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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자의 신이 키우는 축구단-83화 (83/422)

83화. 선덜랜드를 위한 하나 (3)

“브로, 혹시 다른 방침도 그대로야?”

조심스럽게 묻는 브라이언을 바라보며, 나는 컵 대회에서 공격적인 축구를 해주길 주문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프리미어리그에 돌아갈 다음 시즌을 대비하려는 의도였다. 선수들에게 실전 경험을 쌓아주는 한편, 우리 공격력이 어느 정도 팀까지 통할지 시험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하지만, 아스널같은 빅클럽 상대로 전술 시험까지 하면서 승리하라는 조건은 너무나도 가혹하다.

브라이언을 향해 슬쩍 고개를 저은 다음, 로저스 감독에게 시선을 돌렸다.

“수비적으로 하라거나, 혹은 공격적으로 몰아치면 좋겠다거나··· 그런 요구는 하지 않겠습니다. EFL컵에서 결과를 얻기 위한 전술이라면 무엇이든 좋습니다.”

티 날 정도로 안도하기 시작한 브라이언과 달리, 로저스 감독은 차분한 표정으로 빙긋 웃었다.

“말은 그렇게 해놓고, 정작 얼굴을 보면 입이 근질거리는 표정을 짓고 있는 것 같은데.”

하고 싶은 말은 분명히 있지만, 가려서 할 필요가 있다. 로저스 감독이나 브라이언이나 오해할 타입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일단 나는 구단주다.

코칭스태프의 인사권을 손에 쥔 내가 경기 준비에 대해 첨언하기 시작하면, 사실상 조언이 아닌 명령이 되기 쉽다.

그래서 일단 단서를 달기로 했다.

“의견 정도는 있지만, 어디까지나 구단주가 아닌 선덜랜드 팬으로서의 아이디어로 받아들여 주세요. 그래서 말인데, 일반적으로 우리가 아스널 상대로 어떤 축구를 할 거라고 생각할까요?”

“라인을 내리고 수비를 굳힌 다음 역습하겠지. 열 명 중 아홉 명은 그렇게 생각할 거야.”

“당연히 아스널도 그렇게 생각할 겁니다. 마침 우리는 리그 경기에서는 역습 축구를 즐겨 쓰니까요.”

그러자 옆에서 샐리가 웃으며 끼어들었다.

“알겠어요. 초반에는 강경하게 나가면 오히려 허를 찌를 수 있다는 뜻이군요?”

“마침 우리 홈이니까요. 사만구천 명의 열광적인 팬들, 경기장 옆의 풋볼 스퀘어와 펍까지 가득 메운 함성··· 천하의 아스널도 초반엔 적응하기 힘들 겁니다.”

“하긴, 빅클럽들은 보통 컵 대회에서는 로테이션 멤버들을 기용하니까요. 아스널 정도 빅클럽의 주전이라면 함성에 눈 하나 깜짝 안 하겠지만, 어린 선수는 당황하겠죠.”

“그렇게 정신 못 차리는 초반에 몰아붙이고, 골을 넣고 나서는 잠그는 거죠. 원래 하던 축구, 역습 축구로요.”

나와 샐리의 대화를 지켜보던 로저스 감독이 웃었다.

“재미있군. 감독도 일종의 지휘관이라는 점에서 보면, 대원칙 자체는 대단히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네.”

샐리도 반색했다.

“축알못 코치보다 훨씬 나은 거 같은데요. 구단주님, 이 기회에 코치 겸직 안 해보시겠어요?”

“시끄러워, 샐리.”

브라이언의 표정만 밝지 않다. 녀석을 위로할 겸 살짝 덧붙였다.

“물론 실제로 하려면 말처럼 간단하지는 않겠죠. 최소한의 교체와 터치라인 지시만으로 공격 축구와 역습 축구를 오가야 하니까요.”

“내 고충을 알아주는 건 브로하고 에너지드링크 회사뿐이야.”

후자는 좀 몰랐으면 좋겠는데.

고뇌하던 브라이언은 머리를 쥐어뜯기 시작했다. 이마가 부쩍 신경 쓰인다던 녀석으로서는 무척 치명적인 동작이다.

