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웰컴 투 챔피언십 (5)
경기는 3-0, 우리의 완승으로 끝났다. 결과는 물론, 내용으로도 나무랄 데 없었다.
페르난데스는 클린시트를 기록했고, 크리그가 1득점, 요니가 1어시스트를 추가했다.
그리고 더비 매치의 남자, 잭은 1골 1어시스트를 올리며 경기의 MOM을 차지했다.
하지만 언론의 관심은 스티븐에게 몰렸다.
- 데뷔전에서 멋진 바이시클 킥을 성공시키며 일약 스타 탄생을 예고했는데요. 혹시 미리 준비하신 장면인지 궁금합니다.
“어, 정말로 모르겠습니다. 제가 어떻게 한 건지.”
믹스드 존에서, 스티븐은 마치 혼이 나간 듯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경기장 안에서는 중압감에서 풀려났지만, 아직 인터뷰라는 무대에서는 익숙하지 않은 듯했다.
뭐, 이 또한 신인이라면 누구나 거쳐야 할 과정이다.
잠시 버벅거리던 스티븐이 열심히 허공에 팔을 휘두르며, 손짓 발짓을 섞어서 고백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 전후 상황부터 기억도 안 납니다. 코치님이 잠깐 영상 보여주시긴 했는데, 솔직히 지금도 의심스럽습니다. 혹시 다른 선수와 합성한 거 아닌가···.”
- 다른 선수라면?
“아마 잭이 아닐까요··· 만일 크리그 선수라면 터닝 발리를 시도했을 것이고, 요니는 위치를 미리 잡는 편이라 바이시클 킥을 찰 각도가 안 나오죠.”
- 그래서 잭이다?
“네, 잭일 겁니다. 거기서 공을 따라가서 뛰어오를 주력의 소유자는, 선덜랜드에선 잭뿐입니다.”
스티븐은 아직, 자신의 스피드가 잭과 대등하다는 사실을 조금도 체감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한 가지 기억나는 게 있습니다. 너무 힘들어서 고개를 들었을 때, 현수막을 흔드는 팬들의 모습을 봤어요. 절 환영한다고 하더라고요. 덕분에 정신을 차렸습니다.”
- 미담이군요!
“그런데, 그 이야기에는 사실 사연이 있습니다.”
- 사연이요?
“힘이 들면 오른쪽 45도 위를 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 경기장 어디가 오른쪽인지는 계속 바뀌잖습니까? 제 위치가 계속 바뀌니까요.”
- 그렇군요. 전후반에는 골대도 바뀌고요.
“알고 보니 사방에 있었어요. 절 환영한다고, 잘 왔다는 메시지가요. 자세히 보니까 구단주님은 열기구 밑에도 써놨습니다. 덕분에 긴장이 풀렸습니다.”
조금 수줍게 웃으면서, 스티븐은 기자들을, 그리고 그들이 내민 카메라를 둘러보았다.
그 카메라 너머, 자신의 인터뷰를 보고 듣게 될 이들과 눈을 맞추려는 것처럼.
“경기장 안에서 절 도와준 동료들, 사이드라인 밖에서 지지해준 스태프들, 그리고 팬 여러분들··· 만약에 오늘 제가 조금이라도 잘한 점이 있다면, 전부 그분들 덕분입니다.”
터지는 플래시 사이에서 스티븐이 정중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선덜랜드 가족 여러분, 정말 감사합니다.”
* * *
한편, 그 옆에서는 로저스 감독의 인터뷰가 한창이었다.
- 더비 매치에서 3-0 대승을 거두셨는데, 소감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용감히 싸운 선수들 덕분입니다. 누가 봐도 오늘 우리는 승점 3점을 가져갈 자격이 있는 팀이었습니다. 하지만 보로 또한 좋은 팀이었고, 객관적으로 보면 세 골 차이가 벌어질 경기까지는 아니었습니다.”
어린 스티븐과 달리, 노장 로저스 감독은 인터뷰 자리에서도 노련했다.
“페르난데스의 선방이 아니었다면 한 골 정도는 내줬어도 이상하지 않았고, 스티븐의 원더골은 계산 밖의 영역입니다. 그러니 공평한 결과는 아마 2-1이었겠죠.”
선수들에게 공을 돌리면서도, 패배한 상대팀 또한 슬쩍 치켜올리는 승자의 여유를 보였다. 그리고, 선수들의 헝그리 정신을 자극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우리는 2년간 승격에 실패했던 팀이고, 이제 겨우 챔피언십에 올라온 약팀입니다. 아직 갈 길이 멀고, 앞으로 더욱 노력해야 합니다.”
