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챔피언십으로 가는 길 (1)
<미친 사람이 이성적인 사람보다 세상을 더 많이 변화시킨다 - 에릭 칸토나>
뉴캐슬에 스타디움 투어를 다녀왔던 멤버들을 구단주실에 불러 모았다.
“혹시 ‘그 팀’ 드레싱룸 비품들 기억나는 사람 있습니까?”
리지가 곧바로 대답했다.
“회벽돌은 토버 사 제품 같았고, 못은···.”
“와, 리지 씨는 벽돌 브랜드도 알아요?”
“하핫. 어쩌다 보니까요··· 이번에 공사하는 분들하고 좀 어울렸거든요.”
처음에는 다루기 힘들어서 쩔쩔매던 리지였지만, 지금은 꽤 스스럼없이 지내는 모양이다.
“근데 벽돌이나 못이 있었나요? 저는 기억 안 나는데요.”
그러게? 희주 말대로다. 나도 못 봤다. 잠시 고민하다가, 원정 팀 드레싱룸이랍시고 만들어 둔 창고 비스무레한 장소가 떠올랐다.
“원정팀 말고, 홈팀 드레싱룸 말입니다.”
그러자 리지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물러났고, 옆에선 희주가 눈을 빛냈다.
“왜? 똑같은 급으로 맞추려고?”
“아니, 최저 기준치를 정하려고.”
최저라는 단어에 힘을 주며, 조엘을 바라보았다.
“다음 시즌, 우리 드레싱룸은 ‘그 팀’ 드레싱룸보다 모든 면에서 좋아야 합니다. 무슨 듯인지 아시겠습니까?”
“더 크고, 더 쾌적하고, 더 고급스러운 비품을 쓰라는 말씀이시군요.”
“네. 하다못해 물티슈 한 장이라도 우리가 더 고급품을 써야 합니다. 마사지실이나 스파도 모조리 집어넣고요.”
“보람 있는 업무가 되겠군요.”
“들어가는 비품들 브랜드는, 희주의 조언을 들으면 될 겁니다.”
그러자 조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구단주님은 투자의 신이라고 들었습니다. 그 친동생이면 당연히 물건 보는 안목이 있으시겠네요.”
“에헤헤.”
조엘의 칭찬에 희주는 좋다고 웃었지만, 사실 나는 좀 다른 이유에서 희주의 ‘안목’ 을 기대한 거였다.
백화점 명품관을 수시로 드나드는 애니까, 기본적으로 뭐가 고급진지 보는 안목 정도는 있을 거라고.
아니면 내가 헛돈 썼던 거지.
“그럼 시기는 언제로 하시겠습니까?”
“시즌 끝나고요. 시즌 중에 드레싱룸을 뚝딱거릴 수는 없잖습니까? 마지막 홈경기 바로 다음 날 공사 착공해서, 다음 시즌 첫 홈경기 전에 끝낼 수 있도록 준비해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런데 원정 드레싱룸은 그대로 놔두십니까? 지금 홈쪽 설비 뜯어내고 남는 거 적당히 옮겨 달면 어떻겠습니까?”
조엘의 제안에, 나는 턱을 쓸었다.
“원정팀은 좀 더 생각해봅시다. 아이디어가 잘 떠오르지 않네요.”
“아이디어··· 말씀이십니까?”
“유에파 A레벨을 딸 수 있을 정도로는 꾸며놓고 싶은데, 그렇다고 내 돈 쓰면서 원정팀이 편히 경기하는 꼴은 못 보겠거든요.”
빙긋 웃자, 조엘도 따라 웃었다.
“그 팀 스타일이네요.”
“조금 다릅니다. 그 팀은 원정팀 편의를 위해 쓸 돈은 없다는 입장이지만, 나는 원정팀을 위해서도 돈을 쓸 의향이 아주 넘치거든요.”
슬슬 조엘의 미소가 바뀌기 시작했다. 악당이라기엔 조금 천진하고, 악동이라기엔 조금 음흉한 방향으로.
“거울처럼 빛나는 최고급 대리석을 바닥에 깔까요? 아주 매끄러운 놈으로요.”
“드레싱룸 가운데에 최고급 테이블을 놔줄 의향도 있습니다. 가슴 높이로.”
