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자의 신이 키우는 축구단-84화 (84/422)

84화. 선덜랜드를 위한 하나 (4)

바이털 에어리어를 파고들며, 잭은 생각했다.

‘의외로 잘 풀렸네.’

구단주에게 처음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솔직히 위험천만하다고 생각했다.

[리스크가 너무 크지 않슴까?]

[게다가 여러 번 통할 방법도 아닌데요.]

요니도 잭의 생각에 동의했지만, 구단주 이희성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그렇지. 기회는 딱 한 번뿐이야. 성공하든 실패하든 앞으로 두 번 다시 못 써먹어. 적어도 너희가 선수로 뛰는 동안에는.]

이희성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표정은 단호했다. 딱 한 번 써먹을 수 있는 트릭까지 아낌없이 꺼내 드는 모습에서, 잭은 구단주가 이번 EFL컵에 거는 기대가 어떤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준비해 보겠슴다. 어떻게 준비하면 됨까?]

[우선, 미리 사인 따위 전혀 주고받지 않아도 되는 두 명의 선수가 필요해.]

잭은 대답 대신 웃었다. 그의 옆에서, 요니도 똑같은 표정을 하던 기억이 난다.

[원정에서는 통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으니 우리 홈이어야 할 테고.]

그 말대로, 원정에서는 하기 어려운 트릭이었다. 이 트릭 플레이의 묘미는, 키커가 공을 건드렸다는 걸 심판이 명확히 인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무도 모르게 공을 살짝 건드린 다음 “킥을 했다” 고 우기면 당연히 무효 처리되고, 심판에 따라서는 비신사적 파울이 선언될 수도 있다.

문제는, 심판이 알아볼 정도로 공을 확실히 건드리면 당연히 상대 선수들도 눈치를 챈다는 점이다.

[중요한 건 주변의 분위기야. 팀의 다른 선수들, 키커를 교체한다고 믿어줄 호의적인 관중, 그리고···.]

잭은 생각했다. 사이드라인 너머에서, 마치 새 공을 건네줄 것처럼 움직이던 볼보이도 아스널의 방심에 한몫했을 거라고.

‘알아. 이 경기장의 모든 게 우리 편이라는 걸.’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 잔디 한 포기까지도 오직 선덜랜드의 승리를 위해 심어진 장소. 그렇기에 이곳이 원정팀의 지옥으로 불리는 거겠지.

We do what we want. We do what we want.

느닷없는 기습에 당황한 아스널 수비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 당황이 세계 최대의 스크린에 그대로 전해졌고, 사만구천 명의 홈 관중들은 더욱 열광적인 함성을 보내기 시작했다.

We are Sunderland. Say we are Sunderland.

이런 상태에서 제대로 수비할 수 있는 선수는 아주 드물다.

잭은 허수아비나 마찬가지인 아스널 수비진을 피해 바이털 에어리어로 완전히 진입했다.

그 순간이었다.

“멋진 말리시아인데?”

지금까지 선덜랜드의 공세를 모두 셧아웃시켰던 아스널의 6번, 마갈레스가 이번에도 잭의 앞을 가로막았다.

축구 선수라면 안다. 만난 순간 직감할 수 있는, 상대와의 기량 차이를.

아스널의 수비는 전체적으로 허를 찔린 상태였고, 마갈레스는 그 빈틈을 메우기 위해 허겁지겁 끌려 나온 상태였다. 그런데도 어째서인지 마갈레스의 자세에는 허점이 엿보이지 않았다.

테크닉이 뛰어난 남미 출신 선수이기 때문일까.

“그래도 어쩌나? 날 빠져나갈 기술은 없어 보이는데.”

마갈레스의 도발에, 잭은 슬쩍 웃었다.

확실히 지능적 플레이는 남미가 원조다. ‘말리시아’라는 용어까지 따로 만들어낼 정도로, 경기장 위에서 남미 선수들은 항상 영리하고 교활하게 플레이한다.

지금도 마갈레스는 입으로는 잭을 도발하면서도, 주위에 수신호를 보내며 수비조직을 정비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즉, 돌파할 기술 운운은 어떻게든 시간을 벌려는 도발인 셈이었다.

잭은 마갈레스를 응시하며 슬쩍 멈춰 섰다.

‘우린 사인을 주고받을 필요가 없어서 말이지.’

조금 전부터 자신의 등 뒤를 따라붙는 발소리, 잰걸음을 걷는지 조금 가벼운 발걸음 위에 조금 거칠어진 숨소리가 섞였다.

