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라스트 댄스 (3)
분석실 스크린을 가득 메운 영상의 주인공은 해리슨이었다.
샐리가 경쾌한 손놀림으로 마우스를 조작했다. 잠시 후 스크린의 해리슨이 빙글 돌았고, 공은 박스 안쪽으로 데굴데굴 굴러갔다.
마침내 홈 팬들의 실소를 자아내게 한 바로 그 장면을, 샐리는 조금 다르게 평가했다.
“만일 단순한 볼 컨트롤 미스가 아니라 힐 킥이었다고 가정하면.”
브라이언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타이밍에 맞춰 스티븐이 쇄도했다면.”
“완벽한 찬스가 되죠.”
“응, 완벽한 찬스였을 거야.”
브라이언과 샐리가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스크린 속의 해리슨을 바라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 또한 감개무량한 심정이 되었다.
브라이언과 샐리, 두 사람이 같은 결론을 내린 건 너무나 오랜만의 일이거든.
“오빠, 그런데 해리슨은 유소년 시절 패스미스만 실컷 했다고 하지 않았어?”
샐리가 대신 대답했다.
“스티븐도 반응하지 못한 패스를, 겨우 유소년 선수가 어떻게 받았겠어요? 그것도, 지금의 우리 유소년들이요.”
지난 몇 년, 1군 팀이 부진에 빠지면서 선덜랜드 유소년 아카데미 역시 침체기를 겪었다. 알짜배기 유망주는 진작에 다 뺏겼고, 새로운 재능의 수혈도 이루어지지 않았었다.
작년 이후 팀이 확 달라지면서 유소년 아카데미 상황도 나아지고 있지만, 해리슨과 같이 뛰던 세대는··· 그저 그랬다.
어찌 보면 다행일지도 모른다.
만일 우리 유스팀에 해리슨의 패스를 척척 찬스로 바꿔낼 골잡이가 있었다면 진작에 다른 팀에 뺏겼을 테니까. 그것도 1+1 세트로.
다행히 해리슨은 직접 득점을 올리지는 못하는 타입의 찬스메이커였고, 덕분에 내가 발견할 때까지는 눈에 띄지 않게 잘 묻혀 있었다.
이제 잘 키우기만 하면 되겠지.
해리슨의 패스를 묵묵히 지켜보던 로저스 감독이 불쑥 입을 열었다.
“센스는 좋은데, 너무 모험적이야. 양날의 검 같은 타입이군. 동료에게 이어지면 결정적 찬스가 되겠지만, 아니면 바로 턴오버니까.”
“언제 모험해도 되는지, 언제 안전한 패스를 해야 할지에 대한 판단력이 부족한 것 같아요. 아직 어린 선수니까요. 교육이 필요하겠죠.”
교육이라는 표현을 쓸 때, 샐리의 눈이 특히 반짝였다··· 조만간 분석실에 감금하려는 모양이다.
“경험이 쌓이면 나아지겠지만, 본질적으로는 3선에 두기보다는 2선의 찬스 메이킹에 주력하는 게 어울릴 선수 같아.”
브라이언의 말처럼, 후방은 모험보다는 안전함이 필요한 장소다. 그리고 전방은 그 반대다.
“당분간 요니와 자리를 바꿔도 재밌을 거 같네요.”
“그렇지. 요니 특유의 공간 침투에, 해리슨의 기묘한 패스가 더해지면 막기 어려운 조합이 될 테니까.”
“턴오버를 양산하는 약점은, 중원에서 잭이 보조해 줄 수 있을 거고요.”
우리 전술가들의 목소리에 열기가 묻어나왔다. 덕분에 안심이 된다.
다행히 로저스 감독은 어린 선수 육성에 일가견이 있고, 우리 코치진은 전술적 안목이 좋다. 그러니 해리슨의 결점을 잘 다듬어 줄 것이다.
그러니, 앞으로 해리슨 문제는 맡겨두면 되겠지. 선수를 키우는 건 감독과 코치진의 몫이니까.
내 업무는 축구단을 키우는 일. 예를 들면 해리슨의 패스에 연동할 수 있는 선수를 데려온다거나···.
문득, 영상 속의 해리슨과 눈이 마주친 것 같았다.
선수로 뛰던 당시의 내게는 결코 보이지 않았던 풍경, 1초 뒤에 생겨날 수비의 허점을 찾고 있을 바로 그 눈을 응시하다가···.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분석실을 떠나 브리핑 룸의 스크린 앞에 앉았다.
