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갖지 못한 트로피 (2)
두 팀이 30분간 서로 치열하게 맞설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전술의 힘이었다.
리버풀이 자랑하는 리그 최고의 풀백 듀오, 로버트슨과 아놀드를 견제하기 위해 우리는 잭과 스티븐을 좌우 윙포워드로 기용했다.
주로 디펜시브 윙어로 출전하는 스티븐은 물론, 오늘은 잭 역시 상대 풀백의 견제 역할을 맡았다.
견제 방식은 크게 두 가지였다. 기본적으로는 무언의 위협을 가했는데, 한마디로 리버풀이 풀백을 전진시킬 때마다 우리는 그 뒷공간을 털겠다는 것이었다.
그에 더해, 잭과 스티븐은 상대 풀백이 패스를 받지 못하도록 압박하고 있다.
잭도, 스티븐도 원래는 수비적인 포지션 출신. 윙포워드로 쓰기에는 지나치게 수비력이 좋을 정도다. 덕분에 리버풀 특유의 측면 공격은 그 맛을 잃어버렸다.
이렇게만 보면 브라이언의 전술적 승리라고 할 수 있겠지만···.
“와, 쟤는 공격수야, 아니면 수비수야!? 진짜 짜증나네!”
··· 문제는 우리의 공격 기점, 톰슨도 완전히 묶였다는 것이다.
희주의 짜증처럼 리버풀의 9번, 피르미누가 톰슨을 압박하고 있었다. 덕분에 우리 역시 딱히 반격다운 반격을 하지는 못한 상태였다.
매번 상대의 압박에 시달리던 톰슨의 패스에는 날카로운 맛이 없었고, 마침내 보다 못한 희주가 한탄할 정도였다.
“오빠, 혹시 톰슨 선수 컨디션 안 좋아?”
“그럴 리가 있겠냐.”
선수단 컨디션 관리에는 만전을 기하고 있다. 코칭스태프와 메디컬 팀, 피지컬 트레이너들까지 붙어서 세심하게 챙겼다.
특히 무릎이 안 좋은 톰슨은 우리 선수단에서도 가장 각별한 관리를 받는다.
선수들의 육체적인 컨디션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그리고 톰슨 정도의 베테랑이 새삼 결승이라고 긴장했을 리도 없으니, 종합적으로 톰슨에겐 아무 문제가 없다.
“긴장했다거나···.”
“다른 선수면 몰라도, 톰슨은 그럴 리 없지. 쟤는 챔스 결승에 나가봤던 선수거든.”
톰슨은 챔스 트로피를 들어 본 선수고, 심지어 그는 챔스 결승전을 상대 뮌헨의 홈에서 치렀다. 그런 진귀한 경험을 해본 선수가, 새삼 웸블리에서 얼었다면 그게 더 신기할 것이다.
“그럼 왜 한 명에게 쩔쩔매는 거야? 그것도 공격수한테.”
나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만큼 상대가 강한 거야.”
희주가 기억하는 톰슨은, 무쌍을 찍던 플레이메이커다. 리그 원이나 챔피언십에서는 톰슨 상대로 압박을 성공시키는 팀은 거의 없었고, 1부 리그의 노리치조차 톰슨을 잡기 위해선 조직적인 압박을 시도해야 했다.
하지만, 오늘 상대는 리버풀. 만만하지 않은 상대다.
“그 대신, 오늘은 피르미누를 톰슨 곁에 묶어두는 것으로 만족해야겠지. 나쁘지 않은 거래야.”
“그러면 찬스는 누가 만들어?”
“그야, 정해져 있지.”
나는 경기장을 내려다보았다. 리버풀의 주장을 상대로, 한 걸음도 물러나지 않는 우리의 19번을.
“해줄 거야.”
현시점, 선수로서의 요니는 분명히 헨도에게 미치지 못한다. 경험은 물론, 관록도 부족하다.
어쩌면 재능도 미치지 못할지도 모른다. 내 눈에 보이는 숫자로 따지면, 헨도의 가치는 요니의 두 배를 넘는다.
그래도 나는, 요니를 믿는다.
