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챔피언십으로 가는 길 (3)
에이전트.
구단 입장에서는 수수료를 떼먹는 장사꾼들이다. 따라서 유능하고 돈 잘 버는 에이전트일수록 골칫거리가 된다.
재계약이나 이적 과정에서 수수료를 받아내는 특성상, 구단과 마찰을 빚는 일도 잦으니까. 선수의 몸값을 지키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 과정에서 소속팀을 흔들어 놓는 일도 흔하다.
축구판에서는 라이올라 같은 인물이 대표적이다.
덕분에 요즘에는 특정 에이전트와 계약한 선수는 죽어도 안 산다는 팀이 나오기 시작했을 정도다.
물론, 에이전트가 다 그런 존재들이면 스포츠 에이전트라는 직업 자체가 소멸했을 것이니, 세상에는 도움 되는 에이전트도 존재한다··· 뭐, 어딘가엔 반드시 있겠지.
제이미 버튼의 가치는 팔십억 원.
라이올라같은 유명 에이전트급은 절대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절대 무능하지는 않은 인물.
이제 이 친구가 나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일지 아닌지를 따져 볼 필요가 있다.
“순수한 팬심이었으면 참 좋았을텐데요.”
짐짓 아쉬운 척 하며, 식전주로 입을 적셨다. 물론 나는 무알콜 샴페인이지만.
제이미 버튼이 영업용 미소로 응대했다.
“팬심이야 있죠. 만일 선덜랜드라는 구단에 대해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면 제 선수를 넘기려는 생각도 안 했을 겁니다.”
말로는 얼마든지 떠들 수 있는 멘트다. 립 서비스는 돈이 안 드니까.
물론 진담이라면 꽤 양심적인 에이전트인 셈이지만, 몇 마디 말만 듣고 상대를 판단하면 바보다.
“사실 구단주님 개인에 대한 팬심도 있습니다. 돈 잘 버시는 분이니 일종의 롤모델 아니겠습니까? 사실 저는 우리가 하는 일이 무척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까?”
“구단주님은 장래성은 있지만, 아직 빛을 못 본 회사들에 투자하는 일을 하시잖습니까? 회사들은 투자금으로 성장하고요. 물론 자선사업가는 아니시니 그 과정에서 합당한 이득을 취하시죠.”
입담이 좋다. 하긴, 에이전트도 어떻게 보면 일종의 영업직이니까.
“에이전트 일도 비슷합니다. 장래성은 있지만, 아직 빛을 못 본 선수들이 정당한 가치를 받고, 올바른 구단에서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거죠.”
“그 과정에서 수수료를 챙기고요?”
“저도 자선사업가는 아니니까요.”
“알겠습니다. 메뉴나 보면서 이야기하죠.”
그러자 처음으로 제이미가 조금 당혹한 표정을 보였다.
“메뉴요? 사전에 정해진 코스 나오는 거 아니었습니까?”
“그거 말고요.”
알만한 사람이 왜 이러냐는 의미의 시선을 보내자, 제이미가 고개를 끄덕이고 브리프 백을 열었다.
“우선, 저와 계약한 선수들 명단인데···.”
사진이 안 붙어 있어서 확신은 어렵지만, 그래도 이름을 눈으로 훑으면 짐작은 간다.
리그 원 선수 여럿, 챔피언십 선수 몇 명, 그리고 프리미어리그 팀 선수 한 명. 해외 리그도 몇 명 보이지만, 내 관심사는 아니었다. 올해부터 무명의 외국 선수는 데려오기 힘들어진다.
“오늘 점심 낙찰가가 십만 파운드라고 들었습니다.”
“네, 거금이었죠. 그래서···.”
“당신 수수료율이 얼만지는 모르겠지만, 계산하기 좋게 한 5%로 칩시다. 그럼 이적료로 최소 이백만 파운드는 받아야 본전일 텐데, 조건에 맞는 선수는 한 명밖에 없어 보이네요.”
제이미가 팔고 싶은 선수는, 프리미어리거다.
“안목이 높으십니다. 마침 그 선수에 대한 자료가 있는데요.”
제이미가 점잖은 태도로 브로슈어를 꺼내 내밀었다.
