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어제 내린 눈처럼 (1)
<우승은 어제 내린 눈일 뿐이다 - 리누스 미헬스>
우승 당일, 그날은 하루종일 축하가 이어졌다.
“썬, 축하해! 이 정도면 라인 위에 올라간 거 아닐까?”
프레스 팀장 애니가 가장 먼저 나를 찾았다.
말로는 나보고 축하한다는데, 가만 보면 정작 자기도 입이 귀에 걸렸다.
하긴, 예전에는 언론인이라 제 3자 입장을 지키려 노력했지만, 지금의 애니는 선덜랜드 스태프다. 당연히 팀의 우승을 함께 기뻐할 자격이 있다.
나 또한 자꾸만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조금도 감추지 않았다. 오늘 하루쯤은 그래도 되는 날이니까.
우승은 내일의 태양이 뜨면 녹아 없어질 눈처럼 덧없는 존재라지만, 그래도 눈 내린 당일에는 순백의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는 것처럼.
물론, 언론인으로 잔뼈가 굵은 애니는 단순한 축하 때문에 나를 찾은 것은 아니었다.
“외부 보도용 사진 검토 좀 받으려고··· 어때? 잘 나왔어?”
애니가 보여준 사진은 두 장이었다.
일제히 도열한 선수단 사이에서 트로피를 들어 올리는 페르난데스의 사진인데, 구도는 두 종류로 준비했다. 하나는 단체사진 느낌으로, 다른 하나는 바스트샷으로.
“느낌이 좋네요.”
이제는 고전이 된 농구 걸작 만화였다면 ‘그러나 이 사진이···.’ 같은 결말로 이어지는 플래그겠지만, 우리는 무사히 우승했다. 그러니 이 사진은 잘 써먹을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사진도 보도용으로 같이 배포하려고 하는데.”
애니는 곧바로 다음 사진을 내보였다.
감격의 눈물을 훔치는 팬들의 모습 몇 장, 그리고 뜨겁게 포옹하는 사제, 로저스 감독과 브라이언의 사진이다.
정말 잘 찍었다. 당장이라도 구단 SNS 같은 데 올리고 싶다.
그런데, 그다음 사진이 어째 수상하다.
“다 좋은데요··· 그런데 이건 뭡니까?
“아, 그거? 감동의 순간, 구단주 썬의 모습.”
마치 수십년만에 만난 이산가족처럼 서로 뜨겁게 얼싸안는 희주와··· 나다. 빌어먹을.
“기레기 극혐한다는 분이, 파파라치에도 소질이 있는 줄은 몰랐는데요.”
“하기 싫은 거지, 할 줄 모르는 게 아니니까··· 그래서, 이건 내지 말라고?”
“네, 지우세요.”
애니는 잠시 입맛을 다셨지만 순순히 사진을 지웠다.
“감동적인 씬이라고 생각하는데.”
“친남매들은 그렇게 생각 안 할 겁니다.”
스포츠가 주는 감동은, 독한 알콜보다도 사람을 훨씬 취하게 만든다. 그러니까 술에 취해 잠깐 실수한 상황 같은 거다. 두 번 다시 그럴 일 없을 거고.
절대로 없을 거다.
***
선수단도 모처럼 우승 파티를 즐겼다.
메뉴를 준비하던 쉐프 카일이 의견을 물었다.
“선수식 레시피도 이제 궤도에 올랐다고 자부합니다만, 그래도 한 번쯤은 재료나 조리법 제한 없이 정말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고 싶습니다.”
“으음.”
심정적으로 카일의 의견에 공감이 갔다. 어차피 시즌도 끝났고, 하루 정도는 느슨해져도 괜찮지 않을까 싶어서.
다만, 구단주가 선수 몸 관리에 시시콜콜하게 참견하는 모양새는 피하고 싶다.
“메뉴를 일반식으로 할지, 아니면 선수식인지의 문제는 나보다는 선수단 주장과 의논하라고 하면··· 안 되겠군요.”
“봐주십쇼. 그랬다간 단체로 닭가슴살 쉐이크 먹게 될 겁니다.”