아니, 굳이 쥐어뜯지 않아도 네 가격은 잘 보인다니까?

한참 동안 이마 확장공사를 시도하던 브라이언의 얼굴에 미소가 돌아왔다.

“그렇다면, 잭을 윙어로 쓰면 될 것 같은데.”

잭을 윙어로? 그런다고 문제가 해결될까?

나 정도면 축구 꽤 잘 아는 구단주겠지만, 그래도 디테일한 전술이나 선수 기용까지는 장점이 없다.

하지만 샐리는 이해한 것처럼 보였다.

“가짜 윙어군요? 하긴, 요즘 축구계는 가짜가 대유행이죠. 가짜 9번, 가짜 10번··· 조만간 가짜 골키퍼나 가짜 코치도 나오지 않을까요?”

“골키퍼는 규칙상 안 되겠지··· 브로, 이놈의 가짜 분석관이나 어떻게 좀 해 봐.”

샐리가 키득거렸다.

“중원을 그대로 내줄 생각이군요, 코치님?”

“어차피 지공은 우리 장기가 아니니까. 축구 규칙 1조 1항부터 17조 3항까지··· 중원을 차지하는 팀에게 가산점을 주는 조항은 어디에도 없고.”

하긴, 축구의 승패는 무척 단순하다. 골라인을 완전히 넘어간 공만을 득점으로 하고, 상대보다 더 많은 득점을 올린 팀이 이긴다.

그것뿐이다.

“우리 장기는 빠른 전환이죠. 지금까지 리그에서 해온 수비도, 컵에서 해온 전방압박도 어차피 전환이 핵심이니까요.”

눈을 빛내며 이야기를 주고받는 샐리와 브라이언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적어도 경기 당일, 전술에 대해서는 크게 문제가 없을 것처럼 보인다고.

그래서 나는 조금 다른 것들을 생각했다.

한 번밖에 통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한 번 정도는 확실히 써먹을 수 있는 기습을.

* * *

EFL컵 4라운드, 선덜랜드 vs 아스널.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

언제나처럼 익스클루시브 박스에서 경기를 지켜보았다.

경기는 아스널의 선축으로 시작되었다.

아스널의 공세는 썩 적극적이지 못했고, 자기 진영과 하프라인 부근에서 공을 깔짝깔짝 돌리다가 우리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상황을 조금 탐색해 보려는 것인지, 함성에 얼어붙은 것인지는 판단하기 어려웠지만, 적어도 쉽게 공세에 나설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어쩌면 우리의 특기가 역습 축구이기 때문에 몸을 사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역습에 강한 팀 상대로 무턱대고 공격에 나서는 건 위험하니까.

그러니 오히려 우리에게 선공을 넘겨준 다음, 카운터프레스로 찬스를 만들려는 걸지도 모르겠다.

공교롭게도, 우리도 사양할 생각은 없었다. 마침 우리는 시작부터 제대로 몰아치려던 참이었으니.

공을 가져온 우리는, 공수의 기점인 톰슨에게 패스를 보냈다.

톰슨의 위치는 아래쪽이었다. 마치 센터백과 같은 위치로. 후방 빌드업의 정석 라볼피아나였다.

톰슨은 클래스 있는 대선수지만, 전성기가 지나 내려오는 추세다. 톰슨 혼자서 아스널 중원을 억누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니 압박을 피해 아래로 내려간다는 의미에서도, 라볼피아나는 옳은 선택이다.

다만···.

“오빠, 이러면 우리··· 중원이 텅 비는 거 아니야?”

기본적으로 우리는 4-4-2를 선호하고, 오늘도 그렇게 출전했다. 톰슨이 아래로 내려가면 우리 중원에는 미드필더가 한 명만 남게 된다.

마침 오늘 잭은 윙어로 출전했고, 요니는 크리그와 투톱을 이뤘으니, 중원이 텅 빈 것처럼 보여도 이상하진 않다.

“그렇다고 정말로 텅 비워버린 건 아니야.”

