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자의 신이 키우는 축구단-89화 (89/422)

89화. 기억해야 하는 것 (4)

Wise man say, only fools rush in.

킥오프 전부터,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에는 팬들의 노랫소리가 가득 울려 퍼졌다. 원래 달콤한 발라드였던 원곡의 분위기는 조금도 남아 있지 않은, 거친 사내들의 합창.

But I can’t help falling in love with you.

나는, 선덜랜드를, 사랑한다고 선언하던 잭과 요니의 외침에 화답하는 듯한 응원가이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전반적으로 몸이 가벼워 보이는 선수들 사이에서도, 유독 잭과 요니가 활기차 보였다.

Sunderland! Sunderland! Sunderland!

경기장을 울리는 함성은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풋볼 스퀘어에서도, 근처의 축구 펍에서도 전부 똑같은 응원을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휘슬 소리를 완전히 묻어버릴 정도의 열기 속에서, 시작부터 공세에 나선 팀. 당연히 우리 선덜랜드였다.

킥오프와 동시에 우리는 대대적인 공격에 나섰고, 크리그와 스티븐, 요니까지 온통 앞으로 전진했다.

레스터는 곧바로 거센 압박 수비로 대응했다.

“얼씨구, 저것들 봐라? 또 저번하고 똑같이 움직이네?”

평소보다 훨씬 표독스러운 희주의 목소리처럼, 레스터는 지난 번 경기에서와 마찬가지로 레프트윙을 안쪽으로 좁히는 식으로 움직였다.

우리의 공격 방향을 오른쪽으로 제한하려는 의도였고, 마치 몸으로 물어보는 듯한 태도였다.

‘선덜랜드는 학습이라는 걸 모르는 건가?’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우리 벤치쪽을 내려다보았다.

문득, 벤치에 앉아 있는 브라이언과 시선이 마주쳤다고 느꼈다. 매일 밤, 잠을 줄여가며 대응에 나섰던 브라이언의 눈은 새빨갛게 충혈된 상태였고, 크게 뜨기조차 힘들어 보였다.

하지만 그 눈은, 틀림없이 웃고 있었다.

* * *

브라이언은 쓴웃음을 지었다.

‘내 주위엔 왜 이렇게 택티컬 지니어스가 많은 거야?’

샐리는 물론, 오늘 상대하는 레스터 감독 역시 전술 천재를 자처하고 있었다. 덕분에 전술 천재라는 용어는 이제 조금 지겹다는 게 브라이언의 감상이었다.

‘그래도 덕분에 엄청 배웠으니까.’

피로가 가시지 않은 얼굴로 웃으며, 브라이언은 자신이 준비한 전술이 펼쳐지는 모습을 감상했다.

오른쪽 측면을 질주하는 선덜랜드의 5번, 에디 레이놀드를.

“오버래핑 센터백? 측면으로!?”

레스터 벤치 쪽에서 터져 나오는 경악을 들으며, 브라이언은 히죽거렸다.

‘원래 측면으로 빠져나가는 게 정석이지. 오버래핑 센터백은.’

굳이 따로 움직임을 연습할 필요는 없었다. 에디는 원래 셰필드 선수고, 셰필드가 만든 오버래핑 센터백 전술은 항상 측면 공간을 활용한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레스터가 오른쪽을 일부러 비워준 덕분에, 에디는 비교적 순탄하게 전진할 수 있었다.

그 와중에도 존재감을 확실히 뽐내는 모습이, 에디답다고 생각했다.

“선수가 기억해야 하는 세 단어? 뻔하지. 선덜랜드는, 나를, 사랑한다! 나도 나를 사랑하고!”

에디가 히죽거리며 오른쪽 측면을 달려 나갔고, 레스터의 마크는 살짝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센터백이 오른쪽 측면을 질주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겠지?’

오른쪽 측면을 비워 우리 라이트백에게 자유를 주는 대신, 공격 방향을 한쪽으로 제한한다는 게 레스터 전술의 핵심이었다.

