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웰컴 투 챔피언십 (3)
[수요일 오후 16시, 아카데미 오브 라이트, 분석실]
미들즈브러와의 경기를 이틀 앞두고, 스티븐은 언제나처럼 분석실에서 샐리와 함께 영상을 돌려 보는 중이었다.
스티븐의 표정은 어두웠다.
“무슨 일 있어?”
“그게··· 분석관님, 여기서 왜 왼쪽 구석으로 향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데요.”
샐리가 빙긋 웃으며 대답하려는 찰나, 옆에서 에디가 끼어들었다.
“스티비, 그건 왜냐면 말이지. 저쪽 레프트윙이 공 뺏겼기 때문이야. 그러면 우리 쪽에서 보면 어디가 비지?”
“오른쪽이지. 그래서 물어보는 거야. 왜 요니는 왼쪽으로 간 거냐고.”
그러자 에디가 재빠른 손길로 전술 보드에 말 몇 개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오른쪽 비었지. 그러면 쟤들은 커버를 하고 싶지? 그 결심에 힘을 실어주려고 지금 잭이 오른쪽으로 올라가지? 그게 사실은 다 미끼다, 이 말이야.”
척, 척, 거침없는 손길. 잠시 후 왼쪽 구석에 공간이 나타났고, 스티븐은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에디가 웃었다.
“오버로드 투 아이솔레이트. 기초적인 수법 아닌가? 친애하는 스티비.”
“안 낚이면 어쩌려고···.”
“그러면 잭이 곧바로 오른쪽 후벼 파는 거지. 오른쪽에 공간이 생긴 건 확실하니까.”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대답하는 에디를, 샐리가 슬쩍 노려보았다.
“너는 여기 안 불렀는데.”
“너그럽게 봐주시죠. 스티비와 저는 동기 아닙니까. 하하하!”
기분 좋게 웃는 에디와 달리, 샐리의 눈빛은 싸늘했다. 잠시 후, 에디가 조심스럽게 표정을 고쳤다.
하지만, 태도까지 고친 것은 아니었다.
“분석관님, 스티비는 계속 풀백으로 쓰자고 건의해 주시면 안 될까요? 제가 시키는 대로 뛰면 서로 행복할 텐데요.”
“왜? 어째서 서로 행복하지?”
“쟤는 생각을 안 해서 좋고, 저는 궂은일 안 해서 좋고요. 가짜 버릇 연기가 얼마나 힘들고 귀찮은데···.”
“나가.”
샐리의 단호한 지시에, 에디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일어났다. 평소 안하무인인 에디지만, 신기하게도 샐리의 지시에는 퍽 고분고분한 편이었다.
에디를 분석실 밖으로 쫓아낸 다음, 샐리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 다시 시작하자. 스티븐, 역습의 일곱 가지 패턴부터···.”
“에디 말이 맞는 것 같은데요.”
스티븐의 얼굴은 에디를 쫓아내기 전과 조금도 변함없이 우울해 보였다.
“절 윙어로 쓰려는 시도 말인데, 분석관님이 처음은 아닙니다. 당연하잖습니까?”
“당연한가?”
샐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스티븐의 전 소속팀, 블랙번이 그를 윙어로 쓴 적은 한 번도 없었기에.
하지만 스티븐의 대답은 조금 달랐다.
“클럽에 들어오기 전, 축구를 맨 처음 시작했을 때요. 그때 저는 공격수였고 에이스였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그맘때 에이스 아니었던 선수가 어딨겠습니까?”
“하긴.”
개인마다 성장 속도나 가진 재능의 크기는 조금 다르겠지만, 최소한 동네 꼬마들 사이에서 제일 잘 차는 수준은 되어야 유소년 선수가 될 기회가 생긴다.
그리고 유소년 사이의 경쟁을 뚫고 나와야 프로가 된다. 따라서, 대부분의 프로 축구 선수는 언젠가 에이스였던 선수들이다.
“그래서 압니다. 저는 골 결정력이 없어요. 어쩌면 재능이 없는 걸지도 모르죠. 위치선정도, 판단력도 좋지 못하니까요.”
“재능이라면 가지고 있어.”
스티븐을 향해, 샐리는 딱 잘라 단언했다.
“세상에는 축구를 정말로 사랑하는데, 축구가 아니면 살 수 없을 것만 같은데, 그런데도 축구선수가 될 수 없는 몸을 가진 사람들이 있어. 이미 알겠지만, 그리 멀리서 찾아볼 필요는 없을 거야.”
샐리의 눈동자가 무심코 슬쩍 움직였다. 구단주실이 있는 방향으로.