경기장을 메운 우리 팬들의 목소리 틈새로, 이따금 새어 나오는 리버풀 팬들의 노래처럼.
You'll never walk alone.
요니는 절대, 혼자가 아니니까.
* * *
“혹시 네 친구, 안쪽으로 불러들일 생각은 없어? 너 혼자선 버거워 보이는데.”
“거, 더럽게 말 많네.”
입으로는 바쁘게 신경전을 주고받으면서도, 요니의 발걸음은 느긋했다.
공격 상황에서, 가속은 언제나 한순간에 끝나야 한다. 순간적인 질주로 수비를 따돌려야지, 하루종일 뛰어다녀도 아무 소용이 없다.
게다가, 전술적인 이유도 있었다.
‘누굴 바보로 알아? 잭을 안으로 데려오면, 좋다고 풀백 올릴 게 뻔한데.’
리버풀의 좌우 풀백을 견제하기 위해서라도, 잭은 측면에 남아 있어야 했다.
그리고 톰슨 또한, 평소보다 좀 더 아래로 내려가 있어야 했다. 그래야 리버풀의 쓰리톱이 선덜랜드 포백라인을 물어뜯지 못하게 견제할 수 있을 테니.
따라서 오늘 선덜랜드의 전술은, 전적으로 요니가 헨도를 억누를 수 있다는 가정 아래 준비된 것이었다.
불가능은 아니라고, 요니는 그렇게 믿었다.
‘팀이 힘들 때 빅클럽으로 냉큼 도망가버린 배신자에게, 내가 질 것 같아?’
요니는 희미한 직감과, 직감을 뒷받침하는 근거들에 정신을 집중했다. 함성, 호흡 소리, 그리고 공 걷어차는 소리··· 뒤를 돌아보지 않았는데도 어쩐지 상황을 알 것 같다.
요니는 경기장 오른쪽을 향해 달려 나갔다. 그렇다고 직선으로 달린 것은 아니었다. 그의 움직임은 마치 커브를 그리듯 완만했다.
헨도가 곧바로 요니를 추격했다.
“좋은 움직임이야. 오프사이드를 피하려는 거지? 덤으로 주위도 한번 둘러보고··· 확실히 듣던 대로 영리하네. 브라이언이 키워서 그런가?”
“선덜랜드가 키운 건데.”
쏘아붙이듯 대답하며, 요니는 아주 살짝 자기 진영을 확인했다. 톰슨이 피르미누의 마크를 피해 공을 뒤로 넘기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톰슨의 뒤, 그곳에 있는 선덜랜드 선수는 틀림없이 에디다.
요니는 곧바로 가속했다. 등 뒤에서 뻥- 하고, 공을 길게 걷어차는 소리가 들렸다.
에디의 패스가 언제나처럼 오른쪽으로 향했다. 그 궤적의 끝에서 스티븐은 자신을 마크하는 리버풀의 로버트슨을 완전히 힘으로 제압했고, 상대를 등진 채 가슴으로 공을 받아냈다.
투박한 트래핑, 그렇게 흘러나온 공에 가장 먼저 도착한 선수는 언제나처럼 요니였다.
하지만 요니는, 공을 확보하지는 못했다.
“너는 아주 영리해. 덕분에 패스가 어디로 갈지 고민할 필요가 없었어··· 네가 있는 위치가 항상 정답이니까.”
어깨에 거친 충격이 가해져, 요니는 맥없이 비틀거리며 옆으로 밀려났다. 저항은 불가능했다. 헨도와 요니의 체격 차이는 상당한 편이었기에.
공을 따낸 헨도가 곧바로 역습을 주도했다. 헨도가 공을 반대쪽 측면으로 길게 보내자, 어느새 전진한 아놀드가 패스를 넘겨받았다. 리버풀 특유의 측면 전환, 그리고 빠른 속공이었다.
공격을 위해 무게중심을 앞쪽으로 옮겨 두었던 선덜랜드의 수비진은 리버풀의 역습에 대응하지 못했다. 전반 30분, 마침내 선덜랜드의 골네트가 흔들리고 말았다.
“어때? 지금이라도 친구 부르는 게 낫지 않겠어?”
