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어제 내린 눈처럼 (2)
챔피언십 팀과 프리미어리그 팀이 서로 같은 선수를 노리는 일은 아주 드물다. 특히 그 챔피언십 팀이 이번에 갓 승격했다면 더욱.
그렇기에 헨도가, 선덜랜드와 리버풀이 둘다 에디를 노리는 중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기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에디라···.”
상황을 파악한 헨도가 조용히 물잔을 입에 가져갔다.
“하긴, 작년에 너희가 톰슨을 빼갔었지? 노리치가 강등당하자마자.”
“맞아. 노리치는 톰슨 주급이 꽤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더라고. 덥썩 물더라.”
“자금력으로 프리미어리그 팀에 비빌 수 있는 챔피언십 팀이라··· 적응 안 되네. 자꾸 네가 갑부라는 걸 까먹나 봐. 젠장, 더 비싼 술 시킬걸.”
“이미 제일 비싼 거 시키지 않았냐?”
시켜 놓고 입도 안 댄 술잔 쪽에 시선을 돌리자, 헨도가 낮게 웃었다.
“하긴, 물값으로 이 정도면 비싸긴 하다.”
“아무튼, 보다시피 돈은 별 문제가 아니야. 다만, 지금의 선덜랜드가 우리가 뛰던 그 시절 위상이 아니라는 게 문제겠지.”
“에디의 마음에 달린 거겠구나.”
“셰필드보다는 선덜랜드가 매력적으로 느끼게 할 자신은 있어. 다만, 에디에게 다른 선택지가 얼마나 있느냐가 관건이지.”
예를 들면 리버풀 같은.
슬쩍 돌려서 본론을 꺼내자, 헨도의 눈빛이 흔들렸다.
헨도는 과묵하고, 가끔 말할 때도 조근조근한 편이다. 지금처럼 경기장 밖에서 만날 때의 그는, 마치 수줍음 타는 소년처럼 보인다.
하지만 헨도는 결코 나약하지도, 멍청하지도 않다. 사이드라인 안쪽으로 한 걸음 넘어가고 나면, 그는 챔스와 리그를 지배한 팀의 주장다운 모습으로 돌변한다.
헨도는 결코 이 상황에서 내 의도를 짐작 못 할 정도의 바보도 아니고, 자신이 몸담은 구단에 해가 될 이야기를 할 만큼 나이브한 인물도 아니다.
따라서 그의 망설임은, 차라리 신중함에 가까웠다. 어디까지가 오랜만에 만난 옛 친구에게 해줄 수 있는 조언이고, 어디부터 소속팀에 해가 될 발언인지를 판가름하는 것이리라.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헨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에디와 만나본 적 있어?”
“아니, 못 만나지. 대놓고 사전 접촉은 여러모로 좀 그렇잖아?”
사실상 이미 매물로 나온 상태이니만큼, 사전 접촉은 여러모로 바람직하지 않다.
덕분에 에디와는 말 한마디 못 해봤다. 그저 샐리의 분석 프로그램 영상을 씹고 뜯고 맛보고 즐겼을 뿐.
“뭐, 나도 경기장에서 상대해 본 게 고작이지만··· 한 번이라도 실물을 봤으면 그런 고민 안 했을 텐데.”
부드럽게 웃으면서, 헨도가 덧붙였다.
“걔, 유스 시절의 우리랑 되게 닮았거든.”
“우리?”
“너, 나, 그리고 브라이언. 그렇게 셋을 합친 듯한 선수야.”
이 경우, 어디를 어떻게 합치느냐가 관건이 된다.
최악의 조합은 아마 브라이언의 피지컬, 헨도의 말재주, 내 무릎··· 일 텐데, 사실상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랬으면 그건 그냥 일반인이니까.
“유스 시절의 너만큼 철저하고, 브라이언만큼 독특한 축구관을 가졌어. 그리고 당시의 나만큼 자신감이 있지.”
지금의 차분하고 성실한 헨도의 모습과는 달리, 어린 시절의 헨도는 무척 자신감이 넘치는···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다소 건방진 선수였다.
성인이 되어 빅클럽의 주전으로 뛰는 선수 대부분이 그런 것처럼, 어릴 때의 헨도는 그야말로 천재라고 불리기 충분한 자질을 가졌으니까.
덕분에 에디라는 선수에 대해 조금 알 것 같았다.
