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자의 신이 키우는 축구단-93화 (93/422)

93화. 웸블리로 가는 길 (3)

브라이언은 분석실로 향했고, 그 빈자리는 임시로 샐리가 메우게 되었다.

“여러분. 코치님은 좀 편찮으셔서 휴가를 받으셨어요. 그동안 제가 여러분의 임시 코치예요!”

마치 무슨 임시 담임이라도 된 것 같은 말투로, 샐리는 자신을 소개했다.

오늘의 샐리는 단정하게 머리를 뒤로 모아 묶었고, 면접 날 입고 왔던 바지정장 차림을 했다. 자기 딴에는 감독들의 수트 차림을 재현하려던 거겠지만···.

음, 꼭 교사 코스프레 같네.

희주에게 빌려 온 도수 없는 안경도 한몫했다. 유능한 비서 코스프레할 때 희주가 종종 쓰던 안경이었는데, 원래 유능한 샐리의 경우, 안경까지 쓰니 지나치게 지적으로 보인다.

덕분에 나는 꼭 수업 참관 온 장학사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학생 역할은 선수들이겠지. 마침 스티븐이 손을 번쩍 들었다.

“코치님이 정말로 편찮으신 건가요? 코치님은 요즘 분석실에 계시던데···.”

샐리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분석실에 있는 사람은 코치님과 닮았지만 다른 사람이에요. 자꾸 물어보면 다쳐요?”

분위기가 점점 가벼워지는 느낌에, 로저스 감독이 한 마디를 보탰다.

“임시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코치는 코치다. 당분간 샐리의 지시를 충실히··· 왜 그러지 에디?”

“네, 혹시 지시를 따르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궁금한가?”

대답하면서 로저스 감독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옆에선 페르난데스가 나란히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팀의 감독과 주장의 명확한 의사 표명, 까불면 그대로 조져버리겠다는 무언의 선언에 에디는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샐리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오늘부터는 훈련 중 각종 통계와 데이터를 직접 보여주도록 하겠어요! 예전에는 코치진끼리만 공유하던 자료였는데, 역시 선수들도 알면 좋으니까요.”

샐리의 강력한 요구로, 훈련장 한쪽 구석엔 대형 스크린이 설치된 상태였다. 그녀가 태블릿을 톡톡 건드리자, 화면에 각종 차트와 데이터가 쏟아졌다.

“다음 상대팀은 브렌트포트. 데이터 분석에 강하기로 소문난 팀이죠. 세이버메트릭스 기법을 쓴다던데··· 감히 누구 상대로 분석 싸움을 거는 건지, 똑똑히 알려줄 생각이에요.”

환하게 웃는 샐리를 바라보며 나는 잠시 고민했다. 알려줘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었거든.

다 좋은데, 지금 우리 분석실을 지키는 사람은 브라이언이라고. 그러니 분석 싸움은 나중에 하자고.

“브렌트포트의 xGC와 xGB를 분석했어요. 이에 따르면 그들의 공격 전개 방식은···.”

결론부터 말하면, 내 기우였다. 샐리는 이미 분석 자료를 완벽하게 준비해온 상태였다.

선수들도 나름 호평이었다.

“체계적이라는 느낌이 드는데.”

“브라이언 코치님은 좀 감각파였지? 통계나 숫자 이야기는 잘 안 하셨잖아?”

하지만 호평은 길지 않았다. 샐리 교수님의 강의··· 아니, 샐리 코치의 설명이 길어질수록 선수들의 표정이 점점 당혹스러워졌다.

“미드필더에서 블록을 갖추고 끊어내는 거야. 그러면 우선 역습의 일곱가지 패턴부터 생각해야겠지? 크리그가 조금 아래로 내려온 다음에···.”

미드필더, 롱패스, 측면, 전진, 드리블 같은 단어가 어지럽게 허공을 떠다녔다. 그 개념들 속에서, 샐리는 마치 귀신이라도 들린 것처럼 팔을 여기저기 휘둘러댔다.