팀의 승패를 책임지는 사람다운 인터뷰였다. 우승이 어제 내린 눈인 것처럼, 오늘의 승리 역시 내일이 되면 녹아 없어질 결과에 불과할 테니.
감독은 항상 다음 경기를 바라봐야 하는 자리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팬들은 축제를 즐겼다. 다른 팀도 아니고, 더비 라이벌 미들즈브러를 우리 홈에서 꺾은 거니까.
경기장 주변에 울려 퍼지는 노랫소리가 믹스드 존까지 새어 들어왔다.
Wise man say, only fools rush in.
엘비스 프레슬리의 오래된 명곡은, 여러 축구팀에서 즐겨 부르는 응원가의 고전이 되었다. 이곳 선덜랜드에서도 응원가로 쓰이는 중이었다.
But I can’t help falling in love with you. Sunderland! Sunderland! Sunderland!
팬들의 합창 사이에 친숙한 목소리가 섞였다. 순간 로저스 감독과 눈이 마주쳤다.
의미는 명확했다.
[이거 혹시 잭, 그놈인가?]
[그럼 누구겠어요.]
[잡아다 드레싱룸에 좀 끌고 와주게.]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믹스드 존을 빠져나갔다.
잭을 찾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팬들의 합창 소리가 가장 크게 울리는 곳을 찾으면 그만이었으니.
동문 게이트 앞, 이미 인산인해를 이룬 그 한복판에서 나는 목표를 찾아냈다.
땀에 흠뻑 젖은 유니폼을 갈아입을 생각도 안 하고, 팬들과 뒤섞여 노래하는 잭의 모습을.
Wise man say, only fools rush in.
그러게, 현명한 사람은 절대 저렇게 달려나오지 않지. 조금만 똑똑했으면 최소한 땀은 닦고 나왔을 것이다. 혹시라도 몸이 식으면 컨디션 조절에 문제가 생기니까.
하지만, 사랑은 항상 현명함과 거리가 멀다. 잭이 조금 더 현명한 선수였으면, 지금처럼 팬들의 사랑을 듬뿍 받지는 못했을 것이다.
But I can’t help falling in love with you.
“오늘 보로 놈들 상대로 한 방 제대로 먹였지. 사랑한다!”
선덜랜드 팬들이 가장 사랑하는, 충성스러운 사냥개가 환한 미소로 화답했다.
“저도 사랑함다! 앞으로 더 좋은 경기 보여 드리겠슴다! 감사함다!”
“승격도 잘 부탁해!”
“죽기 살기로 해보겠슴다! 꼭! 응원해 주십쇼!”
팬들의 한복판에서 웃으며 손을 흔드는 잭의 주위가, 온통 반짝반짝 빛나 보였다.
세상에는 스타 기질을 타고난 선수가 있다. 그런 선수는, 중요한 경기일수록 더욱 미쳐 날뛴다.
데뷔전에서 바이시클 킥으로 임팩트를 보여준 스티븐도 그렇지만, 더비 라이벌인 미들즈브러 상대로 1골 1어시를 기록한 잭의 스타성도 만만찮다.
정작 잭 본인은, 그저 첫눈 내린 날의 강아지처럼 마냥 신이 난 것 같지만.
그때 잭과 눈이 마주쳤다.
“어, 저기··· 혹시 이것도 무단 이탈인가요··· 구단주님.”
만일 잭에게 정말로 꼬리와 귀가 달려 있었다면, 축 늘어졌을 것임이 틀림없다. 혼나기 직전의 강아지처럼 잔뜩 기가 죽은 잭을 바라보며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징계는 안 줄 건데···.”
감독님에겐 아마 나중에 한 번 제대로 묵사발이 될 거라는 뒷말은, 팬들의 환호에 묻히고 말았다.
“썬! 사랑한다!”
“구단주님! 저기, 사인 좀 해주세요! 저 레플리카도 샀어요.”
눈앞에 0번 마킹 레플리카가 내밀어졌다··· 이게 다 몇 장이야.
단숨에 팬에게 둘러싸인 내 쪽을 흘끔거리며, 잭이 미소를 지었다.
“아무리 봐도 구단주님이 저보다 훨씬 스타신 거 같슴다.”
“그건 아니고.”
피규어도, 레플리카도 잭이 제일 많이 팔린다. 하다못해 양말을 팔아도 18번 마킹만 넣으면 매출이 나올 것 같다는 내부 분석이 있을 정도다.
