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자의 신이 키우는 축구단-73화 (73/422)

73화. 존중의 방식 (2)

한 골씩 주고받고 난 다음, 경기는 급속도로 뜨거워졌다.

서로 질 생각은 조금도 없고, 무승부 후 승부차기로 끌고 갈 마음도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 선덜랜드의 하퍼도, 노리치의 크룰도 승부차기에서 강점을 보여준 골키퍼들이다. 가뜩이나 11m의 러시안 룰렛이라는 승부차기에서 감수하기엔, 서로에게 너무 큰 리스크였다.

그러므로 실점한 팀은 거세게 반격에 나서고, 득점한 팀은 상대의 뒷공간을 털면서 응수하는 것이다.

경기의 균형이 또다시 흔들린 건, 팬들의 함성이 식기도 전의 일이었다.

중원에서 서로를 세차게 압박하며 몇 차례 공을 뺏고 뺏던 와중, 노리치 중원의 그물망 사이를 붉은 유니폼 한 명이 공과 함께 빠져나왔다.

18번, 잭의 등번호를 확인한 선덜랜드 팬들이 곧바로 뜨거운 함성을 퍼부었다.

We do what we want. We do what we want.

전방 압박을 위해 인원을 과투자한 노리치 진영에는 오직 세 명의 수비만이 존재했고, 나머지는 뻥 뚫려 있었다.

텅 비어버린 잔디 위를, 선덜랜드의 18번이 세차게 달렸다. 순간적인 가속, 마치 경기가 이제 막 시작한 것처럼 열정적인 질주가 골대까지의 거리를 무섭게 좁혀나갔다.

We are Sunderland. Say we are Sunderland.

마치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를 방불케 하는 우리 팬들의 뜨거운 함성과 노리치 팬들의 절규가 교차하는 사이에서, 잭은 노리치의 최종 수비라인을 향해 돌진했다.

노리치 수비 역시 침착하게 가로막았다.

드리블 장면에서, 잭의 특기라면 역시 우월한 속도를 살린 돌파를 꼽을 수 있다. 가끔은 우아한 메이아 루아로 나타날 때도 있지만, 대부분 잭은 치고 달리기를 선호한다.

즉, 잭의 돌파에는 필연적으로 뒷공간이 필요하다.

노리치 센터백들의 대응은 잭에게 그 뒷공간을 쉽게 허용하지 않았다. 센터백 두 명이 앞뒤로 약간의 거리를 둔 채 잭에게 접근했기 때문이다.

절묘한, 그리고 노련한 응수.

“잡히겠어!”

희주의 비명과도 같은 절규가 귓가를 때렸고, 나는 무심코 자리에서 일어나고 말았다. 그리고 수비벽에 막힌 잭은 한 차례 주춤거렸다.

문득, 어째서인지 잭과 잠시 눈이 마주쳤다고 느꼈다. 표정을 알아보기엔 먼 거리인데. 내 위치를 확인할 여유가 없었을 텐데도.

다음 순간, 잭이 곧바로 왼쪽 측면으로 빠져나갔다. 수비로부터, 그리고 골대로부터 멀어지는 움직임에 노리치 센터백의 대응이 한 걸음 늦고 말았다.

딱 한 걸음의 차이.

슛을 노리기 어려운 위치로 움직이기 때문인지, 혹은 순수한 주력 차이 때문인지는 판단하기 어려웠다.

확실한 건, 노리치 센터백은 한 걸음을 허용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 걸음의 이점은 잭처럼 발 빠른 선수에게 내주기에는 너무나 큰 대가였다.

붉은 유니폼이, 노리치 최종 수비진을 스치듯 빠져나갔다.

“따돌렸어!”

희주의 외침에 뜨거운 환호가 더해진 순간, 잭의 발이 움직였다.

직접 골을 노리긴 어려운 각도였기에, 잭의 발을 떠난 공은 골을 향하지 않았다. 오히려, 골라인과는 평행한 각도를 그리는 그 공의 궤적은···.

“컷백 스루패스!?”

노리치 센터백 뒤쪽 공간에 떨어지는 패스를, 놓치지 않고 추격하는 선수가 있었다.

