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자의 신이 키우는 축구단-86화 (86/422)

86화. 기억해야 하는 것 (1)

<나는 아스널에서 내 트레이드를 배웠고 맨체스터 시티에서 축구 선수가 되었다. 하지만 선덜랜드에서 진정한 내 반신을 찾았다. 나는 선덜랜드를 사랑한다 - 나이얼 퀸>

파견 나온 호텔리어들이 세심하게 클럽하우스의 구조를 살폈다. 그 곁에서는 시설관리팀과, 건설업체가 분주하게 의견을 나눴다.

“침대 다리는 안쪽으로 좀 더 들어가게 하면 어떨까요? 혹시라도 선수들이 발가락을 다치지 않도록요.”

운동선수라면 누구나 중요하겠지만, 축구 선수에게 발가락은 경기력에 직결되는 아주 중요한 요소다. 다치면 곤란하다.

“아, 좋은 포인트입니다. 반영하겠습니다.”

“호텔에서는 시트와 베개는 개인의 취향에 따라 고를 수 있습니다. 단골이라면 데이터가 있는데, 선수들의 경우는 어떻게 대응하면 좋을까요?”

“가급적 본인이 사용하는 것과 똑같은 침구로 맞추면 좋겠지요.”

“그럼 요나스 뮐러 고객님··· 선수의 경우는요?”

“그 선수는 원래 기숙사에서 살기 때문에, 현 비품을 그대로 쓸 계획입니다. 호텔에 머물 때는 객실에 기숙사 비품을 비치하면 되겠죠.”

“알겠습니다. 비품에 붙은 구단 엠블럼도 재현해야 할까요?”

“중요합니다. 일부 선수들에게는 심리적 안정감을 주는 요소거든요.”

일부라고 해 봤자 잭, 그리고 요니겠지만.

선덜랜드 로고가 붙은 벤치가 훨씬 편하다고 주장하는 잭이나, 은퇴할 때까지 기숙사 밖으로 나갈 생각이 없다는 요니는 여러모로 특수한 선수들이다.

시설관리팀과 호텔리어, 건설업자가 그렇게 토론하는 사이, 나는 적당한 거리를 두고 물러났다.

건설, 특히 인테리어 쪽에는 전혀 아는 바가 없다. 오늘 클럽하우스에 온 건, 그저 오너가 현장에 종종 모습을 비추면 직원의 동기부여에 유리하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깊숙이 개입하다가는, 자칫 오너 권한으로 현실성 없는 이상한 주문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조금 떨어져 거리를 두는 게 이득이다.

그래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내게, 문득 눈에 띄는 존재가 있었다.

단정하게 생긴 십 대 후반의 소년, 당연하게도 우리 유소년 선수일 것이다. 이 시간대에 지금 클럽하우스 근처에 출몰하는 것을 보면.

인상적인 것은 이마의 숫자였다.

400. 이런 선수가 왜 우리 유소년에 있는 거지? 그리고 왜, 나는 지금까지 그걸 몰랐던 거지?

구단을 인수한 직후 몇 차례 확인한 적이 있었다. 유소년 숙소를 찾아간 적도 있고, 시간을 쪼개 유소년 리그 경기를 직접 지켜본 적도 있었다.

당시, 내 눈에 띄는 선수는 아무도 없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아카데미 오브 라이트는 유에파 5성급 유소년 육성 시설이지만, 최근 몇 년간 선덜랜드의 팀 상태가 워낙 엉망이었던 탓이다.

간단히 말하면, 특급 유망주면 여기 올 이유가 없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왜 사백억 원의 가치를 가진 유소년 선수가 우리 클럽하우스에 어슬렁거리는 거지?

혹시 축구 선수가 아닌 건가? 그래서 확인했지만, 다시 봐도 우리 유소년 유니폼을 입고 있다.

내 시선을 눈치챈 소년은 무척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저, 구단주님··· 혹시 무슨 중요한 말씀이라도 있으신가요?”

