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갖지 못한 트로피 (1)
<절대 두렵지 않다. 나를 믿는 열 명의 '우리'가 있기 때문에. - 카카>
EFL컵 최종전, 선덜랜드 대 리버풀, 웸블리 스타디움.
선수 입장을 기다리면서 요니는 생각했다. 속에 꼭 뭔가 얹힌 것만 같다고.
증상을 보면 꼭 소화불량 같지만, 차분히 생각해보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런던에 온 이후에도, 요니는 줄곧 선덜랜드 스태프들이 준비한 음식만 입에 대고 있었으니.
꼼꼼하게도 잭의 집에서 공수해온 수제 컴버랜드 소시지 한 조각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그 외에는 전부 선수용으로 특별히 준비한, 소화 잘되는 음식들이었다.
‘식사 문제는 아닐 텐데.’
따라서, 어디까지나 심리적 문제라는 것 정도는 요니 자신도 이미 눈치챈 상태였다.
무리도 아니다. 이제 겨우 스물두 살 신인에게 컵 대회 결승전이 주는 무게감은 상당한 것이었고, 웸블리는 선덜랜드에게 특히 잔혹한 곳이었기에.
‘카카가 그랬었지? 절대 두렵지 않다. 왜냐면···.’
요니가 어릴 때 들은 이야기인데, 이상하게 뒷부분이 생각나지 않았다. 아마 처음 들었을 때는 공감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말을 한 사람은 세계 최강 브라질 대표팀의 주전이었으며, 밀란의 에이스이기도 했다. 챔스도 우승했고, 발롱도르도 들어 올렸다.
‘그 정도 테크닉에 그 정도 피지컬까지 가졌다면, 도대체 뭐가 두렵겠어.’
테크닉과 피지컬, 둘 다 요니가 갖지 못한 것들이었다. 요니의 개인기는 프로 기준으로 다소 투박한 편에 들고, 피지컬은 독일인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왜소하기에.
요니는 쓴웃음을 지으며 명치 위쪽을 문질렀다. 그러자 옆에서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요니 선수, 괜찮습니까?”
고개를 들자, 메디컬 팀의 포터 부팀장과 눈이 마주쳤다.
“안색이 좋지 못한 것 같군요. 심박도 조금 높아요.”
요니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긴장한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까··· 그러면 지압이라도 좀 해 드릴까요?”
“부탁드립니다.”
포터 부팀장의 손길은 무척 따스했고 또 부드러웠다. 덕분에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긴장은 별로 풀리지 않았지만.
옆에서 잭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하지만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심호흡이라도 해 봐.”
“하고 있어.”
별로 나아지지 않아서 문제지만. 그렇게 생각하며 요니는 쓴웃음을 지었다.
긴장은 선수 입장 순간까지 이어졌다. 몸과 마음을 짓누르는 극도의 긴장이 위를 쿡쿡 찌르는 것만 같아서, 요니는 살짝 입술을 물었다.
생전 처음 경험하는 웸블리의 선수용 통로를 지나, 그라운드에 첫발을 내밀 때까지.
순간, 마법처럼 상황이 바뀌었다.
발 아래 바스락대는 잔디의 촉감은, 지난 한달간 요니가 매일같이 밟던 연습용 그라운드의 감촉과 완벽히 똑같았다.
Wise man say, only fools rush in.
But I can’t help falling in love with you.
귓가에 들리는 함성이 친숙했다.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에서 듣던 것과 완벽하게 똑같은 목소리에, 요니는 무심코 고개를 들고 관중석을 두리번거리고 말았다.
Sunderland! Sunderland! Sunderland!
경기장을 가득 메운 붉은 응원단 사이에, 낯익은 얼굴들이 보였다.
‘파이 가게 아저씨는 원래 쉬는 날이고, 과일가게 아주머니는 장사 접고 오셨나 보네? 카페 누나도···.’
손끝의 떨림은 멈춘 뒤였고, 세차게 뛰는 심장의 두근거림조차 기분 좋게 느껴졌다. 몸 전체를 억누르던 긴장이, 가벼운 흥분으로 변해간다.
두렵지 않다고, 싸울 수 있다고.