예전에 팀을 구하지 못한 유명 스트라이커가 직접 자기 브로슈어를 뿌리고 다녔다는 이야기가 떠올라 입맛이 조금 썼다.
여기는 에이전트가 해주니 조금 낫나?
나는 조심스레 브로슈어를, 정확히는 선수의 프로필과 사진을 집중적으로 살폈다.
에디 레이놀드, 셰필드 소속. 이마의 숫자는··· 300.
나이는 스물셋이고, 포지션은 센터백이다.
이런 귀신같은 놈. 센터백에 목이 마른 우리 팀 사정을 눈치챈 모양이다. 하긴, 팔십억 원 가치가 거저 붙진 않았겠지.
내가 브로슈어를 살피는 사이 음식이 나오기 시작했고, 제이미는 본격적인 영업질을 시작했다.
“구단주님도 아시겠지만, 셰필드는 최근 몇 년 새 오버래핑 센터백을 사용하는 팀입니다. 전술 특성상 좋은 센터백이 자라날 팀이죠. 그리고 그 전술로 셰필드는 작년, 1부 승격 첫 해 만에 9위라는 기염을 토했습니다.”
“그리고 올 시즌엔 17경기 무승 찍었죠. 역대급 기록일 텐데요.”
“어느 팀이나 나쁜 시기는 있습니다. 구단주님이 오시기 전, 선덜랜드에도 홈 20경기 무승 기록이 있지 않습니까?”
나는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이 정도로 담이 센 인간 상대로는, 화를 내도 의미가 없다.
그나저나, 셰필드의 선수라.
셰필드의 이번 시즌은 확정적으로 망했다. 지금은 1부 리그지만, 시즌 끝나면 높은 확률로 다시 강등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이번 시즌은 확정적으로 흥했다. 서로 이변이 없다면 다음 시즌엔 챔피언십에서 만날 상대다.
그런 셰필드가, 우리에게 선수를 팔고 싶어 한다고?
그럴 리가 있나.
“에디는 스물 세 살로, 젊은 선수입니다. 그리고 셰필드가 센터백 잘 키우는 팀인거 아실 테죠. 어차피 이적 시장은 여름에 열리니 검토하실 시간은 충분할 겁니다.”
우호적인 미소를 짓는 제이미를 향해, 나는 차분히 되물었다.
“그래서 날 들러리 세우고, 선수는 어느 팀에 팔려는 겁니까?”
제이미는 태연했지만, 포크 끝이 잠깐 움찔했다. 음, 이래서 프렌치 코스가 좋은 거지.
“구단주와의 점심을 대놓고 경매 낙찰받아버리는데, 셰필드가 이걸 모르면 바보죠. 셰필드가 묵인하지 않았다면 제이미 씨는 절대 이 자리에 나올 수 없어요.”
그런데, 다음 시즌에 서로 챔피언십에서 만날 상대에게 팀의 핵심 유망주를 고분고분 넘겨줄 팀은 별로 없다. 따라서 셰필드가 생각하는 인수처는, 우리가 아닌 다른 팀이다.
프리미어리그의 다른 클럽들을 거래에 끌어들이고 싶은 거겠지.
제이미가 냉정을 되찾았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공식적으로는, 우리는 이적 이야기는 할 수 없죠. 따라서 우리는 그냥 ‘밥 먹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나 좀 했다’ 고 말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믿어줄지는 잘 모르겠네요. 제이미 씨는 날 만나려고 십만 파운드나 썼거든요.”
제이미가 여기 나타난 순간, 선덜랜드가 거액을 들여 에디의 영입 전쟁에 뛰어든다는 그림이 나온다. 진실은 중요치 않다.
밥 한끼에 십만 파운드를 써버린 상황에서 ‘이적 이야기는 절대 안 했다’ 고 말해도 어차피 아무도 믿지 않을 테니까.
심지어 나는 전형적인 슈가 대디, 갑부 구단주니, 들러리 세우면 이적료 부풀리기 좋다.
제이미에게도 이득이 된다. 예를 들어 올여름에 에디가 오백만 파운드 정도에 거래된다면, 제이미는 오늘 점심값의 두 배 이상을 수수료로 벌게 된다.