* * *
브리핑 룸에서도 영상이 한창 흘러나오는 중이었다.
[마침내, 선덜랜드가 갖지 못했던 트로피를 차지합니다!]
웸블리 장내 아나운서의 힘찬 외침 속에서 피터 톰슨이 트로피를 들어 올리는 장면이었다.
잠시 후 카메라는 톰슨을 떠나 관중석의 모습을 비췄다.
화면 속에서, 선덜랜드 레플리카를 입은 우리 팬들이 우승의 기쁨을 만끽했다. 감격의 환호를, 혹은 기쁨의 눈물을 흘리면서.
그런 팬들의 모습의 위에, 2년 전 웸블리의 풍경이 덧씌워진다. 리그 원 승격 플레이오프 최종전, 찰턴에게 라스트 미닛 골을 얻어맞고 탈락하던 바로 그 순간으로.
[Sunderland ’til I die - the Last Dance]
타이틀이 선명히 떠올랐다. 우리와 넷플릭스가 함께 야심차게 준비하는 다큐멘터리 새 시즌의 오프닝이 될 영상이었다.
프리미어리그 복귀와 함께 빵 하고 터트리는 게 목표다. 이러려고 아마존 거르고 넷플릭스와 스폰서 계약 했던 거지.
“어떠십니까, 구단주님?”
“잘 뽑았네요.”
개인적으로는 그냥 시간 순서대로 하면 어떨까 싶은 생각은 든다. 라스트 미닛 골에 침몰한 비극으로부터 부활해, 2년 후 마침내 EFL컵 트로피를 들어 올린 거니까.
하지만 참견하지는 않았다. 투자의 비결은 항상 재능 있는 사람을 발견해서 일을 맡기는 것이고, 이들은 이미 선덜랜드 다큐멘터리 두 개를 찍어낸 제작팀이다.
영상에 대해서는 맡겨 두면 충분할 것이다.
“앞으로도 계속 잘 부탁드립니다. 필요한 내용은 저희 영상팀, 그리고 시설관리팀에 요청하시면 친절하게 도와줄 겁니다.”
내 말에 맞춰 조엘이 미소를 지었다. 넷플릭스 제작팀도 미소로 화답했다.
“그럼, 다음 촬영 일정이 있어서 가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구단주님.”
제작진들이 떠나자, 조엘의 미소가 사라졌다.
“다큐 제작팀은 소문대로 선덜랜드 팬이 맞는 것 같습니다. CS팀에 확인해봤는데, 우리 피규어를 사간 적도 있다고 하더군요.”
“영상 소품으로 산 거 아니겠습니까?”
“스폰서 계약을 하기 전의 일입니다. EFL컵 우승 직후에 곧바로 쓸어갔다더군요.”
어, 용케도 확인했네··· 아마 에이미의 탁월한 기억력 덕분이겠지만.
잠시 후 조엘이 굳은 표정으로 덧붙였다.
“그리고, 다큐멘터리 제작진은 훈련장 쪽에는 출입하지 않았습니다. 당시에도 직원이 붙어 있었지만, CCTV를 돌려 보면서 확인했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다큐 제작진은 후보에서 제외해도 되겠군요.”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해리슨의 출전 소식이 어떻게 미리 샜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해리슨을 보호하기 위해서도 그렇지만, 팀 전체를 위해서도 필요한 조치다.
아무리 브라이언과 샐리가 천재적인 전술을 짜내더라도, 미리 우리 패를 미리 들켜버리면 아무 소용이 없다.
처음엔 훈련장의 드론을 의심했다. 우리 훈련장에는 이미 드론 수십 대가 떠다니는 중이니, 한 대쯤 외부 드론이 섞여 들어와도 눈치채지 못한 게 아닐까 싶어서.
실제로 축구계에는 다른 팀 훈련장을 드론으로 훔쳐본 사례가 있다. 지금은 훈련을 염탐하는 행위를 리그 차원에서 금지하고 있지만, 언론은 그런 거 신경 안 쓰겠지.
하지만, 드론은 아니라고 조엘이 단언했다.
“드론 관리는 철저히 하고 있습니다. 식별 안 된 드론이 포착되면 곧바로 격추할 준비도 끝냈고요.”