순간 요니는 어릴 적 들은 명언의 뒷부분을 떠올렸다.
[절대 두렵지 않다. 나를 믿는 열 명의 ‘우리’가 있기 때문에.]
요니는 무심코 미소를 짓고 말았다.
‘아니잖아. 열 명이 아니었어.’
친숙한 함성, 오만 명 선덜랜드 팬들의 목소리, 웸블리에서도 한결같이 선수들을 뒷받침하는 프로페셔널한 스태프들.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같은 유니폼을 입은 열 명의 동료에 더해, 그를 믿는 수만 명의 ‘선덜랜드’ 가 함께 하기에.
Sunderland! Sunderland! Sunderland!
요니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휘슬을 묻어버릴 듯한 선덜랜드 팬들의 함성을 전부 들이마시려는 것처럼.
처음 경험하는 결승의 중압감도, 리버풀이라는 빅클럽의 이름값도, 이제 두렵지 않았다.
그래서 요니는, 킥오프와 동시에 전력으로 달려나갔다. 그의 매치업 상대를 향해.
하프라인 너머에서, 리버풀의 14번이 여유로운 미소와 함께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 * *
Sunderland! Sunderland! Sunderland!
경기장의 분위기는 완벽히 우리 쪽으로 넘어왔다. 팬들의 기세만 보면, 꼭 우리 홈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물론 정말로 우리 홈이었으면 좀 더 일방적인 응원을 퍼부어, 원정 팬들의 목소리를 완전히 묻어버렸을 것이다.
오늘은 그 정도는 아니었다. 웸블리는 엄연히 중립 경기장이고, 리버풀 팬들도 삼만 오천 명이나 와 있다. 그리고 사실 중립 팬들이 다 우리 쪽으로 넘어온 것도 아니다.
나는 맞은편의 플래카드를 지그시 노려보았다.
[웸블리만 오면 깨진다고? 선덜랜드 진짜 빅클럽이네!]
희주도 불만스럽게 입을 삐죽거렸다.
“저거 뉴캐슬 애들이지?”
“그렇지.”
선덜랜드 진짜 빅클럽 운운하는 문장은, 뉴캐슬 팬들의 단골 조롱 멘트니까.
“오빠, 리버풀하고 뉴캐슬 사이 엄청 좋은가 봐? 이럴 때 응원 와줄 정도면··· 하긴, 리버풀 레전드가 뉴캐슬 감독 맡고 그랬었지?”
그 리버풀 레전드가 혹시 수네즈 말하는 거라면, 뉴캐슬 감독하러 가서 암흑기만 잔뜩 만들고 온 것 같긴 한데.
“리버풀 엠버서더가 뉴캐슬에서 뛰기도 했고.”
그 엠버서더는 리버풀 팬에겐 보통 유다라고 불린다. 참고로 뉴캐슬 팬들도 학을 뗀다고 들었다.
“뉴캐슬의 차세대 주포가 거액에 리버풀로 이적하기도 했지? 그러네! 사이좋은 게 틀림없어.”
캐롤 이야기만 들으면 아직도 헨도는 잠이 안 온다던데··· 너어는 정말.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뭐, 뉴캐슬 애들은 우리가 오늘 우승하지만 않으면 만족할 거야.”
설령 오늘 우리 상대가 미들즈브러였어도, 뉴캐슬 팬들은 잔뜩 몰려왔을 거다. 보로 응원하려고. 어떻게 아냐고? 뻔하지 뭐, 나라도 똑같이 했을 테니까.
덕분에 중립 구역 곳곳에서 리버풀을 응원하는 팬들도 찾아볼 수 있었다. 뭐, 그래봤자 일부지만.
We are Sunderland. Say we are Sunderland.
경기장에 울리는 목소리는, 대부분 선덜랜드 응원이었다. 덕분에 선수들의 몸놀림도 무척 가벼웠다.
희주가 불쑥 중얼거렸다.
“다행이네. 오빠 엄청 걱정 했었잖아. 다들 제대로 못 뛸까 봐.”