요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어금니를 꽉 악문 채 스코어보드를 노려보았을 뿐이다.
[선덜랜드 0 - 1 리버풀]
득점 때문에, 기세를 탄 리버풀 팬들의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Walk on, walk on with hope in your heart.
당장에라도 귀를 틀어막고 싶은 심정이 들었지만, 요니는 그저 어금니에 힘을 주며 버텨냈다. 이 타이밍에 귀를 막는 제스쳐는, 상대팀 팬들을 더 열광시킬 뿐이기에.
You'll never···.
하지만, 리버풀 팬들의 목소리는 요니의 귀에 닿지 않았다. 웸블리가 더 큰 소리로 뒤덮였기 때문이었다.
Sunderland! Sunderland! Sunderland!
득점을 했을 때처럼 열광적인 함성은 아니었다.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에서 늘 듣던 것처럼, 심장을 날뛰게 만드는 종류도 아니었다.
그가 늘 듣던 함성보다 조금은 부드러운 외침. 하지만 그것은, 틀림없이 요니가 시티 오브 선덜랜드에서 매일 듣던 목소리였다.
괜찮다고. 기운 내라고. 아직 경기가 60분이나 남아 있다고 달래는 듯한 그 목소리에···.
요니는 고개를 들었다.
* * *
수잔 베일리는 귀를 의심했다.
“아니, 거기서··· 어휴!”
실점의 빌미가 된 요니의 턴오버 순간, 틀림없이 마일즈는 그렇게 탄식했다.
‘가만, 정말 팀장님 맞아?’
얼굴은 늘 보던 마일즈의 얼굴이고, 축구 보는 안목이 있다는 점에서도 마일즈 본인이 맞는 것 같긴 하다.
하지만 수잔이 아는 마일즈는, 이럴 때일수록 선수를 응원하고 격려하는 사람이다.
굳이 축구장까지 오는 이유는 선수들과 함께 싸우기 위해서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결코 탄식부터 내뱉는 사람이 아닌 것이다.
“평소보다··· 더 많이 아쉬워하시네요?”
“아, 미안.”
슬쩍 물어보자, 마일즈가 눈에 띄게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게··· 혹시라도 우리가 우승하면··· 그러니까···.”
“돈이라도 거셨나요?”
“도박은 절대 안 하지만··· 조금 다른 걸 걸었어.”
“그러시군요.”
담담하게 대답하면서, 수잔은 마일즈를 흘끗 바라보았다. 그러고보니 마일즈는 아까부터 바지 주머니 쪽을 자꾸 확인하는 중이었다.
비록 수잔에게 투시력은 없었지만, 그래도 주머니 속의 내용물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옷 위로 드러난 형태나 크기를 보면, 아마 반지일 것이다.
마일즈가 머뭇거렸다.
“선덜랜드가 우승하면··· 그러면···.”
“네.”
수잔은 마일즈에게 환한 미소를 보냈다.
“이번에 꼭 우승하면 좋겠네요.”
희미한 기대를 접어둔 채, 그녀는 경기장 위로 시선을 보냈다. 선덜랜드가 결승에 온 건 8년 만의 일이라고 들었다. 그러니 혹시라도 또 8년이 걸린다면···.
If I can’t help falling in love with you.
‘아니, 그렇게 두지 않으려고 여기까지 찾아온 거잖아? 끝까지 선수들과 같이 싸우려고.’
수잔은 두 손을 입가에 모았다. 그리고 외쳤다.
Sunderland! Sunderland! Sunderland!
* * *
한 골을 빼앗긴 이후, 우리는 곧바로 더 거센 공세를 펼치며 응수했다.
톰슨은 하프라인을 완전히 넘었고, 에디를 위시한 포백라인도 거의 하프라인 부근까지 올라왔다. 덕분에 리버풀의 진영 역시 뒤로 한껏 물러난 상태가 되었다.
그렇게 우리는 일방적 공세를 퍼부었지만, 결실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잭은 여전히 좌측에, 스티븐은 우측에 흩어진 채 리버풀 풀백을 견제했고, 톰슨은 우리 포백라인을 지켜내는 역할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바이털 에어리어 부근에서 결정적인 찬스를 만드는 역할은, 요니의 몫이었다.
