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웰컴 투 챔피언십 (2)
그 한 점을 신호삼아, 선덜랜드는 본격적인 수비에 나섰다.
지난 1년간 성실하게 수비 축구를 갈고 닦았기에, 라인을 내리고 버티는 건 선덜랜드에는 퍽 익숙한 축구였다.
열광적인 홈팬, 죽어도 선덜랜드라는 바로 그 팬들 또한 선덜랜드의 무기였다.
챔피언십 규모를 훨씬 뛰어넘는 사만구천 명의 팬들, 더비가 공을 잡으면 미친듯한 야유를 퍼붓고, 선덜랜드가 공을 따낼 때는 열렬한 환호로 응원하는 서포터의 외침이 경기의 흐름에 미치는 영향은 컸다.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는 철옹성이었고, 더비의 맹공으로도 생채기가 나지 않았다.
그렇게 버텨낸 90분. 경기 종료를 외치는 휘슬이 길게 울렸다.
[선덜랜드 1 - 0 더비]
악수를 나누고 어깨를 두드리는 양 팀 선수들 사이에서 두 남자의 눈이 마주쳤다.
페르난데스, 그리고 루니.
지난 십수년간 세계 축구를 호령하며 월드컵과 유로, 챔스 같은 큰 무대에서 경쟁하던 사내들. 이제는 선수 생활의 황혼을 맞이한 두 월드클래스가 챔피언십에서 다시 마주한 것이다.
“미리 준비하신 겁니까? 골킥에서 이어지는 역습요.”
루니의 질문에, 페르난데스는 지체없이 대답했다.
“맞아. 지금의 더비는 골라인 아웃 상황에서의 수비 복귀가 느린 편이지. 공격적으로 몰아붙이는 팀이 원정에서 종종 하는 실수야.”
8번, 스미스가 공격에 가담하는 빈도가 무척 높다는 점. 그리고 잭과의 주력 차이에 대해서는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어차피 더비의 코칭스태프가 지금쯤 절절한 심정으로 곱씹을 항목일 테니.
“적에게 주는 정보치고는 꽤 솔직한데요.”
“똑같은 수법에 두 번 당해줄 정도로 멍청했으면, 우리는 오늘 처음 만나는 사이였겠지. 안 그래?”
두 사람은 잠시 낮게 웃었다.
“볼 보이는 계산 밖이었습니다. 사실은 챔피언십에 오신 걸 환영한다고 말해 줄 생각이었는데, 역으로 한 수 배웠네요.”
“그쪽 홈이었으면 애초에 아무 문제도 아니었을 실수야. 원정팀 골킥을 빨리 차게 도와 주는 볼 보이는 아무도 없을 테니까··· 그리고 어쩌면, 챔피언십 팀에서는 드문 디테일일 수도 있고.”
지금의 선덜랜드만큼 일반 스태프들을 세심하게 신경 쓰는 팀은 드물다.
각종 행사 때마다 정기적으로 선수단과 스태프가 같이 식사를 하고, 스태프들의 자기소개 동영상을 곳곳에 틀어놓는 모습은 페르난데스의 긴 축구 경력에서도 처음 겪는 일이었다.
덕분에 선수단과 스태프들의 유대감 또한 긴밀해졌다.
그렇기에 선덜랜드 분석팀은 아직까지 한 번도 공략당한 적 없는 더비의 약점에 과감하게 도전했고, 볼보이는 페르난데스의 신호에 지체없이 공을 넘긴 것이다.
“앞으로는 그런 세세한 디테일을 신경 써야 해. 정식 감독이 되고 싶은 거라면.”
“그럼 페르난데스씨는··· 앞으로 어떻게 하실 겁니까?”
“글쎄. 나야 감독을 노리긴 힘들지. 그래서 작년까지는 행정가가 될 생각이었는데···.”
페르난데스는 골키퍼고, 감독을 노리기는 힘들다. 골키퍼 출신 감독은 무척 드물고, 그나마도 빅클럽을 맡은 사례는 거의 없다.
골키퍼 출신 축구인의 진로는 필드 플레이어보다 훨씬 제한적이다. 그래서 보통 은퇴를 앞둔 골키퍼들은, 필드 플레이어를 부러워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상대를 부러워하는 이는, 루니였다.
