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존중의 방식 (4)
아직 함성의 잔향이 남은 경기장에서, 팀 크룰이 톰슨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망할 놈, 방향은 읽었었는데.”
“그렇더군. 조금만 느슨하게 찼으면 막힐 뻔했어.”
“패스 솜씨도 여전하더라. 마지막에 수비진을 한 방에 부순 그거, 엄청 뼈아팠어.”
“캐로우 로드였으니까.”
톰슨은 담담하게 대답하며 크룰의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조금 그립다는 듯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한때 그가 몸담았던 팀, 홈으로 쓰던 경기장을.
피터 톰슨은 팀을 자주 옮기는 선수는 아니었다. 그의 긴 프로생활에서, 홈으로 쓴 경기장은 오직 세 곳뿐이었다.
스탬포드 브릿지,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 그리고··· 캐로우 로드.
“톰슨, 오늘 네 플레이는 확실히 존중받을 만했어. 그래서 우리가 오늘 널 그렇게 마크했던 거고.”
크룰의 칭찬에, 톰슨은 쓴웃음을 지었다.
“심판 눈 피해서 슬쩍슬쩍 발 밟는 것도 존중인가?”
“너도 우리 애들 엄청 밟았잖아··· 그리고 오른발은 안 건드리잖냐.”
사실 중원에서는 흔히 벌어지는 상황이다. 정강이받이 아래가 피멍으로 물드는 정도는 일상다반사, 축구계에선 딱히 서로 앙금이 남을 일도 아니다.
마주 보고 잠시 피식거린 다음, 크룰이 평소보다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팀은··· 잘 관리해주냐?”
“응. 지금도 버스 세 대에 의료장비와 메디컬 팀을 꽉꽉 싣고 따라왔지.”
“그거 다행이네. 갑부 구단주가 좋긴 좋구나··· 거기 혹시 늙은 골키퍼는 안 필요하대?”
얼마간 크룰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톰슨이 낮게 되물었다.
“혹시 페르난데스와 경쟁해보고 싶어졌냐?”
“아, 오늘 안 나와서 깜빡했네··· 제길, 내가 거기 가면 완전 끼인 꼴이겠지? 노련함은 페르난데스에게 밀리고, 패기는 하퍼에게 안 될 테니까. 그냥 난 옷 벗을 때까지 여기서 버텨야겠다.”
이적을 운운하는 크룰의 반응이 가벼운 농담이라는 것쯤은 톰슨 또한 알고 있었다.
크룰은 네덜란드 인이지만 뉴캐슬 유스 출신이고, 10년 넘게 뉴캐슬에서 뛰었으니까. 그러니 다른 팀이면 몰라도, 절대 선덜랜드에서 뛸 리는 없는 선수다.
혹시라도 정말 크룰이 선덜랜드에 온다면, 뉴캐슬 팬들에게 유다 소리를 들어도 모자랄···.
그때, 노리치 관중석에서 거친 외침이 터져 나왔다. 그라운드에 맞닿은 1층 스탠드였다.
“톰슨, 이 유다같은 배신자 새끼야!”
뜬금없는 야유에 톰슨의 얼굴이 굳었다. 크룰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관중석은 곧바로 뜨거워졌다.
“뭐라고? 너 지금 톰슨한테 뭐라고 했어! 유다라고?”
톰슨은 잠시 귀를 의심했다. 반론이 들려온 곳 또한 노리치 응원석 쪽이었기에. 선덜랜드 팬들이 반론하기도 전의 일이었다.
“여기 머무는 동안 한 번도 대충 뛴 적 없는 선수야. 떠날 때도 잡음 하나 없었고, 돌아와서 세레머니도 하지 않았지.”
“85분에 동점골 넣었는데도, 세레머니는 커녕 포효 한 번, 미소 한 번 보이지 않았어. 주먹 한 번 움켜쥐지 않았다고!”
“그렇게 우릴 존중한 선수 보고, 유다라고? 그러면 톰슨이 일부러 실축이라도 해야 했나? 그럼 크룰은 뉴캐슬 만나면 일부러 먹혀 줘야 해?”
주위의 싸늘한 반응에, 처음 유다를 외친 노리치 서포터가 조금 위축된 목소리로 항변했다.
“나도 알아. 필드골 넣은 거면 나도 암말 안 했을 거야. 하지만 페널티킥이었어. 그걸 꼭 직접 찼어야 했냐 이거지.”