잭의 스피드와 대등하게 달릴 수 있는 유일한 선덜랜드 선수, 스티븐이 공을 따라잡은 것이다.

가속이 붙은 스티븐의 질주는 매서웠다. 노리치 풀백이 필사적으로 스티븐을 마크하려 시도했지만, 어깨가 닿은 순간 마크 시도는 무의미했다.

휘청거리는 수비를 그대로 뿌리치며, 스티븐이 그대로 공을 걷어찼다.

시즌 세 골째 득점이었다.

[노리치 1 - 2 선덜랜드]

“스티-븐!”

득점을 성공시킨 스티븐이 곧바로 원정 팬들을 향해 달려와 포효했고, 우리 팬들 역시 뜨거운 환호로 답했다.

“스티븐, 스티븐, 스티븐 와이트! 부록이라고 누가 말했지?”

“투자의 신이 직접 발탁한 선수가, 허접할 리 있겠냐!?”

팬들의 환호성 사이에서, 희주가 배시시 웃었다.

“다들 오빠 안목을 칭찬하는 중이네.”

“그러게, 골 넣은 선수나 칭찬하지.”

무덤덤하게 답했지만, 어쩐지 코끝이 찡했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오빠랑 똑같은 포지션이라서 그런 거 아닐까? 오빠도 윙포워드였잖아.”

“글쎄.”

희주가 어떤 의도로 말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우리 팬들이 왜 갑자기 내 안목을 칭찬하는지에 대한 나름대로의 답인지, 아니면, 내 코끝이 찡해진 이유를 댄 것인지.

고민은 길지 않았다. 희주의 대답은, 어느 쪽이라도 말이 된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에.

그래서 나도 웃으며 대답했다.

“그럴지도 모르겠네.”

잠시 후, 전반 종료를 알리는 휘슬이 울렸다.

* * *

후반, 노리치는 그야말로 혼을 담은 반격에 나섰다.

우리 팬들 사이에서 몇 번이나 비명같은 탄식이 터져 나올 만큼 조마조마한 장면이 이어졌다.

보다 못한 희주마저 두 손을 모아쥐었을 정도다.

“으으, 그냥 라인 내리고 수비 굳히면 안 되나.”

희주의 심정은 이해하지만, 수비로 전환할 마음은 없었다. 아마 현장에서 팀을 지휘하는 로저스 감독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컵 대회를 통해 우리 팀의 공격력이 어느 수준까지 통할지 알아보기 위한 목적도 있지만, 순수하게 오늘 경기를 따내기 위해서도 수비로 전환할 수는 없었다.

이미 경기가 난타전 양상으로 흐른 이상, 이럴 땐 먼저 꼬리를 내리는 쪽이 지는 경우가 많다.

오히려 라인을 올리고 맞불을 놓는 편이 훨씬 낫다. 그러다 혹시라도 득점으로 이어나갈 수 있다면, 그대로 경기를 가져올 수 있다.

딱 한 골만 더 뽑아낼 수 있다면···.

그때 경기가 움직였다.

전반 내내 집요한 마크와 견제에 시달리던 톰슨이, 마치 자포자기에 가까운 동작으로 공을 길게 걷어냈다. 당장에라도 라인 밖으로 나갈 듯한, 그야말로 어림없는 킥.

하지만 그 킥은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궤적을 그렸다.

* * *

크리그는 하프타임 때, 톰슨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후반전, 딱 한번의 찬스를 만들어 줄 수 있어. 걷어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너에게 가는 로빙 스루로.]

[그게 가능합니까?]

[여러 번 성공시킬 수 있는 기술은 아니지만, 기습적 한 방 정도라면 문제 없지.]

이야기를 주고받는 톰슨과 크리그의 곁에, 잭이 다가왔다. 호기심이 가득한 눈빛이 톰슨을 향했다.

[톰슨 선수, 그럼 전반엔 왜 안 써먹으신 검까?]

톰슨이 대답하기 전, 엉뚱한 방향에서 대답이 나왔다. 요니였다.

[전반엔 바람 방향이 반대였잖아, 멍청아.]