페르난데스의 대답에 담긴 의미가, 무척이나 명확했기 때문이다.
자신은 아직 현역이고, 진로는 은퇴한 다음에나 고민할 문제라고.
서로를 마주보던 두 사람이 천천히 등을 돌렸다.
악수는 하지 않았다.
* * *
스미스가 먼저 잭에게 손을 내밀었다.
“한 방 먹었다. 애송이.”
내밀어진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잭은 잠시 망설였다.
‘잡아도 되나? 신성한 우리 엠블럼에 손등 브이자를 그린 이 더러운 손을?’
고민하던 잭은, 이곳이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임을 상기했다.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의 설비는 우수하고, 새 드레싱룸은 모든 면에서 최고 수준이다. 손세정제도 완벽하게 구비되어 있을 것이다.
잭은 스미스의 손을 잡았다.
“반성하십쇼. 남의 팀 엠블럼에 함부로 손등 내밀면 안 되는 검다.”
그러자 스미스가 웃었다.
“아, 그거? 너 보라고 일부러 한 거였어. 네가 제일 카드 많이 먹더라고. 그리고 분석 결과, 너는 팀 엠블럼 건드리면 미쳐 날뛸 거라고··· 뭘 그리 놀라냐.”
“아뇨, 암것도 아님다.”
잭은 놀라움을 감추려 노력했다.
얼마 전까지는 3부 리그에 머물렀고, 만나는 상대는 선덜랜드보다 훨씬 가난한 클럽들이었다. 제대로 된 분석팀을 갖추지 못한 곳들도 종종 있었다.
서로에 대한 분석 싸움에서 선덜랜드는 항상 상대보다 앞선 팀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챔피언십이고, 따라서 상대 또한 선덜랜드를 분석한다.
잭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 겨우 개막전인데, 자신의 성격까지 짐작했을 정도면 정말로 꼼꼼하게 분석했을 것이다. 최대한 빨리 샐리에게 알려야···.
그때, 잭의 옆구리를 요니의 팔꿈치가 파고들었다.
“멍청아, 네 성격 알아보는데 무슨 분석씩이나 필요했겠냐. 우리 엠블럼 건드리면 너 발작하는거야 상식이고.”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잭이 원망스러운 시선을 보냈고, 스미스는 환한 미소로 응답했다.
“크크. 기대했던 방향과는 조금 다르게 날뛰어서 조금 곤란했지··· 아무튼, 챔피언십에 온 걸 환영한다.”
단순한 환영 인사가 아니라는 것을, 잭은 알고 있었다.
오늘의 승패를 가른 것은 결국 두 팀이 해온 준비의 차이였다. 상대에 대한 치밀한 분석, 그리고 홈 팀이 쓸 수 있는 모든 수단을 활용한 경기다.
하지만 다음에 더비를 다시 만날 때는, 원정 경기가 된다.
열광적인 팬들의 성원과 잘 조직된 스태프의 지원. 선덜랜드가 자랑하는 두 가지 무기를 모두 쓸 수 없는 조건.
그때 선덜랜드는 비로소 챔피언십에 걸맞는 팀이 되었는지 시험받게 될 것이다.
“빠르게 적응하겠슴다. 프라이드 파크에서도 제대로 붙어봐야 하지 않겠슴까?”
“기대하지.”
가벼운 미소로 작별하면서도, 두 사람의 눈은 조금도 웃지 않았다.
선덜랜드의 챔피언십 첫 경기는 그렇게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 * *
이후에도 우리는 무패행진을 이어갔다.
1라운드 더비전 승리에 이어, 2라운드 밀월 원정에서도 승리했다. 3라운드에서는 코번트리를 홈으로 불러들여 격파했고, 4라운드에는 레딩 상대로 무승부를 기록했다.
3승 1무, 승점 10점.
아직 초반이라 큰 의미는 없다지만, 챔피언십에서도 선두권에 들어가는 성적이었다.
그런 우리의 5라운드 상대는 미들즈브러였다.
뉴캐슬과 함께, 선덜랜드의 더비 라이벌로 손꼽히는 팀이다.
“마침 우리 홈에서 더비 매치니까, 홍보 제대로 준비하자. 플랜카드 붙이라고 하고, 제휴 펍에도 싹 연락 돌려.”
