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갖지 못한 트로피 (3)
후반, 리버풀은 큰 변화 없이 피치에 돌아왔다. 반면 우리는 변화를 주었다. 왼쪽 풀백을 교체한 것이다.
오늘 경기에서, 우리는 양쪽 윙어 잭과 스티븐을 상대적으로 높은 위치에 고정했다. 상대 풀백을 견제하려는 목적이었다.
덕분에 전반 내내 리버풀의 공세를 둔화시키는 성과를 거두었지만, 측면에서 우리 풀백들이 커버해야 할 범위가 늘어났다.
이래서 브라이언이 매일 풀백 노래를 부르는 거지··· 다음 시즌엔 꼭 사다 줄게.
옆에서 희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괜찮아? 체력 이슈라기엔 조금 이른 타이밍 같은데.”
최근 들어 경기 보는 눈이 부쩍 좋아진 듯한 여동생을 위해, 짧게 대답했다.
“왜냐면··· 후반전이 승부처라고 예상했기 때문이지.”
리버풀은 틀림없이 하프타임 이후에 본격적인 승부를 걸어올 것이다. 경기를 앞두고 샐리는 그렇게 예측했었다.
[리버풀 감독은 게겐프레싱을 트레이드 마크로 삼는 사람이죠. 선수단의 체력 문제로 요즘은 압박 강도를 유연하게 조정하는 모양이지만··· 결승전이니까 한번쯤은 몰아칠 거에요.]
[예상 타이밍은?]
[후반이겠죠? 그래야 우리가 쉽게 대응하지 못할 테니까요. 그게 작전타임이 따로 없는 축구의 묘미 아니겠어요?]
샐리의 예상에, 브라이언이 고개를 끄덕이던 모습이 아직도 선하다.
[하긴, 그 팀은 뒷심이 있는 팀이지. 챔스에서 드라마틱한 역전도 여러번 했었고.]
[이스탄불 이야기라면, 그때 선수들 죄다 은퇴했을 텐데요. 코치님, 대체 언제적 이야기를 하고 계세요?]
[축구는 멘탈리티의 스포츠니까. 우리는 뒷심이 있는 팀이고, 실적도 있다. 그렇게 믿는 것만으로도 선수단의 집중력이 달라질 수 있어.]
브라이언의 진지한 답변에, 샐리가 입을 삐죽거렸다.
[그런 식으로 따지면 우리는 웸블리에서 늘 지는 팀 컬러가···.]
[샐리!]
[그런 건 죄다 결과론이에요. 리버풀은 극적인 역전승이 많다는 이미지이지만, 극적인 실책 장면도 많잖아요?]
하긴, 골키퍼가 상대 공격수에게 공을 던져주거나, 홀딩 미드필더가 갑자기 미끄러지는 경우도 있었지.
아, 리버풀은 무려 비치볼 실점도 당해봤던 팀이다··· 우리 선덜랜드 상대로.
[결승이나 4강에 많이 나오다 보면, 극적인 장면 하나씩은 누구나 만들기 마련이에요. 복권 당첨 1등 명당 같은 것처럼요.]
샐리는 그런 징크스가 전부 미신이라고 단언했다.
[웸블리에서 늘 지기만 하는 선덜랜드, 뒷심이 강한 리버풀, 그런 징크스들 전부 깨버리자고요. 그러려고 웸블리까지 온 거잖아요?]
미소짓는 샐리의 모습을 떠올리며, 나는 무심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래, 그러려고 왔지.”
수만 명의 관중을 웸블리에 데려와 관중석을 온통 선덜랜드의 붉은 스트라이프로 물들인 이유는, 이기기 위해서였다.
선수단에게 최고의 스태프, 최고의 시설과 환경을 제공하기 위해 노력했던 이유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오늘 이기기 위해서 웸블리에 왔다.
이기기 위해서 브라이언과 샐리가 매일같이 머리를 맞대고 전술 준비에 몰두한 것이고, 로저스 감독은 테크니컬 에어리어에서 핏대를 세운 채 선수들을 독려하고 있다.
우리가 한 번도 갖지 못한 트로피를 들어 올리기 위해서.
선덜랜드는 웸블리에서 지기만 하는 팀이고, 리버풀은 드라마틱하게 이기는 팀이라고, 팀컬러가 원래 그렇다고 넘길 거라면, 이 모든 노력은 필요하지도 않았겠지.
