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갖지 못한 트로피 (4)
동점골 직후 리버풀의 태도가 바뀌었다. 챔스를 병행하는 일정상, 그들은 절대 연장전을 반기지 않을 팀이기에.
하물며 연장전 끝에 기다리는··· 승부차기는 결코 원하지 않을 것이다.
승부차기, 11미터의 러시안 룰렛이라고 불릴 만큼 변수가 많은 이벤트다. 따라서 상대적 강팀인 리버풀 입장에서는 가장 피하고 싶은 상황일 것이다.
그렇기에 리버풀은 정규 시간 90분이 끝나기 전에 승부를 내겠다는 단호한 의지로 총공세에 나섰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버티기만 하면 되는 거지? 그런 거지?”
옆에서 희주가 절박하게 외쳤다.
일리 있는 판단이었다.
리버풀은 연장을 원치 않을 것이며, 승부차기는 더욱 원치 않는다. 바꿔 말하면 연장과 승부차기는 우리에게 나쁘지 않은 조건이다.
무심코 시선이 우리 골마우스로 향했다.
12번 유니폼을 입은 하퍼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한 손을 입가에 댄 채, 다른 손을 내밀어 선수들을 독려하고 지시하는 하퍼의 모습에서, 긴장감이나 불안감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퍼를 가진 우리에게, 승부차기는 결코 손해 볼 것 없는 도박이었다. 하물며 리버풀 키커들의 습관은 샐리와 브라이언이 착실하게 분석을 마친 상태다.
그리고, 버텨내다 보면 조급해진 상대가 먼저 허점을 드러낼 가능성도 있고.
하지만, 유럽의 정상에 올랐던 팀을 상대로 어설프게 시간을 끌면서 버티는 축구를 하다가는 곧바로 잡아먹힐 가능성도 있다.
축구 역시 기세가 중요한 스포츠니까.
나는 우리 벤치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곳에서는, 한결같이 선수들을 독려하는 로저스 감독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시간을 끌 생각은 조금도 없어 보이는 당당한 태도였다.
희주가 비명처럼 외쳤다.
“맞불 놓겠다고!?”
“실력은 몰라도, 기세라면 우리도 뒤질 게 없거든.”
극적인 시간대에, 상대의 허점을 찌르는 동점 골을 성공시켰다. 웸블리는 마치 우리 선덜랜드의 홈처럼 뜨거웠고, 지금도 오만 명 팬들이 쉼 없이 외치는 중이다.
경기의 기세도, 흐름도 전부 우리 거다. 일부러 움츠러들 이유는 조금도 없다. 그렇게 우리 선수들은 한 치도 물러나지 않고 당당하게 맞섰다.
정규시간 90분이 지나, 인저리타임은 2분이 끝나갈 때까지.
91분 34초.
정규시간 종료를 불과 30초도 남겨 놓지 않은 시간, 리버풀의 공격수 피르미누가 완벽한 침투를 성공시켰다.
순간 세상의 모든 소리가 사라진 것 같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서.
소리는 나지 않았다. 그저 휘둘러지는 피르미누의 오른발과, 달려 나오는 하퍼의 모습만이 선명하고 또 생생하게 보였을 뿐이다.
91분 37초.
필사적으로 몸을 날린 하퍼의 손이 공을 막아냈지만, 걷어내지는 못했다. 세컨볼은 그대로 피르미누의 앞으로 흘렀다.
에디가 절규처럼 외치며 달려들지만, 공을 먼저 확보한 선수는 리버풀의 9번이었다.
유일한 희망은, 피르미누와 하퍼가 바짝 붙어 있다는 것뿐이었다.
각도가 없다.
세컨볼, 발리슛, 그리고 공은 또다시 하퍼의 몸을 때렸다. 정강이인지 허벅지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어디쯤을.
91분 40초.
마침내 공이 완전히 하퍼와 피르미누의 뒤로 흘러나왔다. 그리고 간신히 소리가 돌아왔다.
We do what we want. We do what we want.
오만 명 선덜랜드 팬들의 함성. 열광적인 그 목소리 속에서, 누구보다 빨리 에디가 공을 걷어냈다.
언제나 그런 것처럼, 경기장 오른쪽 측면으로.
91분 44초.
텅 비어버린 측면을, 스티븐이 미친 듯 질주했다. 투박하게, 하지만 빠르게. 마치 코뿔소나 코끼리 같은 돌진이 경기장의 오른쪽 측면을 파고든다.
헨도가 필사적으로 외쳤다. 막으라던가, 잡으라던가, 파울로라도 끊으라던가··· 들리지는 않았다. 함성에 묻혀서.
We are Sunderland. Say we are Sunderland.
박스 부근에서, 스티븐이 공을 옆으로 짧게 밀어냈다. 스티븐이 흘려낸 그 공 앞에 가장 빨리 나타난 선수는 언제나처럼 요니였다.
따라붙는 헨도의 거친 어깨싸움에 밀려 비틀거리면서도, 요니의 발은 확실하게 공을 건드렸다.