무릎이 부서질 때까지 노력했지만, 끝내 데뷔하지 못한 유소년 축구선수의 일화는 선덜랜드에서는 이미 유명한 이야기였다. 갓 이적한 스티븐 또한 알고 있을 정도로.
“그런데도 네가 재능이 없다고?”
“······.”
“결정력? 필요 없어. 네가 모든 걸 할 필요는 없으니까. 우리 팀에는 이미 골을 넣어줄 선수가 있어.”
침묵하는 스티븐을 향해, 샐리의 목소리가 나직히 이어졌다.
“공을 가져다줄 선수가 있고, 볼을 따내 줄 선수, 골대를 든든히 지켜줄 선수도 있어. 너는 그냥, 그들을 받쳐주기만 하면 돼.”
숙연해진 스티븐의 어깨를 두드리며, 샐리가 특유의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자신감이 들지 않을 때는, 고개를 오른쪽 45도 위로 들어 봐.”
“오른쪽 45도 위요? 거긴···.”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의 구조를 떠올리기 위해 고민하는 스티븐을 향해, 샐리의 목소리가 경쾌하게 이어졌다.
“자, 그럼 다시 시작할까? 역습의 일곱 가지 패턴에 대해서···.”
* * *
[금요일 오후 5시 30분.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 주차장]
위어티스 더비를 맞아, 마일즈 우드는 언제나처럼 반차를 내고 경기장으로 향했다. 그런 마일즈의 곁에는, 직장 동료이자 초보 축구 팬인 수잔도 함께였다.
“오늘은 짐이 많은가 보네.”
평소에는 작은 핸드백이 고작이었는데, 오늘은 커다란 보스턴백을 챙겼다. 혹시 응원 도구라도 따로 준비한 건가 싶어서 호기심어린 시선을 보내자, 수잔이 슬며시 웃었다.
“조금 이따 보시면 알아요··· 팀장님, 저 잠시만요.”
화장실이라도 다녀오려나 싶었는데, 수잔은 보스턴백을 끌어안고 움직였다.
잠시 후 모습을 드러낸 수잔은, 퍽 낯익은 복장을 하고 있었다. 붉은색과 흰색의 세로 스트라이프, 선덜랜드의 레플리카다.
뜻밖의 모습을 본 마일즈가 눈을 깜빡였다.
“자네, 레플리카 샀었나?”
“네! 얼마 전에요. 세일하더라고요.”
“아, 반차 쓰고 조퇴했던 날?”
마일즈는 별 뜻 없이 말했지만, 수잔의 얼굴은 살짝 붉어졌다.
그날, 클럽 박물관을 돌아보고 감동에 젖은 수잔은 그만 메가스토어 제 5게이트를 통과하고 말았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마킹 레플리카 세 벌과 스카프 다섯 개, 심지어 우승 기념 한정판 디오라마 피규어 풀세트를 구매한 다음이었다.
물론 수잔에게 찾아온 지름신에 대해서 알 리 없는 마일즈는 그저 부드럽게 웃기만 할 뿐이었다.
“잘 어울리는데. 마침 선수들도 기뻐할 거야. 누구 마킹 넣었지?”
“26번 스티븐이요. 그게, 많이 남았길래···.”
보통 새로 영입된 이적생 관련 상품은 적당히 팔리는 편이지만, 스티븐의 경우는 유독 인기가 없는 편이었다. 큰 기대 없이 영입된 선수이고, 아직 선덜랜드 데뷔전도 치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초보 축구 팬과 신참 이적생, 나름 어울리는 조합이다. 마일즈는 미소를 지었다.
“마침 오늘 데뷔한다던데? 스타팅에 들었더라고.”
“네. 잘했으면 좋겠어요! 팀장님, 어디 가세요?”
“나도 마킹 레플리카 한 벌 사려고. 자네 혼자 그렇게 응원하는 건 좀 치사하잖나.”
한때 마킹 레플리카를 사지 않는 습관이 있었던 마일즈였지만, 얼마 전부터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자신의 유니폼을 선물해 주고, 이적은 절대 없다고 못을 박아준 로컬보이 잭 덕분이었다.
“누구 거 사실 거에요?”
“글쎄. 의리를 생각하면 역시 잭인데, 요니 것도 갖고 싶고··· 에디도 조금 탐나는군.”
그러자 수잔이 환하게 웃었다.
“그럼 둘 다 사세요. 하나 끼워 주더라고요.”
* * *
[금요일 오후 6시 30분.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
“스티븐이 선발로 나온다고?”