“톰슨은 지금 선덜랜드의 1옵션 키커라고, 병신아.”
노리치 팬들이 자기들끼리 끓어올랐다. 그런 팬들을 달래러 크룰이 움직이려던 찰나, 톰슨이 크룰의 어깨를 슬쩍 두드려 제지했다.
그리고 톰슨은 노리치 응원석을 향해 다가가, 자신을 유다라고 부른 팬과 눈을 마주쳤다.
“오랜만입니다.”
“응?”
“노리치에 와서 처음으로 골 넣은 날, 제 레플리카에 사인 받아갔었죠.”
“어··· 그러니까···.”
“짐을 챙겨 떠나던 날도 만났었죠. 피켓 들고 계셨잖아요. 전부 기억합니다··· 그래서 절대로 대충 뛰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
“혹시라도 상처를 줬다면 미안합니다. 하지만, 형편없는 플레이를 보여 드리긴 싫었습니다. 그것뿐입니다.”
그러자 유다라고 외쳤던 사내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기, 유다 소리는 내가 잠깐 실수한 거야. 아니, 사실은 다시 보고 싶어져서 그랬던 거야. 네 골 세레머니를.”
노리치 팬이 영원히 볼 수 없게 되어버린 풍경이 있다. 두 팔을 벌리고 달리는 톰슨 특유의 골 세레머니가 그 중 하나다.
세상에는 친정팀 상대로도 시원하게 골 세레머니를 선사하는 선수들이 있지만, 피터 톰슨은 그런 타입이 아니다.
따라서 앞으로 톰슨이 얼마나 많은 골을 넣더라도, 노리치의 팬들은 톰슨의 세레머니를 현장에서 직접 볼 수는 없게 되었다.
“혹시라도 우리가 다시 붙는다면···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에서라면, 세레머니 해도 괜찮아.”
“정말 죄송합니다.”
무표정하던 톰슨의 얼굴에 드물게 감정이 드러났다. 미안함과 당황, 곤란함으로 가득한.
“죽어도 세레머니는 못하겠습니다. 노리치 상대로는요.”
“하긴··· 너는 그런 선수였지.”
인사를 마치고 돌아서는 톰슨을 바라보던 노리치 팬들이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들의 6번이었던, 그리고 지금은 선덜랜드의 6번을 걸친 남자의 등에 박수를 보내기 위해.
* * *
경기가 끝나고 캐로우 로드를 빠져나오는 순간에도, 우리 스태프들은 쉬지 못했다.
“168호 차량, 출발하겠습니다!”
“수잔 베일리 고객님, 마일즈 우드 고객님··· 네, 탑승 확인했습니다. 217호 차량, 출발 준비 완료.”
붉은 버스 삼백 대가 줄지어 움직이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경기장 주변의 노리치 팬들은 부러움에 가득한 시선을 보냈고, 우리 선덜랜드 팬들은 자부심 가득한 얼굴로 차례차례 버스에 올랐다.
“구단주가 돈 많아서 좋겠다··· 썩을 놈들, 이렇게 된 김에 이번엔 꼭 우승해라. 너희도 EFL컵 하나쯤은 있어야지.”
“고맙다. 내년에 또 붙어보게, 위에서 잘 버티고 있어.”
“너희야말로 미끄러지지 말고 잘 올라오고.”
4-3, 일곱 골을 주고받는 혈전을 벌인 두 팀의 서포터들이, 서로를 향해 작별 인사를 건넸다.
“굿바이, 카나리아.”
“굿바이, 블랙캣츠.”
차례차례 떠나는 버스 사이에서, 나 또한 구단주용 리무진에 올랐다.
푹신한 좌석에 몸을 맡기자 기분 좋은 피로감이 몰려왔다. 정신을 놓으면 곧바로 기절하듯 잠들 정도로.
그만큼 극적인 경기였다. 지켜보는 것만으로 기진맥진해질 만큼.
경기중에는 심장이 뛰고 피가 끓어서 지치는 줄도 몰랐지만, 끝나고 나니 긴장이 탁 풀렸다.
잠들면 안 되는데. 생각해야 할 게 너무 많은데.
EFL 컵 3라운드 준비도 신경 써야 하고, 슬슬 FA컵에도 대비해야 하고, 새로운 팬서비스 아이디어도 짜내야 한다.
그리고 눈에 띄게 다가온 목표, 프리미어리그 복귀도 슬슬 준비해야 할 시간이다.