세계에서 오직 한 사람, 그의 파트너만 내는 소리다.

그렇기에 말할 필요도, 고개를 돌려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그저 공을 뒤로 흘리면 충분했다.

다음 순간 잭의 등 뒤에서, 요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가 뭐하러 널 돌파해 주겠냐? 세트피스 상황이었는데.”

요니의 발끝을 떠난 공이 잭의 머리 위로 떠올랐다. 이윽고 그 공은 끌려나온 마갈레스의 머리를, 무너진 아스널 수비진의 위를 넘어, 박스 안쪽으로 향했다.

스티븐과 에디, 톰슨을 비롯한 선덜랜드의 장신 선수들이 바글바글 몰려 있는 박스 안쪽으로.

“센터백이, 함부로 달려나오는 게 아니지.”

아스널은 여전히 한 명의 센터백을 박스 안쪽에 남겨두고 있었지만, 역부족이었다. 스티븐, 그리고 톰슨과의 자리 싸움을 버텨내기도 버거웠던 아스널 수비진은, 그만 에디의 움직임을 완전히 놓치고 말았다.

잠시 후 에디의 이마가 공을 힘차게 내려찍었다.

[고오오올! 선제골! 에디 레이놀드! 커리어 두 번째 세트피스 득점!]

함성이 경기장을 흔들었다.

* * *

[선덜랜드 1 - 0 아스널]

전반 10분 만에 거둬낸 쾌거에, 무심코 스코어보드를 다시 확인하고 말았다.

음, 눈 비비고 다시 봐도 여전히 1-0이네.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갈 것 같다. 음, 완벽한 세트피스였다.

두 번 다시는 못 써먹겠지만.

세트피스 상황에서는 별 해괴한 트릭이 난무하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킥을 차러 가는 도중 일부러 넘어지는 척 템포를 뺏는 사례도 있었고, 연기하려다 진짜 넘어진 선수도 있다.

따라서 조만간 연기하려다 넘어지는 척 다시 킥하는 사례도··· 아, 그건 필요 없겠구나.

희주가 눈을 깜빡거렸다.

“완벽하게 속였네? 따로 연습시켰던 거야?”

“뭐, 그렇지. 잭하고 요니, 그리고 볼보이들만 참가했어.”

우리 팀에는 연기에 서투른 선수들이 많다. 얼굴에 무슨 생각하는지 쓰여 있는 스티븐은 물론, 톰슨도 의외로 정직한 선수다.

에디라면 아카데미급 연기력을 보여줬겠지만, 특성상 코너킥 상황에선 박스 안쪽에 머물러야 하니 논외였다.

그래서 아예 우리 편 선수들에게도 알리지 않고 준비했다. 덕분에 박진감 넘치는 연기가 완성된 것이다. 주위의 우리 선수들조차 키커를 교체한다고 믿었을 테니까.

“그런데 우리 선수들이 대응하지 못했으면 어쩌려고?”

“상관없었어. 처음부터 아스널 센터백을 끌어내는 게 목적이었으니까.”

센터백 한 명만 어떻게든 밖으로 끌어내면, 공중볼 싸움은 우리 천하가 된다. 박스에는 여전히 에디와 스티븐, 톰슨이 모두 남아 있게 되니까.

“흐음, 아스널 센터백이 안 끌려나왔으면? 아, 그대로 잭이 안으로 파고들면 득점 찬스구나.”

“그렇지. 축구 보는 눈이 꽤 좋아졌네.”

“에이, 오빠만 하겠어?”

대답하는 희주의 목소리는 새침했지만, 기분이 좋은지 입꼬리는 씩 올라갔다.

“그럼 이제부터는··· 어떻게 되는 거야? 10분만에 골 넣었으니까, 계속 몰아붙일 거야?”

“바보냐.”

10분만의 득점은 일종의 럭키 펀치나 마찬가지다. 컵 대회에서 로테이션 멤버를 활용한다는 빅클럽의 특성과, 어린 선수들의 경험 부족이 만들어낸 아주 제한적인 기회.

하지만 앞으로 시간이 지나고 경기가 진행되면 아스널 선수들도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의 공기에 익숙해질 것이고, 긴장도 풀어질 것이다.

그리고 아스널 벤치에는 여전히 교체 카드 3장이 남아 있다.

“그러니 이제는 지켜야지.”

어떻게든, 필사적으로.