그리고 요니를 가로막은 상대는 변함없이 헨도였다.
희주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 사람, 오빠 친구라고 했었지? 정말···.”
“그러게. 적으로 상대해보니 정말··· 싫다.”
기량도 그렇지만, 가장 싫은 건 목소리다.
평소엔 조근조근 얌전한 목소리로 말하는 헨도는, 사이드라인 안에서는 볼륨이 평소의 두 배쯤 높아진다. 그렇게 헨도는 쉼 없이 자기편을 독려하는 중이었다.
“바비! 괜찮아! 5번하고 6번 사이만 끊어!”
“로보! 걷어내··· 잘했어!”
옛 친구에게서, 빅클럽의 주장에 어울리는 품격이 느껴졌다. 오늘의 우리가 갖지 못한 요소다. 물론 우리 선덜랜드에도 페르난데스라는 레전드가 있지만, 오늘은 하퍼가 선발이다.
그래서일까.
헨도의 지휘를 받는 리버풀의 움직임은 가벼웠고, 우리는 쉽게 기회를 만들지 못한 채 시간을 계속 보내야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경기는 전반전 43분으로 향했다.
요니가 또다시 느닷없이 측면으로 빠져나갔고, 그에 맞춰 에디가 완벽한 타이밍으로 롱패스를 보냈다.
이번에도 오른쪽 측면이었다.
요니의 곁에는 헨도가 바짝 붙어 있었다.
“이봐, 뚝심과 자포자기는 조금 다른 건데.”
“나도 알아.”
I know I am. I’m sure I am.
웸블리를 가득 메운 선덜랜드 팬들의 함성과 함께, 요니는 더욱 빠르게 가속했다. 아예 포백라인 뒤를 파고들려는 것처럼. 얼핏 보기엔 완벽한 라인 브레이킹이었다.
Sunderland 'til I die. I'm Sunderland 'til I die.
하지만 우리는 안다. 에디의 롱패스가 향하는 목적지는 수비 뒷공간이 아니라, 스티븐이다. 애초에 라인을 내리고 물러난 리버풀 진영엔, 그렇게 넓은 뒷공간도 없었다.
그런데도 태연하게 라인 브레이킹을 시도하는 요니를, 헨도가 잠시 아연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래도 헨도는 이내, 당황하지 않고 요니를 계속 추격했다.
“뚝심과 자포자기는 다른 거라면서?”
“널 놓치는 것보단 낫지. 너 같은 선수는 내버려 두면 어떻게든 공간을 만드니까.”
마침 스크린이 요니와 헨도를 비췄다. 덕분에 나는 두 사람의 표정까지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순간, 요니는 틀림없이 웃고 있었다.
“스티비! 머리!”
요니의 목소리는 헨도처럼 크지는 않았다. 경기 내내 자기 선수들을 독려하는 그런 외침도 아니었다.
그저 단 한 순간, 필요한 정보를 전달했을 뿐이다.
다음 순간 스티븐이 공을 가슴 대신 머리로 받아냈다. 마치 공을 걷어내는 수비수처럼. 그래서 공은 평소보다 훨씬 길게 흘러나왔다.
그렇게 흘러나온 공은, 선덜랜드 유니폼을 향해 굴렀다. 등번호 6, 톰슨이었다.
“톰슨!?”
“못 만난 사이에, 기억력이 나빠졌구나··· 헨도. 여긴 내 사정권인데.”
날갯짓처럼 휘두르는 두 팔. 기세와 체중을 가득 실은 통렬한 킥. 특유의 다이나믹한 슈팅을 선보인 톰슨은 그대로 관중석 쪽을 향해 달렸다. 두 팔을 벌린 채.
잠시 후, 톰슨의 발끝을 떠난 공이 포물선을 그리며 리버풀의 골네트를 흔들었다.
[선덜랜드 1 - 1 리버풀]
Sunderland 'til I die.
웸블리에 가득 울리는 함성, 그 열기는 틀림없이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를 메우던 것과 같은 종류여서.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