티격거리는 잭과 요니를 바라보던 톰슨이 낮게 웃었다.

[아무래도 캐로우 로드에는 익숙하니까. 따지고 보면 아직 여기서 뛴 경기가 더 많을걸. 선덜랜드는 날 꽤 쉬게 해줬지만, 노리치 때는 얄짤없었거든.]

톰슨은 자신의 선언을 지켰다. 역풍, 공에 걸린 스핀, 그리고 익숙한 잔디··· 이 모든 요소가 함께할 때만 가능한 기적적인 스루패스.

당장이라도 라인 밖으로 나갈 것처럼 뻗어나가던 킥의 기세가 거짓말처럼 약해졌고, 잠시 후에는 노리치 수비 뒷편의 공간을 노리는 스루 패스로 변했다.

공에 가장 먼저 접근한 선수는 크리그였고, 노리치 선수들의 대응은 약간씩 늦고 말았다. 무리도 아니었다. 크리그 자신조차 미리 듣지 않았으면 대비하지 못했을 플레이였으니.

사방에서 포위하는 노리치 선수들을 바라보며, 크리그는 냉정하게 기회를 살폈다.

톰슨의 기적적인 패스로도, 크리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기껏해야 딱 두 번의 터치가 가능할 뿐.

‘그거면 충분하지.’

노리치의 주전 푸키와 마찬가지로, 크리그 또한 발재간보다는 득점 감각을 무기로 삼는 선수다. 두 번의 터치. 발재간을 부리기엔 부족하지만, 골을 노리기는 충분하다.

트래핑 한 번과 한 번의 슛. 크리그는 곧바로 왼발로 공을 확보했고, 오른발로 슛을 날렸다.

정확히는, 그러려고 했다.

순간 크리그의 시야를 하늘색 유니폼이 메웠다. 노리치의 골키퍼, 크룰이었다.

“느려. 다이렉트로 찼어야지.”

몸을 날리는 세이빙이, 크리그의 발에서 공을 나꿔챘다. 다음 순간 크룰의 팔이 크게 휘둘러졌다.

“역습이다!”

아쉬움을 곱씹을 여유는 없었다. 크리그는 입술을 깨물며 재빨리 몸을 돌려 수비에 가담했지만, 썩 효과적이지는 않았다.

측면에 전달된 패스, 간결한 터치, 그리고 예리한 질주가 선덜랜드 진영을 파고들었다. 득점 직전까지 상대를 몰아붙였던 선덜랜드가 아직 수비를 가다듬기도 전이었다.

박스 오른쪽까지 침투한 노리치 선수를 가로막으며, 에디가 필사적으로 외쳤다.

“하퍼! 앞으로! 달려 나와!”

에디의 외침과 거의 동시에 하퍼가 움직였지만, 노리치의 대응이 좀 더 빨랐다.

후반 58분, 노리치의 푸키가 동점골을 성공시켰다.

[노리치 2 - 2 선덜랜드]

노리치 팬들의 뜨거운 함성이 캐로우 로드를 가득 메웠다.

We are Norwich and We will sing on our own.

We’re the green yellow army.

선덜랜드의 역습으로부터, 채 3분도 지나지 않아 벌어진 일이었다.

냉정한 톰슨조차 얼굴이 굳었을 정도의 충격적인 상황에, 어린 선수가 많은 선덜랜드는 그만 당황하고 말았다.

그리고 5분 후.

[고오오오오오올! 짜릿한 역전골! 스코어러는 우리의 챔피언십 득점왕- 푸키! 해트트릭입니다!]

마침내 경기를 뒤집는 골이 터져나오고 말았다.

[노리치 3 - 2 선덜랜드]

* * *

노리치 응원석에서 거센 외침이 터져나왔다.

“축구는 돈으로 되는 게 아니거든? 클래스는 돈으로 살 수 없다고!”

“에디도 의외로 별거 없네? 부록 스티븐은 의외로 괜찮은데 말야.”

“투자의 신? 그냥 런던 가서 주식이나 많이 사라 그래라!”

신나서 떠들기 시작한 노리치 팬들을 노려보며, 희주가 부들부들 떨었지만, 나는 침착했다.

