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라스트 댄스 (2)
로저스 감독이 눈을 깜빡였다.
“해리슨이라고?”
노장의 주름진 얼굴에 기묘한 빛이 떠올랐다. 의미는 자명했다. 오래 알고 지낸 사이가 아니더라도 알 수 있을 만큼.
‘천천히 키우자고 하지 않았었나?’
혹시라도 내가 조급해진 마음에, 아직 덜 자란 유망주를 억지로 출전시키려는 게 아닌지 염려스러웠을 것이다.
나는 차분히 설명했다.
“유망주가 망가지는 이유는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지나친 혹사로 몸이 망가지거나, 아니면 과도한 부담을 못 이기고 짓눌리는 경우죠.”
혹은, 처음부터 재능 자체가 없었거나.
마지막 이유를 입안에서 삼켰다. 어차피 해리슨과는 관계없는 이유다. 그는 사백억 원의 가치를 가진 유망주니까.
“이번에 출전시켜도 혹사 문제가 되진 않을 겁니다. 크리그는 열흘이 지나면 돌아올 것이고, 해리슨은 당장 두 경기만 뛰면 되지 않겠습니까?”
로저스 감독이 미소를 지었다.
“두 경기면 혹사는 아니겠지. 그리고?”
“부담감 문제라면, 보통은 경기력의 부진을 주위에서 물어뜯으면서 시달리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겨우 16살짜리 꼬맹이, 심지어 부상당한 주전 대신 갑자기 출전한 어린 선수에게 비난을 퍼붓지는 않겠지.”
나와 로저스 감독을 번갈아 바라보던 샐리가, 냉담한 목소리를 냈다.
“어린 선수가 데뷔 직후 부진할 경우, 보통은 어린애를 내보낸 코칭스태프가 욕을 먹을 텐데요.”
나는 미소를 지었다.
“걱정 마시죠. 대체자를 미리 구해 오지 않은 구단 측도 코치진 못지않게 욕을 먹거든요. 같이 욕 좀 먹고 말죠.”
어쨌든, 선수에게는 화살이 돌아가지 않을 거다. 그러니 뭐 어때. 욕 좀 먹고 말지.
그러자 샐리의 얼굴이 조금 풀렸다.
“구단주님이 방패막이해 주신다면야 든든하죠. 요새 시티 오브 선덜랜드에서 구단주님 잘못 욕했다가는 큰일 난다고 들었거든요.”
“에이, 그 정도는 아닐 겁니다.”
내가 무슨 나폴리의 영웅 마라도나도 아니고.
“아, 브로. 나도 들었어. 뉴캐슬어폰타인에서 브로 씹으면 술이 공짜라고 하던데···.”
“아, 그러고 보니 미들즈브러 다트 바에는 과녁에 자네 얼굴이 붙었다는 소문이···.”
더비 라이벌 사이에서 저런 취급은 오히려 존중의 표현이나 마찬가지다. 토티를 두 발 쏜다는 라치오 팬들의 반응처럼. 유소년 시절의 나는 절대로 받지 못한 대접에, 쓴웃음이 지어지는 한편 뿌듯하기도 했다.
잠시 후, 우리는 다시 본론으로 돌아왔다.
“브로가 말한 것처럼, 한번 시도해볼 모험이긴 해. 1군에서 뛰는 것만으로도 어린 선수의 성장에 도움이 되니까.”
“그러게요. 내년에 프리미어리그에서 데뷔전을 치르는 것보다야 훨씬 낫기도 하고요.”
“문제는 해리슨의 포지션인데··· 최전방은 너무 불안하지 않나? 그 애송이가, 터프한 센터백들 상대로 버틸 수 있을까?”
“그래서 지금이어야 합니다. 프리미어리그의 압박은 훨씬 거세니까요. 이번엔 스티븐과 투톱으로 나설 수 있다는 메리트도 있고요.”
스티븐은 어지간한 센터백만큼 크고 강한 선수다. 따라서 스티븐은 해리슨의 신체적 약점을 메꿔주고, 그를 지켜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해리슨은.
해리슨이 최전방에서 잘 뛸 수 있을지 장담할 수는 없었다. 내 능력은 선수의 가치를 알려줄 뿐, 어느 포지션이 좋을지는 직접 알아내야 한다.
실전에 투입하고, 결과를 보면서, 내 눈과 내 머리로.
약간의 침묵이 흐른 후, 마침내 로저스 감독이 결단을 내렸다.
“좋아. 내보내는 방향으로 준비해 보세.”