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열심히 하라고.”

그러자 어째서인지, 소년은 무척 안심한 것처럼 유소년 훈련장을 향해 달려갔다.

* * *

“해리슨 프레이저 말이군요.”

소년의 인상착의를 설명하자, 샐리가 곧바로 자료를 보였다.

“유스 코치진에게는 평가가 썩 좋지 않아요. 종합적으로는 킥만 좋은 원툴 선수라고 되어 있네요.”

데드볼 스페셜리스트라는 뜻인가?

그럴 리는 없다. 뭔가 잘못되었다.

선수의 교체가 자유로운 스포츠라면 데드볼 스페셜리스트도 중용될 수 있다. 배구 같은 경우는 원 포인트 서버도 기용되는 모양이니까.

하지만 축구는 교체 카드가 한정된 종목이고, 일단 투입된 선수는 경기 끝까지 뛰어야 한다. 따라서 ‘세트피스만’ 잘하는 선수는 절대 중용될 수 없다.

즉, 해리슨이 정말로 사백억짜리 가치가 있는 유망주라면, 데드볼 스페셜리스트 말고도 활약할 여지가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브라이언이 덧붙였다.

“유스팀 보고서에 따르면 세트피스 키커로는 우수한 편이지만, 경기에 들어가면 패스미스가 많다고 되어 있어. 이러면 정말 킥이 좋은지도 미심쩍은데···.”

“기술은 좋은데 판단력이 나쁜 타입인가? 이러면 제 2의 스티븐인데.”

“그런 것 치고는 위치선정은 나쁘지 않대. 기묘하지, 브로?”

확실히 그건 기묘하다. 고개를 끄덕이는 내 곁에서, 이번엔 샐리가 말을 보탰다.

“대신 스티븐만한 피지컬도 없고요. 운동선수로서는 딱 평범한 수준이죠. 그래서 데드볼 스페셜리스트로나 쓸모가 있다는 평가를 받는 거겠지만요.”

종합적으로는 하드웨어는 평범하고, 킥은 정확하지만 패스미스가 엄청나게 많다. 판단력은 좋은지 나쁜지 감이 안 온다.

덕분에 우리 팀 내에서의 평가는 박했고, 그래서 구단주인 내 눈에도 띄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다른 팀에서도 놀라울 정도로 아무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게 샐리의 설명이었다. 올겨울이면 만 16세, 프로 계약을 할 수 있는 나이인데도.

하긴, 여러모로 애매한 느낌이 드는 선수다. 만일 이마에 숫자가 400이 아니었으면 고민조차 안 했겠지.

브라이언이 턱을 쓸었다.

“일단 계약하면 되지 않을까? 스쿼드 25인 제약은 21세 이하에는 적용 안 되니까 펑펑 계약해도 아무 문제 없잖아?”

대답하면서도, 브라이언은 살짝 떨떠름해 보였다. 즉, 아무리 봐도 해리슨이 특급 유망주라고 보이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슬쩍 전제조건을 깔았다.

“나는 코칭스태프가 원하지 않는 선수를 억지로 밀어넣을 생각은 없어. 예산 낭비고, 선수에게도 해로우니까.”

정기적으로 뛸 기회를 박탈당하면 선수로서 성장이 멈춘다. 특히 어린 선수는 임대를 보내서라도 출전 기회를 보장해야 한다.

그렇다고 어린 나이에 혹사당하면 선수 생명이 끝장날 테니, 섬세한 관리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결국, 스태프가 원하는 선수와 계약하는 게 최선이다. 차선이라면, 다른 팀에 비싸게 팔아치우는 것이고.

우리 스태프는 어떨까?

로저스 감독은 호의적인 표정을 지었다. 이건 예상했다. 원래부터 어린 선수 키우는 걸 좋아하는 분이니까.

문제는 해리슨과 로저스 감독의 나이다. 올겨울에 16살이 되는 해리슨이 1군에서 안정적으로 뛰게 될 무렵이면, 로저스 감독은 이미 은퇴할 것이다.