삼 개월짜리 투자로 수익률 100%. 달콤하겠네.
제이미가 슬쩍 고개를 숙였다.
“실례했습니다. 하긴, 투자의 신이라고 불리는 분 상대로 하기에는 그리 참신한 설계는 아니었겠죠. 정확하게 보셨습니다. 제 그림이 아니라는 것만 빼면요.”
“누구 그림입니까?”
“그야 셰필드죠. 어차피 여름에 선수를 지키지 못한다는 건 확실하니, 최대한 비싸게 팔아서 프리미어리그에 다시 복귀하는 게 셰필드의 목적입니다.”
“그러다가 1부 클럽들이 안 낚이면? 우리한테 팔아야 하는 상황이 오면요?”
“셰필드는, 그 경우도 손해는 아니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승격 티켓은 항상 세 장이니까요.”
고개를 끄덕인 다음, 슬쩍 물었다.
“셰필드 생각을 나한테 알려줘도 되는 겁니까?”
“제 고객은 어디까지나 선수니까요.”
“그럼 당신 그림은 뭡니까?”
“선덜랜드가 에디를 영입하는 거죠. 들러리 서지 않고요.”
하긴, 그러면 이번 점심값을 비용으로 얹어서 수수료를 듬뿍 뜯어낼 수 있다는 계산 정도는 하겠지.
물론 순순히 얹어줄 생각은 없지만.
“제이미 씨, 선수 입장에서 보면 우리보다는 빅클럽에 가는 게 낫지 않습니까?”
“빅클럽에 가면, 몇 년은 후보로 뛰게 됩니다. 그런데 센터백은 경험이 필요한 포지션이죠. 선덜랜드라면 풀타임 주전일 테니, 경험치를 쌓을 수 있을 겁니다.”
“그 조건이면 세필드에 남아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선덜랜드는 선수를 혹사하지 않을 테니까요.”
“우리 관리 시스템을 구경이라도 해보신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아뇨. 하지만 저는 구단주님의 스토리를 압니다. 무릎이 망가져 꿈을 포기했던 유소년 선수 출신이라는 걸요.”
“그 유소년은 지금 투자자입니다. 이 업계는 보통 피도 눈물도 없기로 유명한데요. 제가 초심을 지키고 있을 거라고 믿습니까?”
그러자 제이미가 웃었다.
“구단주님의 인품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저는 확인할 수 없는 문제니까요. 다만, 세계에서 손꼽는 투자자라면 자신의 스토리가 축구계에서 얼마나 파워풀한지 모르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니, 선수를 망가뜨리지 않기 위해 최대한 노력하시겠죠.”
“젊은 선수의 성장을 가장 중시한다. 에이전트로서도 꽤 파워풀한 스토리겠군요.”
슬쩍 비꼬는데도 제이미는 조금도 기죽지 않았다.
“네, 그러니 저도 노력해야죠. 선수에게 최선의 팀을 찾도록요.”
이 정도면 담력도, 판단력도 수준급이다. 이번 거래 여부를 떠나, 계속 알고 지내서 나쁠 게 없다.
나는 그의 명함을 품에 넣었다.
“브로슈어는 가져가세요.”
어차피 어떤 선수인지는 우리가 직접 조사할 것이다. 지금은, 삼백억 원의 가치를 가진 젊은 센터백이 시장에 곧 풀린다는 정보만으로 충분하다.
***
“에디 레이놀드? 좋은 선수지. 이백만 파운드를 써도 아깝지 않을 선수야.”
이백만 파운드일 리가 있나. 셰필드, 그리고 에이전트 제이미 입장에서 이백만 파운드는 원가다.
“덤비는 모양을 보면 이적료 천만 파운드쯤 찍어보고 싶은 것 같은데.”
그러자 브라이언이 고개를 흔들었다.
“어··· 브로, 솔직히 그 정도 선수인지는 잘 모르겠어.”
가치는 있다. 내 눈에 보이는 가치로 따지면 삼백억 원. 요즘 환율로는 대략 이천만 파운드짜리 선수다.
따라서 천만 파운드, 혹은 그보다 좀 더 비싸게 데려와도 절대 손해는 안 본다.
