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기억해야 하는 것 (3)
EFL컵 4강 1차전은 레스터의 홈, 킹 파워 스타디움에서 시작하게 되었다.
이번에도 변함없이 많은 팬들이 원정 경기에 동행했고, 구단에서는 버스를 준비했다.
“별다른 홍보를 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도 꽤 모였네요.”
내 소감에, 프레스팀장 애니가 웃었다.
“이번엔 굳이 홍보가 필요 없지. 4강전인데. 선덜랜드가 컵 대회 4강에 간 건 무척 오랜만이거든.”
팀이 프리미어리그에 머물던 시절의 이야기라고 덧붙이면서, 애니는 출발하는 팬들을 향해 살짝 아련한 시선을 보냈다.
“아마 결승에 가면, 홍보 기사는 한 줄이면 될 것 같아. 언제 어디서 웸블리행 버스 출발하는지만 알리면 되겠지? EFL 결승전은 웸블리에서 열리니까.”
그쯤 되면 홍보가 아니라 구단 버스 시간표 아닌가?
한편, 희주는 꽤 복잡한 표정이었다.
“킹 파워 스타디움이라니··· 뭔가 남자애들이 좋아할 것 같은 이름인데.”
“스폰서가 킹 파워 그룹이라서 그런 거야. 명명권을 이용했거든.”
우리도 일단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의 명명권을 팔았다. 내가 되샀지만.
옆에서 에이미가 키득거렸다.
“구단주님께서 빛의 경기장이 선덜랜드에 갖는 의미를 고려하지 않았다면, 우리도 아마 리미트리스 스타디움으로 개명했을지도 모르겠네요.”
원안은 아마 리미트리스 아레나가 될 뻔했던 것 같은데? 범인은 다미였는데, 아마 뮌헨의 사례를 참고한 모양이다.
희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킹 파워에 비하면, 리미트리스 정도면 괜찮지 않아?”
“전혀 안 괜찮아.”
아무리 내 회사라도,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의 이름을 함부로 덧씌우게 둘 수는 없다. 내가 의욕을 뿜어내자 희주는 어깨를 살짝 움츠렸고, 에이미가 옆에서 키득거렸다.
“하긴, 구단주님은 구단 덕질에 진심이시니까요··· 그러면, 킹 파워 스타디움에서 뵙겠습니다.”
잠시 후, 에이미가 스태프용 차량에 올랐다. 스태프용 차량을 눈으로 전별한 후, 나와 희주는 구단주용 리무진에 향했다.
목적지는 킹 파워 스타디움, 레스터 시티.
레스터는 1부와 2부를 줄곧 오가던 팀으로, 역사는 있지만 그래도 강팀은 아니라는 취급을 받았었다.
하지만 킹 파워 그룹을 스폰서로 받아들이면서 무섭게 성적을 올렸고, 몇 년 전에는 우승컵을 들어올리며 동화 같은 이야기를 만들어낸 팀이다.
레스터의 그런 역사를 알기 때문인지, 리무진에 오른 희주의 표정도 진지해졌다.
“레스터는 우리가 롤모델로 삼아야 하는 팀인 거지? 좋은 구단주를 만나게 되면서 급성장한 신흥 강호니까.”
“그렇지.”
대답하면서, 나는 슬쩍 덧붙였다.
“그리고 사실 맨시티도 첼시도, 리버풀과 맨유, 아스널, 토트넘··· 아니, 1부리그에 있는 모든 팀은 우리 롤모델이지.”
“그럼 뉴캐··· 아니, ‘그 팀’은? 거기도 롤모델이야?”
“배울 점이 있지.”
배울 점은 많다. 예를 들면, 뉴캐슬이 가진 챔피언십 최다 관중동원 기록 같은 것.
단순히 관중석만 크다고 가능한 기록이 아니었다. 친절한 직원들, 화려하고 쾌적한 부대시설, 세심한 운영이 뒷받침된 성과다.
흔히 축구 불모지로 취급하는 영국 북동부의 팬들이 얼마나 뜨거운지를 처음 보여준 구단은 바로 뉴캐슬이다. 덕분에 우리도 많이 배웠다.
