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자의 신이 키우는 축구단-90화 (90/422)

90화. 기억해야 하는 것 (5)

“레스터 압박이 조금 약해진 거 같지 않아?”

“많이 약해졌지.”

경기장 곳곳에서 들리는 소리처럼, 레스터의 압박은 확실히 약해졌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뒤로 내려앉았다. 최전방에 자랑스러운 9번을 홀로 남겨둔 채.

짐작 가는 원인은 여럿이지만, 아마 가장 큰 이유는 역시 그들이 따낸 원정 골 때문일 것이다.

이대로 끝나면 당연히 결승에 진출하고, 설령 우리에게 동점 골을 내주더라도, 연장전까지 버티면 승리는 자기들 몫이 된다.

연장전이 끝난 이후에 원정 다득점이 적용되는 독특한 대회 규칙 때문이다.

그러니 굳이 라인을 올리는 리스크를 감수하지 않으려는 거겠지.

아마 체력 부담도 신경쓰일 것이다. 노골적으로 EFL컵이 1순위 목표라고 공언한 우리와 달리, 레스터는 리그에서 챔스권 경쟁을 벌여야 하는 팀이다.

어쩌면 언더독인 우리 선덜랜드가 역습 축구를 잘하는 팀임을 역이용하려는 의도도 있겠지. 역습이 특기인 팀은 주도권을 갖는 지공 상황에서는 오히려 취약한 경우가 흔하니까.

이유야 여러 가지겠지만 결과는 단순하다. 레스터가 왜 내려앉았는지는 어차피 내 관심사가 아니기에.

중요한 것은 상황이다. 우리는 두 골을 더 빼앗아야 하고, 레스터는 전방압박 대신 내려앉기를 선택했다는 것.

그게 레스터의 오산이 될 거라고, 나는 그렇게 믿는다.

끝까지 지킬 수 있다고?

만일 킹 파워 스타디움이라면 레스터의 판단은 현명했겠지만, 이곳은 빛의 경기장,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다. 이 원정 지옥에서, 휘슬이 울릴 때까지 버텨낼 수 있다고 믿는다면···.

해보자고, 끝까지.

쏟아지는 함성, 팬들의 열기 속에서 레스터의 푸른 유니폼은 그렇게 바짝 뒤로 움츠러들었고, 마침내 경기장에는 한 명의 선수가 자유를 얻었다.

압박에서 풀려나 전진하는 선수는 선덜랜드의 6번, 피터 톰슨이었다.

Sunderland 'til I die. I'm Sunderland 'til I die.

톰슨에게 쏟아지는 팬들의 뜨거운 환호에, 내 목소리를 함께 실었다.

* * *

크리그는 물끄러미 레스터의 골문을 응시했다.

포백라인이 잔뜩 내려앉은 상태, 덕분에 박스 주변은 무척 단단해졌고 쉽게 득점을 노릴 수는 없어 보였다.

그래도 아예 빈틈이 안 보이는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크리그는 부지런히 레스터 수비의 허점을 파고들기 위해 움직였다.

그때마다 크리그의 발에는 날카로운 패스가 전해졌다. 대부분 톰슨, 때때로 요니, 가끔은 잭과 에디의 패스가.

그에 맞춰 레스터 수비진 역시 크리그를 빠르게 막아섰다.

후반 77분.

톰슨이 라인 뒷공간에 떨어지는 완벽한 패스를 성공시켰다. 패스를 미리 예상하고 있었던 크리그는 누구보다 먼저 공에 도착했지만, 슛으로 이어나가지는 못했다.

슛을 날리려는 찰나, 발에 묵직한 것이 걸리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최후의 순간 레스터의 수비진이 태클로 공을 걷어냈고, 크리그는 잔디 위를 거칠게 굴렀다.

“아깝다!”

관중석에서 누군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하긴, 위에서 보기엔 빅 찬스이긴 했을 것이다. 라인 뒷공간을 완벽히 파고든 뒤였으니까.