아무렴 페르난데스가 그렇게까지 하진 않겠지만.
“시즌 종료 직후니까 하루쯤은 괜찮겠지만, 그래도 최종적으로는 코칭스태프와 의논해서 결정하시죠. 다만 술은 안 됩니다.”
우리가 무슨 트레블을 한 것도 아니고, 리그 원 우승컵 정도로 술파티를 벌이고 싶진 않았다. 특히 오늘은 경기 직후이기도 하니까, 알콜은 금물이다.
카일이 웃었다.
“술은 필요 없을 겁니다. 스포츠의 감동은 알콜보다 훨씬 사람을 취하게 만드니까요.”
하긴 그렇지. 바로 조금 전 내가 경험한 이벤트다.
한편, 스태프들도 각자의 방식으로 우승을 축하했다.
“CS팀 전 직원은 내일부터 다음 시즌 개막까지, 유니폼에 견장을 착용하겠습니다. 별 16개를 넣어서요.”
“시설관리팀입니다. 우승 축하 폭죽 사용 허가를 받았습니다. 오늘 밤 바로 쏘겠습니다.”
나중에 챔스 우승하면 어쩌려고 벌써부터 폭죽인가 싶은 생각이 드는 한편, 그동안 선덜랜드가 얼마나 트로피에 목이 말랐었는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선덜랜드의 마지막 1부 리그 우승으로부터는 대략 90년이 지났고, FA컵 우승도 벌써 50년 전의 일이다.
그러니 폭죽 사용 허가도 쉽게 받아냈을 것이다. 선덜랜드의 우승은 우리만의 축제가 아니라 이 도시 전체의 축제니까.
이럴 땐 화끈하게 지르는 게 좋다.
지름신은 언제나 옳거든.
“좋습니다. 폭죽에 더해 술도 터트립시다. 우리 제휴 펍에 연락 돌려서, 오늘 맥주는 전부 내가 사는 거로 하죠.”
내 지시에, 조엘과 린다가 신나게 달려 나간 건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
한편 잔디 관리인 리지 또한 무척이나 열성적인 반응을 보였다.
“썬, 다음 시즌 전까지 깔끔하게 복구할 테니까 그라운드 잔디에 글씨 쓰면 안 될까요? EFL 리그 1 챔피언이라고요.”
좋은 생각이다. 나는 빙긋 웃으며 허락했다.
“괜찮겠네요. 진행합시다.”
그런 우리를 바라보며 샐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다들 왜 그렇게 호들갑인지 이해를 못 하겠는데요. 챔스우승도 아니고, 고작 3부 리그 우승인데···.”
하지만, 우리는 지금의 새침한 태도가 샐리의 본심이 아니라는 걸 안다. 분석실 문틈 사이로 들려나온 샐리의 비명 같은 환성을 이미 다 들었거든.
게다가, 겉으로는 새침해 보이는 샐리의 얼굴도 그녀의 벅찬 감정을 미처 다 숨기지는 못했다.
예를 들면 눈 주위의 화장을 고친 흔적 같은 것.
뭐, 오늘 하루쯤은 냉철한 전력분석관 대신 감정적인 스태프로 남아도 괜찮을 것이다.
우승이라는 눈은, 하루 만에 녹지는 않으니까.
***
딱 하루 동안 우승의 기쁨을 만끽하고, 우리는 다음날부터 통상 업무로 돌아왔다.
선수들은 휴가를 떠났고, 시즌 중 쉬기 어려운 메디컬 스태프나 CS팀 직원들 역시 돌아가며 휴가를 쓰기로 했다.
하지만 쉴 수 없는 사람도 있다.
대표적인 인물이 시설관리팀장 조엘, 그리고 신상품기획팀장 아드리안이었다.
구단주실로 두 사람을 불러 업무 관련 이야기를 나눴다.
조엘이 먼저 보고를 시작했다.
“지시하신 대로, 드레싱룸 리모델링 공사에 착수했습니다. 그리고 메가스토어는 6월 둘째 주 오픈 예정입니다.”