* * *
해리슨의 출전 준비는 극비리에 진행되었다.
훈련장 주변에서 취재진을 쫓아내는 거야 축구판의 상식이지만, 이번에는 평소보다 훨씬 강도 높은 통제를 지시했다.
절대로 해리슨을 노출하지 말라는 방침에, 희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빠, 스티븐 때는 의도적으로 관심을 모아주지 않았어? 이번엔 왜 반대로 하는 거야?”
“선수의 상황이 다르니까.”
스티븐은 우리 팀에 오기 전까지 계속 프로로 뛰던 선수였다. 그의 경우는 이적 직후 적응하지 못하는 게 문제였으니, 일부러 자신감을 북돋울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노골적으로 홍보했다. 경기장 곳곳에 플래카드를 걸고, 열기구를 띄웠다. 선덜랜드에 새 얼굴이 왔으니, 서포터 여러분이 다 같이 환영해 달라는 의미였다.
해리슨은 다르다.
이제 갓 프로로 계약한 유망주에게, 지나친 관심은 별로 유익하지 않다. 응원조차 독이 될 수 있기에, 나는 해리슨이 철저한 무관심 속에서 조용히 데뷔전을 치르기를 희망했다.
하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는 게 인생이라는 말처럼, 해리슨은 며칠 뒤, 타인위어 지역 언론을 뜨겁게 달구게 되었다.
[크리그의 공백, 선덜랜드의 선택은 해리슨 프레이저?]
[투자의 신이 직접 선택한 유망주, 마침내 프로 데뷔전 치르나?]
···도대체 어디서 정보가 샌 거지?
정보의 출처를 파악하라고 지시하는 한편, 곧바로 언론 상대로 대응에 나섰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해리슨의 멘탈 관리고, 그러려면 우선 기사부터 잠재우는 게 급선무다.
우리는 곧바로 애니를 앞세워 지역 언론을 압박했다. 원래 안 팔리는 신문사 출신이던 애니의 대응은 능숙했다.
“특집 기사 안 필요해? 응, 단독으로. 예를 들면 페르난데스와 선덜랜드의 라스트 댄스 같은.”
“선덜랜드 내년 스폰서가 어디냐고? 글쎄, 잘 생각해 봐. 우리가 왜 1군 선수단 전원에게 테슬라 로드스터를 지급했을까?”
“아 맞다. 너희한테 꾸준히 광고 내주던 회사 있지? 거기 오너 말인데··· 아니야, 오늘 바뀌었어. 다시 확인해 봐.”
당근과 채찍을 번갈아 휘두른 끝에 적어도 지역 언론에서 해리슨을 들먹이는 일은 사라졌지만, 한번 불이 붙어 버린 팬들의 관심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39라운드 경기 당일,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에 마침내 플래카드가 내걸리고 말았다.
[선덜랜드의 가장 중요한 번호 - ‘9’ 의 계보를 이어갈 우리의 미래!]
가벼운 두통에 머리를 손으로 짚었다. 저절로 혼잣말이 나왔다.
“아니야. 9번 하나도 안 중요한 번호야. 나도 써봤을 정도잖아.”
과거에는 분명히 의미 있는 숫자였다. 9번은 클럽의 레전드, 나이얼 퀸의 등번호니까.
하지만 그건 샐리네 아버님이 현역으로 뛰시던 시절 이야기고, 이후의 9번은 평범한 등번호 중 하나가 되었다. 프로조차 되지 못한 나조차 유소년 시절에 썼을 정도로.
희주가 한숨을 쉬었다.
“그래서 팀에서 가장 중요한 번호가 된 것 같은데.”
대체 뭔 소리인지 모르겠네.
“설령 9번이 중요하다 치더라도, 해리슨 쟤는 99번이잖아. 9번 아니라고.”
“어··· 방금 발언은 오빠가 생각하기에도 좀 그렇지?”
뭐, 솔직히 눈 가리고 아웅이긴 했지. 유망주에게 99번, 이건 아무리 봐도 조만간 9번 달아주겠다는 선언이나 마찬가지니까.
아무튼, 99번 해리슨을 향해 쏟아진 팬들의 성원은 언제나처럼 뜨거웠다. 만일 잭이나 요니 같은 선수였다면 초사커인으로 변신했을지도 모를 정도로.
하지만 인생 첫 프로 경기를 치르는 해리슨에게는 부작용만 났다.
“아, 글렀네.”
경기장에 들어오는 해리슨의 모습은 꼭 밀랍 인형처럼 보였다. 생기가 없고, 핏기도 없었으며, 전체적으로 완전히 얼었다.
