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영업의 비결 (2)
구단주가 된 이후 시도하는 첫 번째 증축, 이른바 ‘블랙캣츠 스탠드 프로젝트’는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내가 지분을 인수한 파퓰러스는 다수의 야구장, 축구장을 지어본 경력이 있는 업체였다.
그리고 파퓰러스 런던 지사의 수석 디자이너 타일러는 웸블리부터 핫스퍼 스타디움까지 두루 참여하며 경력을 쌓은 일류 건축가다.
비록 내 몇 가지 요구에는 난색을 보였지만, 어떻게든 수용하려는 의지를 보이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한편 ‘블랙캣츠 스탠드 프로젝트’ 가 순조롭게 진행되자, 우리 선덜랜드 스태프들의 제안이 속속 접수되었다.
“CS팀의 고객 설문 조사에 따르면, 다음에 지을 스탠드 이름은 썬 스탠드로 하자는 의견이 압도적입니다.”
활짝 웃는 CS팀장 린다를 향해,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어··· 그건 나중에 나 은퇴하고 나면 고민합시다.”
구단주가 된 지 이제 겨우 2년, 벌써 스탠드에 내 이름을 붙이기는 너무 낯뜨겁다.
스탠드에 선덜랜드 관계자의 이름을 붙일 거라면 나보다 더 적당한 인물이 있을 것이다. 마침 우리 팀에는 선수 출신이고, 감독과 단장, 회장을 두루 역임한 진짜 레전드가 한 분 계시니까.
썬 스탠드를 기각 처리하자, 다음엔 시설관리팀장 조엘이 의견을 냈다.
“스탠드 공사 가림막에, 꼬마 팬들의 크레파스 그림을 넣으면 어떻겠습니까?”
“아주 좋군요. 스타디움 관련 그림도 괜찮겠고··· 컵 대회 트로피도 넣으면 좋겠습니다.”
“어느 대회를 넣을까요?”
“그야 EFL컵이죠.”
매치데이에는 공사하는 줄도 모르게 하라는 강력한 요구를 전달했지만, 그래도 경기장 구석에 가림막 정도는 부득이하게 설치해야 한다.
그렇기에 가림막에는 우리의 꿈을, 앞으로 팀이 나아갈 비전을 보여주고 싶었다.
당장의 목표는 역시 선덜랜드가 한 번도 갖지 못했던 트로피, EFL컵이 가장 적당하다.
한편 꽤 실용적인 아이디어도 접수되었다.
“구단주님. 이번에 블루투스 비콘과 와이파이 설비를 경기장 곳곳에 대량으로 설치할 거라고 들었는데요.”
그렇게 운을 뗀 CS팀의 에이스, 에이미가 아이디어를 냈다.
“자리에 앉아서 간식거리 같은 걸 주문할 수 있게 하면 어떨까요? 방법은 많을 거예요. 큐알코드를 쓴다거나 하는 식으로요.”
“괜찮은 생각 같군요. 세심한 배려가 깃든 아이디어라고 생각합니다.”
영업의 비결, 그 첫 번째는 팬들의 니즈를 세심하게 파악하는 것이다. 역시 CS팀의 에이스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내 칭찬에 에이미는 겸연쩍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게, 실은 비서님이 주신 의견이었는데요. 블루투스나 큐알코드 같은 건 저희가 덧붙인 거지만, 경기장에 앉아서 간식을 받는 아이디어 자체는 비서님이 주셨어요.”
하긴, 한국 사람이라면 음식을 배달 시켜 먹는 게 일상이다. 우리가 어떤 민족입니까, 라는 느낌이겠지.
“추진하죠. 기술적인 부분은 조엘과 상의하면 될 겁니다. 다만 경기 보는 중에 판매원이 왔다갔다 하면 다른 팬들의 관람에 방해가 될 테니···.”
“그 부분은 조금 더 연구해 보겠습니다.”
한편 꽤 돈독이 오른 의견도 있었다. 구체적으로는 신상품 기획팀장 아드리안의 경우인데···.