지나치게 비싼 선수를 데려오면서 선수단의 균형이 무너지거나, FFP상 문제가 없는지는 별개 문제지만··· 일단 선수의 가치만 보면 그렇다.
샐리가 끼어들었다.
“에디는 전형적인 볼 플레잉 디펜더로, 부상당한 오코넬 대신 셰필드 수비의 핵심을 맡고 있어요. 기량도 좋지만, 요즘 아주 급성장 중인 선수죠.”
브라이언이 우울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수비의 핵이라. 쫄딱 망한 팀 센터백만 아니었으면 참 매력적인 세일즈 포인트였을 텐데 말이지.”
샐리가 웃었다.
“제가 보기에 이 선수가 아니었다면, 셰필드는 지금쯤 딱 스물다섯 골쯤 더 먹었을 거예요.”
“왜 스물다섯 골이지?”
“25라운드니까요.”
경기당 1실점을 막아 주는 센터백이라니, 살짝 과대평가 느낌이 나긴 하지만, 그래도 군침은 돈다.
샐리의 고평가에, 로저스 감독과 브라이언도 자세를 고쳤다.
샐리가 준비한 분석 프로그램으로 에디가 뛴 모든 경기를 이리저리 돌려보면서 코칭 스태프들이 입을 모았다.
“일단 겉으로 보이는 유일한 약점은 센터백치고 크지 않다는 건데···.”
“그렇다고 공중볼 경합에 약한 선수는 아닙니다. 공격 가담도 좋고요.”
“하긴, 센터백치고 킥이 좋네. 킥만 보면 당장 수비형 미드필더로 뛰어도 손색없겠어.”
보면 볼수록 호평 일색이다. 스태프들을 지켜보는 내 표정이 다 흐뭇하다.
브라이언이 최종적으로 결론을 내렸다.
“브로, 영상으로 잡아내지 못한 다른 하자가 없다는 가정 아래··· 쟤는 우리가 데려올 수 있는 가장 좋은 매물일 거야.”
그거참 다행이네.
“다만, 얼마를 쓸 가치가 있는지는 판단하기 어려워. 음, 사실 그건 코칭스태프의 영역이 아니고···.”
말을 흐리는 브라이언을 보며 나는 빙긋 웃었다. 팀이 힘들 때 자진해서 바텐더 노릇까지 할 정도인데, 정말로 자기 업무 소관이 아니라고 발을 뺄 리는 없다.
이건 어디까지나 갖고 싶어 죽겠지만, 이적료 이야기를 들으니 차마 사달라는 말은 못 하겠다는 뜻이다.
어떻게 확신하냐고? 신상 백에 대해 희주가 종종 보이는 반응과 비슷하거든.
“만약에 저 선수를 데려온다고 치고···.”
“브로!?”
“만약이라고 했잖아. 만약에 쟤를 데려와서 이적 예산이 모두 동났다면, 다른 포지션을 아무도 영입할 수 없다면 그래도 챔피언십에서 순항할 수 있어? 승격할 가능성은?”
“윙포워드 하나만 더 사주면 백 프로라고 할 텐데, 그 조건이면 팔 할?”
“평범한 챔피언십 급 센터백을 사다 준다면?”
“대충 육십 오 퍼센트?”
“그럼 답 나왔네.”
거액이 오가는 거래를 영상 몇 개만 보고 결정할 수는 없다. 그러니 여름까지 계속 지켜볼 것이다.
어딘가 다른 하자는 없는지, 몸은 성한지, 이 정도 돈이 들어갈 선수라면 하다못해 여자관계까지도 탈탈 털어보고 결정해야 한다.
그렇게 3개월을 지켜보고, 아무 문제가 없다면?
당연히 사 올 거다. 설령 천만 파운드, 혹은 그 이상의 돈을 지르더라도. 프리미어리그 승격 확률 15%를 돈으로 사는 거라면 조금도 비싸지 않다.
여름 이적시장까지, 혹은 챔피언십까지 3개월.
지불 능력은 이미 갖췄다.
그 시점에서 유일한 관건은, FFP상 문제없이 끌어모을 수 있는 이적 자금이 얼마인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