나는 경기장을 내려다보았다. 우리가 미리 예상한 것처럼, 경기의 템포가 한창 빨라지려는 중이었다.
온다. 유럽의 정상에 올랐던 거친 전방압박이.
무관의 도전자, 챔피언십 출신 선수들이 맞서기엔 너무 강력한 압박에, 여기저기서 숨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 팬들이겠지.
대책은 세워 두었다. 센터백이 넓게 벌리고, 좌우 풀백은 하프라인 부근까지 올라간다. 그리고···.
“톰슨 옆에, 우리 선수가 한 명 늘었네?”
“맞아. 패스 루트를 늘리는 거지.”
“그건 알겠는데, 한 명 여유가 어디서 생긴 거야?”
“자기네 진영에서 상대 공격수보다 사람을 한 명 더 남기는 건 축구계의 국룰 같은 거니까.”
“그게 우리 마음대로 되는 문제야?”
“그야, 리버풀도 지키는 중이거든.”
잭과 스티븐을 좌우 풀백이 마크하고, 크리그에 대해 센터백 두 명이 견제하는 중이다. 덕분에 우리 후방에 선수 한 명이 남는다.
이렇게 생긴 한 사람의 우위를 어떻게 살리느냐가 후방 빌드업의 묘미이며, 한 사람의 공백을 어떻게 메꾸느냐가 전방 압박의 핵심인 것이다.
우리는 미드필더 한 명을 끌어내려 톰슨 옆에 두었고 중원의 인원 공백은 요니를 내려보내며 메웠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패스 루트가 열리기 시작했다.
“밤새 분석했거든.”
리버풀의 예상 선발 라인업을 뽑은 다음, 그 선수들이 나오는 경기를 전부 돌려봤다. 누구를 어떤 식으로 압박하는지를.
그 순간, 전술적으로 더 잘 준비해온 팀은 틀림없이 선덜랜드였다.
물론 스쿼드의 질 차이는 역력했고, 단순한 전술 싸움만으로 후방에서의 수적 우위를 창의적인 공세로 바꾸지는 못했다.
아마 요니를 아래로 끌어내리면서 전방에 크리그가 고립된 것도 한 몫 했을 것이다.
후반 73분.
후방의 수적 우위를 이용해 순간적으로 마크를 떨쳐낸 톰슨이 전방으로 근사한 로빙 스루 패스를 날려 보냈다.
리버풀의 센터백과 미드필더 사이의 공간에 떨어지는, 톰슨 특유의 패스였다.
평소였으면 요니가 확보했을 패스였지만, 그에게는 여전히 헨도가 붙어 있었다.
그렇기에, 톰슨의 패스를 받으러 움직인 선수는 나로서도 무척 뜻밖의 인물이었다.
“크리그!?”
2선 깊숙한 지역까지 내려오는 모습은, 평소의 크리그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든 장면이었다. 애초에 이런 연계 플레이는 크리그의 특기도 아니다.
그래서일까. 리버풀 수비의 대응은 조금 느슨했고, 크리그는 곧바로 그 느슨함을 응징했다.
크리그의 오른발이 불을 뿜었다. 날카로운 다이렉트 터닝 발리가··· 크로스바 상단을 스치듯 지났다.
“아깝다!”
희주의 탄식을 들으며, 나도 손에 땀을 쥐었다.
기회 다음에는 위기가 온다고 했던가? 곧바로 리버풀이 날카로운 공세로 응수했다.
“바비!”
헨도의 발끝에서, 비록 적이지만 감탄할만한 패스가 날아들었다. 목적지는 리버풀의 9번, 피르미누였다.
수비를 등지고 기다리던 피르미누가 공을 살짝 흘려냈다. 궤도가 비틀린 공이 수비 뒷공간으로 향한 것과 동시에, 피르미누는 그대로 몸을 돌려 침투했다.
“안 돼!”
완벽한 공간 침투에, 옆에서는 희주가 비명을 질렀고, 경기장에서는 하퍼가 필사적으로 달려 나왔다.
하지만 피르미누의 움직임이 좀 더 빨랐다. 하퍼가 따라잡기 직전, 피르미누의 아웃프론트가 공을 툭, 하고 찍어 차듯 건드렸다.
골키퍼를 살짝 넘기는 칩 샷이 무정하게 우리 골네트를 가르려는 찰나··· 필사적으로 달려 공을 따라잡은 에디가 몸을 날렸다.
“걷어냈어!?”