이런 식이면 아마, SNS 등에서도 물어뜯길 것이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이거 중계 나오지?”
“응.”
“그러면 SNS 반응 좀 체크해 줘.”
경기장에 찾아올 우리 골수팬들은 구단 유망주의 데뷔전에 날 선 비난을 쏟아내지는 않겠지만, 그냥 중계나 보는 사람들의 태도는 조금 다를 것이다.
내 우려대로, 해리슨에 대한 SNS 여론은 시작부터 썩 좋지 못했다.
- 해리슨 쟤 예전 별명이 뭔지 아심? 턴오버 머신임.
확실히 그날 해리슨은 무수한 턴오버를 생산했다. 수비와의 피지컬의 차이 때문에, 패스를 제대로 받지도 못하고 밀려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리고 혹시라도 공을 무사히 넘겨받았다 치더라도···.
- 또 도네. 무슨 바람개비냐?
해리슨은 그날, 무수한 턴을 시도했다. 기술 자체는 퍽 능숙하다. 마르세유 턴, 크루이프 턴, 스쿱 턴··· 일단 턴이라는 이름이 붙은 개인기는 대체로 다 쓰는 모양이다.
비록 전혀 수비를 뚫어내지는 못하고 있지만.
그래도 긍정적인 포인트는 있다··· 쉽게 공을 뺏기지 않는다는 점. 딱 그것뿐이었다.
영양가 있는 돌파로 이어지는 일은 없었고, 혹시라도 수비와 어깨를 맞대면 몸싸움에 여지없이 밀려났다.
덕분에 해리슨은 박스 안쪽까지 거의 파고들지 못했다.
유일하게 침투에 성공한 적은 한 번뿐인데, 그나마도 유효슈팅으로 이어가지는 못했다. 해리슨의 킥은 슛인지 패스인지 모를 애매한 궤적, 일명 슈터링이라고 불리는 각도로 날아갔다.
경기장의 초대형 스크린이, 어리둥절한 스티븐과 분한 듯 입술을 깨무는 요니의 모습을 번갈아 비췄다.
- 킥은 좋다더니? 저게 어딜 봐서 킥 좋은 선수임?
ㄴ 프로가 아니라 유소년 레벨이라고 생각해보셈. 그냥 메날두잖음?
ㄴ 메날두? 올려치기가 너무 심한 거 아니냐.
ㄴ 올려치기가 아니라, 유소년에서나 양학할 급이라는 뜻인데. 당연히 프로에서는 안 통하고.
반응이 싸늘해지면서, 해리슨의 몸놀림 또한 전체적으로 무거워졌다.
“어!? 돌긴 돌았는데 발에 공이 없어! 흘린 거야!?”
수비를 피해 몸을 돌리던 해리슨의 발뒤꿈치가 공을 건드렸고, 덕분에 공은 골키퍼 쪽으로 데굴데굴 굴러갔다.
마침내 경기장을 찾은 우리 팬들조차 실소하고 말았고, SNS는 그야말로 대폭발했다.
- 그래도 공은 안 뺏기네? 지가 흘려서 그렇지.
ㄴ 더 나쁜 거 아님? 이 선수는 무료로 드립니다?
- 작작 좀 돌아라. 보고 있자니 내 머리까지 돌 것 같다.
ㄴ 정신병은 나을 수 있습니다. 선덜랜드 로열 병원에서···.
SNS 반응을 계속 체크하던 희주가, 마침내 못 볼 꼴을 봤다는 표정으로 스마트폰을 내려놓았다.
“오빠가 쟤 내보내자고 추천했던 거지?”
“그러게. 내 실수였어.”
공격수로 내보내는 게 아니었는데 말이지. 그리고 일단 SNS 대응팀은 하나 신설해야겠다. 해리슨 SNS 계정은 압류하고.
담담하게 대답하는 나를 향해, 희주가 한숨을 쉬었다.
“우리 영상팀에 연락해서, 오늘 해리슨 클로즈업 샷은 좀 지우자고 하자. 박제 당하면 너무 불쌍하잖아.”
“아니. 전부 찍어야지.”
위에서 내려다보니까 슬슬 알 것 같거든. 해리슨이 어떤 선수인지.
그날 우리는 간신히 1 - 0으로 승리했다. 그리고 해리슨은 그날 평점 5점을 기록했다. 어린 선수에게는 후한 점수를 주는 축구계의 관례를 고려하면, 거의 최악의 평가다.
해리슨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죄인처럼 경기장을 떠났다.