심지어 훈련장을 찍는 드론들 사이에, 다른 드론을 감시하는 드론을 날려 두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더니 마음이 놓였다.
하지만 조엘의 생각은 달랐던 모양이다.
“구단주님, 아무래도 내부자 소행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구단을 인수한 지 벌써 2년이 되었고, 덕분에 우리 스태프들 한 사람 한 사람과도 알고 지낼 만큼 친분이 생겼다.
그래서 확신한다. 이제 와서 새삼 팀의 정보를 가볍게 발설할 사람은 아무도 없음을.
팀이 어렵던 시절에도 선덜랜드를 지켜왔던 직원들, 그들에 대한 내 신뢰는 두터웠다.
범인은 외부에 있을 것이다.
나는 정보의 출처를 더욱 철저히 조사하도록 지시했다.
* * *
“이 판에 처음 기사를 흘린 게 누군지 찾아보니까, 타인위어 스포츠가 나오더라고.”
타인위어 스포츠. 기억이 난다.
구단 인수 직후부터 어그로를 끌고, 급기야 나와 희주의 사생활 찌라시까지 뿌렸던 곳.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놈의 ‘미모의 여비서’ 드립이.
이후 적당한 금융치료와, 애니의 관리 덕분에 잠잠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안 망했나 보군요.”
싸늘하게 웃자, 애니가 미소를 지었다.
“정확히는 그곳 출신 기자. 지금은 프리랜서, 그러니까 일종의 프리라이터야.”
타인위어 스포츠는 얌전해졌으니까 말이지, 그렇게 덧붙이며 웃는 애니의 곁에서 희주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째 꼭 미국 갔다, 혹은 착해졌다는 이야기 같아서 살짝 으스스한데.
“그 프리랜서 기자인지 프리라이터인지를 찾아서 추궁한 결과, 소스로 SNS가 나왔다는 이야기지. 한번 봐.”
[해리슨의 데뷔가 임박했어. @축잘알]
@축잘알이라고? @반짝반짝SQ와 잘 어울릴 듯한 아이디인데··· 설마, 브라이언 이놈 짓인가?
[근거? 첫째, 선덜랜드는 평소보다 아주 강력한 보안과 정보통제를 유지하고 있지. 이건 보통 평소와 다른 전술을 쓸 때의 패턴이잖아? 둘째로···.]
아니구나. 미안, 브라이언.
@축잘알은 이런저런 근거를 내세우며, 우리가 크리그 대신 해리슨을 낼 것이라고 추측했다··· 거의 정답이다.
덕분에 반응이 꽤 뜨겁다. 초반에는 ‘그냥 가서 소설이나 써라, 축알못아’ 같은 조롱으로 점철되었는데, 경기 라인업 이후에는 사람들의 태도가 180도 바뀌었다.
‘성지순례하러 왔습니다.’ ‘복권 당첨되게 해주세요.’ ‘애인 생기게 해주세요.’ 같은 식으로.
나 역시 잠깐 눈을 감았다.
우승하게 해주세요. 트레블 하게 해주세요.
“어떻게 생각해?”
“당장 만나고 싶어졌는데요.”
* * *
@축잘알은, 이십 대 후반의 청년으로 밝혀졌다.
키가 크고 말랐는데, 눈 주위가 퀭하고 다크서클이 심했다. 그렇다고 브라이언이나 샐리처럼 과로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으니, 아마 평소엔 밤낮이 바뀐 삶을 사는 모양이다.
구단주 사무실에 불려온 @축잘알은 필사적으로 항변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냥 얻어걸린 겁니다.”
“압니다.”
@축잘알의 존재를 알게 된 후, 처음엔 흥분했었다.
상대팀 라인업 정보는 우리도 훨씬 정확하게 뽑아내지만, 그건 샐리가 매일같이 비디오를 돌려 보고 통계 자료를 살핀 끝에 얻어내는 결과였다.
약간의 정황 증거만으로 아마추어가 라인업을 유추할 수 있다면, 탁월한 인재임에 틀림없다고 믿었다.
샐리와 브라이언의 과로를 조금 덜어줄 수 있는 인재라는 기대감에, 곧바로 뒷조사에 나섰던 것이다.
하지만 막상 깊게 파헤쳐보니 그의 안목은 딱히 비범하지는 않았다. 이전에도 유사한 글을 몇 번 썼는데, 맞을 때도 있지만 틀릴 때도 많았다.