이적위원회나 스카우터에게는 재능 있는 어린 선수라는 이유로 호평받겠지만, 드레싱룸의 분위기를 지켜내야 하는 감독이나 주장에게는 별로 선호되지 않는 선수.
에디에 대해 조사한 SM&C 직원들의 평가, [팀워크와는 거리가 먼 선수] 라는 말이 새삼 무겁게 느껴졌다.
“다루기 무척 힘들겠네.”
내 소감에, 헨도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덕분에 나는 리버풀의 입장을 완벽하게 추측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의 리버풀은 그야말로 전성기를 질주하는 중이다. 2년 연속 챔스 결승에 가 봤고, 챔스 우승 다음에는 염원하던 리그 트로피를 들어본 팀이다.
하나의 작품으로 충분히 완성된 팀, 그런 팀은 지나치게 개성이 강한 선수, 모난 선수를 선호하지 않는다.
헨도가 내게 줄 수 있는 최대한의 정보였다.
“원하는 대답이 되었으면 좋겠네.”
“충분해. 고맙다.”
“우승 축하 선물이라고 치자.”
빙긋 미소를 보낸 다음, 헨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나는, 자리에 조금 더 머물렀다. 입도 대지 않은 술잔 두 개를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리버풀은 에디를 절실히 원하지 않는다. 그들은 잘 짜여진 팀이니까.
그렇다면, 선덜랜드에는 어떨까? 선덜랜드에는 과연 에디가 필요할까?
잠시 고민하다가, 생각이 정리되기도 전에 웃음이 먼저 나왔다. 지금 무슨 멍청한 생각을 하고 있나 싶어서.
지난 1년간 3부 리그에서 생태계 교란종 취급을 받다 보니, 잠깐 착각했던 모양이다. 선덜랜드는 아직 배고픈 팀, 갈 길이 먼 팀인데.
유일한 업적이라는 3부 리그 우승은 어제 내린 눈처럼 곧 녹아 없어질 것이고, 오는 8월부터는 갓 승격팀으로서 2부 리그에서 싸워나가야 할 처지다.
지금은 독이 되더라도, 삼켜야 한다.
완성된 퍼즐에는 필요 없는 조각이라도, 우리 같은 팀에게는, 어쩌면 훌륭한 개성이 될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우리 팀에는 선수 육성의 대가 로저스 감독이 있고, 선수단의 분위기를 잡아줄 페르난데스와 톰슨 같은 베테랑이 있다.
에디를 훌륭히 키워낼 자신은 있다.
이적 시장 첫날. 나는 공식적으로 협상에 돌입했다.
외교적 수사로 점철된 장문의 문장을 셰필드에 보냈는데, 요약하면 결국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 에디 레이놀드를 영입하고 싶다. 희망하는 이적료를 알려달라.
셰필드의 답변은 무척 간단했다.
- Not for sale.
“안 판다는데, 오빠?”
“그럴 리가 있나.”
선수의 에이전트가 대놓고 나와의 점심 식사를 십만 파운드에 낙찰받았을 정도다.
셰필드가 에디를 지키려고 했다면 격분했을 만한 사건이었겠지만, 셰필드는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은 채 침묵했었다. 그리고 에이전트 제이미는, 셰필드는 우리에게 에디를 팔 수도 있다는 정보를 흘렸다.
셰필드는 에디를 팔 의사 만반이다.
물론, 그렇다고 ‘에이전트 만나게 해 놓고 이제 와서 왜 딴소리임?’ 같은 식으로 추궁할 수는 없다. 그랬다가는 사전 접촉 혐의를 옴팡 뒤집어 쓸 테니까.
뭐, 문의에 답이 없으면 곧바로 제안으로 넘어가면 그만이다.
마침 셰필드 단장은 말 돌리는 걸 선호하지 않는 듯해서, 우리도 외교적 수식어는 죄다 쳐내기로 했다.
리버풀이 거금을 때려부으면 모를까, 지금 에디에게 관심을 보인다는 다른 팀, 스토크나 왓퍼드 정도는 충분히 돈으로 떼어낼 자신이 있었다.
괜히 다른 팀이 따라붙지 못하게 시작부터 세게 때리기로 했다. 결과적으로는 그게 싸게 먹히는 경우가 훨씬 많다.
- 천만 파운드.
- NFS
- 천이백만 파운드.
- NFS
“혹시 선수가 우리 팀을 마음에 안 들어하는 거 아닐까? 왜, 프리미어리거 출신 중엔 1부 리그 팀 아니면 거들떠도 안 보는 사람들이 많다면서.”
