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웸블리로 가는 길 (2)
“골키퍼 문제는 인터뷰 한 번 하면 어떨까? 감독님이 하시는 게 제일 좋겠지만, 정 급하면 브로가 해도 될 텐데···.”
“인터뷰? 무슨 인터뷰?”
“딱 한 줄이면 충분해. 우승에 실패하는 것보다, 약속을 어기는 게 훨씬 괴롭다고. 크··· 상황도 딱이잖아?”
한 가지 문제만 제외하면, 여러모로 상황에 어울리는 멘트이긴 하다. EFL컵 결승, 주전 대신 세컨 키퍼를 출전시킨 감독의 인터뷰였으니.
다만, 브라이언은 한 가지 문제를 간과하고 있다. 로저스 감독은 대답 대신 미소를 지어 보였고, 그래서 내가 대신 물었다.
“그거, 누가 한 말인지 알아?”
“글쎄··· 누구더라?”
고개를 갸웃거리는 브라이언의 옆에서 샐리가 싸늘한 목소리로 대신 답했다.
“페예그리니. 맨시티 감독 시절이죠.”
브라이언은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8년 전, 선덜랜드의 EFL컵 도전을 결승에서 좌절시킨 장본인이 바로 페예그리니가 이끌던 맨시티였으니.
비록 저 발언 자체는 다른 팀 상대할 때 나온 거지만, 우리 선덜랜드가 인용하긴 여러모로 좀 그런 멘트다.
침울해진 브라이언을 달래듯, 로저스 감독이 슬쩍 입을 열었다.
“하퍼도 페르난데스도 프로페셔널한 선수들이지. 적어도 누구를 쓰더라도 문제를 일으킬 것 같지는 않은데··· 벌써 고민할 필요가 있는 일인가? 결승이 한 달이나 남았는데?”
그러자 브라이언이 기운을 되찾았다.
“하긴, 그렇군요. 고민할 필요도 없겠죠. 하퍼의 선방 능력은 요즘 물이 올랐고, 페르난데스는 작년보다 조금 하락세니까요. 그냥 하던 대로 뽑으면 될 것 같습니다.”
샐리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래서 축알못은 안 된다니까요. 수비 조율이 넘사벽으로 차이가 나잖아요. 게다가 팀의 사기, 멘탈리티를 고려하면 답 나왔어요. 페르난데스에요.”
“뭐, 축알못?”
평소였으면 누가 축알못이냐고, 네가 축알못 아니냐며 발끈했을 브라이언이었지만, 지금은 그저 분한 듯 말꼬리를 흐리기만 했다.
샐리가 구단 레전드의 딸이라는 사실을 안 다음부터 조심하는 모양이다··· 샐리 본인부터 전혀 신경 안 쓰는데도 말이지.
축알못 운운을 빼더라도, 브라이언이 하려던 말은 대충 짐작이 간다. 나는 웃으며 끼어들었다.
“수비 조율이나 멘탈 관리는 꼭 골키퍼가 맡아야 할 역할은 아닙니다. 톰슨이나 다른 선수가 대체할 수 있는 요소지요. 하지만 선방만은 골키퍼 본연의 역할입니다.”
“네, 동기부여라면 감독님이 하실 수 있죠. 수비 조율은 톰슨이 대신할 수 있고요. 하지만 팀의 사기 측면에서는 불안감이 있는데요.”
“홈 팬들의 성원이 사라져서 그렇습니까?”
“그렇기도 하고··· 그날은 리버풀 팬이 더 많을 테니까···.”
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마 관중석에는 우리 유니폼이 더 많을 겁니다.”
“티켓이 매진되었다고는 들었어요. 하지만 클럽별로 배정되는 티켓은 정원의 80%까지죠. 20%는 중립 구역인데, 솔직히 우리가 리버풀만큼 인기 있는 팀은 아니잖아요?”
“그래서 준비 중입니다.”
빈말이 아니라, 정말로 계획이 있다. 일명 블랙캣츠 폭탄드롭 계획.
아, 그렇다고 진짜로 웸블리에 폭탄 던지고 온다는 뜻은 아니고, 우리 서포터들 오만 명쯤 밀어 넣을 생각이다.