감독으로서 해리슨을 키우고 쓸 역할은 브라이언의 몫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브라이언은 해리슨이 썩 탐탁지 않은 것 같았다.

그냥 잠깐 데리고 있다가 팔아야 하려나? 사백억의 가치를 가진 선수를.

그때, 샐리의 고운 입술 사이에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제 의견을 말씀드리자면, 반드시 장기 계약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래? 혹시 뭔가 싹수가 보여?”

“아뇨, 코치님. 놀라울 정도로 아무것도 안 보여요. 그래서 계약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봐 샐리, 맨날 헛소리하는 건 알겠는데···.”

“왜냐면, 제가 판단할 수 없는 타입의 선수이기 때문이죠. 저는 제가 세계 최고의 축잘알이라고 생각하지만···.”

“자의식 과잉은 모든 축알못들의 공통된 성향이지만···.”

로저스 감독이 쓴웃음을 지으며 브라이언을 나무랐다.

“브라이언, 지금은 샐리 분석팀장의 이야기를 들어보지.”

“감사합니다, 감독님. 계속하죠. 만일 제가 펩이나 투헬, 나겔스만 이상의 전술 천재라고 하더라도···.”

브라이언은 이번에도 뭔가 말하려는 듯 입을 삐죽거렸지만, 로저스 감독의 눈짓에 곧바로 멈췄다.

로저스 감독을 향해 살짝 눈으로 웃어 보인 샐리가 차분히 말을 이었다.

“··· 제가 천재라는 주장에는 아무 의미 없어요. 왜냐면, 참인지 거짓인지를 전혀 증명할 수 없을 테니까요.”

“왜 증명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 딱 한 경기만 지휘해 봐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는데?”

“그럼 코치님은, 선수 출신도 아니고, 내세울 경력도 없는 여자에게 팀을 맡길 수 있나요? 단 한 경기라도요.”

“··· 못 맡기지. 맡긴다 쳐도 선수들은 절대 말을 안 들을 거고. 그렇군. 증명 못 하겠네.”

“네, 사실은 분석관 자리조차 쉽게 허용되지 않겠죠. 그런데도 구단주님은 저를 채용해 주셨어요. 면접을 보자마자 곧바로요.”

샐리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 감사의 의미를 담은 시선이 돌아왔다.

로저스 감독이 빙긋 웃었다.

“샐리 퀸 분석팀장, 물론 나는 자네의 실력을 전적으로 인정하지만, 설령 실력을 떠나서라도 선덜랜드는 자네에게 마땅히 기회를 줬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래서 일부러 이력서에는 가족 관계를 일체 적지 않았죠. 구단주님이라면 눈치채셨을지도 모르겠지만요.”

“브로, 쟤 가족이 뭐 어쨌는데···. 혹시 총리 딸이야?”

얼빠진 소리를 하는 브라이언을 향해, 나는 살짝 한숨을 섞어 대답했다.

“96년부터 선덜랜드 팬이라고 밝혔고, 계기는 아버지의 전근이었으며, 아일랜드 국적에 퀸이라는 성을 쓴다는 조건이 모두 붙잖아.”

구단 관계자라면 대부분 짐작할 수 있는 조건이었다. 아직 눈치채지 못한 사람은 브라이언, 그리고 희주밖에 없겠지.

샐리가 웃었다.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어차피, 집안 때문에 뽑으신 건 아니었잖아요?”

“네, 채용 당시엔 전혀 몰랐습니다.”

그녀의 집안은 내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그저, 이마의 숫자를 보고 채용했을 뿐이다.

샐리 스스로의 말처럼, 선수단의 지휘를 영원히 맡을 수 없는 그녀에게 오십억의 가치는 정말로 파격적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게 내 기준이다. 밝힐 수는 없지만.