“구단주님, 스타디움 피규어를 새로 찍어내고 싶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의견을 꺼내며, 아드리안은 피규어 시제품 또한 함께 내밀었다. 경기장 한쪽 구석에 스탠드가 하나 더 추가된 형태였다.
“아직 완공되지도 않은 경기장 모습을 용케 만들었네요.”
“어려운 작업은 아니었습니다. 저희와 컨택중인 피규어 업체가 실력이 좋은 편이고, 일단 도면이 나왔으니까요.”
말은 어렵지 않았다고 하면서도, 아드리안의 눈가에는 다크서클이 가득하다. 업체를 꽤 들볶았을 것이고, 어쩌면 시제품 만들 때 붙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긴, 스타디움 증축은 아드리안 입장에서는 일종의 대목에 해당되는 이벤트긴 하다. 축구 팬들이라면 누구나 꿈꾸지만, 실제로 경험해보긴 쉽지 않으니까.
“팬들이라면 흔쾌히 지갑을 열 것으로 확신합니다.”
“동의합니다만, 그래도 이런 제품은 안 됩니다. 우승 기념 한정판 풀세트 팔아먹은 지 몇 달이나 되었다고···.”
당장은 잘 팔리겠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독이다. 우리는 이미 매 시즌 스탠드를 확충하겠다고 선언한 상태니까.
“매 시즌 새 스타디움 피규어가 나오는데, 기존 제품과 호환도 안 되면, 도대체 이런 걸 좋아할 사람이 어딨겠습니까?”
“그러시면···.”
“블랙캣츠 스탠드 모듈만 따로 만들어 보세요. 기존 스타디움 피규어에 결합할 수 있도록 설계해서요.”
“어 그건···.”
아드리안은 꽤 곤란해하는 것처럼 보였다. 기존 경기장 피규어가, 추가 모듈과의 확장성을 고려하지 않은 상태로 만들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은 있었다.
애초에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는 지어질 때부터 칠만 석 규모까지의 확장이 가능하도록 설계된 경기장이었고, 우리 모형은 세세한 디테일까지 재현한 제품이니까.
잠시 고민하던 아드리안이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즉시 착수하겠습니다.”
“맡기겠습니다. 그리고··· 요즘 우리 굿즈 매출은 좀 어떻습니까?”
매점과 메가스토어의 판매 직원은 전부 CS팀 관할로 넘어갔지만, 상품 매출 현황은 여전히 아드리안이 체크하고 있다.
아드리안의 입가에 웃음기가 돌아왔다.
“호조입니다. 이적생 관련 굿즈 매출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요즘은 스티븐 관련 굿즈가 아주 잘 팔립니다.”
“다행이군요.”
스티븐은 큰 기대감이 없이 팀에 합류한 선수고, 이적 직후에도 한동안 경기에 나오지 못했었다.
자연히 선수 관련 굿즈도 전혀 팔리지 않았다. 스티븐 마킹 레플리카는 악성 재고 취급을 받을 정도였다.
다행히 요즘은 선수의 활약이 이어지면서 관련 굿즈 매출도 부쩍 늘어난 모양이다.
“그럼 에디는 좀 어떻습니까?”
그러자 아드리안의 얼굴에는 미묘한 빛이 떠올랐다.
“에디는···.”
* * *
에디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봐, 스티비? 골 세레머니가 이게 뭐야. 좀 박진감 있게 못 하겠어?”
스티븐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미안, 득점 찬스만 오면 정신이 멍해져서 그만··· 내가 골 넣는지 아닌지도 모르겠어.”
“아 맞다. 너는 공중볼 딸 때만 머리를 쓰는 타입이었지.”
혀를 차면서 에디는 마우스를 몇 차례 클릭했다. 그러자 화면에 잭의 모습이 떠올랐다.
“스티비, 이제부터는 잭을 롤모델로 삼도록. 저 친구 세레머니가 아주 끝내주거든.”