웸블리 수용인원은 약 구만 명, 내 계획대로 진행되면 결승 당일엔 우리 팬들이 확실히 과반수를 넘길 것이다.
샐리는 곧바로 수긍했다.
“하긴, 구단주님이 하는 일이니까요. 그날은 우리 팬이 더 많겠죠.”
그러자 이번에는 브라이언이 쓴웃음을 지었다.
“사기 관리가 중요하다면서, 그렇게 대충 퉁치고 넘어가도 되는 거야?”
“구단주님이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는 일이면, 백 퍼센트 실현될 테니까 괜히 따져 봐야 시간 낭비잖아요? 전술 이야기나 해요.”
“하긴, 페르난데스와 하퍼는 선수로서의 장단점이 다르니 수비 전술도 맞춰서 짜야겠지.”
언제 으르렁거렸냐는 듯 전술보드를 꺼내며 머리를 맞대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로저스 감독이 슬쩍 물었다.
“그 전에··· 리그 준비부터 신경써야 하지 않나?”
브라이언과 샐리가 동시에 찔끔했다.
“EFL컵, 올 시즌 팀의 최우선 목표지. 하물며 결승인데 얼마나 중요하겠나. 우리가 컵 대회 트로피를 들어 올린 지도 벌써 50년이 되었고··· 그래도 말일세. 정도라는 게 있을 텐데.”
로저스 감독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브라이언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사실은 나도 살짝 기가 질린다. 이건, 우리가 유소년 시절 질리게 겪어본 교관님 모드다.
“결승까지는 시간이 꽤 남았지. 그래서 말인데··· 브라이언, 우리 웸블리 가기 전에 리그 몇 경기 하는지 혹시 알고 있나?”
“그게··· 네 경기 아니면 다섯 경기 같습니다.”
로저스 감독은 한숨을 내쉬었고, 평소였으면 한 마디 끼어들었을 샐리도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수그렸다.
“알아들었으면, 가서 반즐리 원정이나 준비하게.”
* * *
반즐리 원정은 솔직히 썩 훌륭하진 않았다. 선수들의 사기나 집중력은 나쁘지 않았지만, 전술적으로는 평소의 예리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원인은 분명하다.
챔피언십 팀 대부분을 전술적 수 싸움으로 압도해온 브라이언 - 샐리 콤비의 집중력이 가출했기 때문이다. 아마 웸블리에 가 있겠지.
옆에서 경기를 지켜보던 희주도 고개를 갸웃거리기 시작했다.
“웸블리에 영혼 보낸 거지?”
어, 의미는 알겠는데, 그래도 그 표현은 쓰지 마라.
아무튼, 우리 전술가들이 정신줄 놓은 사이, 반즐리는 예상보다 훨씬 매서운 공세를 펼쳤다.
그런데도 실점은 하지 않았다. 반즐리와 우리는 기본적으로 체급 차이가 나는 팀이기도 하고, EFL컵 결승행을 확정 지은 선수들의 사기가 워낙에 드높았기 때문에.
특히 수비진의 활약이 눈부셨다. 팀이 힘든 경기라면 당연한 그림이지만.
페르난데스의 호령이 경기장 곳곳에 울려 퍼졌다.
“멈추지 마! 고개 들고! 요니가 비었어!”
“올라가! 더 빨리! 가서 한 골 더 가져와!”
거의 90분 내내 멈추지 않고 선수들을 독려하는 리더십은 물론, 수비 조율도 완벽했다.
“차분하게, 머리로 걷어내··· 잘했어, 에디!”
페르난데스의 지시에 따라 공을 걷어낸 에디는, 이어진 칭찬에 조금 기쁜 표정을 지었다.
“오빠, 우리가 아는 그 에디··· 맞아?”
“맞는 거 같은데.”
천하의 에디가, 마치 칭찬을 조르는 강아지처럼 보이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당연하게도 그날의 MOM은 페르난데스였다. SNS에서도 페르난데스에 대한 칭찬이 쇄도했다.
- 오늘 페르난데스 진짜 쩔더라.
- 월클, 레전드란 이런 거지.
ㄴ 폼은 일시적이어도 클래스는 영원하다!
한편, 페르난데스가 맹활약을 펼치자 사소한 부작용도 생겼다.