재빠른 손길로 업무 지시를 소화한 다음, 희주가 가벼운 불평을 늘어놓았다.
“세상에 무슨 놈의 더비가 그렇게 많아? 타인위어 더비, 위어티스 더비, 1라운드에 만난 팀도 더비였지? 그놈의 더비, 더비··· 혹시 내가 모르는 더비가 또 있어?”
“이게 전부야.”
축구계에는 물론 수많은 더비 매치가 있지만, 선덜랜드의 더비 라이벌은 딱 두 개 뿐이다.
뉴캐슬과의 타인위어 더비, 그리고 미들즈브러를 상대하는 위어티스 더비. 미들즈브러 쪽에서는 티스위어 더비라고 부르겠지만, 아무튼 그렇다.
내 설명에도 희주는 아직 미심쩍은 것처럼 보였다.
“오빠, 더비 매치라는 건 라이벌끼리 붙는 거 아니야? 그래서 선덜랜드 라이벌이 도대체 어느 팀이야?”
“뉴캐슬이지.”
“뉴캐슬 라이벌은?”
“선덜랜드.”
선덜랜드 팬을 사자, 뱀, 뉴캐슬 팬, 미들즈브러 팬이 있는 밀실에 가두고 총알 두 발 든 총을 주면 어떻게 될까?
답 : 당연히 뉴캐슬 팬을 두 발 쏜다. 아마 뉴캐슬 애들도 똑같이 대답할 것이다. 선덜랜드 팬을 두 발 쏜다고.
그러면 미들즈브러는 뭐냐고 생각할 것 같은데, 음.
마침 희주의 눈동자도 물음표로 변해가는 것 같아서, 나는 재빨리 덧붙였다.
“어, 그러니까 삼국지 같은 거야. 뉴캐슬은 1부 가있으니까 위나라고, 그리고 우리는 주인공이니까 촉나라 포지션이겠지?”
“아하, 이해했어. 기본적으로 삼파전이지만, 그중에서 살짝 라이벌 의식이 빠지는 애들이 미들즈브러인 거구나.”
미들즈브러 팬들은 절대 동의하지 않겠지만, 뭐 그런 느낌이다.
잠시 고개를 주억거리던 희주의 얼굴에, 보기 드물게 진지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러면 오빠, 이번엔 정말 빡세게 준비해야겠다.”
“그렇지. 더비 매치임에는 변함이 없으니까.”
“그것도 그건데··· 미들즈브러가 오나라 포지션이라면서?”
그렇지. 더비 라이벌이지만, 숙적까지는 아닌 느낌이 딱 오나라에 어울린다.
하지만 희주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유비의 촉에게 가장 큰 피해를 준 건, 오나라잖아.”
어, 그렇게 되네.
* * *
미들즈브러 감독, 닐은 테이블에 놓인 자료를 살폈다.
노안을 배려해 큰 글씨체로 출력한 자료는 무척이나 두툼했다.
선덜랜드의 로저스도 노장으로 알려졌지만, 닐은 올해 일흔이 넘은, 축구계 최고령 감독을 다투는 연배였다. 그런 닐으로서는 아무래도 전자 화면보다는 종이 서류가 마음 편했다.
“선덜랜드는 수비 축구를 하고 있다지?”
“네, 개막전부터 더비의 맹공을 버티지 못하고 내려앉더군요. 이후에도 최대한 라인을 내렸었고요. 작년부터 계속 수비 축구를 해왔던 팀입니다.”
“무조건 위로 올라올 자신이 있었던 거겠지. 승격하고 나면 언더독이니까 미리 팀 체질을 바꿔 놓고, 꽤 합리적이지 않나?”
“진짜라면 대단하겠지만··· 설마 그런 계산까지 미리 했겠습니까?”
반신반의하는 코치를 바라보며, 닐은 슬쩍 주제를 돌렸다.
“그 팀 관중이 아주 열광적이라고 들었는데··· 아닌가?”
“보로 출신으로서는 인정하기 싫은 사실이지만, 네, 일단은 그렇습니다. 챔피언십인데도 경기장이 거의 만석이죠. 사만 구천 석이나 되는데도요.”
“그런데, 수비 축구는 보통 팬들에게 인기가 없는 축구야. 안 그런가? 그런데 선덜랜드는 수비 축구를 하면서도 열광적인 팬들을 가지고 있지.”