‘이대로 에디에게 따라붙을 거야? 아니면 끝까지 오른쪽을 비울 거야?’

브라이언은 살짝 심술궂은 표정으로 레스터 벤치를 흘끔거렸다. 그러자 레스터 벤치에서 곧바로 지시가 나왔다.

“블록을 유지해! 상대는 센터백이 빠져나갔다! 빼앗아서 쐐기 골을 넣으면 4강전은 이대로 끝나!”

‘에디가 올라간 자리는 톰슨이 아래로 내려와서 커버하면 그만인데 무슨.’

서로 위치를 바꾸며 전진하는 선덜랜드 선수단의 모습에, 레스터 벤치가 부산해졌다.

“반스! 자리 지켜! 메디슨, 5번 잡아!”

에디를 견제하던 선수는 그대로 톰슨을 상대하고, 대신 미드필더에 생긴 여유를 오른쪽으로 돌리겠다는 식의 대응이었다.

무척 합리적이지만, 그런 만큼 선덜랜드의 전술가들이 상정해둔 범위 안에 들어 있는 내용이기도 했다.

브라이언은 문득 지난 며칠간의 일을 떠올렸다.

[샐리, 네가 레스터 감독이라고 생각하고 대응해 봐.]

[어렵지 않지요. 마크맨을 서로 스위칭하면 간단하잖아요? 오른쪽으로 공격 방향을 제한하는 건, 우리 라이트윙이 스티븐이기 때문이고요.]

[스티븐이 안으로 파고들게 하면?]

미리 준비한 대로, 브라이언의 눈 앞에서 스티븐이 거칠게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동시에 크리그가 마치 자신이 욍포워드라도 된 것처럼 왼쪽 측면으로 빠져나갔고, 요니는 오른쪽 하프스페이스로 움직였다.

선덜랜드가 미리 준비한 체계적인 움직임, 약속된 플레이에 레스터 수비진의 대응은 딱 한 걸음 늦고 말았다.

딱 한 걸음의 차이가 만든 빈틈, 그 사이로 에디가 요니에게 정확한 패스를 건넸고, 요니는 박스 안쪽으로 짧은 크로스를 올렸다.

마무리는 스티븐이었다. 특유의 순발력과 거구를 살린 다이빙 헤딩으로.

[고오오오올! 스티븐, 스티븐 와이트! 오늘 경기 선제골입니다!]

쏟아지는 환호 속에서도 스티븐은 담담했고, 세레머니는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스티븐은, 상대를 가장 질리게 만들 행동을 선택했다.

바로, 공을 들고 하프라인으로 뛰는 것이다.

선덜랜드 선수 누구도 세레머니에 동참하지 않았다. 유일하게 에디가 팔을 위아래로 휘저으며 복귀했지만, 그저 팬들의 박수를 유도했을 뿐이지, 딱히 세레머니라고 부를 정도는 아니었다.

Sunderland! Sunderland! Sunderland!

더욱 거세진 선덜랜드 팬들의 함성 속에서, 브라이언은 싸늘하게 웃었다.

더 몰아칠 것이다. 정신 차릴 틈조차 주지 않도록.

[ (1) 선덜랜드 1 - 0 레스터 (2) ]

* * *

팬들은 뜨겁게 환호했고, 레스터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레스터의 동요를 감지한 우리 벤치에서, 곧바로 외침이 터져 나왔다.

“압박해! 더 많이, 더 빨리 달려!”

감독의 지시에 따라, 우리 선수들은 곧바로 강렬한 전방 압박을 선보이며 대응했다.

누군가는 컵 대회 특유의 홈-어웨이 2연전을 가리켜, 180분짜리 경기라고 부른다.

두 경기가 아니라, 한 경기라고. 그저 하프타임이 세 번이고, 경기 시간이 180분인 거라고.

그 주장대로라면, 우린 아직 1-2로 지고 있다. 분위기는 다 넘어왔지만.

