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웸블리로 가는 길 (1)
<우승에 실패하는 것보다, 약속을 어기는 게 훨씬 힘들다 - 마누엘 페예그리니>
선덜랜드의 결승 진출을 가장 신나서 떠들어댄 사람이 누구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적어도 후보 정도는 명확하게 좁힐 수 있을 것 같았다.
후보 1, 아까부터 분당 700타쯤 되는 듯한 속도로 맹렬히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는 희주.
후보 2, 옛 직장 선덜랜드 데일리 상대로 전화통 붙잡고 떠들어대는 애니.
내가 SNS를 전혀 하지 않는 탓에, 애니의 결과물이 먼저 눈에 띄었다.
[두 사람의 로저스. 두 가지의 선택]
공교롭게도 두 팀 감독의 성이 같다는 점을 내세운 선덜랜드 데일리는, 두 감독의 다른 선택을 부각했다.
[레스터의 로저스는 우위를 지키려 했고, 선덜랜드의 로저스는 끝까지 도전자의 자세를 유지했다. 승패를 가른 것은 아마도 마음가짐의 차이가 아니었을까?]
이번엔 기사 조회수가 잘 뽑혔는지 팬들의 댓글이 한창 불타는 중이었다. 눈대중으로 보기엔 레스터 팬들의 댓글이 훨씬 많았다.
- 우리 감독이 쫄보라 그럼 ㅠㅠ 상황변화에 약함.
- 뭘 감독이 쫄보야. 그냥 팀 자체가 압박에 짓눌린 건데.
-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 완전 미쳤던데? 미친놈들 소굴 같았음.
ㄴ 괜히 선덜랜드가 홈 무패겠냐. 거기서 이기고 나온 팀 아무도 없어.
ㄴ 그럼 뉴캐슬은···.
ㄴ 승부차기는 무승부라고요. 쫌!
사람들의 반응은 주로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가 얼마나 레스터에게 가혹한 경기장이었는지에 집중되어 있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구단주가 된 이후, 나는 이곳을 원정 지옥으로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까.
최고급 드레싱룸과 우수한 설비, 팀의 전술에 따라 세팅을 섬세하게 바꾸는 잔디, 그리고 미친 듯 날뛰는 우리 서포터들의 열광··· 홈에서의 선덜랜드를 무적불패로 만드는 요소들이다.
하지만 이제 웸블리에서는 그런 홈 버프가 완전히 없어진다.
그렇다면 하다못해 상대라도 좀 만만한 팀을 만나면 좋으련만···.
그때, 내 스마트폰이 울렸다. 메시지를 보낸 사람은 헨도였다.
[결승 진출 축하한다. 웸블리에서 보겠네.]
쓴웃음을 지었다. 이거, 레스터 잡아줘서 고맙다는 소리인가 싶어서.
뭐라고 답을 보내야 하나 고민하다가, 솔직히 답하기로 했다.
[축하는 정말 고마운데, 솔직히 너희 만나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다.]
챔스와 리그를 연달아 들어올리며 부활에 성공한 리버풀을 상대하기엔, 우린 아직 여러모로 부족하다. 제발 안 만났으면 좋겠다는 심정을 담아 회신을 보냈다.
그랬더니 곧바로 답장이 돌아왔다.
[칭찬 고마워.]
고마우면 안 올라오면 안 되겠냐?
리버풀이 우리 결승 상대로 정해진 건, 그다음 날의 일이었다.
* * *
리버풀이 우리 결승 상대로 정해졌다는 소식에, 샐리는 차라리 다행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리버풀은 강팀이지만, 강팀치고 스쿼드가 두텁지는 않거든요. 솔직히 말하면, 맨시티를 상대하는 것보다 훨씬 나아요.”
하긴, EFL컵의 맨시티는 정말 끔찍하게 강력하다. 지난 6시즌 중 5번 결승에 갔을 정도니까. 특히 결승전의 맨시티는 더 강해진다. 승률이 그냥··· 어휴.
그러고 보니 우리 선덜랜드의 마지막 EFL컵 결승 상대도 맨시티였다··· 결과는 뭐, 다들 알겠지. 우리는 한 번도 EFL컵을 갖지 못했으니까.
맨시티가 아니라 리버풀? 갑자기 해볼 만한 상대처럼 들린다. 기분 탓이겠지만.
브라이언도 마찬가지 반응이었다.
“브로, 긍정적으로 생각하자고. 첼시나 토트넘을 웸블리에서 상대했다고 상상해 봐. 얼마나 끔찍했겠어?”
