 곳에 있는 상대도 아님을 확인할 기회이기도 했다.
무심코 시선이, 리그 순위표에 향했다.
시즌 종료까지 이제 약 3개월, 2위와의 승점은 벌써 19점 차이로 벌어졌다.
코앞까지 다가온 챔피언십 승격.
슬슬 팀의 체급을 키울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