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함께 걷기 위해서 (3)
We are Sunderland. Say we are Sunderland.
고막을 넘어 심장까지 파고드는 외침, 몇 번을 와도 익숙해지지 않는 함성에, 플리머스의 주장 게리는 슬쩍 입술을 깨물었다.
‘이 경기장을 좋아할 수 있을까.’
이 경기장은, 원정 팀에게는 틀림없이 지옥이었다. 캄 노우가, 산티아고 베르나베우가, 스탬포드 브릿지가, 그리고 악명 높은 안필드가 그런 것처럼.
지난 시즌,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에서 승리를 챙겨간 원정팀은 리그 원에서는 아무도 없었다.
컵 대회까지 눈을 돌리면 선덜랜드의 오랜 라이벌 뉴캐슬이 승부차기 끝에 다음 라운드에 향하긴 했지만, 승부차기는 어디까지나 공식적으로는 무승부다.
그만큼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는 원정팀에게 가혹한 경기장이고, 이 경기장을 원정 지옥으로 만드는 요소의 팔 할쯤은, 홈 팬들의 열광적인 함성 탓이었다.
심지어 그 함성은 지난 시즌보다 훨씬 뜨거워진 채였다.
그래서인가, 플리머스 선수들의 움직임은 전체적으로 무거웠다.
‘이건 좋지 않은데.’
게리는 안타깝게 킥오프를 준비하는 동료들을 바라보았다. 그 너머, 하프라인 건너 선덜랜드 진영의 모습이 보였다.
선덜랜드의 포메이션은 평소와 달랐다. 1년 내내 4-4-2를 고수하던 선덜랜드는, 오늘은 4-1-2-3을 꺼내 들었다.
평소와 다른 포메이션.
“주장, 쟤들 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요.”
미드필더 대니가 불쑥 물었다. 게리는 차분히 대답했다.
“뻔하지. 우릴 찍어누르겠다는 거야.”
“승격 좀 했다고 뵈는 게 없나. 얼마 전까지 리그 원에서 같이 구르던 주제에, 우릴 어쩌겠다고요?”
이를 가는 대니를 향해, 게리는 변함없이 차분하게 대꾸했다.
“자존심 상할 거 없어. 얼마 전까지 우리는 바로 저놈들에게 더블 당한 처지니까.”
“맞는 말씀이지만, 기분이 더럽게 나빠서 말이죠.”
“나도 기분은 나쁘지만, 생각해보면 우리에게도 기회 아닐까?”
지난 시즌 선덜랜드의 수비진 상대로 1점도 뽑아내지 못한 플리머스로서는, 선덜랜드의 수비축구가 훨씬 까다로웠다.
오히려 익숙하지 않은 공격 축구로 나서면, 의외로 틈이 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오늘 선발이 에드워드 하퍼니까.’
에드워드 하퍼는 페르난데스와의 주전 경쟁에서 완전히 밀린 선수다. 심지어 지난 시즌에는 컵 대회에서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한창 전성기에 접어들 나이에 벤치 행을 받아들인 하퍼도 이해하기 어렵지만, 평소 안 하던 공격 축구를 하면서 오랫동안 안 쓰던 골키퍼를 굳이 내보낸 이유도 짐작이 가지 않았다.
‘기용 미스라고 생각하면 간단하지만.’
선덜랜드 코치진에 한해, 그런 실수를 할 리는 없다. 감독 로저스는 지난 시즌 리그 원 올해의 감독상을 차지한 명장이고, 브라이언은 여러 팀의 러브콜을 받았다고 들었다.
게리가 생각을 정리하기 전에, 킥오프를 알리는 휘슬이 길게 울렸다.
‘뭐, 천천히 알아보면 되겠지. 아직 시간은 기니까.’
킥오프 직후부터 거세게 압박해 들어오는 선덜랜드의 잭과 요니를 흘끗 바라보며, 게리는 공을 길게 걷어냈다.
* * *
플리머스가 걷어낸 공이 하프라인 부근에 높이 떠올랐다. 선덜랜드의 골키퍼, 에드워드 하퍼는 떠오른 공을 바라보며 장갑 낀 손을 마주쳤다.
[팀을 옮겨야 하는 거 아니니?]
