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챔피언십으로 가는 길 (4)
지금까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 내용이었다.
지난 시즌의 영입은 톰슨과 페르난데스뿐이었고, 그들의 이적은 FFP상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범위였다.
선덜랜드는 입장권 수입만 해도 리그 원의 다른 팀과는 단위가 다른 팀이고, 굿즈도 엄청 팔았으니까.
하지만 올여름부터는 챔피언십 팀이 되고, 사오고 싶은 선수는 프리미어리그 팀들과 경쟁해야 할 상황이다.
FFP는 최소 3년 단위 기록을 검토하니까, 올 여름에 잘못 처신하면 나중에 챔스 노릴 때 뜬금없이 발목 잡힐 수 있다.
돈지랄을 한번 시원하게 하고 싶긴 한데··· 일단 회계 기록은 깨끗하게 정리해야겠지.
쓸 수 있는 금액 파악을 위해 회계보고서를 훑어보는 사이, 책상에 제로 콜라가 놓였다. 희주다.
“선수 지를 생각에 여념이 없으신 오라버님.”
“왜.”
“나한테 아주 좋은 생각이 있어.”
별 기대감은 들지 않지만, 일단 말해보라는 의미로 시선을 던졌더니 희주가 실실 웃기 시작했다.
“구단주 인형을 열심히 사재기하는 거지. 우리 피규어는 꽤 고가품이잖아?”
하긴, 가격으로 보나 퀄리티로 보나 애들 장난감 수준은 훨씬 넘었다. 그렇다고 선수 이적료를 대려면··· 어휴, 피규어의 산을 쌓게 생겼다.
“그걸 사재기해서 다 어디다 놔두라고.”
“태워. 아니면 파묻던가.”
고오맙다. 혹시라도 피규어 사재기할 일 있으면 품목은 꼭 비서 피규어로 해주마.
콜라를 따서 들이키는 사이, 희주가 배시시 웃었다.
“농담이야. 역시 유니폼 스폰서가 제일 편하지? 그러니까 오빠가 투자한 회사 아무 데서나 우리 유니폼에 로고 넣어주면 해결되는 거 아니야? 비용은 오빠가 나중에 사비로 메꿔주고.”
나는 한숨을 쉬었다.
“누구 본업에 차질 생기는 거 보고 싶냐?”
축구계에서야 걸려도 그냥 유에파 징계로 끝날 수준이지만, 투자업계에서는 좀 다른 이야기가 된다.
잘못하면 자기 축구팀에 뒷돈 꽂는 조건으로 투자한다는 식의 이상한 낙인이 찍힌단 말이지.
괜히 맨시티가 에티하드 항공을 메인 스폰서로 쓰는 게 아니다. 구단주가 통제할 수 있으니까. 심지어 공식적으로 구단주 소유는 아닌 회사라 더욱 좋다.
게다가 이제 겨우 챔피언십에 올라갈 팀에 거액의 유니폼 스폰서를 꽂아버리는 건, 유에파를 도발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와서 털어보라고.
유니폼 스폰서는 프리미어리그에 올라간 다음에 처리할 문제고, 이번에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접근할 생각이다.
어디까지나 챔피언십에서 필요한 만큼만, 깔끔하게.
그런 처리를 해줄 수 있는 회사는, 한 군데뿐이다.
“한국하고 시차가 어떻게 되더라?”
***
전화기 너머로 친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 사장님 번호와 목소리긴 한데, 그래도 보이스피싱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서···.”
“내 민번이라도 불러줄까?”
“제 생일을 말씀해 보시겠어요?”
“모르는데.”
깊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잠시만요. 영상통화로 바꾸죠.”
잠시 후 깔끔한 사무실의 모습이 폰 화면을 메웠다. 벽면에는 금색 글자가 선명하다.
리미트리스.
버크셔 해서웨이와 나란히 투자회사의 대명사로 불리는 기업으로, 본사는 여의도에 있다.
설명하자면 전 세계 유니콘 스타트업 대부분의 지분을 다양하게 보유하고 있다거나 하는 수식어가 붙지만, 그냥 간략히 줄여 말하자면 내 회사다.
“얼굴 까먹겠어요.”
“지금 나 한국 안 들어온다고 시위하는 거지?”
“네.”