제대로 된 인프라를 갖추고 홍보하면, 북동부 팬은 경기장을 찾아와 준다. 뉴캐슬이 이미 수년 전부터 입증해온 사실이다.
아, 차별대우 넘치는 드레싱룸 운영법이나, 원정 서포터를 3층 스탠드에 집어넣어 격리하는 법도 배웠지. 흠흠.
그러니 레스터에게도 배울 점이 많을 것이다. 레스터에는 택티컬 지니어스가 있으니까.
레스터의 감독은 비교적 젊은 나이에 감독으로 성공한 인물이었다.
젊은 감독들이 대부분 그런 것처럼, 레스터 감독도 카리스마는 부족한 편이었고, 빅클럽을 맡았을 때는 선수단을 장악하지 못해 실패를 경험하기도 했다.
그래도 전술적 역량은 뛰어난 인물인지, 네임드가 없는 레스터에서는 명장으로 자리매김하며 좋은 성적을 내는 중이다.
그러니, 브라이언에게도 좋은 롤모델이 되겠지.
“말만 들으면 꼭 배우러 가는 사람 같네. 이기러 가는 거면서.”
삐죽거리는 희주를 향해,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원래, 상대를 이기려고 노력할 때 가장 많이 배우는 거야.”
* * *
레스터는 정말로 배울 점이 많은 상대였다.
Welcome to the King Power Stadium!
홈 팬들의 조직적인 응원부터, 지금까지 상대해온 팀들과는 분위기가 달랐다.
하긴, 우리가 프리미어 상위권 팀과 원정에서 맞붙은 건 이번이 처음이긴 하다.
게다가 레스터의 준비는, 전술적으로도 훌륭했다.
“오빠, 저쪽 압박이 조금 이상한데? 오른쪽이 텅 비었어.”
희주의 지적처럼, 수비 상황에서 레스터의 레프트윙은 안쪽으로 잔뜩 들어온 상태를 유지했다. 우리 센터백을 견제하려는 것처럼.
덕분에 우리는 라이트백이 자유로운 상태였다.
“팍팍 공격해! 달려!”
대놓고 생긴 노마크 상황에 희주는 신이 나서 날뛰기 시작했지만, 나는 무심코 입술을 깨물고 말았다.
아픈 데를 찔린 셈이기에.
그동안 프리미어리그 팀 상대로 전술적으로 약점을 공략당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브라이언과 샐리라는 뛰어난 전술가를 가졌기 때문이었지만, 본질적으로는 정보의 차이이기도 했다.
우리는 상대적으로 무명의 언더독이었으니까.
그렇지만 올 시즌, 우리는 EFL컵에서 맹활약 중이다. 챔피언십에서는 선두권을 달리며 승격을 눈앞에 두고 있다.
그러니 슬슬 프리미어리그 팀들도 우리를 경계할 만한 상황이 되었다.
지금 레스터의 노골적인 블록도 그 사례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오른쪽으로 공격하게 될 거야. 아마 그게 레스터의 목표겠지. 우리를 오른쪽으로만 공격하게 만드는 것.”
“응, 오른쪽으로 팍팍 공격하면 되는 거 아니야?”
고개를 갸웃거리는 희주를 향해, 나는 한숨을 섞어 대답했다.
“오른쪽은 스티븐 쪽 사이드거든.”
스티븐의 역할은 상대 풀백의 오버래핑을 억제하고 공격 상황에서 머릿수를 높이는 일종의 조연이다. 가끔 스펙터클 다이나믹한 골을 성공시키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선수가 맡은 역할의 본질까지 바뀌는 건 아니다.
상대적으로 중량감이 떨어지는 오른쪽을 자유롭게 풀어주는 대가로, 중앙과 왼쪽을 틀어막는다는 레스터의 전술은 무척 세련된 방식이었다.
그렇게 우리 공격방향을 제약한 레스터는, 자기들 공격 턴에는 날카로운 반격을 선보였다.
[고오오오올! 선제골! EFL컵 득점왕! 바디! 오늘 완전히 불 붙었네!]
“불 붙었다고? 저거 원래 크리그 응원가 아니야!? 짜증나!”