“잭과요니가미들라인을최대한묶어주고스티븐이안으로들어갈거야. 그러면하프스페이스에생기는경우의수는몇가지겠어? 총다섯가지겠지? 따라서···.”

샐리의 숨이 넘어가는 게 먼저일지, 선수단의 정신줄이 넘어가는 게 먼저일지 궁금해질 즈음, 유망주 해리슨이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잘 모르겠지만, 풀백과 윙어가 1:1을 하면 되는 거죠?”

“해리슨! 너는 아주 똑똑하구나!?”

‘그런데 왜 패스는 못 할까?’ 라고 묻는 듯한 표정으로, 샐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사이, 한쪽 구석에서는 주전 미드필더진 세 명의 토론이 한창이었다.

“말씀을 너무 어렵게 하심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슴다. 전혀 모르겠슴다.

“나는 중간까지는 알아듣겠는데··· 다음은 모르겠더라. 톰슨 씨는 어떠세요?”

“나도 반 정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미드필더진 사이에서, 잭이 깊은 한숨을 쉬었다.

“브라이언 코치님은 좀 더 알기 쉽게 설명해 주셨슴다. 코치님 몸이 많이 안 좋으심까?”

“아마, 머리가 복잡··· 많이 아플 거야.”

톰슨의 대답에, 요니가 쓴웃음을 지었다.

“하긴, 웸블리에서 리버풀을 잡아낼 생각을 하면, 머리가 아픈 것도 당연하겠네요.”

“그러니까 우리가 힘을 실어 주고, 부담을 덜어줘야 해. 안 그러면···.”

“앞으로도 계속 샐리··· 교수님의 양자역학 강의를 듣게 된다는 말씀이시죠?”

비록 샐리의 “전술 브리핑” 은 선수들에게는 일부만 전달된 것 같은 느낌이지만, 그래도 팀의 상황 정도는 확실히 전해진 것 같았다.

페르난데스와 톰슨을 중심으로 똘똘 뭉친 우리 선수들은, 브렌트포트 상대로 완벽한 경기력을 과시했다.

[선덜랜드 2 - 0 브렌트포트]

* * *

사람들의 예상처럼, 브라이언은 머리가 복잡했지만, 웸블리에서 리버풀을 어떻게 잡아내야 할지의 고민하지는 않았다.

“xGC··· 이건 도대체 어떻게 보는 거야?

선덜랜드 분석팀이, 자신이 분석관으로 머물던 시절과는 퍽 달라졌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지금은 자체 개발한 프로그램을 쓰고, 영상과 각종 통계 자료를 쓴다.

심지어 샐리는 상대 팀 선수들의 피로가 얼마나 쌓였는지까지 추정하고 있다.

‘영상의 움직임을 기준으로, 머신러닝을 어떻게 했다고 들었는데···.’

이미 분석관으로서는 샐리가 훨씬 낫다는 것쯤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영상에서 선수들의 버릇을 찾는 거라면야 선수 출신인 그가 낫겠지만, 팀 단위의 움직임이나 통계 분석에서는 샐리가 월등하다.

‘나는 쓸모가 있는 걸까.’

브라이언은 우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보조 스크린에서는 지난 경기 영상이 한창이었다.

[선덜랜드 3 - 1 블랙번]

브렌트포트에 이긴 선덜랜드는, 블랙번 상대로도 깔끔한 승리를 따냈다. 전술적으로도 나무랄 데 없었고, 선수단의 동기부여도 최상이었다. 최근 들어 가장 뛰어난 선덜랜드였다.

‘연전연승이네. 내가 없는데도 말이지.’

브라이언이 깊은 한숨을 내쉬는 사이, 스마트폰이 울렸다. 확인해 보니 톰슨의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퇴근하고 블랙캣츠로]

* * *

“훈련 마친 선수와 술 퍼먹는다는 소문이 돌면, 코치 생활하기 힘들어지는데.”