하지만 축구의 판정은 두 가지뿐이다. 라인을 넘었느냐, 넘지 못했느냐. 이번 공격은 레스터 골라인을 넘기지 못했다. 피치 위를 구르며 크리그는 그렇게 자조했다.

구르는 느낌조차 친숙한,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의 잔디. 그런데도 어째 혀끝에 비릿한 느낌이 전해졌다. 넘어지면서 입안이 터진 모양이다.

“더 빨리.”

무심코 중얼거리는 크리그의 눈앞에 손이 내밀어졌다. 레스터의 센터백이었다.

표정은 상냥했지만, 눈빛은 싸늘했다. 마치, ‘그 발로?’ 라고 물어보려는 듯한 눈빛이었다. 크리그와 눈이 마주치자 레스터 센터백은 어깨를 살짝 움츠렸지만, 미안한 기색은 별로 없었다.

사실 크리그 또한 느린 선수는 아니었다. 엄청 준족까진 아니라도 평균 이상에는 들어가는 주력의 소유자다. 그저 비교 대상이 나빴을 뿐이다.

레스터의 9번, 바디는 크리그보다 훨씬 빠른 선수이기에.

크리그는 내밀어진 손을 무시한 채 자기 힘으로 일어났다. 그런 크리그의 등 뒤에서, 톰슨의 목소리가 들렸다.

“걱정하지 마! 몇 번이고 보내준다! 그게 내 일이잖아!”

고개를 끄덕이고, 크리그는 유니폼을 털었다. 톰슨은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다 해줄 선수다. 그러니 크리그 또한, 자기 일을 해야 할 시간이었다.

아니, 톰슨뿐이 아니다. 선덜랜드에는 에디가 있고, 요니가 있고, 잭이 있다. 크리그 대신 공을 따내 줄 선수들이 있고, 공을 가져다 줄 선수들이 있다.

그리고 전방압박으로 억누르지 않는다면, 톰슨의 패스는 반드시 크리그에게 전해질 것이다.

‘지금처럼.’

또다시 등 뒤편에서 들리는 공차는 소리에, 크리그는 누구보다 빨리 반응했다. 타이밍을 맞출 필요는 없었다. 톰슨이 이미 맞춰주었을 것이기에.

그래서 크리그는 공의 위치를 확인하기도 전에 발을 휘둘렀다. 마치 채찍처럼.

심장 뛰는 소리에 섞여, 응원가가 마치 환청처럼 들렸다.

Bill Krieg’s On fire. He’s on fire.

‘그랬던 시절도 있었지.’

공에 발이 닿으면 골로 이어진다고, 그렇게 믿던 시즌도 있었다. 벌써 수년 전의 이야기지만.

선덜랜드로 이적한 후에는, 전혀 넣지 못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구단주가 바뀌기 전까지는.

[크리그 선수, 잔디 밟는 느낌이 어떻습니까?]

‘좋습니다. 아주.’

[공격수는 여러모로 민감하니까요.]

빙긋 웃는 기억 속의 구단주를 향해, 크리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 그건 제가 병신이라 그런 겁니다. 제가, 이 팀의 수준에 어울리지 않는 공격수라서.’

레스터의 키퍼 슈마이켈이 환상적인 선방을 선보였고, 공은 골키퍼 장갑에 맞아 흘러나왔다.

똑똑히 보였다. 퉁, 퉁, 잔디 위에서 두 번 튀어 오른 공의 행방이.

[하핫, 테치 제거에도 신경 쓰고 있거든요. 어느 구역에서도 항상 일정한 느낌으로 뛸 수 있도록.]

‘공이 올 거야.’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멋대로 움직였다. 크리그는 공을 향해 몸을 날렸다.

어쩌면 우연이었을지도 모른다. 펀칭한 공이 어디로 흐를지 정확히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은 아주 드물고, 하물며 잔디에 튀어 오른 이후의 움직임은, 사람이 읽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크리그 자신 또한, 세컨볼의 궤적을 예측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매일같이 이 잔디 위에서 공을 차던 기억 속의 어느 풍경과 겹쳤을 뿐.