91분 50초.
공이 박스 안쪽에 높게 떠올랐다. 22번 크리그가 공을 확보하기 위해 움직였다.
리버풀의 센터백이 크리그에게 바짝 붙었다. 절대로 슈팅은 내주지 않겠다는 기세로.
골로 이어지는 모든 각도를 틀어막힌 크리그가 할 수 있던 유일한 플레이는, 떠오른 공에 머리를 가져다 대는 것뿐이었다.
91분 54초.
공이 아크 정면으로 향했다. 잭이 기다리는 곳으로.
Sunderland 'til I die. I'm Sunderland 'til I die.
무심코 무릎에 힘이 들어갔다. 때려. 기다리지 마. 키퍼가 달려 나오고 있어!
잠시 후 잭의 발이 그대로 돌려차기의 요령처럼 휘둘러졌다.
친숙한 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공 걷어차는 소리, 세상에서 오직 축구공만 내는 소리가 이상하게도 선명하다.
원래는 들릴 리 없는 소리인데. 웸블리에 이렇게 함성이 가득한데.
I'm Sunderland 'til I die.
91분 56초.
마침내 잭의 다이렉트 발리가 네트를 세차게 흔들었다.
[선덜랜드 3 - 2 리버풀]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난간에 매달릴 듯 달라붙어 경기장 쪽으로 반신을 내민 채 포효하는 중이었다.
Sunderland 'til I die.
* * *
휘슬이 세 번 울린 경기장에서, 제 발로 서 있는 선수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패배의 충격에 망연하게 주저앉은 리버풀 선수들은 물론, 승리한 선덜랜드 선수들도 온전히 서 있지는 못했다.
긴장이 풀렸는지, 아니면 체력 때문인지 요니는 잔디 위에 드러누운 채 손으로 얼굴을 가렸고, 스티븐은 무릎을 꿇고 엎드린 채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물론, 태연하게 관중석 앞으로 달려간 에디와 잭 같은 사례도 있지만, 대체로 패배한 리버풀보다 이긴 선덜랜드 선수들이 훨씬 더 힘들어 보였다.
‘이해해. 우리도 그랬으니까.’
헨도는 생각했다. 안필드에서 네 골을 넣으며 바르샤를 잡아냈을 때, 리버풀 선수들이 저런 식으로 주저앉아 울었었다고.
그래도 승자에게 눈물은 어울리지 않는다. 하물며 트로피를 들어올릴 의무가 있는 결승전의 승자는 더욱 그렇다.
헨도는 애써 표정을 관리하며, 자신의 오늘 매치업 상대였던 요니에게 손을 내밀었다.
“고맙습니다.”
“말이 길어졌네?”
“경기 끝났으니까요. 구단주님하고 친구시죠?”
갑자기 말투가 퍽 공손해진 요니를 바라보며, 헨도는 피식 웃었다.
잠시 후 요니가 헨도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입장상 축하까지는 못하겠고, 수고했다.”
“수고하셨습니다.”
가볍게 인사를 주고받고, 헨도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오늘의 결승전은 끝났지만, 그의 의무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리버풀의 시즌은 아직 끝나지 않았기에, 그는 동료들을 일으켜야 했다.
그런 헨도의 등 뒤에, 요니의 목소리가 따라왔다.
“혹시 후회하신 적은 없습니까?”
헨도는 곧바로 대답했다.
“전혀. 너희가 챔스와 리그를 둘 다 들어 올리고 나면 혹시라도 생각이 바뀔지도 모르겠지만.”
대답에 망설임은 조금도 없었지만, 그래도 헨도는 딱 한 가지만은 무척 부럽다고 생각했다.
유스 출신 동료와 함께, 그리고 팀과 함께 계속 성장해나갈 수 있다는 것은··· 선수에게 최고의 축복이니까.
‘썬, 브라이언···.’
과거의 헨도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던 기회가, 잭과 요니에게는 아직 남아 있었다. 같은 선덜랜드 유스 출신으로서, 그 한 가지만은 사무치게 부러웠다.
‘축하한다.’
절대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할 이야기를 가슴 속에 삼키며, 헨도는 경기장을 둘러보았다. 아직 패배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리버풀 선수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헨도는 망설이지 않았다. 곧바로 아놀드를 토닥이고, 로버트슨을 일으키고, 피르미누를 위로하면서···.
한때 선덜랜드의 10번이었던 리버풀의 주장은, 천천히 사이드라인을 빠져나갔다.
* * *
온통 승리의 기쁨으로 가득한 선덜랜드의 관중석에서, 마일즈 우드는 고민에 빠져 있었다.
기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역사적인 첫 우승, 그 장면을 직접 볼 수 있다는 것은 축구팬으로서 정말로 기쁘고 영광스러운 감격의 순간이었다.
하지만 지금 마일즈 우드에게는 일생일대의 문제가 걸려 있었고, 그렇기에 순수하게 우승의 기쁨을 만끽할 수는 없었다.