“누가 원조인지 따지면 그렇긴 한데.”
‘불 붙었다’ 는 오래 전부터 크리그가 사용하던 응원가였다. 당시의 그는 리그 원에서 활약했었고, 득점왕도 해 봤으며, 아일랜드의 국가대표였다.
크리그가 ‘불 붙었던’ 무렵, 바디는 4부, 5부리그를 전전하던 선수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금은.
두 사람의 입장은 완전히 역전되었다. 지금의 바디는 프리미어리그에서 뛰고, 리그 우승컵도 들어 봤으며, EPL의 득점왕이다.
그래서일까.
킹 파워 스타디움을 가득 메운 ‘온 파이어’의 합창 속에, 우두커니 서 있는 크리그의 모습이 쓸쓸해 보였다.
그날 우리는 2 - 0으로 졌다.
* * *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에 돌아온 직후, 브라이언과 샐리는 곧바로 자기 방에 틀어박혔다.
물론, 패배의 아쉬움에 굴 파러 들어간 건 아니다.
“브로, 미안한데 혹시 야식 좀 챙겨줄 수 있어? ··· 한 나흘치 정도면 좋겠는데.”
“저도요.”
이번 원정에서, 레스터 상대로 전술적 우위를 빼앗긴 두 사람의 눈은 이글이글 불타고 있었다.
잠은 분석실 안마의자에서 자고, 밥은 모니터 앞에서 먹겠다며 설칠 정도다.
그리고 우리 선수들 또한 삼삼오오 모여서 패배의 아픔을 곱씹고, 설욕전을 준비했다.
원래부터 매일같이 개인 훈련에 몰두하던 크리그에게, 스티븐과 에디가 가세했다.
한편 개인기 훈련 대신 다른 준비를 하는 선수들도 있었다. 예를 들면 톰슨. 그는 요즘 페르난데스에게 붙어 다니며 열심히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 아마 리더십 특강이라도 듣는 모양이다.
한편, 잭과 요니도 나름대로의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전술을 짜느라 기진맥진해진 브라이언을 기숙사의 빈방 아무 곳에라도 던져놓고 나오는 와중, 클럽하우스 로비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잭과 요니의 모습을 발견했다.
언제나처럼 집에서 만든 수제 소시지를 잔뜩 챙긴 잭이 요니를 찾아온 모양이다.
그 옆에는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두 사람을 바라보는 해리슨의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얘는 왜 데려왔어?”
퉁명스러운 잭의 물음에, 요니가 친절하게 대답했다.
“같이 기숙사 사니까.”
“그렇군··· 이봐 꼬맹이, 혹시 구단주님이 무슨 이야기 안 해 주셨어? 예를 들어, 선수가 기억해야 할 세 가지라던가.”
“아뇨. 못 들었는데요.”
“그래, 모르면 됐어.”
우월감을 느꼈는지 잭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요니가 쓴웃음을 지었지만, 잭은 조금도 개의치 않는 것처럼 보였다.
해리슨이 눈을 빛내기 전까지는.
“궁금한데요··· 나중에 구단주님 만나면 여쭤봐야겠어요.”
“그냥 내가 알려줄테니까, 구단주님 귀찮게 굴지 마··· 사실 구단주님은 바로 답을 주시지는 않았어. 스스로 깨달으라는 것처럼.”
그 말처럼, 굳이 알려주진 않았었다. 어차피 선덜랜드 선수로서 경기를 뛰면 자연스럽게 깨닫게 될 일이었기에.
“그래서 나하고 요니는 한참 고민했지.”
“술과 도박과 여자를 조심하라는 게 아닐까 하는 의견도 있었지만···.”
쓴웃음을 짓는 요니의 곁에서, 잭이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답을 알려줄 테니, 감사한 마음으로 따라 하도록 해. 나는, 선덜랜드를, 사랑한다.”
어, 그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해리슨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눈을 깜빡이느라 그만 한 박자 늦게 따라하고 말았다.
“나는, 선덜랜드를, 사랑한다?”
뭐, 어쩌면 저것도 정답일지도 모른다. 잭과 요니에게 있어서는.