화면 너머에서 최다미가 웃었다.
반년간 내가 회사를 비우고 축구 구단주 업무만 신경 써도 본업에 아무 차질이 생기지 않게 책임져준 핵심 인재, 리미트리스의 찰리 멍거 같은 존재다.
“구단 회계 자료는 희주 씨한테 어제 받았어요.”
보통 사람에게 ‘어제 받은 자료’ 는 아직 확인 중이라는 뜻이겠지만, 다미의 경우는 시간 단위를 조금 다르게 판단해야 한다.
“미리미리 노력 많이 하셨던데요? 굿즈 만들고, 프리시즌에 빅클럽 부르고.”
초청비를 내 사비로 내는 정도의 노오오력이 있었지. 덕분에 입장료 수입은 전부 구단 매출이고.
“그래서, 얼마까지 쓸 수 있겠어?”
“그야 얼마나 유능한 회계사를 고용하느냐에 달린 거죠? 마침 회사에 영국 회계사 자격증 가진 법학 전공자가 한 명 있는데요.”
“그거 너잖아. 네가 자리 비우면 본사는 누가 지키냐.”
회계팀에서 적당한 직원 몇 명 뽑아 보내라고 지시하자, 화면 너머에서 다미가 곧바로 시무룩해졌다.
“개미는 없는 거죠?”
“개미? 우리 업무는 개미투자자와 얽힐 일 없지 않나?”
“모르시면 됐어요. 뭐, 희주 씨가 옆에 있으니 잘 처리하겠죠.”
“설마, 내가 개미 나오는 집에 살까 봐?”
그리고 희주는 벌레 못 잡는데.
“개미는 어디에나 나와요.”
방역에 대해 단호한 집착을 과시한 다미가 이야기를 돌렸다.
“출생의 비밀은 없으시죠?”
“뭔 소리야.”
“그야, 맨시티와 완전히 똑같은 수법을 쓰려면 어디 중동 왕국의 친인척이어야 하거든요. 아, 혹시 저 몰래 정략결혼 같은 걸 하셨다면···.”
“안 했어.”
“다행이네요. 그럼 통상적인 범위에서만 조금 만져 볼까요? 일단 올여름에 선수 초상권을 파시는 게 어떠세요?”
구단에 당장 매출이 생기고, 굿즈 관련해서 선수에게 지급할 로열티 비용도 외부에 떠넘길 수 있다. 수익 부풀리기의 가장 기초적인 수법이다.
적당히 도와줄 회사만 있다면.
“마침 좋은 회사가 하나 있는데요. 리미트리스 스포츠 마케팅 앤 컴퍼니라고··· 스포츠 구단의 홍보부터 회계까지 다양한 업무를 도와줄 수 있는 회사죠.”
아무리 다미가 유능해도 하루 만에 자회사를 뽑아냈을 리는 없으니, 저건 조만간 회사를 하나 차리겠다는 뜻이다.
리미트리스 회계팀을 선덜랜드에 파견할 명분을 뚝딱 찍어내는 다미를 바라보며 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거 잘 됐네. 그럼 구장 명명권도 좀 팔자. 아, 물론 가격은 시세대로 처리할 테니까 안심하고.”
“그야 어렵지 않죠. 바꾸실 이름은 정하셨어요?”
“뭐, 적당히.”
‘그 팀’이 아주 좋은 방법을 하나 알려줬거든.
선수단 초상권과 구단 명명권, 대충 그 정도만 처리해도 최소한 2부 리그 팀에 와줄 만한 선수를 돈 때문에 못 살 일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한국엔 언제 오시나요?”
“시즌 중이라 곤란한데.”
“그렇군요. 예상은 했지만요··· 비시즌 중에는 선수 사고 축구장 리모델링 한다고 안 오실 거죠?”
뜨끔하다. 화면 너머에서 다미의 눈이 새초롬하게 변했다.
“기안 하나 올릴게요. 아까 말씀드린 리미트리스 SM&C 말인데요. 업무를 원활하게 봐 드리려면 아무래도 영국 지사를 하나 세워야 할 것 같아요.”
하긴, 어째 얘가 투자회사 본업도 아닌 일에 이상하게 적극적이다 싶었는데, 아무래도 내 옆에 직원 박아놓고 수시로 회사 업무를 토스하려는 모양이다.