슬쩍 불평하는 브라이언을 향해, 톰슨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문했다.

“무슨 소리야. 너 지금은 분석관이잖아··· 아, 주문? 나는 마티니, 젓지 말고 흔들어서.”

“그럼 나도 마티니.”

잠시 후 마티니 두 잔이 두 사람의 앞에 놓였다. 같은 마티니인데도 색이 퍽 달랐다.

아마 섞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하며, 브라이언은 ‘마티니’ 라는 이름의 걸쭉한 녹색 액체를 들이켰다.

톰슨이 인상을 찌푸렸다.

“야, 굴 적당히 파고, 빨리 복귀해. 요즘 죽겠어.”

“왜, 엄청 깔끔하게 이겼더만.”

그러자 톰슨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동안 샐리 분석관과 대화하는 건 네 일이었지?”

“그랬지.”

“··· 너는 그 여자 말을 대체 어떻게 알아듣는 거냐?”

“응? 그야 뻔한 소리만 하니까. 못 알아들을 이유가 있나?”

“아, 맞다. 너도 전술 천재였지.”

쓴웃음을 지으며, 톰슨이 낮게 덧붙였다.

“우리 팀 차기 감독으로 낙점될 정도로.”

“톰슨!”

무심코 언성을 높인 브라이언을 향해, 톰슨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신인들, 혹은 어지간한 바보가 아니면 모를 리가 없잖아. 아마 캡틴도 알고 있을걸? 네가 우리 차기 감독이라는 것 정도는.”

“······.”

말문이 막힌 브라이언이 칵테일 잔을 홀짝거리는 사이, 톰슨의 이야기가 계속 이어졌다.

“감독님은 4년 계약을 하셨지. 리그 원에서 1년, 챔피언십에서 1년, 그러니 남은 2년은 프리미어리그에서 보내시게 될 거야. 순조롭게 올해 승격한다는 가정이지만.”

그렇게 운을 뗀 톰슨은, 브라이언의 기준에서는 참으로 무시무시한 말을 입에 담기 시작했다.

“감독님과 썬의 관계를 고려하면 경질은 없어. 그러니까 2년간 1부 리그에서 살아남는 역할까지가 감독님 역할인 거지. 안 그래?”

대답이 궁해진 브라이언에게, 톰슨이 결정타를 날렸다.

“팀을 챔스권, 혹은 그 위로 데려가는 건 네 역할이겠지. 그때쯤이면 넌 서른 넷이야. 대충 지금의 나겔스만 정도 나이니까, 그림도 딱 좋지? 유스 출신의 젊은 명장.”

“나는···!”

브라이언은 반박하려고 했지만, 쉽게 입이 열리지 않았다. 그 사이, 톰슨의 반론이 이어졌다.

“아니라고? 이봐, 썬이 하는 일이잖아. 걔가 아무 계획도 없이 4년 계약을 했을 거라고 생각해?”

하긴, 그 말대로다. 브라이언이 아는 이희성은 결코 무계획적이지 않다. 이희성이 유일하게 아무 계획 없이 충동적으로 벌인 일은, 구단 인수뿐이었다.

“그럼 감독님은···.”

“은퇴하시겠지. 새삼스럽게 왜 그래? 아마추어처럼.”

“아마추어?”

“표현이 좀 그러면, 유스 아카데미 안 나온 사람이라고 고쳐 줄까?”

브라이언은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톰슨의 말대로, 브라이언은 이미 경험해본 일이다.

유스 아카데미에서 머물던 수많은 유소년 중, 무사히 프로가 된 사람은 한 줌도 안 될 테니까.

톰슨과 브라이언은 유스 시절의 추억을 공유하고 있다. 비록 톰슨과는 팀이 달랐지만, 그래도 유소년 리그에서 몇 번쯤 마주친 사이.

그 시절 함께 뛰던 어린 유소년들이 어떤 식으로 떠나갔는지, 어떻게 자취를 감췄는지··· 브라이언과 톰슨은 이미 알고 있었다.