런던도 워낙 대도시라 교통편이 썩 편리하다고는 말 못 하겠지만, 그래도 첼시나 토트넘은 우리와 비교하면 웸블리까지의 거리가 무척 가깝다.
반면 우리 팬들은 이번 결승전을 위해 대략 430km를 이동해야 한다. 지옥 같은 원정길이라는 문구는, 이번 결승에는 역으로 우리에게 적용될 표현이다.
“조금이라도 우리 홈 같은 분위기가 나면 좋을 텐데.”
그러자 스태프들이 차례로 눈을 빛낸다.
“맡겨두세요. CS팀에서는 이번에, 웸블리 근처의 숙소를 직접 이용해볼 생각이거든요. 직접 가보고 추천하는 런던 숙소 리스트!”
“괜찮네요. 기왕이면 협의도 하죠. 결승 티켓을 가진 우리 팬들에게 할인 혜택을 제공할 수 있는지요.”
내 지시를 메모하는 CS팀장 린다의 곁에서, 이번엔 시설관리팀장 조엘이 나섰다.
“이번에는 원정길에 오르는 팬들의 인원수가 극적으로 늘어날 예정이므로, 웸블리행 버스를 증편하여 차질없이 지원하겠습니다.”
“아주 좋습니다.”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는 나를 향해, 리지가 보고를 시작했다.
“웸블리에 대해서는 이미 꾸준히 모니터링해 왔어요. 훈련장의 15, 16, 17번 그라운드를 웸블리와 동일하게 세팅 끝냈고요.”
꼼꼼하고 빠른 일처리였다. 하긴, 웸블리는 적진이 아니니, 정찰 자체는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세 개나 필요해요?”
희주가 내 마음속의 의문을 대신 입에 올리자, 리지가 싱긋 웃었다.
“비 오는 날, 비 온 다음 날, 그리고 흐린 날에 맞추려고 그렇게 준비했어요.”
“맑은 날은 없어요?”
“런던이니까요.”
농담처럼 말하는 리지의 곁에서, 브라이언이 쓴웃음을 지었다.
“레이디, 사실 16번과 17번 세팅이면 런던의 맑은 날에 대응할 수 있긴 합니다.”
“이해했어요.”
고개를 끄덕인 희주는, 이윽고 무시무시한 소리를 입에 올렸다.
“오빠, 좋은 생각이 났어. 전투기 띄우자. 에어쇼를 하는 거지.”
전투기 에어쇼는 일단 FA에서 절대 허가를 안 내줄 거라고 생각하지만···.
자신의 의견에 한 치의 의문도 보이지 않는 희주를 흘끔거리며, 주위의 스태프들이 분주히 시선을 교환하는 모습이 보였다.
총대를 멘 사람은 리지였다.
“에어쇼는 조금···.”
“왜요? 우리 오빠 돈 많은데?
“웸블리 스타디움은 버킹엄 궁전과 너무 가깝거든요. 비행 허가가 날 것 같지 않네요.”
도로 기준 15km정도로, 직선거리는 더 짧다고 한다. 에어쇼에 나올 전투기들이면 웸블리 상공에서 버킹엄 궁전까지 눈 깜짝할 사이에 닿는 모양이다.
음, 좋은 명분이었어.
그 외에도 팬들에게 홍보 기사를 뿌리겠다거나, SNS를 통해 홍보하겠다는 의견이 잔뜩 쏟아졌고, 나는 대만족 상태가 되었다.
“여러분의 의견 고맙습니다.”
의욕적으로 의견을 내준 스태프들에게 감사한 다음, 슬쩍 물었다.
“그런데, 구단주로서는 전부터 궁금한 게 하나 있었습니다. 시즌권 구매자는 우리의 가장 소중한 팬 아닙니까? 우리 홈에서 하는 모든 경기에 와주는 분들이니까요.”
“그렇죠.”
반사적으로 대답하는 린다를 향해, 다시 확인했다.
“그리고 이번 결승전은 올 시즌, 우리의 가장 중요한 경기고요.”
“맞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의 가장 소중한 고객이 받는 혜택에, 올 시즌 가장 중요한 경기가 포함되지 않는 겁니까?”
내 말을 이해한 린다가 입을 쩍 벌리는 모습을 보고, 나는 슬쩍 미소를 지었다.
* * *
마일즈 우드는 고민하고 있었다.