* * *

내 예상대로 아스널이 빅클럽의 면모를 되찾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실점 직후 곧바로 반격에 나선 아스널은, 전반 20분을 넘길 무렵부터는 아예 본격적인 공세에 나섰고, 30분 무렵부터는 거의 반코트 게임을 펼칠 정도였다.

우리 벤치 또한 기민하게 움직여 대응했다.

윙어로 출전한 잭, 그리고 스티븐 두 사람이 각각 아스널 풀백의 오버래핑을 제한했던 것이다.

물론 두 줄 수비 특유의 블록을 유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오늘 경기 준비에서 가장 멋진 부분이었다.

애초에 풀백 출신이라 디펜시브 윙어로 활용되는 스티븐은 말할 것도 없지만, 잭은 원래 3선 미드필더로 나름의 수비력을 갖추고 있다. 발도 빠르고, 지구력도 훌륭하다.

물론 잭은 측면에서의 수비에 익숙한 선수는 아니지만. 약간의 빈틈은 요니가 특유의 센스로 멋지게 커버했다.

그런 철통같은 수비는 전반 내내 아스널에게 변변한 유효슈팅 한 개를 허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후반.

아스널은 하프타임이 끝나기가 무섭게 교체카드 두 장을 사용했다. 14번 오바메양, 12번 윌리안.

공격진에 무게감을 두려는 의도가 느껴졌다.

그때부터 경기는 정말 피말리는 혈투로 흘렀고, 우리는 점차 열세로 몰려갔다.

점유율은 이미 빼앗긴 상태였고, 슈팅 숫자도 두 배 가깝게 벌어졌다.

그래도 점수는 쉽게 내주지 않았다.

“끌려나가지 마! 대열 유지해!”

“후방에서 공 돌리게 놔 둬! 빌드업 하라고 해!”

베테랑 톰슨과 하퍼의 독려에, 벤치의 움직임이 더해졌다.

톰슨을 센터백 사이로 내리고, 요니를 한 칸 아래로 옮겨 5-4-1과 같은 형태로 전환한 것이다.

최소한의 지시만으로 전반의 기습과 후반의 버스 주차를 가능하게 하려던 브라이언의 고민의 산물이었다.

그런 육탄 방어 끝에, 마침내 경기는 막바지를 향해 달렸다.

89분.

심판이 인저리 타임을 알리는 팻말을 들어 올린 것과 거의 동시에, 이대일 패스를 주고받은 윌리안이 박스 안쪽을 파고들었다.

스티븐이 곧바로 기세좋게 등 뒤를 추격했다.

“스티비, 이 멍청아! 따라 들어오지 마!”

에디의 필사적인 외침과, 윌리안이 앞으로 넘어진 것은 거의 동시의 일이었다.

휘슬이 울렸고, 심판이 페널티 스팟을 손으로 가리켰다.

등 뒤에서 스티븐의 접촉이 있었다고 판단한 것이다.

“말도 안 돼! 저게 페널티 킥이라고!? 심판! 진짜 눈이 있긴 한 거야!? 우리한테만 왜 그래!?”

희주가 분한 듯 이를 갈았고, 관중석에선 선덜랜드 팬들이 미친 듯한 야유를 퍼부었다.

우리 선수들이 사방에서 심판에게 달려가 맹렬한 항의를 퍼부은 것은 물론이다.

물론, 판정이 번복되지는 않았다.

그 사이, 골 마우스 앞에서는. 하퍼가 물끄러미 페널티 스팟을 응시하고 있었다.

항의에 가담하지도 않았고, 다른 선수들과 이야기를 주고받지도 않았다.

그저 자신의 장갑 낀 손을 펼쳤다 오므렸을 뿐이다.

잠시 후 아스널의 14번이 천천히 페널티 스팟에 섰다.

* * *

“으으, 진짜 못 보겠어!”

희주가 치를 떨고는, 그만 몸을 홱 돌려 버렸다.

뭐, 이해할 수는 있다. 축구 감독들 중에서도 페널티 킥은 못 보겠다는 사람이 있으니까.

페널티 킥은 이미 전술의 영역이 아니다. 그러니 감독이라면 잠시 외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물며 구단주 비서라면, 당연히 눈을 돌릴 자유가 있다.

하지만, 나는 다르다. 내겐 끝까지 지켜볼 의무가 있다. 경기장에 모인 사만구천 명의 팬들이, 풋볼 스퀘어와 축구 펍의 수많은 팬들이 이 순간을 지켜보는 중이니까.

그 팬들에게 축구라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구단의 책임자로서, 나는 당연히 눈을 돌릴 수 없다.