우리의 대화를 듣던 희주가 질린 듯한 표정을 지었다.
“어, 축구는 원래 정정당당한 스포츠 아니었어요?”
에이미와 리지가 곧바로 대답했다.
“아주 정정당당한 스포츠죠. 사이드라인 안에서는요.”
“이 정도는 심술 축에도 못 드는데요.”
음, 악동이 더 있었네. 아무래도 세심하게 챙기는 건 여자들이 잘하겠지 싶어서, 슬쩍 물었다.
“리지 씨, 에이미 씨. 원정 드레싱룸 구상 좀 해볼래요? 설계까지 다 하라는 소린 아니고, 아이디어 정도만 뽑아 봅시다.”
그러자 곧바로 아이디어가 쏟아진다.
“어웨이팀 전술 보드 위치가 전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요. 상식적으로 문 뒤가 정위치겠죠.”
스탬포드 브릿지에서나 상식 아닌가?
“원정팀 통로는 계단을 내려갔다가 올라오게 만드는 거죠. 통로 천장을 조금 낮게 하고요. 지나갈 때마다 고개 숙이도록요. 그 앞에 우리 엠블럼을 붙이면 완벽해요.”
선덜랜드 앞에 고개 숙여라? 흠, 흥미롭네.
“거울은 전부 오목거울로 바꿔야 해요.”
확실히 여자들이 세심하다. 덕분에 아이디어가 떨어질 일은 없어 보인다.
대신 다른 걱정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이거, 다음 시즌 개막까지 완공할 수 있나?
***
드레싱룸 리모델링 미팅 다음에는, 로저스 감독의 집무실을 찾았다.
“다음 시즌엔 코치를 추가했으면 합니다.”
“어떤 역할의?”
“기술 코치가 가장 시급하겠죠.”
시즌 초 코칭스태프를 한 차례 보강했지만, 아직 부족한 부분이 보인다.
내 생각에, 가장 부족한 부분은 역시 기술 훈련이다.
잭과 요니, 팀이 키워낸 핵심 인재 두 사람만 봐도 알 수 있다. 둘 다 수많은 장점을 가졌지만, 볼 컨트롤이 빼어난 선수는 아니니까.
여름에도 기술 코치를 영입했지만, 어디까지나 리그 원에서 준수한 수준의 코치에 불과했다. 선수들의 기량이 쇠퇴하지 않게 관리할 수는 있어도, 끌어올리기는 힘든 코치였다.
보강이 필요하다. 최소 두 명 정도.
브라이언이 머리를 긁었다.
“브로, 좋은 생각이긴 한데··· 왜 이제야 보강해 주는 거야? 기왕이면 올 시즌 초에 해주지.”
순진하게 묻는 브라이언의 곁에서 로저스 감독이 쓴웃음을 지었다.
“스태프의 위계 문제지. 브라이언 자네는 꽤 많은 권한을 가졌잖나? 감독인 내가 신뢰하고, 구단주도 신뢰하고 있지. 사적으로는 친분도 있고.”
“그렇··· 죠. 그렇다고 우리 브로가 절 낙하산으로 뽑진 않았을 텐데요.”
“능력이야 알지. 자네에게 경기 전 전술 준비를 전부 맡기고 있는 마당인데. 하지만 외형적으로 보면 자네는 아직 애송이 코치거든. 그리고 나는 유스 팀 감독이나 하던 사람이고.”
로저스 감독의 말대로, 시즌 초 우리가 데려올 수 있는 코칭스태프의 수준에는 한계가 있었다. 무명 감독과 애송이 수석코치의 조합이었으니.
심지어 보드진도 모조리 물갈이 상태, 투자의 신이라는 명함도 축구계에서는 큰 영향력이 없다.
지난 여름의 선덜랜드는, 거물 코치들이 관심을 둘 자리는 아니었다. 혹시라도 거물급 코치가 들어오면 아마 로저스 감독이나 브라이언을 멋대로 휘두르려 들었을 것이다.
특히 브라이언이 그 대상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브라이언은 코치로서는 젊고, 경력도 짧으니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실적이 생겼으니.
3부 리그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리그에서 압도적인 성적을 올리고 있다. 그리고 컵 대회에서는 1부 팀인 리즈, 그리고 뉴캐슬 상대로 접전을 펼쳤다.