하퍼의 어머니가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낸 건, 페르난데스의 재계약이 발표된 직후의 일이었다.
근심에 가득한 자신의 어머니를 바라보며, 하퍼는 자신 있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걱정 마세요, 어머니. 저 지금 엄청 많이 배우는 중이니까요.]
[너도 이제 곧 스물 여덟이잖아. 선수로서 한창 뛸 나이인데···.]
[한참 멀었죠. 페르난데스는 마흔 가까운 나이에도 현역이잖아요.]
페르난데스 같은 대선수에게 배우고 십 년간 더 뛰는 게, 지금 팀을 옮겨서 일 년 빨리 뛰는 것보다 이득이라고 대답하자, 하퍼의 어머니는 더 이상 충고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하퍼 역시 마냥 마음 편하지는 않았다.
페르난데스에 대한 불만은 없다. 그가 훌륭한 선수라는 것도 알고 있고, 그런 대선수에게 배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1년간 더 벤치에 남을 가치가 있다고도 생각했다.
그래도, 뛰고 싶다는 열망 자체를 온전히 지울 수는 없었기에, 하퍼는 갈등했다.
페르난데스에게 배울 점이 많을수록, 그를 대신해 골마우스에 설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뜻이기에.
특히, 리더십 그 자체의 차이는 절망적일 정도였다.
챔스와 유로, 월드컵을 모두 주장으로서 들어올린 대선수 페르난데스의 카리스마는, 하퍼가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팀은 하퍼에게 기회를 허락했다.
[올 시즌에는 페르난데스가 리그, 하퍼가 컵 대회를 맡는다. EFL컵은 물론, FA컵도 마찬가지다.]
로저스 감독의 발표에, 가장 먼저 하퍼의 어깨를 끌어안아 준 사람은 페르난데스였다.
[축하한다. 하퍼!]
그래서 하퍼는···.
“하퍼-!”
톰슨의 외침이 하퍼를 회상에서 현실로 돌려놓았다. 썩 좋은 현실은 아니었다. 공이 날아드는 중이었으니.
오른쪽 상단.
중거리 슛치고는 꽤 예리한 코스지만, 그래도 손이 닿는 거리다.
하퍼는 장신이고, 점프력과 반응 속도에도 강점이 있는 편이었다. 선방 능력이라면 자신이 있었다.
‘파고든 공격수는··· 없군.’
따라서 세컨볼 처리를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하퍼는 공을 확실히 두 손으로 막아낸 다음, 골대 앞에 확실히 떨어뜨리는 것을 우선했다.
팬들의 환호 속에서 하퍼는 여유 있는 동작으로 톰슨에게 공을 연결했다.
“나이스 플레이!”
무심코 벤치에 눈이 향했다.
언제나처럼 엄격한 표정으로 경기장을 바라보는 노장 로저스와, 히죽거리는 코치 브라이언.
그리고, 눈이 마주치자마자 곧바로 장갑의 엄지를 세워 보이는 페르난데스까지.
하퍼는 웃었다. 올 시즌, 컵 대회를 전담하기로 통보받았던 날처럼.
[네, 주장의 등 뒤에서 줄곧 지켜보고 배웠던 것들을, 경기에서 최대한 보여주고 오겠습니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같은 골키퍼끼리.]
하퍼의 결의에, 대체 무슨 소리 하느냐고 웃어넘기던 페르난데스의 모습이 눈에 생생했다.
[우리들은 팀메이트의 등 뒤를 지키는 포지션이지만··· 같은 골키퍼끼리는, 옆에서 함께 걷는 거다.]
언제나처럼 경기장을 가득 메운 팬들의 함성에 지지 않게, 하퍼는 목소리를 높였다.
존경하는 주장, 페르난데스가 늘 그랬던 것처럼.
“올라가! 너희 뒤엔 내가 있다! 몇 번이든 막아줄 테니, 마음 놓고 뛰어!”
* * *
경기를 내려다보던 희주가 혼잣말처럼 물었다.
“오빠, 우리 팀 움직임이 평소와 좀 다른데··· 어떻게 된 거야?”
“어떻게 된 거긴, 네 축구 보는 안목이 좋아진 거지.”