잠시 후, 아스널의 키커가 천천히 도움닫기를 시작했다.

마치 우리의 숨을 끊기 위한 저승사자처럼.

* * *

공까지 다섯 걸음.

경기장 곳곳에서, 기도하듯 손을 모은 우리 스태프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통로 곳곳의 CS팀, 사이드라인 바깥의 메디컬 팀과 시설관리팀, 볼보이들··· 그리고 잔디관리인 리지까지.

모두 하나같이 간절한 표정으로 사이드라인 안쪽을 응시하는 중이었다.

내가 그런 것처럼, 그들 역시 사이드라인 안으로는 들어갈 수 없기에.

그러니 목소리에 힘을 넣을 수밖에.

I know I am. I’m sure I am.

I’m Sunderland ’til I die.

공까지 네 걸음.

벤치에서 지켜보는 샐리와 브라이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목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마치 저주라도 퍼붓는 게 아닌가 의심스러울 만큼 쉼없이 입술을 달싹거리는 샐리의 얼굴이 선명히 보였다.

그 옆에서는 브라이언이 펜을 돌리는 중이었다.

이 순간조차 데이터를, 버릇을 뽑아내려는 거겠지.

공까지 세 걸음.

코치진과 달리 로저스 감독은 의연해 보였다. 어쩌면 다 잡은 승리를 코앞에서 놓칠 상황, 자칫하면 승부차기까지 끌려갈지도 모르는데도.

문득, 로저스 감독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무엇 하나 멈추지 마라. 그저 축구를 하고 와라. 선덜랜드의 축구를.]

그래서, 대답하듯 외쳤다.

Sunderland 'til I die. I'm Sunderland 'til I die.

공까지 두 걸음.

페르난데스의 얼굴은 유난히 침착해 보였다.

키는 작지만, 전성기에는 수많은 기적을 양산해온 ‘기적의 사나이’ 는, 지금까지도 선덜랜드 수비의 중추이자, 팀의 정신적 지주로 활약하는 중이었다.

조금의 감정도 드러내지 않은 채, 묵묵히 팀을 이끌어온 철인 같은 주장.

하지만 그 철인의 손끝은 파르르 떨렸다. 아마, 같은 골키퍼이기 때문일 것이다.

승패를 가르는 흥분과 긴장, 막아줄 거라는 기대, 그리고 어쩌면, 자신이 저 자리에 서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섞였을 떨림.

그 떨림을 들키지 않으려 두툼한 골키퍼 장갑에 손을 집어넣으며, 페르난데스는 차분한 얼굴로 골 마우스로 시선을 보냈다.

그래서일까?

하퍼 역시 여전히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문득, 나는 그 모습이 페르난데스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공까지 한 걸음.

Let us pray for Sunderland football club and for our city.

누군가의 기도 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이윽고 사만구천 명의 팬들의 입이 동시에 달싹거리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눈물을, 누군가는 기도를, 누군가는 탄식을···.

Guide us in our love, for our city and our club.

하지만 그 목소리는 결국 한 곳으로 모인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팀을 위한 기도, 팀을 위한 응원, 선덜랜드를 위한 하나의 목소리로.

Sunderland 'til I die. I'm Sunderland 'til I die.

발이 휘둘러진 것과, 하퍼가 몸을 날린 것은 거의 동시의 일이었다.

다음 순간, 경기장이 떠내려갈 듯한 함성 소리에 희주가 몸을 돌렸다.

“막았어? 막았어!?”

“그래, 임마. 막았어! 막았다고!”

나는 이 날을 잊지 못할 것이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몸을 날리는 하퍼의 모습을.

필사적으로 뻗은 장갑 끝에 가까스로 걸려 비틀리는 공의 궤적을. 크로스바에 맞아 흘러나온 세컨볼을 향해 달려드는 붉은 유니폼을.

마침내 휘슬이 길게 세 번 울리기 전까지, 누구 하나 발을 멈추지 않던 선수들을.

Sunderland 'til I die.

포효하는 하퍼를, 환호하는 팬들을, 유니폼을 벗어들고 홈팀 스탠드를 향해 달리는 잭과 요니를.

[선덜랜드 1 - 0 아스널]

스크린에 떠오른 선명한 문장을.

[선덜랜드 EFL컵 5라운드 진출]

벅찬 감격을 못 이겨 손으로 얼굴을 감싸는 브라이언과, 눈물범벅이 된 샐리를.

이 풍경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til I d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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