누군가는 이제 겨우 가을인데 벌써 무슨 설레발이냐고 나무랄지도 모르겠지만, 내게는 근거가 있었다. 오늘의 난타전 끝에, 위로 올라갈 수 있음을 확신했으니까.
물론 챔피언십은 리그 원처럼 만만하지는 않다. 지난 시즌처럼 리그를 초토화하며 1위로 직행할 자신은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못해도 승격 플레이오프를 놓치지 않을 자신은 있었다. 그리고 승격 플레이오프는··· 컵 대회와 거의 같은 조건으로 이루어진다.
방식은 토너먼트고, 결승은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치러지니까.
그리고 컵 대회에서 만나는 팀은, 승격 플레이오프에서 만나게 될 팀들보다 강하다. 오늘 만난 노리치만 해도, 지난 시즌 챔피언십을 지배한 팀이 아니었던가?
그러니까 우리는 반드시 승격할 수 있다. 플레이오프를 뚫어내고 프리미어리그로 돌아갈 것이다. 선덜랜드가 5년 전까지 몸담았던, 세계에서 가장 치열한 리그로.
그에 맞춰 미리 준비해야 한다. 선수도 더 사와야 하고, 슬슬 유니폼 스폰서도 바꿔야 하고, 그리고, 그리고···.
모르겠다. 머리가 안 돌아가. 조금 더 경기의 여운을 느끼고 싶기 때문이겠지.
그때 옆에서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희주가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
“네? 잠시만요. 오빠, 린다 씨인데.”
건네받은 전화기 너머에서 언제나처럼 차분한 린다의 목소리가 들렸다.
“구단주님, 혹시 괜찮으시면··· 잠시 팬들과 소통 가능하시겠어요?
마침 피로감과 경기의 여운에 젖어서 머리가 잘 안 돌아가던 참이었다. 팬들과 소통하는 건, 내게도 나쁠 거 없는 일이었다.
팬서비스도 해주고, 겸사겸사 아이디어도 얻을 수 있을 테니.
“괜찮을 것 같긴 한데···.”
그런데 둔해진 머릿속 한쪽이 근질거렸다. 뭔가 걸린다.
“··· 좀 이따 하죠. 준비되면 내가 연락하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구단주님.”
전화를 끊은 다음, 희주에게 지시했다.
“메디컬 팀에 전화 좀 걸어 봐.”
“메디컬 팀? 갑자기 왜? ··· 혹시 무릎 아파?”
그럴 리가 있나. 오늘은 비도 안 오는데.
“이상해서 말이지. 팬들과 소통하려면 나보다 훨씬 적임자가 있잖아.”
“아하, 잭 선수? 피곤해서 그런 거 아닐까? 경기 끝난 직후잖아.”
“걔가 피곤하다고 팬을 마다할 인간이냐.”
요니는 지금쯤 의식불명이 되었을 것이고, 어쩌면 다른 선수들도 축 늘어졌겠지만 잭은 해당 없다. 지구력의 차이도 있겠지만, 팬 서비스 정신이 남들과는 차원이 다른 편이다.
우리 홈에서만 벌써 몇 번이나 드레싱룸을 빠져나가 팬들에게 달려나갔던 잭이, 돌아가는 버스에서 팬들과의 소통을 사양할 리는 없다··· 컨디션이 정상이라면.
마침 페널티 킥을 얻어냈을 때도, 그리고 결승골 때도 잭은 노리치 선수들과 뒤엉켰다. 부상을 의심할 수 있는 상황이다.
잠시 후 희주가 전화를 건넸다.
“네, 구단주님. 버드입니다.”
“혹시 잭 거기 있습니까?”
그러자 곧바로 옆에서 잭의 목소리가 들렸다.
“구단주님, 저 정말 괜찮슴다! 아무렇지도 않슴다.”
“··· 네, 구단주님. 잭 선수는 지금 메디컬 차량에 있습니다. 충돌이 몇 번 있어서 점검 중입니다.”
왜 나쁜 예감은 빗나가는 법이 없어.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올 시즌, 잭은 명실상부한 팀의 핵심 선수로 성장하는 중이었다. 아직 톰슨만큼 경기 전체에 영향력을 미치지는 못하지만, 대신 분위기 메이커 노릇은 톡톡히 해주고 있다.
혹시라도 잭이 이탈하게 되면, 챔피언십에서의 순위 경쟁도 장담하기 힘들게 된다. 게다가···.