그저 현역 선수인 잭은 팬들에게 사인해줄 일이 많고, 구단주인 나는 팬들에게 사인할 기회가 드물 뿐이다.
뭐, 아무튼.
나는 침착하게 펜을 꺼내 들고 사인을 시작했고, 어느새 잭 또한 내 옆에서 신나게 펜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덕분에 동문 게이트는 임시 사인회장으로 바뀌었다.
그러고보니 내가 여기 뭐 하러 나왔더라?
“썬! 제발 10분만 더 기다려 줘요! 바로 레플리카 사 올게요.”
모르겠고, 일단 내가 여기 서 있으면 매출은 오를 것 같다. FFP 제한에 안 잡히는 알짜배기 굿즈 수입이.
“저는 축구공에 해 주세요! 선덜랜드 축구공이요!”
어이쿠, 아직 텍도 안 뗐네! 어쩌다 톰슨같이 무뚝뚝한 놈에게 자본주의 손이 생겼는지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얼마간 팬들에게 정신없이 사인하는 와중, 조금 떨어진 곳에서 머뭇거리는 소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대충 열두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년, 곁에 다른 어른은 없다.
“혹시 사인 안 필요하니?”
최대한 친절한 미소로 응대하려 노력했는데도, 소년은 조금 기가 죽은 것처럼 보였다.
“그게···.”
얼핏 보니 소년은 빈손이었고, 팀 레플리카를 입지도 않았다. 그러니 사인을 받기 미안했던 거겠지.
“괜찮으면, 입고 있는 셔츠에 사인해줄 수도 있는데.”
그러자 소년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정말요? 고마워요! 오늘 이겼다죠? 굉장했다고 들었어요. 보로 상대로 3-0이라니!”
“그랬지.”
무심히 대답하자, 소년의 얼굴이 확 하고 붉어졌다.
“그게, 저기··· 요즘은 표를 구하기도 너무 힘들고, 저는 펍에는 갈 수 없어서···.”
“가면 큰일 나지.”
영국에도 청소년보호법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술집에 애들이 드나들게 장려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무튼, 나는 대충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한국과 달리, 영국은 스포츠 중계료가 무척 비싼 편이다. 유료 멤버십에 가입해야 하는데, 딱 응원하는 팀 경기만 챙겨보려는 사람들에게는 부담스러운 가격대다. 하물며, 어린 소년의 용돈으로는 어림도 없다.
괜히 영국에서 축구 펍이 성행하는 게 아니다.
그렇다고 경기를 보는 게 아예 불가능하지는 않다. 인터넷을 찾아보면 생중계해주는 사이트 정도는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다.
아마 이 소년도 몇 경기쯤은 그런 식으로 챙겨봤을 것이다. 하지만 그걸로는 만족하지 못하게 되어, 경기장 앞까지 찾아온 거겠지.
비록 여기선 경기는 보이지 않지만, 그래도 열기는 전해질 테니까.
챔피언십에 올라온 이후, 우리 경기장은 항상 만석이다. 경기를 보고 싶어도 보지 못하는 팬들이 늘어날 것이다.
어떻게든 대책을 세우고 싶다.
머릿속으로 그런 생각들이 스쳐 지나가는 동안, 나는 소년에게 다가가 웃으며 펜을 들었다.
“자, 셔츠 조금 내밀어 볼래?”
그러자 소년은 의외로 조금 머뭇거렸다. 잠시 주머니에 손을 넣고 뭔가를 찾던 소년이, 손수건을 내밀었다.
“셔츠 대신 여기에 해 주실 수 있나요?”
“물론, 너만 괜찮으면 셔츠에도 해줄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소년을 향해, 슬쩍 물었다.
“혹시 가장 좋아하는 선수는 누구니?”
“저는 구단주님이 제일 좋아요! 음, 선수로만 한정하면 페르난데스고요.”
“동생은?”
“잭이 제일 좋대요··· 제가 동생이 있다고 말했었나요?”
눈을 동그랗게 뜨는 소년을 향해, 나는 씩 웃어 보였다.
“보면 알아.”
넘겨짚은 거였다. 셔츠 대신 손수건을 꺼냈으니까. 물론 셔츠가 아주 비싸서 사인을 받기 싫었을 수도 있지만, 소년의 셔츠는 딱 보기에 그런 고가품은 아니었다.
그리고 소년이 내민 손수건의 문양은, 열두 살 소년이 쓰기에는 지나치게 귀여웠다. 동생, 높은 확률로 여동생이겠지.