“알겠습니다. 계속 신경써주세요.”
고개를 끄덕인 다음, 나는 아드리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메가스토어 오픈에 맞춰서 신상품 라인업을 출시했으면 합니다. 리그 원 우승도 했으니까요.”
그러자 아드리안이 냉큼 대답했다.
“마침 보고드리려던 참입니다. 우승 기념으로 한정판 피규어 세트를 준비중에 있습니다.”
“우승 기념 한정판이라면, 기존 피규어와 어떻게 다른 겁니까?”
“소품에 트로피가 추가됩니다. 그리고 선수들 팔 관절에 트로피를 들어올릴 수 있는 기믹을 추가하게 됩니다. 스타디움 모형에는 EFL 리그 원 챔피언 문구를 넣을 거고요.”
“그건···.”
악랄하다는 말을 애써 삼켰다.
우리 피규어는 퀄리티가 무척 높은 편이고, 그에 비례해 가격 또한 고가인데, 심지어 한정판 세트라면 얼마나 받아먹을지 상상도 안 간다.
그런데도 골수 팬이라면 사지 않을 수 없을 테니, 악랄하다는 표현은 정확하다.
“일단 피규어 세트는 계획대로 추진하죠. 대신 우승 기념으로 다른 굿즈도 만들었으면 합니다.”
“다른 굿즈라고 하시면···.”
“마진은 많이 안 남아도 됩니다. 대신 꼬마 팬들도 용돈 모으면 살 수 있을 만한 가격대의 상품을 원합니다.”
우승의 기쁨은 팬들 모두와 나누는 거니까.
그런 내 의도를 전달하자, 아드리안은 곧바로 뭔가가 떠올랐는지 열심히 메모를 시작했다.
“그리고 구단주님, 레플리카 킷에 구단주님 마킹을 넣고 싶다는 니즈가 많습니다.”
“내 마킹이요?”
이제 와서 선수도 아닌 사람 마킹을 왜 넣냐고 발뺌할 생각은 없다. 수시로 유니폼 걸치고 구단 홍보 나간 장본인은 바로 나니까.
다만, 내 경우는 마킹을 넣기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
“등번호는 어떻게 들어갑니까?”
“현재로선 등번호를 비우고 이름만 넣는데, 그러면 예쁘지 않아서 고민입니다. 이 기회에 적당한 등번호를 하나 정하면 어떨까요?”
“괜찮은 아이디어 같군요. 하나 정합시다.”
야구처럼 스태프가 유니폼을 입는 종목에서는 코칭스태프도 등번호를 다는 경우가 흔하다고 들었다.
축구에서는 드문 사례지만, 우리 팀에선 내가 종종 유니폼을 걸치니까 구단에서 자체 지정한 내 등번호 하나쯤은 있어도 괜찮긴 할 것이다.
“유스 시절에 쓰셨던 번호, 9번을 희망하는 팬들이 많은데요.”
“그건 현역 선수들이 써야 하니 안 됩니다. 아예 선수들이 쓸 수 없는 번호를 고르는 게 좋겠군요.”
“그러시면 100은 어떻습니까? 구단주님은 백만장자시니까요.”
아드리안의 의견에, 나는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0으로 하죠.”
축구선수 이희성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숫자다. 고개를 끄덕이는 아드리안을 향해, 나는 조용히 덧붙였다.
“괜찮으면 0번 마킹 유니폼 하나 가져다줄 수 있겠습니까? 물론 비용은 지불할 겁니다.”
“알겠습니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아드리안, 그리고 조엘이 차례로 방을 빠져나갔다. 나는 천천히 의자 등받이에 몸을 실었다.
선수로서의 내 가치, 내 눈에만 보이는 숫자는 0이었다. 프로가 될 수 없다는 냉혹한 선고였다.
그 숫자를 바꾸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 증거가 내 무릎에 남아 있다.
그날 이후 나는 이마에 보이는 숫자를 믿게 되었다. 그 숫자가 사람의 가치 한계치라고.
그런 원칙을 세우고 충실히 지켰기에, 나는 투자자로 성공할 수 있었다.