무심코 오른쪽 무릎을 한번 바라본 다음, 나는 무거운 기분으로 물었다.
“어디를 다쳤습니까?”
“발목에 살짝 충격이 온 거 같습니다만, 큰 부상은 아닙니다. 당장 이번 주말 경기에 출전해도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그건 다행이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내 귓가에, 메디컬팀장 버드의 목소리가 차분하게 울렸다.
“혹시라도 문제가 남지 않도록 최대한 케어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잘 부탁합니다.”
그러자 버드에게서는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감사합니다.”
고맙다고? 메디컬 팀이 나한테 고마워할 상황인가? 그 반대가 정상 아닌가?
“사실 메디컬 팀으로서는 지금 같은 상황이 제일 불안합니다. 아예 큰 부상이면 차라리 바로 대응하면 되는데, 작은 부상이 의심스러울 때는 돌아가는 길 내내 미칠 것 같았습니다.”
전화기 너머에서 버드가 낮게 웃었다.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에는 최고의 설비를 갖춰 주셨지만, 그동안 원정에서는 간단한 검사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이젠 아니지만요. 구단주님 덕분입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나는 시트에 몸을 파묻었다. 긴장이 싹 풀려서 그만 웃음이 나왔다.
옆에서 희주도 함께 웃었다.
“진짜 다행이다··· 그치?”
“그러게.”
덕분에 머리가 맑아졌다. 잭의 부상 가능성에 놀라서 잠도 깼고 말이지.
나는 린다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 * *
팀 엠블럼이 선명하게 칠해진 300대의 버스에서는, 선덜랜드 팬들의 노래가 한창이었다.
Wise man say, only fools rush in.
But I can’t help falling in love with you.
마일즈와 수잔이 탑승한 217호 차량 역시 마찬가지였다.
Shall I stay? Would it be a sin.
If I can’t help falling in love with you.
이제 선덜랜드를 우렁차게 세 번 외칠 차례였다. 마일즈는 숨을 들이쉬었다.
“Sun-”
순간, 노래가 멈추었다. 버스 앞에 비치된 스크린에 낯익은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네, 썬입니다. 선덜랜드 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썬!”
곧바로 버스는 환성으로 뒤덮였다. 열렬한 환호에 미소로 화답한 구단주 이희성이 표정을 고쳤다.
“오늘 우리는 EFL컵을 향해 의미있는 한 걸음을 내밀었습니다. 치열한 공방 끝의 원정 승리. 먼 길을 마다않고 함께해 주신 팬 여러분 덕분입니다.”
“응원만 할 수 있게 해주는데, 이 정도는 해야지!”
원정 경기를 위해 구단에서 버스까지 대절하는 경우는 무척 드물었다. 심지어 스태프까지 파견해서 입장을 돕는 팀은 아마도 전 세계에서 선덜랜드 한 팀 뿐일 것이다.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에, 마일즈의 가슴이 뿌듯해졌다.
I can’t help falling in love with you.
정말로 사랑할 수밖에 없는 구단주였다. 조금 전까지 모두가 합창하던 노래의 가사처럼.
“감사합니다. 더 좋은 경기력으로 보답하겠습니다. 그리고 구단 내외를 더 정비해나갈 겁니다. 여러분들이 정말로 응원만 하실 수 있게, 아무런 걱정도 불편도 없도록요.”
그때 누군가 불쑥 입을 열었다.
“정말로 고마운데··· 요즘은 표 구하기가 정말 너무 힘들어. 시즌권은 기다려도 차례도 안 오고···.”
마일즈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야 기존 시즌권 보유자가 빠지지 않으니까. 응, 절대 안 빠질 걸.”
지난 5년간 팀이 암흑기를 맞이했을 때에도 시즌권을 유지해온 팬들이다. 이제 팀이 본격적으로 부활의 여정을 걷기 시작한 지금, 시즌권을 포기할 리가 없다.
좌석 수가 늘어나기 전까지, 티켓 구하기는 계속 힘들 것이다.
화면 너머에서 이희성이 환하게 웃었다.
“그렇군요. 마침, 제가 드리려는 선물이 그거였습니다. 다음 시즌부터는 표 구하기 좀 쉽게 해드릴까 하는데요.”
‘설마···.’
마일즈가 숨을 삼키는 동안, 이희성이 힘찬 목소리로 선언했다.
“이제부터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를 증축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