“그러게, 끝내주네.”
“몸동작 하나하나에서 골을 넣은 기쁨이 막···.”
“응, 쏟아지는 것 같네.”
“그리고 이 기쁨을 팬들에게 나눠 주겠다는 의욕이 보이잖아? 이게 비결이라고. 유니폼 판매량의 비결.”
침을 튀겨가며 설명하는 에디의 귓가에, 깊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너희는 대체 왜 분석실에서 세레머니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지?”
슬슬 표정이 사나워지기 시작한 샐리를 향해, 에디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하, 좀 봐주십쇼! 훈련장에서 골 세레머니 신경 쓰다간 감독님이 스티비를 죽일 겁니다.”
“널 죽이는 게 아니고?”
샐리의 눈빛은 싸늘했지만, 에디는 개의치 않았다. 미녀 앞에서 넉살 좋게 굴 수 있는 것은 에디가 생각하는 자신의 수많은 장점 중 하나였다.
“저하고 스티비 중에 누가 더 가치 있는 선수인지 모르실 정도면, 올해의 감독상 못 타셨죠.”
“말이나 못하면 밉지나 않을 텐데···.”
보란 듯 인상을 찌푸리는 샐리를 곁눈질하며, 에디는 재빨리 화면을 돌렸다.
“스티비, 이건 작년 박싱데이 영상이야. 엠블럼 키스 세레머니 보이지? 저 다음날 잭 유니폼이 동났다더라.”
“어, 저건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스티븐의 순박한 대답에, 에디의 얼굴이 구겨졌다.
“스티비, 스티비! 제발 생각을 좀 하고 살아. 저런 건 이적설이 났을 때 해야 효과가 있지! 아니면 데뷔골 넣고 바로 하던가. 이제 와서 키스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어?”
“그럼 왜 보여준 건데···.”
“적절한 시점에 좋은 세레머니가 인기의 비결이고, 유니폼 판매량의 비결이니까 참고하라고. 듣자니 스티비 네 유니폼 악성재고 되기 직전이라더라.”
친근하게 스티븐의 어깨를 두드려주던 에디는, 순간 가벼운 불안감을 느꼈다. 샐리의 표정이 퍽 미묘해졌기 때문이다.
빼어난 미모와 예리한 지성, 놀라운 축구 지능을 겸비한 분석관 샐리지만, 표정 관리는 그녀의 특기가 아니었다.
“뭔가 아시는 게 있군요. 털어놓으시죠.”
그러자 잠시 머뭇거리던 샐리가 차분하게 말했다.
“지난달 마킹 레플리카 판매 순위 말인데, 스티븐이 4위라고 들었어.”
“그거 선수끼리만 매긴 순위입니까? 아니면 스태프도 포함해서··· 하긴, 큰 의미는 없겠군요.”
선덜랜드에는 잭과 요니, 페르난데스라는 확실한 탑 3이 존재한다. 팀의 유니폼 판매량을 책임지는 핵심들이다.
비록 선수는 아니지만 엄청난 레플리카를 팔아치우는 구단주 이희성의 존재까지 생각하면, 스티븐의 4위는 에디보다 무조건 높은 순위일 수밖에 없다.
에디가 입술을 깨물었다.
“즉, 저는 지금 저보다 유니폼 훨씬 잘 파는 놈한테 영업의 비결을 떠들어댔다는 뜻이군요. 재밌으셨겠어요.”
“그게, 에디. 너는 센터백이고··· 골과는 거리가 먼 포지션이라···.”
뒤늦게 수습하려는 샐리와 난처한 표정을 짓는 스티븐을 향해 에디는 미소를 지었다.
“뭐, 역시 선수는 골을 넣어야 인기가 있으니까요··· 골 넣는 센터백? 완전 어썸하죠.”
그러자 샐리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세트피스 전술을 수정하자고 건의해볼까? 마침 다음 상대 버밍엄은 제공권에서 별 강점이 없는 팀이니까···.”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에디가 고개를 저었다.