“그런가? 헤헷.”
축구 보는 안목이 늘어야 정상이긴 하다. 희주가 익스클루시브 박스에서 축구를 본 지도 벌써 1년이 넘었으니까.
익스클루시브 박스는 축구장의 모든 좌석 중 가장 비싼 공간이고, 그런 만큼 경기가 가장 잘 보이는 자리이기도 했다.
그라운드와 바로 맞닿은 1층 객석만큼 역동적이지는 않지만, 그 대신 경기장 전체를 내려다보며 흐름을 파악하기에는 훨씬 좋다.
“블록을 위로 올린다는 게 이런 뜻이었구나.”
“맞아.”
우리 선수단은 플리머스의 바이털 에어리어에 블록을 형성했다. 요니와 잭을 앞세워서.
물론 요니와 잭, 둘이서만 압박한 것은 아니고, 전방의 쓰리톱 모두의 헌신적인 조력이 있었다.
우선 라이트윙 스티븐. 그는 상대의 레프트백에게 찰거머리처럼 달라붙었다. 덕분에 플리머스 레프트백은 꼼짝도 못 하는 중이다.
“스티븐 선수 수비 못 한다더니··· 순 엄살이었던 거야?”
“수비가 서툰 편이긴 하지··· 풀백치고는.”
하지만 지금 스티븐은 윙포워드로 뛰는 중이고, 그의 수비력은 윙포워드로서는 수준급에 속한다. 풀백과 윙포워드에게 요구되는 수비력은 분명 다르니까.
게다가, 스티븐에게 가장 부족한 요소였던 판단력도, 지금의 전술에서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우리가 수비할 때는 상대 풀백을 근접 마크하고, 공격할 때는 안으로 파고드는 게 전부였으니.
자기가 잘하는 플레이에만 집중하는 스티븐의 경기력은 요즘들어 부쩍 물이 올랐고, 덕분에 플리머스 레프트백은 빌드업에서 완전히 제외되었다.
반대쪽 측면에서도 똑같은 상황이 벌어졌기에, 공방은 주로 중앙에서 벌어졌다.
플리머스의 센터백 둘과 미드필더 둘,
그리고 요니와 잭, 크리그 사이의 공방이다.
“우리 인원이 한 명 적어서 불리해 보이지만··· 그 정도는 잭의 활동량이나 요니의 공간 지능으로 메울 수 있지.”
쉽게 공을 뺏지는 못하지만, 원래 압박의 목적은 상대를 몰아내는 것이다.
견디다 못한 상대가 롱패스를 선택할 때까지.
“따냈어!”
플리머스가 공을 길게 걷어내면, 톰슨의 먹잇감이 된다. 톰슨의 피지컬은 어지간한 센터백 급이니까.
음, 완벽한 가두리양식이다. 공을 빼앗은 톰슨이 곧바로 로빙 스루를 꽂아넣었고, 순간적으로 몸을 돌려 침투한 크리그가 날카로운 슛을 날렸다.
이런, 크로스바 높이는 홈 팀 맘대로 조정 못 하려나···.
“그런데 오빠, 그러면 플리머스가 공을 길게 걷어내지 않는 선택지는 없는 거야?”
“가능하지만, 꽤 용기가 필요할걸.”
자기네 진영에서 공 돌리다가 뺏길 경우, 그 자체만으로도 위기가 된다. 심지어 잭과 요니 상대로 공을 돌리겠다고? 별로 추천하고 싶진 않은 선택인데.
잭과 요니는 둘 다 3선 미드필더 출신이고, 따라서 수비력이 괜찮다. 발도 빠르고, 위치선정도 좋다.
차라리 걷어내서 톰슨에게 짤리는 게 낫지, 괜히 자기 진영에서 공 돌리다 잭이나 요니에게 뺏기면···.
“아픈 꼴을 보겠네.”
잭의 압박을 피해 옆으로 공을 돌리던 플리머스의 패스를, 요니가 단숨에 끊어냈다.
요니의 발이 움직이기도 전에, 희주가 환호했다.
“오른쪽!”
축구 보는 눈이 정말로 늘긴 했네. 무심코 빙긋 미소가 지어졌다. 잠시 후, 희주의 외침대로, 요니의 패스가 오른쪽 뒷공간을 파고들었다.