‘축구는 이래서 어렵단 말이야.’
선덜랜드가 우승하면 수잔에게 반지를 전하려 생각했다. 경기 시작 전에는 참 쉽고 단순한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선덜랜드가 이기고 나니 여러 가지로 신경이 쓰인다.
‘언제 반지를 줘야 하지?’
휘슬이 울린 순간인가? 그건 지났는데··· 아니면 혹시, 트로피를 들어올리는 순간일까?
‘그러고보니 트로피는 누가 들어올리지? 페르난데스? 아니면 톰슨··· 아니, 지금 그딴 걸 생각할 때가 아니잖아!’
그때, 바지춤에서 가벼운 진동이 느껴졌다. 메시지가 도착한 모양이다. 마일즈는 재빨리 호주머니에 손을 넣었고, 동시에 수잔의 얼굴에도 긴장의 빛이 떠올랐다.
[반지 안 잃어버렸지?]
브렌든의 참견에, 마일즈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옆에서 수잔 또한 한숨을 쉬었다.
“팀장님. 혹시 아까 제가 한 이야기, 기억나세요?”
“기억하는데···.”
대답하면서, 마일즈는 말꼬리를 흐렸다. 오늘 수잔이 한 이야기 자체는 전부 기억하고 있다. 문제는 ‘아까’ 가 언제냐는 것이었다.
“말씀드렸잖아요. 행복해지고 싶다고.”
“그랬지.”
마일즈의 얼굴에 미소가 돌아왔다.
예전에 수잔에게 축구를 보면 인생이 조금 행복해진다는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었다. 수잔을 축구 팬으로 만든 계기가 된 발언이었다.
그래서, 앞으로도 수잔과 축구를 자주 보겠다고 약속할 생각이었는데···.
그런데, 어째 수잔의 목소리가 점점 샐쭉해졌다.
“일부러 경기 끝나기 전에 말씀드렸던 건데. 경기 결과에 따라 대답이 달라진다고··· 그렇게 생각되기 싫었거든요.”
그때 마일즈의 폰이 다시 울렸다. 이번에도 브렌든이었다.
[얼간아, 무조건 행복하게 해 주겠다고 해.]
브렌든의 메시지를 본 순간, 마일즈는 뒤통수를 한 방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행복하게 해 줄게, 너무나도 상투적인 멘트다. 따라서 행복해지고 싶다고 말한 수잔 역시, 분명한 의미를 담고 대답한 것이었다.
너무나 뻔한 이야기였는데··· 축구 이야기가 얽히면서 그만 착각하고 말았던 모양이다.
상황을 파악한 마일즈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폰을 적당히 주머니에 쑤셔넣은 다음, 조심스럽게 반지를 꺼냈다.
“수잔.”
그 순간, 경기장이 환호로 뒤덮였다. 마침내 선덜랜드 선수단이 트로피를 들어 올렸기 때문이지만, 마일즈와 수잔에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실이었다.
오만 명 선덜랜드 팬들의 함성은 무척이나 열렬했다. 마치 새로 태어난 커플을 축하하는 것처럼.
* * *
결승전으로부터 이틀 후, 선덜랜드 클럽 박물관.
크레파스로 그려 둔 꼬마 팬들의 서툰 그림 사이에서, EFL컵 우승이라는 삐뚤빼뚤한 글씨를 찾아냈다.
그 앞에는 이미 유리 진열장이 놓여 있었다.
[FC 선덜랜드, EFL 컵 챔피언]
린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구단주님, 이제 그림은 뗄까요?”
“아뇨, 놔두죠.”
모처럼 팬들이 마음을 담아 그려준 그림이다. 실물을 가져왔다고 해서, 그림을 치울 이유는 없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이대로 그림 앞에 진열할게요.”
린다의 대답을 들으며, 나는 잠시 트로피를 바라보았다. 창단 이래 처음으로 가져온, EFL컵을.
옆에서, 리지가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할아버지가 말씀하신 적이 있어요.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가 지어진 이래, 우리는 한 번도 트로피를 갖지 못했다고요. 컵 대회도, 1부 리그 우승도···.”
“네, 압니다.”
마지막 컵 대회 우승은 50년을 거슬러 올라야 하고, 1부 리그 우승은 벌써 80년이 지난 과거의 기록이 되었다.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가 지어진 지, 이제 겨우 24년. 지금까지 빛의 경기장이 가졌던 트로피는, 기껏해야 하부 리그의 우승컵뿐이었다.
이젠 아니다.
나는 이곳에, 선덜랜드가 한 번도 갖지 못한 트로피, EFL컵을 가져왔다. 그러니까···.
시선을 돌려, 장식장 옆에 늘어선 팬들의 그림을 확인하듯 바라보았다. FA컵, 프리미어리그 우승, 챔피언스 리그 우승···.
“전부 가져올 겁니다.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가 갖지 못했던 트로피를, 전부.”
크레파스 그림 앞에 천천히 트로피를 놓으며, 나는 그렇게 선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