우리 팬들은 해리슨에게 열렬한 박수를 보냈지만, 어디까지나 격려 차원이었을 뿐 그의 경기력에 만족한 사람은 아주 드물었을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해리슨의 가능성을 알아보지 못한 것은 아니었는지, 경기가 끝난 직후 내 스마트폰이 연속으로 울리기 시작했다.
[구단주님? 해리슨을 쓰는 방식에 대해 다시 의논해보고 싶은데요. 최대한 빨리요.]
[브로! 쟤는··· 잘 키우면 정말로 대박일 것 같은데?]
우리 벤치와 분석실에서 쇄도하는 메시지를 보며, 나는 낮게 웃었다.
* * *
눈이 마주치자 해리슨이 곧바로 어깨를 움츠렸다. 그 모습을 본 크리그는 낮게 한숨지었다.
“연습은?”
“끄, 끝났습니다. 그게··· 오늘은 그만하라고 하셔서요.”
“그래. 휴식은 중요하지. 내가 말하긴 좀 그렇지만.”
휴식을 운운하자, 맞은편에서 그를 바라보던 메디컬 팀원의 얼굴에 곧바로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서 크리그는 그만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선덜랜드에서 가장 휴식이 필요한 선수는 크리그였다. 팀 훈련에 더해 개인 연습까지 거르지 않는 타입이었고, 쉬는 것도 프로의 일이라는 조언을 몇 번이나 무시했었다.
그러다 마침내 부상을 당했으니, 메디컬 팀에서 저렇게 반응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기분 탓인지 메디컬 팀원들의 시선이 영 따가워서, 크리그는 슬쩍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어제 경기,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불렀는데.”
그러자 해리슨의 몸이 더 쪼그라들었다.
“죄송합니다. 실수 너무 많이 했죠.”
“따지려고 부른 건 아니야. 누구나 데뷔전에서 얼어붙긴 하니까. 안 그런 녀석도 있지만. 마침 99번인 너와는 퍽 연관 깊은 번호인데···.”
“구단주님인가요?!”
반색하는 해리슨을 바라보며, 크리그는 그만 얼굴을 찌푸리고 말았다.
“구단주님을 내가 그렇게 막 부르겠냐? 잭이야.”
잭은, 실축하면 곧바로 탈락하는 승부차기에서 파넨카를 꽂아 넣을 정도로 대범하다. 당연하게도 데뷔전에서도 전혀 떨지 않았었다.
절대적인 강심장.
그리고 그것은, 크리그 생각에는 득점원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센스가 더 좋은 요니조차, 득점만 따지면 잭과 비슷할 정도니까 말이지.’
요니가 더 공격적인 역할을 맡는다는 점을 고려하면, 순수하게 득점력만 따지면 잭이 좀 더 낫다. 실력보다는 성격의 차이라고, 크리그는 생각했다.
직접 골을 노릴 수 있는 대담함··· 혹은 욕심이, 주위 상황을 냉정히 살피는 판단력보다 훨씬 클 때만, 선수는 골 사냥꾼이 될 수 있으니까.
크리그가 보기에 해리슨이 보여준 모습은 골 사냥꾼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크리그는 스마트폰을 꺼내, 해리슨의 킥 장면을 재생했다. SNS에서 올해의 슈터링 후보로 널리 퍼진 장면이었다.
“죄송합니다. 그게···.”
“패스였지? 괜찮으니까 솔직히 말해 봐.”
그러자 해리슨은 한참을 우물거린 끝에 실토했다.
“누군가 쇄도하면 머리쯤에 딱 맞을 높이와 각도라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잘 풀리진 않았지만요.”
“그냥 평범하게 패스하지 않았던 이유는?”
“슛처럼 보이면 골키퍼의 반응이 조금이라도 늦어지지 않을까 해서··· 죄송합니다. 제가 괜히 이상한 짓을 했어요.”
크리그는 그만 눈을 질끈 감아버리고 말았다.
스티븐은 전혀 파악하지 못한 것 같았지만, 영리한 요니는 해리슨의 의도를 곧바로 간파했을 것이다. 그랬기에 요니는 저렇게 분한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던 거겠지.
그리고 감각적인 잭이었다면, 머리로 생각하기 전에 곧바로 몸을 날려 골을 만들어냈을 것이다.
만일, 그라운드에 선 사람이 크리그 자신이었다면, 그랬다면 어땠을까?
‘나였으면 받을 수 있었을까?’
도저히 확신이 들지 않았기에, 선덜랜드의 스트라이커는 그저 눈을 감은 채 어금니를 악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