희주의 환호에, 오만 명 선덜랜드 팬들의 환호가 뒤따랐다. 나 또한 살짝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우리는 최다 우승팀 리버풀과 일진일퇴의 공방을 주고받았다. 치열하게, 또 팽팽하게.
경기 종료를 10분 남긴 순간까지 이루어진 공방에서, 마침내 득점에 먼저 성공한 팀은···.
··· 리버풀이었다.
* * *
거짓말 같은 실점에, 수잔 베일리는 눈을 깜빡였다. 하지만 다시 봐도 스코어보드의 결과에는 변함이 없었다.
[선덜랜드 1 - 2 리버풀]
‘80분까지 너무나 잘 싸워왔는데···.’
스코어보드를 바라보는 수잔의 옆에서 깊은 한숨 소리가 났다. 돌아보니 그녀가 아는 모든 기억 중 가장 침울한 마일즈와 시선을 마주쳤다.
마일즈의 입매는 꾹 다물어져 있었고, 눈빛은 고요했다. 하지만 어쩐지 그 모습이 꼭 울 것처럼 보여서, 수잔은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축구를 보면, 인생이 행복해진다고 말해준 사람이 있었어요. 직장 상사였죠.”
그러자 수잔의 직장 상사, 마일즈의 얼굴에 아주 살짝 웃음이 돌아왔다. 쓴웃음이긴 했지만.
“··· 그래서, 행복해졌나?”
“조금은요.”
담담하게 대답한 수잔은 곧바로 목소리를 높였다. 그녀의 옆에 선 남자는, 그러면 앞으로도 축구를 많이 보자고 말해버릴지도 모르는 그런 사람이기에.
종료까지 단 10분을 남겨둔 시점, 이대로 경기가 끝나버리기 전에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처음엔 마냥 신이 났었어요. 팬서비스도 끝내 줬고, 같이 응원하는 관중들은 뜨거웠고··· 경기장은 신나고. 아무튼 너무 좋았어요. 선덜랜드가 영국 최강인 줄 알았고요.”
마일즈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작년엔 리그 원에서 뛰었으니까. 이름만 보면 1부 리그라고 착각할 수도 있겠지.”
“네, 하지만 이젠 알아요. 우리가 있던 리그 원은 3부 리그라는 걸. 선덜랜드는 최강팀 같은 게 아니라는 걸.”
“······.”
“그러니까, 응원해도 닿지 않을지도 몰라요. 우승은 힘들어진 걸지도 몰라요··· 아니라고 말씀 못 하시겠죠? 조금 전, 포기하고 계셨으니까요.”
대답하지 못한 마일즈를 향해, 수잔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네, 알아요. 세상은 동화 속 이야기가 아니고, 보답받지 못한 채 사그러드는 노력이 어디에나 있다는 것도요.”
당장 오늘의 웸블리에도 있을 것이다. 트로피를 놓고 치열하게 달리는 스물두 명의 선수들 중, 열한 명은 어떠한 보답조차 받지 못한 채 빈 손으로 돌아가야 한다.
언더독이라는 전력, 종료까지 단 10분 남은 시간, 1점 뒤진 스코어. 이 모든 사실을 종합해 보면, 오늘 보답받지 못하는 팀은 아마 선덜랜드일 확률이 높다.
그 모든 사실을 알면서도, 수잔은 차분하게 말했다.
“그래도, 그게··· 노력을 포기할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고 생각해요.”
선수들이 아직 달리고 있으니까. 관중석에선 아직 선덜랜드 팬들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중이니까.
We do what we want. We do what we want.
“팀장님, 저는 행복해지고 싶어요. 앞으로 더 많이 행복해지고 싶어요.”
비록 닿지 않을지라도, 보답받지 못할지라도··· 그래도 들려주고 싶었다. 힘내라고.
적어도, 끝까지 포기하지는 말라고.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에서 매일 그랬던 것처럼, 수잔은 외쳤다. 잠시 후 그녀의 외침에, 매일 직장에서 듣던 사내의 목소리가 섞였다.
이윽고 그 외침은, 선덜랜드 팬들 전체의 함성으로 바뀌어 갔다.
We are Sunderland. Say we are Sunderland.
* * *
“정신 똑바로들 차려! 아직 안 끝났어! 휘슬이 세 번 울리기 전까지 아무것도 멈추지 마.”
우리의 실점 직후, 헨도의 호령이 경기장에 울렸다. 나는 무심코 입술을 깨물고 말았다.