“짜증나! 얘들 진짜 말 심하게 하네!”

“뭘, 이 정도면 신사적이지. 욕설을 퍼붓지도 않았고, 인종차별도 없었고, 경기장에 물건을 던진 것도 아니고···.”

내 예시를 들은 희주는 조금 진정했지만, 대신 다른 부작용이 생기고 말았다.

“오빠, 축구 말인데, 정말로 신사의 스포츠 맞아?”

“사이드라인 안에서는.”

축구에서, 모든 중요한 장면은 항상 사이드라인 안에서 일어난다.

팬이나 구단주는 물론, 감독도, 코치도 들어갈 수 없는 공간에서, 선수들의 발과 심장으로 승패를 가르는 게 축구라는 스포츠다.

사이드라인 밖에서 해줄 수 있는 것은···.

Sunder-land!

원정 응원석에서, 팬들이 하나둘씩 일어나기 시작했다. 꿈틀거리는 붉은 물결. 언제나 팀을 지탱해온 목소리가 캐로우 로드에 울려 퍼졌다.

Wise man say, only fools rush in.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에서는 400km나 떨어져 있고, 함께한 팬들의 수는 평소의 반의 반에 불과하지만.

외침에 담긴 힘은, 그 간절함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But I can’t help falling in love with you.

그 위에 목소리를 얹었다. 희주도, 그리고 나도.

경기장의 시계가 63분을 넘어 70분, 80분으로 향해갈 때에도. 노리치의 승리, 선덜랜드의 탈락이 불과 5분 앞까지 다가왔을 때에도.

Sunderland! Sunderland! Sunderland!

선덜랜드의 붉은 유니폼을 입은 사람은, 휘슬이 세 번 울리기 전까지는 절대 포기하지 않으니까.

* * *

85분.

선덜랜드의 로컬 보이가 또다시 왼쪽 측면을 질주했고, 오른쪽에서는 스티븐이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다.

그리고 아크 정면에서는 요니가 공을 건네받은 채 수비와 대치했다.

오늘의 경기에서 우리가 잡아낸 가장 좋은 찬스이자, 어쩌면 오늘의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를 장면이었다.

센터백과 대치하던 요니의 발이 공을 오른쪽 아웃프론트로 밀어낸다 싶은 순간, 요니의 몸이 오른쪽으로 돌았다.

노리치 센터백이 기민하게 움직였다.

“안 속는다! 돌파가 아니라 패스지!?”

울려퍼진 외침처럼, 요니는 이런 상황에서 직접 득점보다 패스를 훨씬 선호하는 선수다. 확실히 노리치는 오늘 우리를 존중했다. 요니의 성향까지 미리 조사했을 정도로.

하지만, 요니의 센스까지 완벽히 조사하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스티븐 쪽으로 휘둘러진 요니의 발은, 그대로 공 위를 스쳐 지났다. 이윽고 공은 요니의 몸과는 반대편으로 굴렀다.

“힐 킥이라고!?”

시야가 닿지 않는 등 뒤, 서로의 움직임조차 확인하지 않았음에도 요니의 패스는 정확히 왼쪽을 파고드는 잭에게 향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함께 축구를 해 온 사이에서나 가능한 호흡에 경기장이 끓어올랐다.

공을 향해 무섭게 파고드는 잭. 그리고, 필사적으로 걷어내기 위해 달려드는 노리치의 수비가 뒤엉켰다.

휘슬이 울렸다.

달려온 심판이 페널티 스팟을 가리켰고, 경기장은 곧바로 달아올랐다. 야유를 퍼붓는 노리치 팬들과, 함성을 지르는 우리 선덜랜드 팬들로.

그런 소음 속에서 페널티 킥을 준비하러 키커가 천천히 걸어 나오는 순간, 경기장은 그야말로 폭발했다.

페널티 스팟에 향하는 키커는, 피터 톰슨이었다.

노리치에 몸담았던 선수. 캐로우 로드를, 그리고 노리치 골키퍼 크룰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선수.

홈팬들의 야유와 원정팬들의 환호 속에서, 피터 톰슨이 천천히 공 앞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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