원정 드레싱룸에서, 미들즈브러 감독 닐은 인상을 찌푸렸다.
스티븐이라니, 예상 밖의 선수였다.
하드웨어는 좋지만, 판단력이 엉망인 어린 풀백이다. 기껏해야 로테이션 멤버로나 써먹을 만한 선수이고, 이적한 이후 아직 선덜랜드 데뷔전도 치르지 못한 애송이다.
미들즈브러가 자랑하는 두 유망주, 쿨슨과 스펜스라는 챔피언십 최고의 풀백 듀오에 대항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선수다.
하물며 더비 매치에 출전시킨다니!
‘혹시 이놈들이 지금 우릴 우습게 보는 건가?’
늙은 노장의 눈에 분노가 피어오르려는 찰나, 젊은 코치가 재빨리 덧붙였다.
“그런데 감독님, 명단이 조금 이상합니다. 포지션이라고 해야 하나··· 포메이션이라고 해야 하나··· 평소와 좀 다른 느낌인데요?”
“무슨 소리지?”
“주전 포백라인 네 명이 모두 선발로 출전했거든요. 혹시 스티븐을 센터백으로 쓰려는 게 아닐까요?”
빠르고 덩치 큰 수비수가 풀백과 센터백을 오가는 일은 그리 드물지 않고, 스티븐은 어지간한 센터백들과 비슷한 체격의 소유자다.
“파이브백? 아니, 그렇지는 않을 거야.”
리그 원 시절, 선덜랜드는 한 수 아래의 팀을 상대로도 수비 축구를 선호할 만큼 보수적인 팀이었다.
하지만 그런 선덜랜드가 유일하게 공격적으로 나선 경기가 있었다. 바로 FA컵 4라운드, 뉴캐슬과의 경기였다.
선덜랜드는 절대 더비 라이벌 상대로는 꼬리를 내리지 않는다. 자기들 홈에서, 미들즈브러 상대로 파이브백을 들고나올 가능성은 없다.
닐의 눈이 빛났다.
“혹시 명단에 윙어가 한 명 비지 않나?”
“아, 맞습니다. 라이트윙이 빠졌군요.”
“즉, 스티븐을 디펜시브 윙어로 쓰겠다··· 허, 제법 묘수를 준비했군.”
선덜랜드의 라이트윙은 미들즈브러의 레프트백과 격돌하게 된다. 미들즈브러가 자랑하는 영건, 쿨슨이 있는 자리다.
“쿨슨을 찰거머리처럼 지워 버리겠다는 뜻이겠지.”
닐은 혀를 찼다. 선덜랜드가 자랑하는 젊은 전술가, 브라이언의 기책일 것이다.
곱씹어 볼수록 묘수였다. 닐 자신은 쉽게 떠올리지 못할 발상이었고, 전술적 대응책 또한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만일 전술 싸움만으로 축구가 돌아간다면, 선덜랜드는 방금 미들즈브러에게 선취점을 올렸다고 봐도 좋다.
하지만, 축구는 체스가 아니다.
밖에서 보면 양 팀 코치진 사이의 전술 싸움처럼 보이지만, 결국 승부는 사이드라인 안쪽에서 정해진다.
선수들의 발과 심장으로.
* * *
[금요일 오후 7시.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
옆에서 희주가 기도처럼 속삭였다.
“괜찮을까? 스티븐 완전히 얼었던데.”
희주에게 독심술이 생긴 건 아니다. 그저, 선수 입장 당시 스티븐의 팔과 다리가 같이 움직였을 뿐.
덕분에 플레이어 에스코트로 참여한 꼬마 팬이 웃음을 참느라 고생했었다.
나는 나직히 대답했다.
“아마 빠르면 20분 정도에 정신 차릴 거고, 운 나쁘면 전반 내내 저럴 거야.”
“혹시 경기 내내 얼탈 가능성은 없어?”
“전혀 없지··· 그러면 교체당할 테니까.”
아무리 로저스 감독이 젊은 선수 키우기를 좋아한다지만, 더비 매치에서 경기 내내 얼타는 선수를 방치할 정도의 호인은 아니다.
괜히 저 분이 교관님 소리를 들었던 게 아니거든.
전반전은 미들즈브러의 선축으로 시작되었다.
잠시 후방에서 차분하게 공을 돌리며 태세를 정비하던 미들즈브러는, 곧바로 양쪽 풀백 모두를 전진시켰다.
미드필더 한 명을 센터백 사이로 내린 대가였다.
라볼피아나. 이제는 상식처럼 쓰이는 후방 빌드업이다.