결승전이 확정된 날부터, 나는 혹시라도 선수들이 긴장에 짓눌리지는 않을까 정말로 걱정했었다. 결승전이 주는 무게감, 그로 인한 긴장은 우리 선수들에게 훨씬 무겁게 작용할 테니까.
지금의 리버풀은 챔스와 리그 우승을 경험해본 세대가 선수단의 주축을 이루고 있다. 그러니 EFL 컵 결승 정도에 새삼스레 긴장할 그릇들은 아니었다.
우리는 다르다. EFL컵은 구단 역사상 한 번도 갖지 못한 트로피고, 1부 리그 우승이나 컵 대회 우승 기록은 최소한 50년은 거슬러 올라가야 찾을 수 있을 정도다.
톰슨과 페르난데스를 제외하면, 우리 선수 중 누구도 결승전에 와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어쩌면 양 팀 선수단의 전력 이상으로 큰 차이는, 선수들의 마음가짐일 거라고 생각했다.
절박하다는 점이나, 트로피를 원하는 동기부여라면 당연히 우리가 훨씬 우세하겠지만, 그런 만큼 반대급부로 극심한 긴장에 노출된다는 문제점이 있다.
그래서 결승전 준비에 정성을 쏟았다. 우리 선수들이 최대한 평소와 똑같은 환경에서 뛸 수 있도록.
숙소의 상태, 잔디의 느낌, 그리고 팬들의 목소리까지. 최대한, 웸블리를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와 똑같이 만들어주고 싶었다.
승리에 대한 열망이나, 트로피에 대한 갈증은 유지하기 바라지만, 그래도 오늘의 경기 자체는 평소와 똑같이 그냥 축구를 하고 돌아오길 원했다.
···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잡아먹힐 테니까.
그만큼, 오늘 우리가 상대하는 팀은 강력한 적수였다.
나는 차분히 경기장을, 사이드라인 안쪽을 내려다보았다. 우리 선수들이 맞서는 상대, 챔스와 리그를 차례로 들어 올렸던 팀을.
그리고 그들의 캡틴을.
한때 선덜랜드의 10번이던 남자가, 지금은 리버풀의 14번 유니폼을 걸친 채 우릴 막아서고 있었다.
[썬, 들어가! 무조건 패스 넣어줄 테니까!]
유소년 시절, 수도 없이 지켜봐 온 기억과 똑같은 모습으로 피치 위를 누비는 옛 동료, 헨도의 모습을 본 순간 가슴 한 구석이 시큰거렸다.
그래서, 두 손 모아 외쳤다.
I know I am. I’m sure I am.
나는 선덜랜드의 구단주다. 그리고 저 아래 있는 남자는 리버풀의 주장이다.
경기 종료를 알리는 휘슬이 울릴 때까지, 사이드라인을 빠져나오기 전까지, 우정이나 옛 추억 같은 감정은 잠시 접어두어야 한다.
I’m Sunderland ’til I die.
그래서 외쳤다. 목이 터지도록.
* * *
웸블리를 가득 메운 선덜랜드 팬들의 챈트는, 헨도에게도 무척 친숙한 것이었다. 그 또한 유소년 시절 수도 없이 들어왔던 외침이기에.
I know I am. I’m sure I am.
무심코 그 다음을 따라해 버릴 것 같아서, 헨도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이제 선덜랜드가 아니다. 리버풀의 캡틴이다.
그렇지만 축구선수로서의 헨도를 구성하는 요소의 제일 아래에는, 틀림없이 선덜랜드의 흔적이 묻어 있었다.
[고개를 떨어뜨리지 마라. 휘슬이 세 번 울릴 때까지 절대로 포기하지 마라.]
헨도는 무심코, 테크니컬 에어리어에 서서, 선수들을 독려하는 로저스 감독의 모습을 곁눈질했다. 유소년 시절, 자신을 프로로 키워준 은사의 모습을.
그리고 헨도의 눈은, 은사의 곁에서 유스 시절 동료, 브라이언의 모습 또한 찾아냈다.
‘브라이언, 그리고 썬···.’
줄곧 함께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유스 시절의 추억이 스멀거렸다. 함께 선덜랜드를 우승시키자고 외치던 순간들이.