이마에 공이 닿았고, 다음 순간 몸 전체에 촉각이 느껴졌다. 땅에 처박히는 충격부터, 이젠 너무나 친숙한 잔디의 감촉.

그리고 고막에 울리는, 경기장 전체의 환호가.

Bill Krieg’s On fire. Your defence is terrified.

크리그는 몸을 일으켰다. 눈앞에 공이 보였다. 골라인을 확실히 넘어간 공이.

[ (3) 선덜랜드 3 - 1 레스터 (3) ]

입안에 퍼지는 비릿한 느낌과, 명치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뜨거움이 섞여서···.

I know I am. I’m sure I am.

크리그는 입을 벌리고 달렸다. 자신의 입 밖으로 새어나온 소리가 포효라는 사실을 그가 깨닫기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I’m Sunderland ’til I die.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에 울려 퍼지는 팬들의 환호를 들으며, 크리그는 공을 주워들고 하프라인으로 달렸다.

기억할 것이다. 이 목소리를. 붉은 열기를.

언제까지나.

Sunderland 'til I die.

* * *

후반전이 끝나갈 무렵 한 골을 허용한 레스터는 눈에 띄게 허둥대기 시작했다.

일단 수비를 굳히고 태세를 정비할지, 아니면 곧바로 반격에 나설지 제각각 다른 생각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선수단의 흔들림을 통제하고 다잡아야 할 벤치에서도 곧바로 지시가 나오지 않는 모습이었다.

하긴, 망설여지겠지.

연장전 이후에는 원정다득점이 적용된다. 그러니 추가실점만 안 하면 무조건 레스터가 올라가는 상황이었다. 레스터는 굳이 무리할 이유가 없다. 섣불리 반격하다가 괜히 추가골을 내주면 곤란할 테니.

하지만 1부 리그에서 챔스 티켓을 놓고 절찬 경쟁중인 레스터의 경기 일정을 고려하면, 연장까지는 가지 않고 끝내고 싶을 것이다.

그 망설임이, 틀림없이 우리보다 강팀일 레스터의 발목을 잡았다.

레스터는 정말로 강한 팀이었다. 지금 피치 위를 누비는 선수들의 이마만 봐도 눈이 부실 지경이다. 잭과 요니, 에디 같은 선수가 레스터에는 몇 명씩 드글거렸다.

레스터의 감독 역시 지금의 브라이언 이상의 전술 천재, 그러니 중립 경기장에서 열 번 붙으면 아마 여덟 번은 우리가 질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이곳,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는 우리 홈이다.

우리에게 힘이 되는 장소이자 원정에게는 가장 가혹한, 빛의 경기장. 관중석을 가득 메우고도 모자라 풋볼 스퀘어에 모인 잔뜩 모인 팬들의 목소리가 공기를 가득 메운 곳.

그리고 이곳에서 싸우는 우리 선수단과 코치진에게는 무척 명확한 의식이 있었다. EFL컵은 올 시즌 우리의 최우선 목표라는.

우리는 오늘 반드시 승리해야 한다. 원정골이 없었기에 연장을 가면 유리한지 불리한지 따질 그런 잔머리조차 필요치 않았다.

팬들의 함성, 선수단의 집중력, 코치진의 목표 의식은, 두 팀 선수단에 분명히 존재하는 실력 차이를 상쇄할 만한 요소였다.

후반 85분.

바디를 앞세운 레스터가 마침내 반격에 나섰다. 바디는 여전히 위력적인 스피드로 날카로운 침투를 선보였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두렵지는 않았다. 지금의 침투는 어디까지나 선수 개인의 역량이지, 팀 차원의 공격은 아니었기에.

에디가 침착하게 패스를 끊어냈다.

“가라!”

크리그의 골로 기세를 되찾은 희주가 명랑하게 외쳤고, 에디는 여느 때처럼 경쾌하게 전진했다.