여느 때의 그였다면, 주로 축구 관련된 고민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선덜랜드는 과연 EFL컵 결승전에 누구를 주전으로 낼지. 웸블리에서는 어느 숙소가 좋을지. 차편은 뭘 이용할지. 응원용 복장과 도구는 어떻게 할지.
하지만 놀랍게도, 마일즈의 고민은 조금 다른 쪽이었다.
‘수잔이 나를 피하는 것 같은데.’
시점은 아스널과의 EFL컵 경기 이후, 그러니 원인은 분명하다. 키스캠 사건 때문이겠지.
‘직장 동료 사이에 있을 수 없는 실례인 건 맞는데··· 화났다고 보기엔 정작 축구는 같이 보러 가잖아?’
답답해서 사연을 SNS에 슬쩍 올렸더니, 곧바로 답변이 달렸다.
- 그냥 직장 동료이자 축구 친구라고 선을 긋는 것 아닐까요?
- 키스? 그게 뭐 어쨌다고? 무슨 빅토리아 시대 사람임?
마일즈를 시무룩하게 만드는 수많은 답글 사이에서, 조금 다른 의견이 모습을 내밀었다. 예를 들면···.
- 혹시 여성분께 고백은 하셨나요? @Amy
닉네임이 에이미인 걸 보면 여자인 게 분명하다고 마일즈는 생각했다. 틀림없이 영양가 있는 답변을 받을 수 있을 것이었기에, 마일즈는 곧바로 답변을 달았다.
[아직입니다. 드라마틱한 타이밍에 하려고요.]
어쩐지 스마트폰 화면 너머로 한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물론 SNS에 그런 기능은 없지만.
- 여자분이 축구 팬이신 거죠? 그렇다면 웸블리에 오시는 게 어떨까요? 응원하는 팀이 우승하는 순간은 극적이잖아요. @Amy
확실히 그거 괜찮겠지 싶었다. 선덜랜드가 강호 리버풀을 꺾고 웸블리에서 우승한다면, 그 이상 극적인 순간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테니.
마일즈는 컴퓨터 앞에 앉아, 재빠른 손길로 티켓을 두 장 예매했다.
그때였다. 마일즈의 집에 고급스러운 검은 봉투가 도착한 것은.
[VIP 시즌권 보유자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EFL컵 결승 티켓을 동봉하오니, 팀의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에 함께해 주시기 바랍니다.]
* * *
5년 이상 시즌권 보유자, 일명 티타늄 시즌권 보유자 전원에게 결승전 티켓을 보냈더니 우리 홈페이지가 아주 뜨겁다 못해 터질 정도가 되었다.
- 뭘 이런 걸 다 보냄? 안 보내줘도 당연히 갈 건데.
- 결승은 웸블리니까, 구단에서도 티켓 사서 보내 주는 거지? 이럴 돈 모아서 내년에 선수나 좀 보강하지.
- 티켓 반납 어디로 하면 됨?
나는 곧바로 공식 입장을 발표했다.
[이번 티켓은 구단주 썬이 사비로 선물한 것으로, 팀의 재정과는 무관합니다. 안심하고 관람하세요.]
CS팀에서도 홍보 영상을 추가로 내보내며 응대했다.
[이번 기회에 소중한 분들과 함께 오시면 어떠세요? 웸블리에서 기다리겠습니다.]
그러자 티켓 판매에 속도가 붙었다. 계획대로였다.
시즌권 보유자, 특히 티타늄 시즌권을 가진 VIP 팬들 정도면 어차피 결승전은 무조건 직접 볼 사람들이다.
희주의 표현을 빌리자면, [공짜 티켓이 한 장 생기면, 사람 한 명 더 데려오려는 게 진짜 찐팬들의 발상] 이거든.
게다가 굿즈 매출도 늘었다. 요즘 돈 버는 법을 알아낸 아드리안의 계획대로였다.
[EFL컵 결승전을 응원하고 싶으시다고요? 그렇다면 73년 클래식 선덜랜드 레플리카는 어떠세요? FA컵 챔피언의 추억과 함께, 웸블리를 붉게 물들이세요!]
솔직히 처음엔 이게 무슨 상관이 있나 싶었다. FA컵과 EFL컵은 다른 대회니까. 하지만 놀랍게도 ‘클래식 레플리카’ 는 출시 이틀 만에 완판되었다.
어리둥절한 나를 찾아온 에이미가 낮게 웃었다.
“투자의 신도 예상 못 할 정도였나요?”