Sunderland! Sunderland! Sunderland!

팬들의 함성이 더욱 거세졌다. 열병같이, 들불같이 퍼져나가는 열기 속에 경기장은 그야말로 광란의 축제처럼 끓어올랐다.

원정 서포터에게는, 그리고 원정팀 선수들에게는 그야말로 지옥의 한가운데처럼 느껴질 소음이겠지만, 우리 선수들에게는 세상 무엇보다 힘이 되는 소리다.

그리고 선덜랜드에는, 이런 분위기일수록 더욱 강해지는 선수가 있다.

순간적인 압박으로 공을 빼앗은 잭이 그대로 반격에 나섰다. 요니가 곧바로 합류했고, 잭은 요니와 자유롭게 원투 패스를 주고받으며 전진했다.

I know I am. I’m sure I am.

점점 뜨거워지는 함성 속에서, 희주가 목 터지게 외치기 시작했다.

“달려! 다 제쳐버려!”

우리 목소리가 들리기라도 한 것처럼, 잭의 발놀림이 더욱 빨라졌다.

심장이 뛴다. 내가 선수가 된 것처럼.

“들어가!”

곧바로 크리그가 침투할 것처럼 오프사이드 라인 선상에서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잭은 크리그의 움직임에 맞춰 발을 채찍처럼 휘둘렀다.

툭, 패스라기엔 너무나도 짧은 킥이 잭의 발 앞을 굴렀다.

그것이 사실 중거리 슛을 위한 예비 동작이었음을 눈치챘을 무렵 잭이 벼락같은 기세로 공에 달려들었다.

흔히 말하는, 맞고 뒈져라 슛이 레스터의 골문을 파고들었다.

“꺄악!”

희주의 비명과, 레스터 골키퍼 슈마이켈의 선방 중, 뭐가 더 빨랐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거의 비슷했을 것이다.

슈마이켈이 처낸 공이 페널티박스 바깥까지 흘러나왔다. 그만큼 슛의 기세가 강렬했기 때문이다.

흘러나온 세컨 볼에 가장 먼저 접근한 선수는, 이번에도 잭이었다.

튕겨 나온 볼이 땅에 닿기도 전에, 잭은 그대로 공을 오른발로 걷어찼다.

발등에 제대로 맞은 공이 둥근 호를 그렸고, 그대로 파 포스트 쪽 네트에 꽂혔다.

[ (2) 선덜랜드 2 - 0 레스터 (2) ]

마침내 터져나온 팬들의 환호 속에서, 잭은 그대로 레스터 골대를 향해 질주했다. 그리고 곧바로 공을 회수해 하프라인을 향해 달렸다.

명백한 메시지였다. 2점으로는 부족하다고, 우린 더 넣을 거라고.

Sunderland! Sunderland! Sunderland!

더욱 거세진 우리 팬들의 함성 속에서, 희주가 울먹이듯 소리 질렀다.

“거의 올라간 거지!? 결승 가는 거지!? 그렇지!?

“아직 몰라.”

냉정하게 대답하면서도, 사실은 나조차 그렇게 믿었다.

웸블리로 가는 길이 활짝 열렸다고.

그렇지는 않았다.

정확히 5분 후, 우리는 레스터에게 만회 골을 허용하게 된다.

레스터의 9번, 바디의 기습적인 돌파였다.

[ (2) 선덜랜드 2 - 1 레스터 (3) ]

순간, 눈앞에서 웸블리로 향하는 문이 반쯤 닫히는 것처럼 보였다.

두 경기 합산 스코어가 같으면, 원정 골이 많은 팀이 올라간다. 비록 EFL컵은 연장전까지 치르고 난 후에야 원정 다득점을 적용하지만, 우리가 불리해진 것만은 사실이다.

이제, 우리는 두 골이 더 필요해졌다. 킹 파워 스타디움에서 단 1점도 가져오지 못했기에.