특히 리즈전은 ‘전술가들의 체스’ 나, ‘2012년 유로의 재현’이라는 극찬까지 받았다.
로저스 감독이 브라이언을 향해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이 팀의 전술을 누가 짜는지도 모를 정도의 멍청이라면, 절대로 썬이 데려올 리 없지. 그러니 이제 누가 오더라도 자네 전술 안목을 존중해 줄 걸세.”
“브로···.”
새삼 감동받은 것 같은 브라이언을 향해 슬쩍 웃으며 약을 쳤다.
“낯간지러운 소리는 미리 사양한다.”
친구끼리 술 먹을 때면 몰라도, 낮에 맨정신으로 할 만한 이야기는 아니다.
“알았어, 브로. 그럼 어떤 코치를 알아볼까?”
“네가 같이 일하기 편한 사람.”
내 대답을 들은 브라이언은 반사적으로 로저스 감독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로저스 감독이 웃었다.
“자네가 같이 일하기 편한 사람이면, 당연히 내가 컨트롤 할 수 있는 급이겠지. 자네가 원하는 사람을 알아보게.”
잠시 눈을 깜빡이던 브라이언이, 바쁜 걸음으로 회의실을 뛰쳐나갔다.
***
한편, 분석팀 인력을 충원하겠다는 내 제안에, 샐리는 퍽 미묘한 반응을 보였다.
“음··· 제 부하요?”
크리스마스 선물로 들여놓은 안마의자에 파묻힌 채 축 늘어진 샐리의 모습을 보아하니, 인력 충원이 무척이나 시급해 보인다.
하긴, 기본적으로 우리 분석팀에서 축구를 아는 사람은 샐리 뿐이다. 물론 그녀를 위해 영상을 모아오고 편집해주는 인력은 넘쳐나지만, 선수의 버릇이나 상대 팀의 전술을 읽어낼 사람은 없다.
덕분에 축구 영상을 수없이 돌려보는 건 전적으로 샐리의 업무가 되었다.
“필요한 인력은 누구든지 구해 주시나요?”
“물론입니다.”
분석팀 인력 충원을 서두르지 않았던 건, 샐리가 브라이언 이상으로 얕보이기 쉬운 조건이었기 때문이다. 샐리는 여자고, 선수 경력은커녕 스태프로 일한 것도 이번이 처음이니까.
물론 첫 시즌을 치르며 샐리 또한 자신의 가치를 입증했다. 축구계에서 가장 꼼꼼하게 상대를 파헤치는 감독, 비엘사와의 분석 싸움에서 무승부를 기록했으니.
샐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바라는 건 그리 많지 않아요. 축구가 실수의 스포츠임을 인지해야 하고, 공간보다 시간이 훨씬 유한함을 인정해야 하며···.”
요구사항이 어째, 브라이언과 입씨름할 때 써먹던 레파토리 같다.
“리틀 샐리를 원하는 것 같군요.”
“가능하세요!? 혹시 생명공학 기업에도 투자하신 거라면 저 좀 복제해 주시겠어요? 두 명 정도만요.”
당장에라도 안마의자 밖으로 뛰쳐나올 것처럼 눈을 빛내는 샐리의 모습을 보니 머리가 아프다. 에라이, 축구밖에 모르는 사람 같으니.
“복제 문제는 인류의 기술이 좀 더 발전하면 다시 의논해봅시다··· 그리고 사실, 만약에 인간 복제 기술을 구했으면 메시부터 세 명쯤 확보하는 게 순서 아닙니까?”
“하긴 그렇겠네요··· 그럼, 분석관 부하는 필요 없어요. 입씨름하는 것도 의외로 피곤한 일이거든요. 그 대신 다른 쪽 업무를 좀 덜어 주시면 좋겠어요.”
“그것도 괜찮겠네요. 어떤 인력을 원합니까?”
“통계 잘 아는 사람, 그리고 프로그래머요. 만들어보고 싶은 게 생겼거든요.”
만들어보고 싶은 거라.
호기심이 들었지만 묻지는 않았다. 희주라면 또 모를까, 샐리는 축구 말고 아무 관심이 없다. 필요한 인력을 주면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바라는 게 그게 전부면, 외주 맡기겠습니다.”