“그렇긴 한데, 에디는 해당 없다.”
에디의 에이전트는 챔피언십에서 뛰는 걸 전제로 내게 접근했거든. 무려 십만 파운드나 쓰면서.
이마에 팔십억 원 가치가 붙은 에이전트가 선수의 속내도 모를 만큼 멍청하진 않을 테니, 에디는 조건만 맞으면 우리 팀에서 뛸 의향이 있는 선수라고 봐야 한다.
“아이 씨, 그러면 왜 이러는 건데!?”
“돈 더 달라는 거지. NFS가 아니라 MM이라고 읽어야 해. More money.”
어쩌면 잔뜩 몸이 달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 싶다. 챔피언십 수준에서 이적료 천만 파운드도 꽤 거액에 해당하는데, 심지어 나는 곧바로 천이백만 파운드로 레이즈를 쳤다.
이 기회에 제대로 뜯어내 보려는 거겠지.
내게 돈을 잔뜩 뜯어내면 일석이조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같은 챔피언십에서 한정된 승격 티켓을 놓고 경쟁할 사이니까.
내게서 돈을 잔뜩 뜯어내면 그만큼 셰필드는 강해지고, 선덜랜드의 영입 전선에는 상대적으로 차질이 생긴다.
셰필드의 의도를 파악한 희주가 분노로 몸을 떨었다.
“아, 짜증나!”
아무래도 희주는 흥정에 능숙한 성격은 아니다. 주로 백화점 명품관에서, 정찰제로 쇼핑하는 데 익숙하니까.
하지만, 이번 거래에서 희주는 어디까지나 메신저 역할에 불과하다.
선덜랜드의 협상 테이블에 앉은 사람은 나다. 그리고 나는 직업 특성상, 정찰제가 아닌 거래에 매우 익숙한 편이다.
리버풀이 절대 오버페이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 그리고 에디의 최대 가치.
그 두 가지 정보를 손에 쥔 이상, 셰필드가 내게 바가지를 씌울 방법은 없다.
셰필드의 유일한 무기는 자기들이 이 협상의 주도권을 가졌다는 착각이니, 우선 그 무기부터 뺏고 다시 협상하면 되겠지.
“미팅 약속 하나 잡아 줘. 최대한 빠른 시일 안에.”
그러자 희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누구하고? 셰필드 단장? 그 인간은 좀 비추인데.”
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에디 에이전트.”
***
“셰필드의 욕심이 너무 과하군요.”
만나서 인사를 나누자마자, 제이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챔피언십 구단끼리 이적료 천이백만 파운드는 결코 적지 않은 금액입니다. 에디는 앞으로 훨씬 몸값이 비싸질 선수긴 하지만··· 그렇다면 차라리 셀온 조항을 요구하는 게 합리적일 텐데요.”
셀온 조항, 선수를 다른 구단에 이적시킬 경우 수입의 일부를 나눠주는 계약이다. 앞으로 몸값이 뛸 게 확실한 선수를 부득이하게 팔아야 할 때 많이 쓰는 조항이다.
“셀온 조항은 넣을 겁니다.”
“그렇게 다시 비드하셨습니까? 저는 아직 전해듣지 못했는데요.”
“아뇨. 오늘은 다른 거래 건으로 뵙자고 한 겁니다.”
“네?”
“여러 선수들을 관리하고 계시더라고요.”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에디··· 아하, 이해했습니다.”
내 의도를 깨달은 제이미가 잠시 눈을 빛냈지만, 이내 그의 표정에는 단호한 거부의 의사가 떠올랐다.
“에디를 위해 저와 계약한 다른 선수를 들러리 세우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들러리 세울 생각은 없습니다. 셰필드를 자극하려고 마음에도 없는 다른 선수를 괜히 찔러보는 그런 짓은 하지 않습니다. 조건에 맞는 선수는 확실하게 영입할 겁니다.”
마침 윙포워드도 한 명 필요하거든.
슬슬 눈을 빛내기 시작한 제이미를 바라보며, 나는 차분하게 선수의 이름을 거론했다.
“우선, 스티븐 와이트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군요.”
***
셰필드 FC의 홈, 브라몰 레인.
셰필드의 구단 사무실에서 단장 해리스가 초조하게 손을 비볐다.
‘이 놈들 봐라?’