- 아니, 이렇게 쩌는 키퍼를 놔두고 결승에서 하퍼 쓰겠다고? 제정신이냐?
ㄴ 아모른직다. 결승전 명단 아직 안 나왔음.
ㄴ 뭘 몰라, 축알못아. 상식적으로 페르난데스를 결승에 쓸 거 같으면 리그에서 하퍼를 내보내면서 로테이션시키는 게 정상 아니냐?
이런 식으로.
* * *
우리 코치진의 집중력은 다음 경기에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나마 샐리는 좀 나은 것 같았지만, 브라이언의 상태는 심각하다.
명백히 마음이 콩밭에 가 있다. 오죽하면 경기를 지켜보던 희주가 전화기를 꺼냈을 정도다.
“뭐 하냐?”
“웸블리 CS팀에 문의할까 싶어서. 분실물은 어디로 찾으러 가면 되냐고.”
시답잖은 농담인데도, 반박할 기분도 들지 않는다.
그날도 지지는 않았지만, 대신 다른 부작용이 생겼다. 팀이 고전할수록 주목받는 포지션 특성상, 페르난데스가 스포트라이트를 몰아받게 된 것이다.
화려한 선방과 안정적인 리더십으로 든든하게 골마우스를 지켜준 우리의 퍼스트 키퍼에게 팬들의 갈채가 쏟아졌다.
그런 만큼 EFL컵 결승전 선발 논란도 더욱 커졌다.
믹스드 존에 선 페르난데스에게, 기자들의 질문이 쇄도했다.
- 이제 곧 웸블리로 향하실 텐데, 그날 누가 골마우스에 서게 될 것인가 관심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페르난데스 선수로서도 욕심이 나는 자리일 텐데요.
“기본적으로 선수 출전은 감독님의 권한입니다. 다만··· 주장으로서 제 생각을 말씀드리자면.”
그렇게 운을 뗀 페르난데스는, 주위를 날카로운 눈으로 둘러보았다.
“지금까지 EFL컵에서 헌신하며, 팀을 결승으로 데려온 선수는 하퍼입니다. 퍼스트 키퍼라는 이유만으로 그의 자리를 가로채고 싶지는 않네요.”
흠잡을 데 없는 인터뷰였다. 이대로라면 기삿거리가 되지 않는다고 느꼈는지, 기자들의 질문이 좀 더 노골적으로 변했다.
- 보통 대회 트로피를 가장 먼저 드는 역할은 클럽 캡틴의 권한입니다. 그런데 페르난데스 선수는 이제 곧 계약이 종료되지 않습니까?
“아, 그런 의미였군요. 제가 주장답게 트로피를 들어 올릴 기회를 받아야 한다는 말씀이신 겁니까? 곧 은퇴할지도 모르니까?
- 그렇습니다. 그게 세계 축구계의 레전드였던 당신에 대한 존중이라고···.
“존중, 참 좋은 말이군요. 그러면 EFL컵 내내 골마우스를 지켜온 하퍼에 대한 존중은요?”
말문이 막힌 기자를 향해, 페르난데스가 날카로운 시선을 보냈다.
“EFL컵은 우리에게, 팬들에게 너무나 소중한 트로피입니다. 한번도 가져본 적 없으니까요. 선덜랜드의 모두는 그 트로피를 가져오려 최선을 다할 겁니다. 누가 트로피를 먼저 들어 올릴지는, 너무나 사소한 문제죠.”
- 사소한 문제라고요?
“네. 그보다는 차라리, 내일 아침에 뭘 먹을지 고민하는 게 건설적일 것 같군요. 저한테는 그렇습니다.”
물론 페르난데스는 아침 메뉴를 별로 고민하는 타입은 아니다. 어차피 닭가슴살 쉐이크를 먹을 테니까.
기껏해야 닭가슴살과 물의 양 정도를 고민하겠지.
선덜랜드 팬이라면 누구나 알아들을 것이다. 페르난데스에게 있어서 자신의 선발 여부는 딱 그 정도 고민거리라고.
페르난데스의 인터뷰에, 하퍼 역시 곧바로 화답했다.
“팀의 승리가 최우선입니다. 선덜랜드가 트로피를 들어 올리느냐 마느냐에 비하면, 그날 누가 골마우스에 서는지는 너무나 사소한 문제입니다.”