뭐, 그 정도는 기쁘게 해줄 수 있다. 내 업무는 기업 창업주들 얼굴 사진 보면서 종목 정하는 정도니까.
“맞다. 그러고 보니 슬슬 희주도 복학해서 졸업해야 할 텐데, 영국 지사 세우는 김에 혹시 비서도 한 명 보내줄 수 있어?”
그러자 의외의 답변이 돌아왔다.
“희주 씨가 제일 나아요. 그냥 종신시키세요.”
걔 일 처리 솜씨가 나쁘진 않지만, 그래도 종신할 정도인가? 그건 잘 모르겠다.
“능력보다 신뢰가 더 중요한 자리니까요. 정치인만 봐도 그렇잖아요? 다른 보좌관은 능력으로 뽑지만, 스케줄과 각종 기밀, 자금을 다루는 행정비서 자리는 반드시 믿을 수 있는 사람을 쓰죠.”
다미는 마치 눈에서 불이라도 뿜을 듯한 기세로 선언했다.
“신뢰할 수 있는 사람. 그 조건에서 희주 씨보다 나은 사람은 거의 없어요.”
‘거의 없다’ 는 수식어의 의미는 명확하다. 뭐, 가끔은 측근의 기분을 맞춰 줄 필요도 있겠지.
“그렇겠네. 더 나은 사람은 여의도를 지켜야 하니까.”
그러자 다미의 얼굴에 예쁘게 미소가 피었다.
“아하하. 감사합니다. 그래서 사고 싶은 선수는 정하셨어요?”
“그런 셈이지.”
그러자 다미의 얼굴이 조금 어두워졌다.
“요즘 축구 이적시장에 거품이 장난 아니라던데요. 오버페이가 흔하다던데···.”
“그럴 일은 없어.”
적어도 선수의 가치보다 더 주고 살 일은 영원히 없다. 이마의 숫자가 안 보이는 날이 오기 전까지는.
“하긴, 사장님은 한 번도 정가보다 비싸게 투자한 적이 없죠. 괜한 참견을 했네요. 사실 제가 축구는 잘 모르거든요.”
“그래서 같이 일할 수 있는 거지.”
혹시라도 다미 쟤가 축덕이라, 레알이나 바르샤 같은 데 팬질하면서 깐죽거렸으면 진작에 잘랐을 거다.
선덜랜드 팬은 성적에 민감하거든.
다미가 깔깔거리기 시작했다.
“저희 부모님도 맨날 야구 보다가 싸워요. 저는 축구팬이 되지 말아야겠어요.”
그거참 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
축구와 관련 없는 일을 하는 직장 동료 두 사람이 둘 다 축구팬일 가능성은 희박하고, 심지어 같은 팀 팬일 가능성은 거의 기적에 가까우니까.
투자 파트너를 잃는 위험을 감수하느니, 축구팬 한 명 정도 잃는 게 낫지. 암.
***
축구와 관련 없는 일을 하는 직장 동료 두 사람이 같은 팀 팬이라는 기적의 주인공, 마일즈 우드와 수잔 베일리는 근심하고 있었다.
“팀장님.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의 명명권이 팔렸다는데요? 리미트리스 SM&C인가? 그런 회사가 사 갔대요.”
“으음.”
기사에 따르면, 조만간 경기장 이름이 [리미트리스 아레나] 로 바뀔 거라는 추측이 붙어 있었다.
“소스가 선덜랜드 데일리잖아요? 그럼 이거 사실상 오피셜 아닌가요? 팀장님, 우리 다음주 홈 경기부터 리미트리스 아레나로 직관 가야 하는 거에요?”
수잔의 이야기를 들으며, 마일즈는 깊게 탄식했다.
“하필이면 아레나라니.”
예전, 선덜랜드의 최대 라이벌, 뉴캐슬의 홈구장 이름이 바뀐 적이 있었다. 세인트 제임스 파크에서, 스포츠 다이렉트 아레나로.
뉴캐슬 팬들은 격분했고, 선덜랜드 팬들은 신나게 조롱했다. 돈 몇푼에 자존심을 팔았다고. 심지어 스포츠 다이렉트면 엄청 싼티나는 회사 아니냐는 레파토리는 덤이었다.