“그렇··· 죠?”
서서히 얼굴이 굳어지기 시작한 젊은 코치를 바라보며, 닐은 부드럽게 웃었다.
“그 팀의 팬서비스가 무척 좋다고 소문이 자자하다는 사실을 굳이 지적해야 할까?”
코치가 침을 삼켰다.
“구단을 인수했을 때부터 전부 다 계산에 두고 있었단 말씀이십니까?”
“그것까지야 나는 모르지. 팀을 인수한 처음부터 다 계산했는지, 아니면 천천히 맞춰나간 것인지··· 다만, 지금의 선덜랜드 구단주는 보통 놈이 아니라는 거야.”
닐은 자료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선덜랜드 구단주 이희성. 투자자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는 설명 아래, 이름만 들으면 알 만한 기업들의 목록이 즐비했다.
“이런 구단주는 팀을 금방 위로 끌어올리겠지. 돈도 많다고 들었고, 수완도 좋은 모양이니··· 챔피언십은 아마, 지나가는 길 취급일 게야.”
“그렇다고 호락호락 보내줄 건 아니잖습니까?”
“그야 그렇지.”
자조섞인 쓴웃음을 지어 보인 늙은 감독의 눈에, 서서히 날카로운 빛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뉴캐슬도 선덜랜드도 우리를 제삼자로 취급하지만, 그래도 명색이 더비 라이벌 아닌가.”
선덜랜드의 스쿼드 명단, 그리고 예상 포메이션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생각을 정리하던 닐의 손이, 마침내 한 곳을 짚었다.
“이길 수 있을 때 확실하게 밟아 놓아야 해. 그게 더비 매치의 규칙이야.”
노장의 손길이 가리킨 곳은, 선덜랜드의 포백라인이었다.
* * *
미들즈브러와의 경기를 며칠 앞두고, 언제나처럼 브리핑 룸에 모였다.
“보로의 예상 스타팅 명단은?”
“준비했어요. 훈련중 갑작스런 부상 같은 변수만 아니면, 이대로 나올 거에요.”
샐리가 준비한 명단을 눈으로 훑은 브라이언이, 깊은 한숨을 쉬었다.
“쿨슨하고 스펜스 둘 다 내는 거냐. 독하네.”
“더비 매치니까요.”
미들즈브러의 두 영건, 쿨슨과 스펜스는 챔피언십에서도 손꼽히는 유망주들이었다.
내 눈에 보이는 가치도 상당하다. 미들즈브러 선수만 아니었으면 한 번쯤 찔러 봤을 정도다.
최근에는 둘 다 주로 측면 수비수로 뛰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측면이라면 어느 위치에서도 뛸 수 있는 선수들. 윙어로 뛸 때는 적극적으로 수비에 가담하고, 풀백으로 뛸 때는 수시로 오버래핑에 나선다.
우리 상대로 그 둘을 모두 내보낸다는 의미는 명확했다.
미들즈브러는 우릴 반드시 잡아낼 것이며, 그 수단으로 측면을 활용하겠다는 선언이다.
“이렇게 되면 좌우 측면을 사정없이 후벼팔 것 같은데. 양 사이드, 특히 풀백 자원은 미들즈브러가 우리보다 확실히 나은 영역이니까.”
인상을 쓰는 브라이언을 향해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풀백 사 달라고 했으면 사다 줬을 텐데.”
“브로, 진짜로? 그러면···.”
이젠 아니야. 이적시장 끝났거든. 그리고 우리는 겨울에는 영입 안 하는 주의고.
윈도 쇼핑하는 희주같은 표정을 짓기 시작한 브라이언을 잠시 무시한 채, 나는 샐리에게 눈을 돌렸다.
샐리가 곧바로 대답했다.
“쿨슨과 스펜스의 크로스에 대해서는 크게 염려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요. 우리 센터백은 에디니까요.”
동감이다. 쿨슨과 스펜스는 틀림없이 우수한 유망주지만, 그래도 에디에 비할 정도는 아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고, 나름대로의 근거도 갖고 있다.
“다만··· 측면을 완전히 내주는 전개는 바람직하지 않군요. 대책이 필요할 것 같은데요.”
그러자 샐리가 웃었다.
“슬슬 스티븐을 내보내자는 말씀이신 거죠? 동의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