“세트피스로 골 넣는 센터백은 발에 채일 만큼 흔하잖아요. 그리고 저, 헤더 별로 안 좋아해요. 제 뇌세포 죽으면 축구계의 손실이 너무 큽니다.”
고운 손을 이마에 가져다 대며 인상을 쓰는 샐리를 곁눈질하며, 에디는 단호한 표정으로 선언했다.
“제가 알아서 넣겠습니다.”
* * *
리그 9라운드, 선덜랜드 대 버밍엄. 언제나처럼 익스클루시브 박스에서 경기를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에디의 움직임이 어째 영 이상하다고 느낀 건, 전반전 20분경의 일이었다.
후방 빌드업을 위해 톰슨이 센터백 사이로 내려온 장면, 전형적인 라볼피아나 빌드업의 포석이었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에디는 혼자서 위로 쑥 올라가 버린 것이다. 뜻밖의 장면에 어이가 없어진 희주마저 쓴웃음을 지었다.
“저건 무슨 전술이야?”
센터백과 미드필더가 자리를 바꾸는 전술이겠지··· 저게 정말로 전술일 경우의 말이지만.
나름 참신하다면 참신한 부분은 있었다. 실제로 톰슨은 센터백으로 출전한 경험이 있는 선수고, 그리고 에디는 수비형 미드필더로 뛰어도 되겠다는 평가를 받았었다.
게다가 에디는 작년까지 셰필드에서 뛰면서 오버래핑 센터백 전술을 수행하기도 했다. 공격 상황에서 앞으로 전진한 경험 자체는 풍부하다.
하지만 톰슨과 에디가 굳이 자리를 바꾸는 의미는 잘 모르겠다. 브라이언, 혹은 로저스 감독이 쓰기엔 지나치게 참신한 기책인데···.
“아! 감독님 화나셨다.”
희주 말처럼, 테크니컬 에어리어에서는 얼굴이 시뻘겋게 변한 로저스 감독이 목에 핏대를 세워 가며 뭐라 외치는 중이었고, 톰슨의 표정도 무척 볼만해졌다.
즉, 이번 전진은 어디까지나 에디의 독단적인 판단이라는 뜻이다.
“이래도 괜찮은 거야? 잘하긴 하는 거 같긴 한데···.”
“응, 잘하긴··· 하네.”
에디의 몸놀림은 경쾌했고, 발재간도 나쁘지 않았다. 드리블 돌파를 시도하진 않지만, 길고 짧은 패스로 경기를 조립해나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원래는 톰슨이 하던 역할을 에디는 퍽 훌륭하게 수행했다. 처음에 당황하던 우리 선수들도 어느새 에디의 움직임에 호응하기 시작했다.
스티븐이 전방을 파고들고, 요니와 잭이 부지런하게 경기장 곳곳을 누볐다. 뜻밖의 움직임에 당황하던 우리 팬들도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선덜랜드의 공세.
EFL컵 2라운드에서 지난 시즌 챔피언십 우승팀을 난타전 끝에 제압한 바로 그 팀의 공격이, 심지어 홈 경기에서 펼쳐진 상황이었다.
버밍엄으로서는 쉽게 버티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니 라인을 내린 채 한껏 움츠러들 밖에.
뜨거워지는 함성, 달아오른 경기장의 공기 속에서, 공세의 끝을 맺은 선수는 에디였다.
흘러나온 공을 향해 에디가 전력으로 달려들었다. 잠시 후 에디는 두 팔을 크게 벌려 중심을 잡았고, 왼발을 앞으로 크게 내디뎠다.
마치 전성기의 톰슨을 연상하게 하는 다이나믹한 동작이었다.
다음 순간, 달려들던 기세와 자신의 체중까지 모두 실은 통렬한 킥이 버밍엄의 골네트를 흔들었다.
[선덜랜드 1 - 0 버밍엄]
에디가 교체된 것은 그 직후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