로저스 감독의 입버릇을 헨도에게서 듣게 되다니. 친구로서는 미묘한 기분이지만, 선덜랜드 구단주로서는 정말 최고의 굴욕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이었다.
로저스 감독은 무표정했지만, 브라이언은 얼핏 보기에도 표정이 썩어들어가는 중이었다.
아마 우리 선수들도 마찬가지인 심정이었을 것이다.
특히 충성심 강한 잭은 관중석에서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부들부들 떠는 중이었다.
그리고 요니도.
하긴, 오죽하면 희주마저 분한 듯 발을 구를 정도다. 선수라면 분하겠지.
한편으로는 안타까움에 가슴이 욱신거렸다.
선덜랜드 아카데미가 낳은 최고의 재능이, 지금 이렇게 우리를 가로막는 장벽이 될 줄은··· 예전에는 몰랐으니까.
잠시 후, 킥오프를 알리는 휘슬이 울렸다.
경기 종료까지 10분 남았을 뿐이기에, 우리는 맹렬한 공세를 펼쳤고, 리버풀은 굳이 무리하고 싶지 않았는지 수비를 굳히며 응수했다.
그래서 경기 양상은 일방적으로 흘렀다. 지키는 리버풀과, 때리는 선덜랜드로.
잔뜩 내려앉은 리버풀의 수비는 견고했고, 시간에 쫓기는 우리 선덜랜드의 공세는 치밀하지 못했다. 박스 안쪽까지 파고들기 힘들어지자, 자연히 중거리슛 비중이 높아졌다.
잭의 슛, 톰슨의 슛, 크리그의 슛··· 중거리포의 쇄도.
“이봐, 아까도 말했지만··· 뚝심과 자포자기는 조금 다른 건데.”
오죽하면 슛을 몸으로 막아낸 헨도가 질린 듯 중얼거렸을 정도다. 요니는 대답 대신 천천히 코너플래그로 향했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코너킥, 센터백 에디까지 전부 세트피스에 참여했다.
We are Sunderland. Say we are Sunderland.
경기장을 가득 메우는 우리 팬들의 함성 속에서, 잠시 리버풀 골대를 노려보며 킥을 준비하던 요니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잭을 불러들였다.
“잭, 네가 차!”
“왜, 못 차겠어? 그러게 작작 긴장···.”
“이 자식들이 누굴 바보로 아나!? 아스널 상대로 써먹은지 얼마나 지났다고!”
아놀드가 분노에 찬 소리를 지르며 곧바로 잭을 추격했다. 그리고 헨도는 쓴웃음을 지었다.
“뚝심과 자포자기는 조금 다른 거라니까 그러네.”
요니가 히죽거렸다.
“나도 안다니까?”
I know I am. I’m sure I am.
다음 순간, 요니가 그대로 공을 길게 걷어찼다. 박스 안쪽을 향해서.
리버풀 선수들의 시선이 일제히 심판 쪽을 향했다.
“키커의 투 터치는 파울···.”
“빌어먹을, 이번엔 공 안 건드렸잖아! 트렌트! 돌아와!”
상황을 파악한 헨도의 뒤늦은 외침이 울렸을 무렵, 공은 확실히 박스 안쪽까지 도착했고 잭 또한 아놀드를 따돌리며 박스에 파고든 상태였다.
Sunderland 'til I die. I'm Sunderland 'til I die.
열광적으로 울려 퍼지는 우리 팬들의 환성 속에서, 잭은 완벽한 노마크 찬스를 맞이했다.
누구보다 열정적인 선덜랜드의 사냥개는, 박스 안에서는 냉정한 선수였다.
트래핑 한 번, 달려드는 수비를 따돌리기 위해 한 번. 그리고 골을 노리는 세 번째 터치까지.
잠시 후, 득점을 알리는 휘슬이 울렸다. 순간적으로 시야가 뿌옇게 변해 버려서, 눈을 깜빡였다.
선덜랜드 아카데미가 낳은 최고의 재능은 팀을 떠났다. 단순한 숫자로만 따지면, 헨도는 잭과 요니를 합쳐도 모자랄 정도의 재능을 가졌었다.
그리고 리버풀에는 헨도같은 선수가, 혹은 그 이상 가는 선수가 몇 명이나 존재한다.
그래도, 우리는 지금 싸우고 있다.
[선덜랜드 2 - 2 리버풀]
그들과 대등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