에디 역시 예외가 될 수 없다. 그러니 에디의 이적료로, 이천만 파운드 이상을 쓰지 않을 것이다.
나는 전화기를 들었다.
***
“썬, 우승 축하한다.”
“고맙다.”
자리를 권하며, 나는 빠르게 덧붙였다.
“오늘은 어디까지나 친구로서 만나는 거야. 축구 관계자가 아니라 옛 유스 동료로서.”
그러자 헨도가 피식 웃었다.
“그렇게 강조 안 해도 괜찮아. 설마 챔피언십 팀에서 리버풀 주장을 빼돌리려 들겠어?”
“맞는 말이긴 한데, 오랜만에 만나서 팩트로 때리지는 말자.”
그러자 헨도가 낄낄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잠시 후 바텐더가 메뉴를 가져왔고, 헨도는 대충 가장 비싼 칵테일과 물 한 잔을 주문했다.
의외다. 헨도는 술 잘 안 마시는데···.
“꽤 독한 술 골랐다?”
“독한 거야? 평소에 안 마셔서 몰랐지.”
“오늘은 마시려고?”
그러자 헨도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물만 마실 거야. 그래도 자릿세는 내야 하니까 그냥 비싸 보이는 거 골랐어.”
“예전엔 콜라 같은 것도 곧잘 마시고 하더니만.”
“어릴 때 이야기지. 누구 덕분에 지금은 다 끊었어.”
옛날이야기를 주고받기 시작하니, 별 영양가 있는 이야기 없이도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무한정 옛 추억만 공유할 수는 없었다. 아무리 옛 친구 사이라지만, 선덜랜드 구단주와 리버풀 주장이 수시로 얼굴을 마주하는 건 서로에게 곤란하니까.
그나마 오늘은 우승 축하라는 명분이라도 있지만, 다음에는 그런 명분이 없다.
슬슬 본론으로 들어갈 시간이다.
“그래서, 다친 데는 좀 괜찮냐?”
그 전에 빌드업 좀 하고.
“어이쿠, 내 걱정해 주는 거야? 눈물난다.”
“아니, 네가 멀쩡해야 너희 팀이 우리 선수 안 넘볼 거 아니야.”
“잭? 걔는 선덜랜드 종신 선언했잖아.”
물 한 모금으로 입을 축인 다음, 헨도는 특유의 조근조근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뭐, 요즘은 센터백이 제일 아쉽지. 다이크가 장기부상 끊었으니까. 후보가 누군지는 말해주기 그렇지만···.”
“셰필드의 에디 레이놀드?”
그러자 헨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너 우리 스카우트 팀에 스파이 심었냐?”
나는 웃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고, 잠시 나를 귀신 보듯이 바라보던 헨도가 웃음을 터트렸다.
“맞다. 에디네 에이전트가 너랑 점심 먹었지. 십만 파운드짜리로.”
“이적 이야기는 안 했어.”
“공식적으로는 그렇겠지··· 그 에이전트 안 되겠네.”
“오해 없도록 말해두자면, 그 친구는 너희 팀 이름은 입에도 안 올렸다.”
헨도와 마찬가지로 물 한 모금으로 입을 축인 다음, 나는 빠르게 덧붙였다.
“다만 시즌 끝나기도 전에 에이전트가 여기저기 돌아다닐 정도면 에디가 매물로 나오는 건 확실하고, 마침 너희는 센터백이 필요해 보이는 팀이니까.”
SM&C 직원들이 파악한 바로는, 에디를 노리는 후보는 몇 팀 정도 있다.
챔피언십의 스토크와 왓퍼드, 이번에 프리미어에 복귀하는 스완지와 노리치 같은 팀이 종종 거론된다.
하지만, 그들 중 리버풀 이상의 자금력과 네임밸류를 갖춘 구단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에디의 이적료는 사실상 리버풀이 결정할 가능성이 높다.
리버풀이 에디를 얼마나 절실히 원하는지를 알아내는 것, 그게 오늘 헨도를 만난 목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