인터넷에서 축잘알로 행세할 정도는 되겠지만, 프로 분석관으로 쓸 급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를 구단주실까지 불러온 이유는···.
내 눈치를 살피던 @축잘알이 싹싹 읍소했다.
“구단주님! 저는 염탐 같은 것도 안 했고··· 제발, 고소는 하지 말아주세요.”
“고소요?”
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구단주님을 적으로 돌리면 인생이 끝장난다고 들었는데요. 기자한테요.”
처음엔 희주가 범인인가 싶었는데, 기자라고 한다. 그래서 무심코 애니에게 시선을 돌리자, 곧바로 ‘나 아니야.’라는 시선이 돌아왔다.
@축잘알이 더듬거렸다.
“찌라시 잘못 냈다가 사장한테 짤렸다고··· 그때부터 인생이 완전히 꼬였다던데요!?”
아, 타인위어 스포츠 쪽이겠구나. 고개를 끄덕인 다음 나는 차분하게 응대했다.
“고소하려고 부른 건 아닙니다. 선덜랜드에서 직원을 뽑는 중이라서요.”
“정말이십니까? 그거, 혹시 제 신상 털려고 속임수 쓰시는 거 아니죠?”
“신상이요?”
“근로계약서에 이름하고 주소 써야 하잖습니까.”
그러자 옆에서 희주가 키득거리기 시작했다.
“@축잘알씨··· 가 아니고, 아벨 가드너 씨. 지금 어디 계시죠?”
@축잘알, 혹은 아벨의 몸이 굳어졌다.
그의 신상을 알아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예전에 누군가 말했던 것처럼 여기는 영국이고, 도일과 크리스티의 나라이기에.
“아벨 씨 신상 정보는 필요 없습니다. 이미 다 알거든요. 이건 정말로 채용 제안입니다.”
“감사합니다! 그래서, 저한테 무슨 일을 시키시려는 겁니까?”
“SNS 대응팀에서 근무해줬으면 좋겠습니다. 정확히는 프레스팀 산하의, SNS 대응 책임자로요.”
@축잘알이 사실 별로 축잘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불러들인 이유는, 그가 가진 SNS상의 파급력 때문이었다.
극히 한정된 정보만으로 논리적인 정보를 만들어낼 수 있는 정도의 통찰력과 사람들의 관심을 모을 수 있는 글재주, 그리고 이마의 숫자 10까지.
틀림없이 좋은 키보드 워리어가 되어 줄 것이다.
희주가 내민 근로계약서에 서명을 마친 아벨이, 내게 시선을 돌렸다.
“그럼 구단주님, 이제부터 어떻게 SNS를 관리하면 될까요?”
업무의 우선순위를 확인하는 아벨을 바라보며,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사실, 내 마음속에서는 이미 명확한 우선순위가 있었다.
당장 SNS에 가장 알리고 싶은 내용은 당연히 다큐멘터리였지만, 사실 그건 넷플릭스가 알아서 해줄 문제다. 그러니 선덜랜드 구단주로서의 업무는 아니다.
그다음은···.
해리슨에게 불필요한 관심이 쏠리지 않게 하는 것. 장차 팀의 미래가 될 새싹이, 안전하게 자라날 수 있도록 키울 토대를 만들고 싶었다.
그리고, 이제 곧 팀을 떠나갈 사내를 최고의 형태로 전별할 준비를 해야 한다.
그렇다고, 이제 새로 들어온 SNS 담당자에게 이 모든 지시를 다 전달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기에···.
“선덜랜드 팬들이 기다리시던 블랙캣츠 스탠드가 곧 오픈한다고. 그 이야기로 SNS가 가득 뒤덮이게 해 주세요.”
···나는 그렇게만 지시했다.
* * *
[내일부터 계정 폐쇄합니다. @축잘알]
- 고소미 먹음? 그래서 내가 선덜랜드는 건들지 말랬잖아. 거기 구단주한테 불려간다니까. 그 양반 트위터 지분 많이 가졌어.
[구단주실에 불려간 건 맞는데, 고소미는 안 먹었음. 내일부터는 선덜랜드 직원이니까, 공식 계정에서 봅시다. @축잘알]
ㄴ 어 그냥 드립이었는데, 진짜 불려갔네.
[계정 닫기 전에, 마지막으로 딱 이것만 말하겠음. #44R #스탠드 #오픈 @축잘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