선덜랜드의 마지막 비드를 거절한지 이 주일이 지났는데도 아직 아무 소식이 없다.
‘혹시 손을 뗀 거 아니야?’
슬슬 불안감이 들기 시작했다.
‘에디는 이번에 반드시 팔아야 하는데.’
에디의 마음은 진작에 셰필드를 떠났다. 언제든지 이적 요청서를 내밀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그런데도 해리스가 선덜랜드의 이적 제의를 곧바로 거절한 것은, 최대한 돈을 긁어내기 위한 협상 테크닉이었다.
“선덜랜드는 다른 움직임이 없나? 혹시 에디 말고 다른 선수를 노린다거나···.”
그러자 비서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그런 루머는 전혀 없고요. 요즘 제이미와 자주 만나는 것 같아요. 사전 접촉으로 한번 걸어볼까요?”
“놔 둬. 그러다 정말 손 떼버리면 골치 아파져.”
선덜랜드 측과 제이미가 자주 만난다는 소식이 해리스의 불안감을 상당히 억눌렀다.
“계속 에이전트와 만나는 건 청신호지. 아직 에디를 사고 싶다는 신호 아니겠어? 좀 더 기다리지.”
“그래도 천이백만 파운드면 나쁜 조건은 아니었는데요. 오히려 엄청나게 후한 조건에 가깝고요.”
비서의 우울한 목소리를 들으며, 해리스는 고개를 저었다.
“다른 구단이면 몰라도 선덜랜드잖아. 거기 구단주가 투자의 신이라면서. 이 기회에 한번 제대로 긁어내야지.”
젊은 선수니까 셀온은 반드시 넣고 싶고, 조금만 더 버티면 이적료를 천오백만 파운드 이상으로 늘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상상만으로도 군침이 돌아서, 해리스는 입술로 혀를 핥았다.
“그러니까 말이죠.”
비서의 목소리는 해리스와 대조적으로 우울했다.
“투자의 신이라고 불리는 사람이, 과연 오버페이를 할까요?”
해리스가 고개를 흔들었다.
“투자판과 축구는 달라. 투자자라면 수백, 수천 군데의 회사에도 투자할 수 있겠지. 앞날이 유망한 회사를 찾아서, 돈 묻어놓고 버티면 그만이야.”
하지만 축구는 다르다. 어느 정도의 성적을 내야 하고, 스쿼드는 25인까지로 제한된다.
따라서 돈을 좀 쓰더라도 당장 필요한 선수를 사야 한다.
그때, 비서의 목소리가 우울하게 단장실을 메웠다.
“저기, 단장님?”
“왜.”
“선덜랜드가 이적 오피셜 냈는데요.”
“무슨 소리야. 나는 비드 수락 안 했는데.”
“아뇨, 에디가 아니라··· 다른 선수요. 스티븐 와이트라는데요.”
“스티븐 와이트? 그건 또 누구야?”
고개를 갸웃거리는 해리스를 향해, 비서가 한결같이 우울하게 대답했다.
“블랙번 소속이고, 포지션은 풀백이에요.”
“제이미와 만나고 다닌다더니? 뜬금없이··· 가만, 이런 빌어먹을!”
상황을 눈치챈 해리스가 입술을 깨물었다.
제이미는 에디의 에이전트이지만, 에이전트는 보통 선수 한 명하고만 계약하지 않는다. 여러 선수를 동시에 관리하는 게 에이전트들의 기본이다.
즉, 선덜랜드는 제이미가 관리하는 다른 선수를 산 거다. 하필이면 풀백을!
“와이트인지 화이트인지 하는 그놈, 덩치가 어떻게 돼?”
“풀백치고 키가 크네요. 185라는데요.”
세상에는 풀백과 센터백을 오가는 선수들이 적지 않다. 그리고 와이트는 센터백을 볼 수도 있는 체격의 소유자다.
에디 레이놀즈가 그다지 키 큰 센터백이 아님을 감안하면··· 스티븐 와이트는 여러모로 에디를 대체할 수 있는 선수다.
선덜랜드에게서 최대한의 돈을 뜯어내 보려는 해리스의 야망은, 그렇게 햇살 아래의 눈처럼 녹아 내리고 말았다.
잠시 신음하던 해리스의 대응은 빨랐다.
“선덜랜드에 오퍼 넣어. 에디 팔겠다고. 조건은 천삼백만 파운드, 20% 셀온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