오늘 경기에서 몇 번이나 선보인 오버래핑, 오른쪽 측면 돌파에 레스터는 습관처럼 오른쪽 측면을 틀어막았다.

“어이쿠, 고마워라.”

레스터 선수 한 명을 오른쪽 측면으로 끌어내려는 목적을 달성한 에디는, 무리하지 않고 전방으로 길게 공을 걷어냈다.

잠시 후 스티븐이 패스를 몸으로 받아냈고, 흘러나온 공에는 언제나처럼 요니가 가장 먼저 도착했다.

“찬스야, 오빠! 찬스라구!”

날뛰기 시작한 희주, 경기 종료가 임박했는데도 조금도 지친 줄 모르는 팬들의 함성.

심장이 뛰었다.

잠시 후 요니가 아크 정면으로 짧은 패스를 보냈다. 목적지는 당연히 우리의 스트라이커, 선덜랜드 No 22. 빌 크리그였다.

수비를 등진 채 패스를 받으려는 크리그와, 그런 크리그를 향해 쇄도하는 잭의 완벽한 침투가 어우러지면서, 레스터 수비는 눈에 띄게 당황하기 시작했다.

크리그가 직접 처리할지, 아니면 잭에게 되돌려줄지 판단하기 어려운 것처럼 보였다.

크리그는 수비의 망설임을 놓치지 않았다. 그의 몸이 순간적으로 오른쪽으로 돌았다.

“가! 다 날려버려!”

수비 한 명을 따돌리며 박스 안쪽으로 파고드는 크리그의 침투에, 레스터의 슈마이켈이 전진 수비로 대응했다. 각을 주지 않겠다는 돌진, 절묘한 타이밍으로.

꿈틀, 무릎에 힘이 들어갔다.

다음 순간 크리그의 왼발이 공을 옆으로 살짝 밀어냈다. 아웃프론트. 윙포워드들이 매크로처럼 쓰는 페인트 동작이, 골키퍼를 완벽히 따돌렸다.

기억 속에 있는 장면.

잠시 후 크리그의 왼발이 불을 뿜었다. 지키는 이 없는 네트를 향해.

[ (4) 선덜랜드 4 - 1 레스터 (3) ]

두 주먹을 불끈 움켜쥔 크리그가 관중석을 향해 달렸고, 그 뒤로 아홉 개의 붉은 유니폼이 뒤따랐다.

오늘 경기에서 처음으로 시도하는 세레머니였다.

날뛰는 심장을 억누르려는 듯, 주먹으로 왼쪽 가슴을 두드리는 크리그를 향해 팬들의 환호가 쏟아졌다.

He’s On fire. 정말로, 오늘 완전히 불붙었다고.

크리그의 골이 결승점이었다. 선택지가 없어진 레스터가 뒤늦은 총공세에 나섰지만, 우리 선수들은 종료를 알리는 휘슬이 울리기 전까지 필사적으로 버텨냈다.

[선덜랜드, EFL컵 결승 진출!]

스크린에 떠오른 문구를 바라보며, 흥분으로 떨리는 손을 바지에 문지른 다음 주먹을 꾹 쥐었다.

“축하해, 오빠. 첫 결승전이네.”

무심코 고맙다고 대답하려다가 웃으며 대답을 고쳤다. 희주 쟤도 선덜랜드 구단 직원, 우리 식구니까.

“너도 축하한다.”

그러자 희주가 배시시 웃었다. 기분좋은 것처럼.

“가져올 수 있을까? 우리가 갖지 못한 트로피, EFL 컵.”

“노력해야지.”

아직도 가시지 않은 경기의 흥분을 억누르며, 나는 짧게 대답했다.

EFL컵, 선덜랜드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갖지 못한 트로피를 향한 여정. 그 여정은 이제, 웸블리에서의 결승전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우리 선수들을 최상의 컨디션으로 웸블리에 세울 수 있도록,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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