“잘 팔릴 거라곤 생각했습니다. 티켓 값이 굳은 대신, 그 돈으로 굿즈를 사는 팬들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완판될 줄은 몰랐습니다.”
솔직하게 대답하자, 에이미의 눈이 가늘어졌다. 원래 미인인 데다, 수시로 고객을 상대하는 일을 하는 에이미의 미소는 정말로 눈부실 정도였다.
“사람의 등을 떠밀어주는 건, 결국 명분이니까요. 저도 요즘 SNS에서 팬들의 등을 밀어드리는 역할을 하고 있답니다.”
하긴, 명분이 중요하긴 하다. 에이미가 어떻게 팬들의 등을 밀어주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서 말인데요. 구단주님, 요즘 SNS에 팬들의 목소리가 부쩍 늘어났어요. 알아두셔야 할 것 같아서···.”
에이미의 얼굴은 진지했고, 그래서 나도 무심코 긴장하고 말았다.
“뭡니까?”
“그게, EFL 컵 결승전 주전이 누군지를 놓고 말이 많아서요.”
이야기를 들은 순간 맥이 빠졌다. 스타팅이 누군지 따지는 건 축구팬들의 오랜 떡밥이자 즐거움이다.
한마디로 늘 있는 일이라는 뜻이다. 그런데도 에이미의 표정은 변함없이 진지했다.
그래서 나 또한 마음을 다잡았다.
에이미는 CS팀의 에이스로 통하고, 축구단 직원 생활도 몇 년쯤 했다. 업무 특성상 팬들의 반응에도 친숙하다. 늘 있는 이야기를 굳이 구단주에게 보고하진 않을 것이다.
“구단에서 신경쓸만한 정도의 여론입니까?”
“네, 골키퍼 때문에 말이 많아요. 알고는 계셔야 할 것 같아서···.”
에이미의 말에 나는 곧바로 깨달았다.
우리는 요즘 컵 대회에는 하퍼를, 리그에서는 페르난데스를 고정적으로 출전시키는 중이었다.
지금까지는 잡음이 없었다. 세컨 키퍼에게 컵 대회를 맡기는 일은 축구계에서는 관례와도 같은 일이었기에.
그런데 그 컵 대회에서 결승까지 올라가고 나니, 의외의 잡음이 생긴 것이다.
- 아무리 컵 대회는 세컨 키퍼 쓴다지만, 결승까지 세컨 키퍼 쓴다고? 진심임?
- 세컨 키퍼 쓰기엔, 선덜랜드에겐 너무 걸린 게 많은 대회잖아? 유로파 컨퍼런스 리그 출전권도 붙어 있고.
챔스 나가는 리버풀에게는 아무 관심도 의미도 없는 출전권이겠지만, 우리에겐 무척 솔깃한 상품이다.
게다가···.
- 하퍼 쓴다 치고, 선덜랜드가 우승했다 치면 트로피는 누가 들지?
원래 트로피를 들어올리는 역할은 주장의 것이며, 우리 팀에서는 페르난데스가 맡을 역할이다.
하지만 페르난데스는 올 시즌 EFL컵에 전혀 출전하지 않았다. 만일 결승전에서도 벤치에 앉는다면, 그가 트로피를 들어올리는 모습은 무척이나 어색할 것이다.
원래대로라면 그렇게까지 고민할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페르난데스가 빠지는 경기에서는 톰슨이 주장 완장을 차고 있으니, 트로피도 톰슨이 들면 그만이긴 하다.
문제는 페르난데스의 은퇴가 임박했다는 것이다.
예정된 은퇴를 미뤄 가며 하부리그에 와준 페르난데스의 헌신을 생각하면, 트로피를 멋지게 들어 올리는 역할은 그에게 맡기고 싶은 게 내 솔직한 심정이다.
그렇다고 컵 대회에 줄곧 출전해온 하퍼를 갑자기 뺄 수도 없고···.
“선수 선발은 감독님 권한이지만, 구단주님도 일단 상황을 알고 계셔야 할 것 같아서 말씀드리는 거예요.”
“고맙습니다.”
그녀의 말처럼, 선수 선발은 감독의 권한이다. 페르난데스를 기용하거나, 하퍼를 내거나, 로저스 감독은 팀이 이기기 위한 선택만 고민해주면 된다.
다만, 이번의 선발 명단은 사이드라인 밖에도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우리 팬들에게. 그리고 선수들에게.
그때부터는 내 영역이 될 것이기에, 나는 조용히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