팀에 대한 애정, 구단에 대한 충성심은 분명히 프로 선수에게 필요한 덕목 중 하나니까.
“이번엔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에서 뛰잖아? 우리 팬들 앞에서. 그러니까 보고 있어. 우리가 홈 팬들 앞에서 어떻게 뛰는지.”
누구보다 팀을 사랑하는 선수, 잭이 그렇게 말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천천히 등을 돌렸다.
그리고 조엘에게 전화를 걸었다.
“궁금한 게 있는데요. 혹시 레스터에서 우리 쪽 올 때는 어느 도로로 들어옵니까?”
A1018이라는 대답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 * *
퇴근길에 오른 마일즈 우드는, 뺨을 꼬집었다.
“이게 대체 다 뭐지?”
그가 종종 이용하던 A1018번 도로 위에 선덜랜드 엠블럼이 무수히 내걸린 것이었다. 마치 만국기처럼.
무심코 핸들을 경기장 쪽으로 꺾었더니,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 주위는 이미 온 사방이 붉은 색 일색이었다.
건물부터 길까지 온통 붉은 색 일색이고, 곳곳엔 현수막까지 붙었다.
This is Sunderland.
Welcome to the Stadium of Light.
명확한 메시지. 경기장에 들어오는 길부터 기선제압을 하겠다는 듯한 의도가 역력했다.
그리고 풋볼 스퀘어에서는 종일 펀딧들의 메시지가 흘러나왔다.
[EFL컵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웸블리로 가는 길은 닫히지 않았습니다.]
[홈, 어웨이의 2연전을 하는 거죠? 사실상 하프타임이 세 번 있는, 180분짜리 경기라고 생각하면 편합니다. 지금 딱 절반인 거죠.]
심지어 구단주 이희성까지 직접 풋볼 스퀘어에 모습을 드러냈다.
선덜랜드 한정으로는 세상 어느 펀딧보다 높은 인지도를 갖는 구단주의 출현에, 팬들은 곧바로 기립박수를 보냈다.
물론 마일즈도 마찬가지였다.
박수 속에서, 구단주의 목소리가 차분하게 울렸다.
[여러분은 기억하실 겁니다. 제가 구단을 인수하고 처음 치렀던 프리시즌 3연전을요.]
“레바뮌 3연전 말이지!? 기억하지!”
누군가의 외침에, 이희성이 싱긋 웃는 것처럼 보였다.
[그때, 저는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뮌헨전을 우리가 홈에서 겪을 마지막 패배로 만들겠다고. 네, 선덜랜드는 아직 홈에서는 지지 않았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팬들 사이에서, 물색없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어, 작년 FA 컵에서 뉴캐슬에게 지지 않았었나?”
곧바로 해당 팬에게는 적절한 야유가 쏟아졌다.
“넌씨눈.”
“승부차기는 공식적으론 무승부잖아.”
[이번에도 그럴 겁니다. 레스터라도, 아니, 세상의 어느 누구라도 우리를 홈에서 꺾을 수는 없습니다. 약속합니다. 그러니, 함께 해 주십시오.]
부드러운, 하지만 단호한 목소리에 팬들의 환호가 쏟아졌다.
“티켓은 못 샀지만, 대신 풋볼 스퀘어에서 외칠 거야! 안심해! 경기장 안까지 들리게 외칠 테니!”
마일즈는 어느새 자신 또한 목 놓아 외치는 중임을 깨달았다. 지금도, 그리고 경기 당일도 목이 터지게 외칠 것이다. 휘슬이 세 번 울릴 때까지.
[반드시 여러분을 웸블리로 모셔가겠습니다. 그러니까···.]
환호와 함성에 묻혀, 다음 말은 들리지 않았다.
사실은 들을 필요도 없었다.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를, 시티 오브 선덜랜드 전체를 붉게 물들일 테니까.
EFL컵 4강 2차전, 선덜랜드 대 레스터.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는 언제나처럼 만석이었고 풋볼 스퀘어와 선덜랜드 곳곳의 펍들 또한 붉은 열기로 가득 뒤덮였다.
그 열기 속에서.
선덜랜드의 일레븐은 조용히, 하지만 누구보다 뜨겁게 설욕전을 준비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