잭을 제일 좋아한다던 동생을 위해 소년은 손수건을 챙겼을 것이다. 경기가 끝난 직후 경기장 주변을 서성이다 보면, 잭의 사인을 받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잭 주위를 잔뜩 둘러싼 팬들을 뚫고 사인을 받아내는 건, 열두 살 소년에겐 꽤 힘든 일이다. 그러니 대신 내 사인이라도 가져다주려는 거겠지.
나는 최대한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려 노력했다.
“혹시 동생이 근처에 있으면, 데려올래?”
“네?”
“네가 사인을 받아다 줘도 좋아하겠지만, 기왕이면 잭에게 직접 사인받는 걸 좋아할 것 같은데.”
“어··· 근처에 있긴 한데, 정말 그래도 되나요?”
뭐, 이따 감독님한테 같이 혼 좀 나고 말지.
애초에 이미 늦었고, 다행히 잭은 팬들하고 섞여 날뛰느라 몸이 식지 않았거든.
“네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게.”
잠시 날 바라보던 소년이 몸을 돌렸다. 그리고 정신없이 달려갔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전화기를 꺼냈다.
“여기 동문 게이트, 주차장 옆인데··· 우리 레플리카 좀 가져와. S하고 M사이즈 하나씩. 마킹은··· S은 18번, M은 0번으로.”
[오케이! 비용 처리는 어떻게 할까?]
“내 카드로 긁어.”
옆에서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잭을 향해, 슬쩍 덧붙였다.
“18번 레플리카엔 네가 직접 사인해.”
“감사함다!”
잠시 후, 소년이 여동생의 손을 잡고 돌아왔다. 그와 거의 동시에 희주가 레플리카 두 장을 들고 나타났다.
“어머, 귀여워라!”
어린 남매를 발견한 희주가 환호했다. 하긴, 내가 보기에도 귀엽긴 하다.
동생을 생각하는 어린 소년도 그렇지만, 얌전히 제 오빠를 따르는 여동생도 참 귀엽다.
기억은 잘 안 나지만, 아마 희주도 저렇게 얌전한 시절이 있긴 했을 거다. 일곱살 넘어서부터는 얄짤 없었지만 말이지··· 부디 저렇게 자라지는 말아다오.
소년의 등 뒤에 숨어서 빼꼼히 머리만 내민 소녀를 바라보며, 나는 잭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잭이 손수 사인한 S사이즈 마킹 레플리카를 내밀었다.
“선물이야. 유니폼은 우리 구단주님이 직접 주는 거야. 인사해야지?”
“고맙습니다.”
조심스럽게 오빠 옆으로 나와서 레플리카를 받아든 소녀가, 수줍게 웃으며 인사했다. 보고 있자니 흐뭇한 미소가 지어진다. 이런 게 아빠 미소라는 거겠지.
무심코 소망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앞으로 오빠 말 잘 듣고. 뭐 사달라고 떼쓰지 말고.”
그러자 희주가 냉큼 반격했다. 소년에게 내 레플리카를 건네며, 희주가 히죽거렸다.
“여동생 함부로 때리지 말고. 예뻐해 주고.”
“난 한 번도 때린 적 없다.”
“오빠가 때렸다고 말한 적은 없는데?”
그러니까 이렇게 자라지 말라고.
잠시 옥신각신하는 우리를 바라보던 어린 남매가 배시시 웃었다.
* * *
다음 날. 조엘을 곧바로 호출했다.
“조엘, 우리 경기장 스크린을 뗍시다.”
“네?”
뜻밖의 지시에 당황하는 조엘을 향해, 차분하게 부연했다.
“스크린 떼서 동문 앞에 옮겨 달아요. 중계권 문제 안 생기는 선에서 경기 영상 틀고, 경기 전엔 프리뷰, 리뷰 영상도 틀고요.”
그러자 조엘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조치하면 경기장을 찾아주시는 분들이 스크린이 없어서 불편하실 텐데요.”
“조엘.”
“네, 구단주님.”
“나는 전부터 아주 불만스러운 부분이 하나 있었습니다. 작년에 보니 핫스퍼 스타디움 스크린이 우리 것보다 훨씬 크더라고요. 아마 에티하드 스크린도 우리보다 크죠?”
“네··· 그렇습니다만···.”
조심스럽게 대답하는 조엘을 향해, 나는 단호하게 지시했다.
“경기장 내부 스크린은 새로 만듭니다. 핫스퍼보다, 에티하드보다 더 큰 사이즈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