골키퍼들이 앞장서서 잡음을 제거해준 덕분에 팀을 둘러싼 주위의 분위기는 꽤 진정되었다.
그리고 나는, 마침내 브라이언을 구단주실로 호출했다.
“브라이언, 그렇게 집중 못 하겠으면 EFL컵 결승전 전날까지 분석실로 발령 내 줄 수도 있는데··· 어때?”
“브로, 지금 나보고 샐리 밑으로 들어가란 이야기야? 그 축알··· 아니, 레전드 따님. 음, 배울 게 있을지도 모르겠네.”
얼버무리는 브라이언을 향해, 일부러 미소로 응답했다.
“에이 설마, 내가 너를 샐리 밑으로 넣겠냐.”
그렇게 하면 혼자서 전술을 맡아야 하는 로저스 감독의 부담이 너무 커지잖아. 가뜩이나 요즘 전술 트렌드에서 꽤 동떨어진 분인데.
“분석실에 가 있는 동안엔, 샐리를 임시 코치로 쓸 생각이야.”
“뭐?”
상황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눈을 깜빡이는 브라이언을 향해, 친절하게 덧붙였다.
“어차피 지휘는 감독님이 하실 거고, 샐리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전술적 조언에 불과해. 누구한테 조언해도 큰 차이는 없을 것 같은데?”
그러자 브라이언이 한숨을 쉬었다.
“브로, 내가 그 정도로 심각해? 나보다 샐리를 코치로 쓰는 게 낫지 싶을 정도로?”
“응.”
내가 보기에, 순수하게 전술가로서의 역량만 따지면 샐리와 브라이언은 거의 대등한 수준이다. 판짜기는 샐리가 좀 더 낫고, 세부 디테일과 상황변화에 따른 대응은 브라이언이 우세하다.
선수단을 직접 통솔할 수 있는지의 여부까지 따지면 차이가 넘사벽으로 벌어지겠지만, 책상 앞에서 전술만 짜게 한다면 큰 차이는 없다.
“도대체 뭐가 문제야? 컵 대회 결승전 압박에 정신줄 놓기로 했어?”
추궁하자, 브라이언이 시선을 피하며 우물거렸다.
“페르난데스 때문에···.”
아니, 이건 또 뭔 소리야. 혹시 잘못 들었나 싶어서 돌아보니 희주도 기막히다는 표정을 짓고 있다.
“브라이언 씨는 줄곧 하퍼 선수를 추천했잖아요?”
“그게···.”
망설이던 브라이언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솔직히 페르난데스가 앞으로 몇 년 더 뛰어줄 거라면 아무 고민도 안 했을 거잖아. 그냥 하퍼 썼겠지.”
“그렇지.”
“그래서 그래. 페르난데스를 결승전에 내보내자고 하는 모습이 꼭, 박수쳐줄 테니까··· 무대 만들어줄 테니까 은퇴하라고 등 떠미는 거 같아서···.”
“······.”
“브로, 나는 기본적으로 축구밖에 모르는 인간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바보는 아니야.”
‘어? 아니었어요?’ 라는 표정을 짓는 희주를 잠시 옆으로 치워버린 다음, 브라이언에게 계속 말해보라는 시선을 던졌다.
“감독님이 슬슬 은퇴를 준비하시는 것도, 아마 그 후임은 나라는 것도 알아··· 페르난데스 이야기가 꼭, 감독님을 내 손으로 밀어내는 그런 거 같아서··· 자꾸 신경이 쓰여서.”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럴 수 있겠네.”
이해할 수 있다. 나에게 그런 것처럼, 로저스 감독은 브라이언에게도 은사다.
심지어 프로로 데뷔까지 시켜줬으니, 어쩌면 감사한 마음은 나보다도 브라이언이 훨씬 클지도 모른다.
이해할 수는 있다. 친구로서는.
마음을 추스르길 기다려 줄 수 있다. 투자의 신으로서는.
브라이언은 언젠가 리그에서 손꼽는 명장이 될 재목이고, 지금 그가 하는 고민은 전부 그의 경험치가 될 테니.
하지만, 당장 이번 주말에도 경기를 치러야 하는 선덜랜드 구단주로서는 조금 다른 대답을 해야만 한다.
“당분간 분석실에 가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