전술적으로는 이미 대비가 되어 있었다. 레프트백 쿨슨에게 스티븐을 붙여, 미들즈브러의 공격 방향을 한쪽으로 제한하려는 의도다.
상대가 어느 쪽으로 올지 미리 알기만 하면, 톰슨이 무척 손쉽게 공을 따낼 테니까.
그랬어야 했는데···.
“놓쳤어! 어떡해!”
희주의 비명과, 쿨슨의 질주는 거의 동시에 벌어진 일이었다. 잔뜩 긴장한 스티븐은 곧바로 대응하지 못했고, 그만 쿨슨을 완전히 놓쳐 버리고 말았다.
전반 5분, 미들즈브러가 자랑하는 측면 공격이 우리 선덜랜드의 오른쪽 사이드에 휘몰아쳤다.
* * *
쿨슨은 생각했다.
‘그러니까 지금, 이 허수아비를 나한테 붙여놓고 전술 싸움 이겼다고 좋아한 거야?’
스티븐은 키가 크고 발이 빠르다는 평가를 받는 선수지만, 그 외의 다른 장점은 찾기 힘들었다. 혹시 육상을 했으면 대성했을지도 모르지만···.
‘여긴 축구 경기장이란 말이지. 챔피언십이고.’
쿨슨은 가벼운 페인트로 스티븐의 시선을 돌렸고, 주의를 뺏자마자 곧바로 따돌렸다. 너무 쉬워서 웃음도 안 나올 정도였다.
‘그리고 허수아비 하나 추가요.’
텅 비어버린 그라운드를 질주하는 쿨슨의 시야 끝에, 에디의 모습이 들어왔다.
에디 레이놀드. 쿨슨과는 또래의 선수로, 스티븐과 달리 정말 좋은 선수라는 평가가 따라다녔다.
쿨슨은 물론, 에디에 대한 평가에 동의하지는 않았다. 단순히 어린 유망주끼리의 호승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에디 레이놀즈에게는 버릇이 있다. 어린 선수들이 대부분 그런 것처럼.
쿨슨도 그랬었다.
챔피언십에 처음 데뷔하던 해, 사소한 버릇을 상대에게 간파당해 팀의 구멍 취급을 받았었다.
분석팀의 도움을 받아 뚫리는 장면을 몇 번이고 돌려본 다음에야 쿨슨은 간신히 자신에게 버릇이 있었음을 깨달았다.
갓 프로가 된 어린 선수들이 흔히 겪는 일이다.
‘웰컴 투 챔피언십, 풋내기들.’
어느새 최종 수비진 앞까지 돌파한 쿨슨을 에디가 가로막았다. 에디의 얼굴에는 자신감이 넘쳤다. 자신의 버릇이 이미 탄로났다는 것도 모르는 것처럼.
“이쪽은 통행금지인데, 미스터 쿨슨.”
“아닐 걸.”
낮게 대답하며, 쿨슨은 에디의 오른발을 슬쩍 곁눈질했다.
미들즈브러 분석팀이 파악한 에디의 버릇. 그는 항상 슬라이딩 태클에 나서기 직전, 오른발에 체중을 옮겨 싣는다.
‘온다.’
에디의 태클 기술은 정말로 수준급이었지만, 타이밍을 미리 알기만 하면 간단히 피할 수 있다.
쿨슨은 어렵지 않게 태클을 뛰어넘었다. 그것이 에디와 페르난데스가 미리 준비한 함정인 줄은 꿈에도 모르고.
‘노마크 찬···!?’
다음 순간, 쿨슨의 시야를 초록색 유니폼이 가득 메웠다. 선덜랜드의 골키퍼 유니폼, 페르난데스다.
‘아니, 골키퍼가 왜 벌써 튀어나와!’
쿨슨의 움직임을 미리 유도했기에, 페르난데스의 대응은 무척이나 예리했다. 쿨슨은 제대로 저항하지 못한 채 속수무책으로 공을 빼앗기고 말았다.
쿨슨의 눈앞에서 페르난데스의 팔이 크게 휘둘러졌다.
“역습이다! 올라가!”
페르난데스는 철저한 몸 관리로 정평이 난 선수였고,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그 어깨는 여전히 변함없는 비거리를 자랑했다.
‘빌어먹을!’
선덜랜드 특유의 역습에 대한 두려움, 코 앞에서 놓쳐버린 찬스의 아쉬움에 쿨슨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여유부릴 시간은 없었다. 필사적으로 자기 진영에 복귀해야 했으니.
따라서 쿨슨은, 에디의 입가에 떠오른 싸늘한 미소를 발견하지는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