그곳에는 스티븐이 달려드는 중이었다. 미리 약속한 대로의 우직한 플레이였고, 기교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투박한 몸놀림이기도 했다.
하지만 힘과 속도가 더해지자, 그 자체만으로도 무시무시한 쇄도가 되었다.
스티븐은 플리머스 수비를 아예 신경조차 쓰지 않은 채 질주했고, 필사적으로 유니폼을 붙잡던 플리머스 레프트백이 단숨에 뿌리쳐졌다.
Sunderland 'til I die. I'm Sunderland 'til I die.
경기장을 가득 메운 팬들의 함성이 더욱 거세질 때마다, 스티븐의 질주 또한 빨라졌다. 내딛는 걸음마다 무서운 속도로 골이 가까워졌다.
그 뜨거운 외침의 끝에서, 선덜랜드의 26번이 달려온 기세 그대로 공을 걷어찼다.
[고오오오올! 불과 18분만에 스티븐 와이트가 선제골을 뽑아냅니다! 시즌 두 골째!]
* * *
선제골 이후에도 선덜랜드의 공세는 멈추지 않았다.
전반 26분. 플리머스의 롱 패스를 커트한 톰슨이 그대로 가슴으로 공을 트래핑했고, 공이 땅에 닿기도 전에 다이렉트 발리 패스를 시도했다.
오른쪽 무릎에 힘이 들어간다고 느낀 순간, 요니가 절묘한 타이밍으로 수비 뒷공간을 파고들었다.
부심의 깃발은 올라가지 않았다.
완벽하게 포백라인 뒤를 파고든 요니가 크리그에게 컷백 패스를 보냈다. 그리고 크리그는 이 조건에서 득점을 놓칠 사람이 아니었다.
팬들의 환호 속에서, 크리그가 침착하게 오른쪽 구석에 공을 밀어넣었다.
[선덜랜드 2 - 0 플리머스]
전반 종료 직전에는 잭이 추가골을 뽑아내, 점수 차이를 3점으로 벌렸다.
마침내 견디다 못한 플리머스의 수비가 더 이상의 실점만 하지 않겠다는 것처럼 움츠러들었을 때도, 우리 선덜랜드는 계속 공세를 이어갔다.
문득, 1년 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작년 여름, 바르샤와의 프리시즌이.
내가 팀을 인수하고 처음 치른 경기이기도 했다.
그날 우리는 엉망이었다. 축구의 신이 이끄는 바르샤의 맹공에 속절없이 무너졌고, 제대로 된 공격은 시도하지도 못한 채 다섯 골 차이의 패배를 당했다.
하지만 그날의 나를 가장 안타깝게 했던 건, 휘슬이 울리기도 전에 경기를 내려놓는 우리 선수들의 모습이었다.
그날로부터 이제 1년 조금 넘는 시간이 흘렀다.
아직 바르샤에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지만, 그래도 지금의 우리는 작년 여름 프리시즌의 그 나약한 팀이 아니다.
[발을 멈추지 마라. 고개를 떨어뜨리지 마라. 휘슬이 세 번 길게 울리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멈추지 마라.]
선덜랜드의 선수라면 누구나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는 이야기이자, 로저스 감독의 입버릇 같은 말.
오늘, 선덜랜드의 선수들은 그 말처럼 뛰었다. 경기의 승패가 이미 결정된 다음에도 끝까지 우직하게, 바보처럼.
Wise man say, only fools rush in.
경기장을 가득 메운 팬들이, 그 우직한 질주에 아낌없는 함성으로 화답했다.
But I can’t help falling in love with you.
경기가 다섯 골 차이로 벌어졌을 때도, 플리머스 선수들의 발이 멈추기 시작했을 때에도···.
Sunderland! Sunderland! Sunderland!
쉼없이 몰아치던 붉은 돌풍은, 경기 종료를 알리는 휘슬이 길게 울린 후에야 멈췄다.
[선덜랜드 5 - 0 플리머스]
공교롭게도, 바르셀로나에게 0 - 5로 무너졌던 그 날과 똑같은 점수 차이, 정반대의 결과를 보며.
나는 소리 없이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