레프트윙으로 나온 잭은, 자기가 미드필더로 출전했을 때와 똑같이 피치 한가운데에서 플레이했고, 요니 또한 2선 아래쪽까지 내려와 공간을 메웠다.

브라이언이 이마를 확장시키면서 고심했던 성과물에, 아스널 수비진의 당황이 엿보이기 시작했다.

“이대로 마크 놓쳐주지 않으려나?”

“아스널 정도 되는 팀이면 그렇게까지 호락호락하진 않겠지만···.”

내 예상대로, 아스널 선수들은 서로 위치를 조정하고 마크를 바꾸면서 따라붙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전혀 효과가 없지는 않았다.

아스널이 수비를 조정하는 그 찰나의 틈을 노려, 톰슨이 특유의 롱 패스를 오른쪽 측면으로 날려 보낸 것이다.

스티븐 쪽이었다.

* * *

날아드는 공을 바라보며, 크리그는 생각했다.

‘저걸 전방에서 따내줄 선수는, 스티븐밖에 없겠지.’

리그 원에 있을 땐 크리그 자신도 수시로 수비를 등지고 공을 받아내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하지만 챔피언십에 온 다음부터는 전혀 통하지 않았다.

챔피언십의 수비수들은, 크리그보다 훨씬 크고 강한 선수들이었다. 그들 상대로 공을 따내기는 쉽지 않았고, 어쩌다 공을 따내더라도, 몸을 돌릴 기회는 받지 못했다.

‘지금의 나는, 공격 작업에 가담할 수 없는 반쪽짜리 공격수지.’

그런데도 선덜랜드는 변함없이 크리그를 기용하고 있었다.

[축구는 열한 명 대 열한 명의 싸움이지. 그러니, 각자 자기 역할만 확실히 해 주면, 그 이후의 플레이는, 팀원이 메워 줄 거야.]

물론, 크리그의 역할은 득점이다. 하지만 자신감이 들지는 않았다.

‘내 기량은 딱 챔피언십 정도가 한계일 테니까.’

1부리그 팀 상대로는 거짓말처럼 넣지 못했다. 노리치전에서 결정적 찬스를 만들기는 했지만, 마무리는 잭에게 맡겨야 했었다.

하물며 오늘 상대인 아스널은, 노리치와는 비교도 안 되는 빅클럽이다.

관중석의 환호가 커졌다. 수비를 등진 스티븐이 무사히 가슴으로 공을 따낸 것이다.

스티븐은 그대로 공을 뒤로 되돌렸고, 가장 빨리 세컨볼을 따낸 선수는 요니였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온다···!’

찬스메이킹이라는 점에서, 요니의 센스는 틀림없이 일류였다. 다음 순간, 공은 어김없이 크리그의 발 앞에 나타났다.

크리그는 주저하지 않고 오른발을 휘둘렀다.

* * *

공이 허공에 높이 떠올랐고, 환호가 탄식으로 바뀌었다.

“저걸 막았다고!?”

옆에서 들리는 희주의 경악을 배경삼아, 나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뭐, 거저먹을 거라고는 생각 안 했지만.”

결정적인 찬스에서, 크리그의 슛을 가로막은 선수는 아스널의 6번, 마갈량··· 마갈레스였다.

첫 번째 코너킥.

요니가 코너플래그로 향했고, 공격에는 스티븐과 잭, 크리그는 물론, 톰슨과 에디까지 모두 가담했다.

선덜랜드가 자랑하는 장신 선수 전원을 투입한 것으로, 세트피스의 정석과도 같은 공격 방식이었다.

옆에서 희주가 속삭였다.

“괜찮을까?”

“괜찮을 거야. 톰슨과 스티븐은 둘 다 센터백을 볼 수 있는 하드웨어를 가졌고, 요즘은 에디도 부쩍 달라졌으니까.”

여전히 경기장 밖에서는 조금 뺀질거리는 것 같지만, 요즘의 에디는 사이드라인 안쪽에서는 무척이나 성실하다. 그야말로 팀을 위한 선수가 되었다고 표현해도 이상하지는 않을 정도로.

세트피스에서의 공중전은 역시 센터백의 영역이다. 그리고 요니라면, 틀림없이 에디의 머리를 노릴 것이다.