레전드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구단 일자리는 얼마든지 제공할 의향이 있었다. 하지만 샐리에게 재능이 없었다면 절대로 분석관 자리를 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브로, 그러면 저 싸가지없는 축알못··· 아니, 아름답고 지혜로우신 퀸 분석관의 아버님께서···.”

아마도 선덜랜드 역사상 최고의 레전드로 꼽히는, 나이얼 퀸이겠지. 지금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겠지만.

“앞으로도 그냥 샐리라고 불러주시면 좋겠는데요··· 계속해도 될까요?”

브라이언이 멍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샐리는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

“저는 해리슨이 좋은 선수처럼 보이지는 않아요. 하지만 우리 구단주님은 투자의 신이라고 불리는 사람이니, 아마 남들과 다른 기준을 가졌겠죠.”

남다른 기준을 가지긴 했다. 이마에 숫자가 보이는 사람은 나 말고는 아주 드물 테니까.

“저에게는 구단주님의 기준을 존중할 의무가 있어요. 남들과 같은 기준으로는 절대 분석관으로 채용되지 않았을 테니까요.”

“으음, 그거 꼭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 같네. 브로 아니었으면 기회를 못 받았을 테니까··· 좋아, 특급 유망주로 취급하겠어.”

브라이언도 표정을 고쳤다.

“브로, 그러면 레딩전부터 바로 투입할 수 있도록 다듬을까? 아니면 역시 생일 지나고?”

“서두를 필요는 없어. 나는 해리슨이 좋은 유망주라고 생각하지만, 지금 당장은 별볼일 없는 선수라는 관계자의 평가도 존중하고 싶거든.”

내 능력은, 선수가 언제 터질지는 전혀 짐작할 수 없다. 그리고 세상에는 남보다 늦게 터지는 선수도 분명히 존재한다.

해리슨은 아직 16살 생일도 지나지 않은 어린 선수, 출전을 서두를 필요는 없다.

길게 보고 키웠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전달하자, 로저스 감독이 웃었다.

“염려 말게. 이번엔 절대 망가뜨리지 않을 테니.”

* * *

프로 계약을 하고 싶다는 내용을 전달하자 해리슨은 잠시 멍한 표정이었다.

“계약이라면, 어디서 뛰는 거죠?”

희주가 재밌다는 듯 웃었다.

“그야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겠죠? 혹은 아카데미 오브 라이트거나···.”

“죄송합니다. 제 보직이 뭔지 여쭤보려는 거였습니다.”

희주가 또 까불거릴 것 같아서, 이번엔 내가 대신 대답하기로 했다.

“글쎄, 나로서는 확답하기 힘든데··· 지금 뛰는 포지션은 미드필더 아니었나?”

“네, 지금은 미드필더입니다만··· 그게 중요한가요?”

“네 보직을 정하는 건데 당연히 중요하지 않을까? 다만 팀의 사정과, 육성 방향에 따라서는 포지션이 바뀔 수 있겠지만.”

그러자 해리슨이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네, 잔디 관리인은 자신 없지만 시키신다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혼란하다. 잔디 관리인이 왜 튀어나오는 거지? 확인해보니 경기장과 훈련장에서 모두 일하는 보직이라고 들어서, 잔디 관리인이라고 생각했다는 모양이다.

황급히 부인했다.

“아니, 잔디는 안 깎아. 선수로 계약할 생각인데.”

계약서에도 그렇게 쓰여 있지 않았었나? 선수라고.

“선수 계약입니까? 죄송합니다··· 프로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어서요.”

조심스럽게 말하는 해리슨의 이마를 흘끔거렸다. 다시 봐도 이마에 드러난 숫자는 400이다··· 너, 정말 축구 선수 맞지?

“아주, 아주 재능 있는 선수만 콜업되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잭이나 요니 선수 같은.”

희미한 미소를 짓는 해리슨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너에게도 재능이 있어.”

내가 갖지 못했던 재능, 프로가 될 수 있는 재능, 선택받은 소수의 인간에게만 허용되는 그런 재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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