그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썬도, 브라이언도 먼저 사이드라인 밖으로 나가 버렸다. 한 명은 끝내 1군 주전에 들지 못했고, 다른 한 명은 선수로조차 남지 못했다.
아직도 무릎을 감싼 채 잔디 위를 구르던 친구의 모습이, 헨도의 기억에 선하다.
홀로 남은 헨도는, 리버풀의 이적 제의를 도저히 거부하지 못했다. 당시의 선덜랜드는 명백히 가라앉는 중이었고, 함께 뛰기로 약속한 친구들은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기에.
그래서 더욱 감회가 새롭다고, 헨도는 생각했다.
‘썬, 너도 보고 있지? 웸블리 어딘가에 있는 거지?’
이희성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헨도는 확신했다. 구단주가 된 이래, 이희성은 한 번도 선덜랜드 경기에 불참한 적이 없다.
[썬, 들어가! 무조건 패스 넣어줄 테니까!]
“잭! 파고들어! 타이밍은 내가 맞춰줄 테니까!”
선덜랜드가 자랑하는 JJ 듀오, 잭과 요니의 모습이 예전의 자신들과 자꾸만 겹쳐 보였다.
어쩌면 포지션 때문일까? 헨도는 그렇게 추측했다.
요니는 오늘 헨도의 매치업 상대로 뛴다. 그리고 잭은 측면으로 자리를 옮겼다. 레프트 윙포워드. 유소년 시절에는 주로 이희성이 뛰던 포지션이다.
잭이 측면으로 향한 이유는, 리버풀의 라이트백 아놀드를 견제하기 위한 목적일 것이다. 요즘 리버풀의 공격은 양쪽 풀백 주도로 이루어지고, 따라서 아놀드는 상대 진영 깊숙한 곳까지 종종 올라간다.
‘아놀드가 올라가면, 가차 없이 뒷공간을 파버리겠다는 거지, 브라이언?’
예전부터 브라이언은 그런 식의 수 싸움에 능숙한 편이었음을, 헨도는 잘 알고 있었다.
잠시 후, 잭이 예상대로 아놀드가 올라간 빈자리를 파고들었다. 헨도는 곧바로 속력을 높여 잭을 추격했고, 과감한 태클을 시도했다.
비록 공이 터치라인 밖으로 나가기는 했지만, 흠잡을 데 없는 호수비였다. 파울은 선언되지 않았다.
잔디 위를 구르는 선덜랜드의 유니폼을 얼마간 물끄러미 바라보던 헨도가, 잭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무릎 조심하고.”
“지금 시비 거시는 검까? 아니면 협박?”
“아니, 사소한 조언인데.”
표정이 험악해진 잭이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헨도는 손을 놓지 않았다.
“혼자 사이드라인 밖으로 나가버리지는 마. 떠나는 사람도 편하진 않겠지만, 남겨지는 사람은 생각보다 훨씬 외롭거든.”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헨도는 몸을 돌려 자기 자리로 향했다.
같은 선덜랜드 유소년 출신으로서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충고였다. 이제, 휘슬이 울리기 전까지 그는 철저히 리버풀만을 위해 뛸 것이다.
Walk on, walk on with hope in your heart.
웸블리를 가득 메운 선덜랜드의 응원 속에서, 리버풀 팬 특유의 목소리를 잡아낸 헨도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옛 친구들, 은사, 친정팀까지 모두 적으로 돌리게 되었지만, 그래도 외롭다는 생각만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이렇게라도 다시 만날 수 있어서 기뻤다.
두렵지도 않았다. 지금의 그는 결코, 혼자 걷지 않을 것이기에.
You'll never walk alone.
리버풀의 상징과도 같은 문구가 웸블리에 울려 퍼졌고, 선덜랜드 팬들 역시 지체없이 자신들의 가장 유명한 구호를 외쳤다.
Sunderland 'til I die.
영국 축구의 성지 웸블리는 두 팀 팬들의 함성으로 가득했고, 그 열기 속에서 무관의 도전자와 대회 최다 우승팀은 서로에게 상처조차 내지 못한 채 치열하게 힘을 겨뤘다.
팽팽하던 경기의 균형이 처음으로 무너진 것은, 전반 30분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