요니와 호흡이 맞는다는 점에서는 잭이 최고겠지만, 하지만 잭의 피지컬은 세트피스 상황에서 무기가 될 정도는 아니다.

그리고 톰슨과 스티븐은 키와 체격은 출중하지만, 각각 약점이 있는 선수들이다. 톰슨은 점프력이 그저 그렇고, 스티븐은 순간적인 위치선정과 판단력이 나쁜 편이다.

기질적으로 영리한 선수들끼리 끌린다는 점을 고려하면, 요니는 틀림없이 에디에게 공을 보낼 것이 틀림없었다.

“제발···.”

희주의 애원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요니가 공을 길게 걷어찼다. 그와 동시에 에디가 니어포스트로 파고들었다.

“그렇지!”

무심코 환호하고 말았다. 그만큼 완벽한 세트피스 공격이었기에.

니어포스트 근처에는 원래 스티븐이 머무르는 상태였다. 에디는 그런 스티븐을 미끼 삼아, 혹은 인간 방패로 삼아 자신의 마크를 따돌린 것이다.

자유를 얻은 에디의 몸이 하늘로 솟구쳤다.

그리고 이번에도 마지막 순간, 공은 밖으로 나가버리고 말았다. 아스널의 6번, 마갈레스의 호수비였다.

희주가 이를 갈았다.

“젊다 못해 어린데도 엄청 잘하네.”

“에디를 데리고 있는 우리가 할 말은 아니지만, 센터백치고 엄청 젊긴 하지.”

그런데도 마갈레스는 아스널 선수들 중 손꼽힐 정도로 차분해 보였다. 역시 1부리그에서 뛴 경력이 에디보다 훨씬 길어서일까?

잠시 후 선덜랜드의 두 번째 코너킥이 선언되었고, 우리 팬들의 함성은 더욱 커졌다.

반쯤은 쾌감이었을 것이다. 비록 전반 초반이긴 하지만, 천하의 아스널을 슛 한번 못 해보게 가둔 채 일방적으로 몰아치고 있다는 통쾌함.

그 한편으로는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불안감도 있었으리라. 이 정도로 몰아붙이고도 득점으로 연결하지 못하는 상황이 반복되면, 흐름이 뒤집히는 경우도 흔하니까.

오히려 상대에게 회생할 틈을 주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기에 우리 팬들은 한껏 목청을 높였고, 목소리에 마음을 모았다.

We do what we want. We do what we want.

그 뜨거운 함성 속에서, 코너 플래그에 요니가 섰다.

We are Sunderland. Say we are Sunderland.

요니는 한참 동안 아스널 골대를 노려보며, 발로 신중하게 공의 위치를 조정했다.

그러던 요니가, 고개를 저었다.

“안되겠다··· 잭, 네가 대신 차!”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뜬 잭이 자신의 가슴팍을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였다. 요니가 쓴웃음을 지었다.

“어우, 힘이 안 들어가. 이런 분위기면 네가 차야지.”

“어쩌다 그런 쫄보가 되셨어? 뭐, 내가 하지.”

요니가 고개를 저으며 페널티 에어리어 쪽으로 걸었고, 잭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크게 한숨을 내쉬고는 코너플래그를 향해 이동했다.

그때였다. 아스널 벤치에서 거친 목소리가 터져나온 건.

“함정이다! 18번 잡아!”

그 외침과 거의 동시에, 잭이 공을 몰고 질주하기 시작했다. 예상 밖의 움직임에 아스널 선수들의 대응은 한발 늦었다.

코너플래그에 놓인 공을 요니가 발로 건드려 움직인 순간, 선덜랜드의 코너킥은 처리된 것이다. 그러니 요니는 더 이상 공을 건드릴 수 없지만, 잭의 드리블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베테랑이라면 절대 속지 않았을 트릭.

하지만 아스널은 오늘 주로 어린 선수들을 내보냈고, 그들은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의 열기에 잔뜩 짓눌린 상태였다.

한결 뜨거워진 외침 속에서, 선덜랜드가 자랑하는 사냥개가 적진을 향해 돌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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