옆에서는 울먹이는 소리가 났다. 희주겠지.

“어떡해··· 원정 골 뺏겼어!”

대답 대신, 나는 살짝, 아주 살짝 눈을 감았다.

그러자 선덜랜드 가족 모두의 모습이 똑똑히 보이는 것만 같았다. 선수단, 코칭스태프, 그리고 일반 직원들까지.

내 상상 속에서, 누군가는 분함에 입술을 깨물었고, 누군가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조마조마함에 두 손을 모은 채 기도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경기장에서 눈을 돌리거나, 패배감에 고개를 떨구지는 않았다. 그런 모습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모양이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선수가 기억해야 하는 건.”

아니, 선덜랜드 사람이 기억해야 하는 건, 딱 세 단어 뿐이니까.

[절대, 포기하지, 마라.]

팀의 상황? 대회의 규칙? 원정 골? 다음 라운드 진출 가능성? 그런 거 몰라. 관심도 없어.

아직 휘슬이 울리지 않았으니까.

내가 배웠던 것, 브라이언이 배워왔던 것, 지금도 선덜랜드 선수들이 배우고 있는 가르침대로.

휘슬이 세 번 울리기 전까지, 끝까지 싸울 것이다.

We do what we want. We do what we want.

눈을 뜨자 피치 위에는 조금도 기세가 줄지 않은 붉은 유니폼의 모습이 보였다. 고개를 떨어뜨리지도, 발을 멈추지도 않은 열한 명의 전사들.

그들의 등에, 조금이라도 힘을 보탤 수 있도록.

We are Sunderland. Say we are Sunderland.

언제나처럼 외쳤다. 경기장을 가득 메운 팬들과 함께.

* * *

“지켜! 이대로 지키면 우리가 올라간다!”

레스터 벤치에서 터져 나오는 외침을 들으며, 크리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빌어먹을.’

만일 선덜랜드가 원정 골 1점만 가져왔다면, 승부차기를 노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레스터의 슈마이켈은 무척 훌륭한 골키퍼지만, 딱히 승부차기에 강하다는 인상은 아니었다. 반면 하퍼는 드라마틱한 승부차기 승리 기록이 있고, 페널티킥 방어에 성공한 실적도 있다.

원정 지옥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의 분위기까지 고려하면, 승부차기는 사실상 선덜랜드가 훨씬 유리한 룰이었다.

하지만 승부차기의 가능성은 이제 완전히 사라졌다.

‘역시 레스터 원정에서 득점하지 못한 공격진의 탓··· 내 책임이겠지.’

크리그는 기억하고 있다. 팀이 이번 경기를 어떻게 준비했는지를.

매일같이 코칭스태프는 밤을 지새웠고, 구단주는 팬들과 끊임없이 소통하며 분위기를 끓어오르게 만들었다. 스태프들은 경기장과 그 주변을 그야말로 붉게 물들였다.

크리그는 기억하고 있다. 자신이 이번 4강전에서, 몇 번의 찬스를 날려먹었는지를.

“바디 불붙었어! 선덜랜드 수비는 벌벌 떨지!”

기억하고 있다. 자신이 사용하던 응원가, ‘불붙었어’ 의 대명사가 언제부터 바디로 바뀌었는지를.

‘온다.’

기억하고 있다. 등 뒤의 열 명이, 어떤 선수들인지를. 포기하지 않고, 멈추지 않는 그의 동료들.

그들이 어떻게 공을 따내고 가져다 주는지, 크리그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어떤 과정을 거쳐 내 발 앞에 공이 놓이게 되는지를.]

기억하고 있다. 팀의 미래를 짊어질 유망주에게, 자신이 어떤 조언을 했는지를.

벤치에서, 마치 울 것 같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해리슨을 곁눈질로 바라보며, 크리그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렇게 그는 찬스를 기다렸다.

결코 함부로 날려버릴 만큼 가볍지 않은 찬스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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