예를 들면, 무릎이 부서진 이희성처럼.

“브로···.”

무심코 이희성의 애칭을 부르자, 톰슨이 쓴웃음을 지었다.

“확실히 썬은 대단한 놈이지. 그래서 나도 군소리 없이 리그 원에서 1년 뛰었던 거야. 걔는 무릎이 깨져도 축구를 그만두지는 않았잖아?”

축구를 그만두지 않았다고? 무슨 소릴 하는 건가 싶어서 바라보자, 오히려 톰슨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썬이 지금 하는 일이 뭐지?”

“선덜랜드 구단주··· 그렇네. 여전히 축구인이네.”

“감독님도 아마 마찬가지가 아닐까? 모습은 달라지겠지만, 은퇴한다고 축구를 그만두진 않으실 거야. 휘슬이 세 번 울리기 전까지, 아무것도 포기하지 말라는 분이니까.”

브라이언이 아는 한, 로저스는 한 번 축구를 그만둔 적이 있다. 하지만 그때는 애제자의 무릎이 박살 난 충격 때문이었다.

이제는 다를 것이다. 지금의 로저스는 선덜랜드를 잘 키워낸 명장이고, 인생에는 원래 휘슬이 울리지 않는다.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는 브라이언을 향해, 톰슨이 빙긋 미소를 지었다.

“생각 정리에 도움이 좀 되었으면 좋겠는데.”

“큰 도움이 된 것 같아.”

“다행이네. 그러면 이거 통역 좀 해 줘.”

톰슨이 스마트폰을 내밀었다. 화면에는 훈련장에서, 마치 접신한 것처럼 속사포 랩을 쏟아내는 샐리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절대로 중원에서의 점유율을 내주면 안 된다는데.”

“··· 이게 그 소리야?”

“뭐, 대충 비슷해.”

상당한 요약과 축약이 필요했지만, 아무튼 그런 이야기였다. 브라이언이 아는 샐리는 시간의 유한성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타입, 크루이프이즘의 신봉자니까.

비록 브라이언과는 우선순위가 다르지만, 그렇다고 축구 이야기를 나누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브라이언은 천천히 전화기를 들었다.

“샐리. 미안하지만 분석실로 돌아와 줬으면 하는데.”

[그런가요? 이제 겨우 제 축구를 해보려나 싶었는데.]

“점유율 축구는 다음 기회에 해. 은사님을 위해 장식장에 트로피 하나 놔 드리고 싶어졌으니까, 코치 자리 반납하고.”

[코치직 반납은 어렵지 않지만, 장식장에 트로피요?]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같이 오래 일한 사이니 목소리만 들어도 전해지는 생각이 있기 마련이다. 샐리는 틀림없이, 새삼스럽게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고 묻고 있었다.

‘은퇴하더라도 관계가 끝나는 건 아니니까. 축구를 사랑하는 사람은, 축구를 계속할 수밖에 없으니까.’

브라이언이 대답을 입안으로 삼키는 사이, 샐리가 흔쾌히 대답했다.

[좋아요. 뭐, 선수들이 말귀를 못 알아들어서 답답하던 참이었어요. 그동안 코치님이 제일 축알못인줄 알았는데, 나가 보니 그렇지도 않더군요.]

“피차 많이 배워야겠지. 너나, 나나.”

* * *

브라이언은 코치 자리에 복귀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예상보다 조금 이른 복귀지만, 나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브라이언과는 나름 오래 알고 지낸 사이다. 그러니 말하지 않아도, 얼굴 표정만 보면 생각이 정리되었다는 것쯤은 충분히 알 수 있다.

선수단도 말은 안 하지만, 브라이언의 복귀를 반기는 느낌이다. 샐리의 특강을 듣지 않아도 된다는 것만으로도, 해리슨을 제외한 모든 선수들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아마도 그날부터였을 것이다.

선덜랜드가, EFL컵의 우승을 위해 전력으로 싸울 준비를 시작한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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