[RIP 세인트 제임스 파크. RIP 뉴캐슬의 역사]
매일같이 경기장 옆에서 장례식이 열릴 만큼 과열된 사태는, 스폰서가 명명권을 되사들여 경기장 이름을 세인트 제임스 파크로 돌려놓는 해프닝으로 끝났다.
“선덜랜드가 뉴캐슬같이 근본 없는 팀이 되어 버렸어··· 경기장 이름을 팔다니.”
탄식하면서도, 마일즈는 애써 위안거리를 찾으려 노력했다. 그래도 리미트리스 정도면 스포츠 다이렉트보다는 나을 거다. 리미트리스는 세계적인 투자회사니까.
‘그런데, 리미트리스가 누구 회사였더라?’
고개를 갸웃하는 마일즈의 곁에서, 수잔이 반색했다.
“팀장님! 다른 뉴스가 떴어요!”
[리미트리스 SM&C. 명명권 재매각]
“재매각이라니,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수잔은 대답 대신 자신의 스마트폰을 내밀었다. 리미트리스 SM&C의 성명문이었다.
-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는 단순한 경기장의 이름이 아니다. 탄광의 희미한 불빛 아래에서 살아온, 선덜랜드 사람들의 인생 그 자체를 상징하는 이름이다.
- 당사는 깊은 내부적 검토 끝에,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의 새 이름을 짓는 무게를 감당할 수 없음을 통감한다.
- 익명의 독지가가 SM&C가 보유한 명명권의 재구매를 희망하였고, 당사는 해당 명명권을 발동하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 권리를 양도하였다.
“팀장님. 이 익명의 독지가 말인데요··· 혹시 썬 아닐까요? 경기장 명명권을 도로 사들일 만큼 돈이 많으면서, 선덜랜드에 호의적인 부자가 또 있을 리 없잖아요?”
그제야 마일즈는 리미트리스 소유주가 누구였는지 떠올렸고, 미친듯이 웃었다.
***
4월 즈음, 내 고민거리는 대부분 사라졌다.
구장 명명권과 초상권 덕분에 다음 시즌 이적료에 대해서는 큰 고민할 필요가 없어졌고, 선덜랜드와 셰필드는 나란히 챔피언십 행 직행 열차를 탔다.
그리고 SM&C 직원들의 면밀한 뒷조사 결과, 에디 레이놀드는 생각보다 훨씬 좋은 선수로 밝혀졌다.
“훈련에 불성실한 적은 없습니다. 훈련에 마지막으로 지각한 적이 열한 살 때랍니다.”
“여자관계도 깨끗합니다. 혹시나 싶어서 남자관계도 조사해봤습니다만 아무것도 안 나왔습니다.”
“술도 담배도 약물도 도박도 안 합니다.”
이쯤 되면 거의 축구만 하는 기계라는 소리다.
“동료들 사이에서 평이 박한데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팀워크와는 거리가 먼 선수라고 하던데요.”
보고하는 직원은 물론, 나 또한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축구만 하는 기계들이 동료들에게 흔히 들을 만한 평가다.
그 시점에서, 에디 레이놀드의 유일한 “하자” 라면, 그를 노리는 클럽 명단에 리버풀이 포함되었다는 것이었다. 그 팀은 센터백도 줄부상 상태니까.
빅클럽이 끼어드는 시점에서 선수 몸값은 천정부지로 뛴다. 그나마 리버풀이면 큰돈은 안 쓰는 편이지만, 어디까지나 ‘빅클럽치고 그나마’ 다.
덕분에 에디의 이적료가 당초 예상한 천만 파운드는커녕, 이천만 파운드도 넘길 가능성이 생겼다.
그건 조금 곤란하다.
돈은 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원칙의 문제니까.
내 눈에 보이는 에디의 가치는 300. 파운드로 환산하면 대략 이천만 파운드의 가치가 있는 선수다. 딱히 선수를 사서 이득을 남기려는 게 아니니까, 이천만 파운드까지는 써도 된다.
하지만 그 이상의 금액은, 내 원칙을 건드리는 영역이다.
눈에 보이는 가치보다 비싼 돈을 투자하지 않는다. 투자자로서의 나를 지탱해준 원칙이었다.
구단주로서는, 달라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