그러자 샐리의 고운 눈썹이 아래로 처졌다.
“외주요? 컨트롤하기 힘들지 않나요?”
“아뇨. 컨트롤 잘 될 겁니다. 지금 샐리 씨가 보는 영상, 누가 가져다주는지 잊었습니까?”
“아.”
공식적으로 FC 선덜랜드 소속, 전력분석팀 스태프는 샐리 퀸 혼자다. 그렇지만 실제로 분석팀 업무를 돕는 인력은 엄청나게 많다.
FC 선덜랜드의 스폰서, 지역 방송사 직원들이다.
샐리를 도와줄 프로그래머 역시, 비슷하게 구해 오면 된다.
“데이터마이닝 잘하는 소프트웨어 회사 한 곳을 데려오도록 하죠.”
“네, 부탁드릴게요.”
샐리는 수단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어차피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적절한 회사 지분을 내가 이미 가졌으면 끝이고, 아니면 그냥 새로 사들이면 된다.
재계에는 FFP가 없거든.
***
성과를 가장 먼저 가져온 사람은 의외로 샐리였다··· 브라이언이 더 빠를 줄 알았는데.
하긴, 코칭스태프는 보통 시즌 단위로 움직인다. 기술 코치감을 구해 오더라도 계약은 어차피 시즌 종료 후에 해야 할 것이다.
평소 자신이 머물던 분석실 대신 브리핑 룸에서 보고를 시작한 샐리가,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다음 시즌부터 사용할 분석 시스템을 소개드립니다. 아직 베타지만, 시연 정도는 가능한 상태라서요.”
대형 스크린에 축구장 히트맵이 떴다. 그 위에서 선수 얼굴 아이콘이 빨빨거리고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짧은 시간 치고 의외로 잘 만들었다. 구해다 준 개발자들을 밤새 들볶은 모양이다.
“이거 꼭 게임 같은데요.”
“네, 인터페이스가 친숙하실 것 같아서요.”
브라이언이 옆에서 투덜거렸다.
“자기한테 친숙한 거겠지··· 축구 게임 그대로 베꼈구만. 그래서 이게 뭐 대단한 거라고?”
“보시면 알아요. 사용한 데이터는 리그 원 개막전, 브리스톨 전입니다.”
샐리는 마우스를 조작해서, 맵에서 선수를 한 명 클릭했다. 19번. 요니다.
잠시 후 스크린 구석에 요니의 모습이 클로즈업되었다. 촬영팀이 찍은 선수의 모습이 실시간으로 움직였다.
“옆에는 데이터가 한가득이군요.”
“네, 우리는 ETPS를 쓰니까요. 그 데이터와 연동했어요. 경기 기록도요.”
데이터는 무척 상세했다. 요니의 심박 수 변화, 지금까지 몇 KM를 움직였는지, 공을 몇 번 만졌는지, 그리고 스프린트를 얼마나 했는지까지.
로저스 감독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경기의 국면을 좀 더 섬세히 분석할 수 있겠군. 선수 개인의 상태도.”
“경기에서의 실수를 복기하기도 좋고요. 이제부터 이 화면을 기준으로 우리 경기를 리뷰하려고 합니다.”
“음, 그거 아주 편하겠군.”
대만족 상태가 된 로저스 감독을 바라보며, 샐리가 부드럽게 웃었다.
“아직 베타니까, 다음 시즌 전까지 기능을 더 추가할 예정이에요. 여름부터는 챔피언십에 올라가는 거니까, 더욱 섬세한 분석으로 팀을 지원하고 싶어요.”
“수고했네. 이대로 완성해 주게.”
“네.”
로저스 감독의 칭찬을 들으며 활짝 웃는 샐리를 향해, 이번엔 내가 물었다.
“샐리 씨, 이걸로 상대팀 선수도 확대해 볼 수 있습니까?”
“ETPS에서 가져오는 데이터는 표시할 수 없지만, 그 외의 경기 기록은 보여요. 선수 모습도 클로즈업 할 수 있고요.”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덕분에 수고가 줄어들 것 같다. 다음 시즌에 데려올 센터백을 찾으러 다닐 수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