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라스트 댄스 (4)
챔피언십 40라운드, 카디프 대 선덜랜드.
원정 경기를 맞아, 브렌든은 핫도그 사내와 함께 축구 펍을 찾았다.
맥주집 사장이 두 사람을 반갑게 맞이했다. 카운터석에 앉은 두 사람의 앞에는 언제나처럼 근사한 안주와 시원한 맥주가 놓였다.
“오늘도 해리슨 선발이라고?”
“어쩔 수 없지. 크리그 부상이니까. 그래도 큰 부상은 아니라니까 곧 복귀할 거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던 둘의 앞에서 맥주집 사장이 인상을 썼다.
“턴오버 머신 좀 그만 쓰지. 유소년 리그 종종 가서 봤는데, 많이 별로더라고.”
그러자 핫도그 사내가 곧바로 응수했다.
“어린 선수잖아? 아직 실력은 더 키워야겠지만, 확연한 센스가 느껴지는데.”
브렌든이 뭐라고 끼어들기도 전에, 핫도그 사내와 맥주집 사장이 서로 눈을 부라렸다.
두 사람 모두 체격이 좋았고, 솥뚜껑 같은 손과 통나무 같은 팔뚝을 가진 억센 사내들이었다.
그래서 브렌든은 말리는 대신 맥주를 들이켜기로 했다.
“턴오버 머신? 그 턴오버 머신이 공격 포인트라도 올리면 어쩌려고 그렇게 막말을 하지?”
“하, 그럼 자네들 오늘 술값은 공짜야. 못 올리면?”
“매상 두 배로 올려 주지.”
어느 결론이 나더라도 브렌든으로서는 손해볼 일이 없는 흐름이었다.
‘투자는 이렇게 하는 거지.’
만족스럽게 혼자 고개를 끄덕이는 브렌든을 향해, 두 사람이 시선을 돌렸다.
“브렌든,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해리슨 같은 어린 선수를 선발로 쓰는데, 이러다 사고 한번 날 것 같지 않나?”
“해리슨 같은 특급 유망주가 명장을 만났으니, 제대로 사고 한번 칠 것 같지 않나?”
브렌든은 두 사람의 험상궂은 얼굴과 팔뚝, 손을 차례로 흘끔거린 다음 대답했다.
“어, 나는···.”
누구 편을 들어도 후환이 두렵다보니 대답이 궁하다. 신중하게 말을 고르던 중, 브렌든의 스마트폰이 울렸다.
마일즈가 보낸 메시지였다.
[블랙캣츠 스탠드가 곧 열린다는데. 44라운드 홈 경기부터!]
링크도 딸려 있었다. 정보의 출처는 @축잘알이라는 사람이었는데, SNS에서는 꽤 유명한 모양이었다.
“이봐 브렌든,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냐니까?”
바짝 얼굴을 들이대는 핫도그 사내와 맥주집 사장을 향해, 브렌든은 침착하게 스마트폰을 내밀어 보였다.
두 사내가 동시에 합창처럼 중얼거렸다.
““스탠드가 생각보다 빨리 열린다?””
맥주집 사내의 눈에 이채가 돌았고, 잠시 후 눈동자가 쉴 새 없이 좌우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관중석의 수용인원이 늘어나면 아무래도 축구 펍으로서는 고객을 뺏기는 문제가 있지만, 대신 경기장 주위의 인원이 늘어나면 매출에는 분명 긍정적일 것이다.
한편, 핫도그 사내 역시 환호했다.
“좌석이 늘어난다. 따라서··· 시즌권도 늘어난다. 얼마나 더 풀릴지는 모르겠지만, 시즌권이 풀린다고! 이제 편하게 직관할 수 있어!”
환호하는 핫도그 사내와 눈동자를 굴리는 맥주집 사장을 번갈아 흘끗거리며, 브렌든은 재빨리 핫도그 사내의 옆구리에 팔꿈치를 찔러 넣었다.
시즌권을 사면 아무래도 축구 펍에서 경기를 볼 일이 줄어들게 된다. 맥주집 사장도 이미 짐작할 일이겠지만, 굳이 그 앞에서 대놓고 할 말은 아니었다.
“아···.”
브렌든의 팔꿈치를 느낀 핫도그 사내가 재빨리 표정을 관리했다. 그 모습을 본 맥주집 사장이 웃었다.
“괜찮아. 나도 선덜랜드 팬이고, 게다가 우리 집은 장사 엄청 잘되거든.”
그러자 핫도그 사내도 히죽 미소로 화답했다.
“홈 경기 당일에는 얼굴보기 힘들겠지만, 원정 날은 여기 올게. 앞으로도 자주 보게 될 거야.”
“그러자고.”
변함없는 우정을 과시하는 두 사람을 향해, 브렌든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자네들, 혹시 뭐 잊어버린 거 없나?”
“글쎄 뭐였지?”
“기억이 잘 안 나는데.”
속으로는 안도하면서, 브렌든은 보란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시즌권, 못 구했다.”
선덜랜드 팬들이 애타게 기다리던 증축, 그 증축 이벤트가 완료되었다는 소식에 이제 데뷔전을 치른 지 얼마 안 되는 열여섯살 신인 해리슨은 곧바로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그 무관심 속에서.
해리슨은 조용히, 자신의 가치를 시험받을 준비를 마쳤다.
* * *
로저스 감독은 오늘 4-4-1-1을 들고나왔다. 챔피언십에서 우리가 늘 사용하던 친숙한 포메이션이지만, 선수들의 위치는 평소와 달랐다.
원래 크리그의 자리인 최전방에는 요니가 섰고, 요니가 맡던 자리는 해리슨의 몫이었다.
해리슨은 이전보다 훨씬 편안해 보였다. 안색도 좋고, 표정도 훨씬 밝았다.
포지션이 조금 아래로 조정되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데뷔전의 긴장이 사라졌기 때문인지··· 혹은 팬들의 반응이 평범했기 때문인지까지는 모르겠지만.
어린 선수인 만큼, 긴장이 풀린 건 경기력에 긍정적일 것이다.
경기장을 내려다보던 희주가 옆에서 명랑하게 말했다.
“오늘은 좀 다르려나? 그랬으면 좋겠는데.”
“다르긴 할 거야. 얼마나 다를지는 모르겠지만.”
데뷔전을 치를 때는 재능을 간파하지 못한 채 무작정 실전에 투입했지만, 지금은 해리슨이 어떤 타입의 선수인지 알아내 적합한 역할을 맡겼다.
그리고 자칫 어린 선수를 좀먹을지도 모르는 팬들의 지나친 관심도 차단했다.
데뷔전에서의 낮은 평점에, 우리가 준비한 SNS 여론몰이가 더해지자 팬들은 해리슨에게 큰 기대를 두지 않게 되었다.
부담감 없이 뛰기 좋은 조건이다.
“혹시 모르니까 SNS 반응도 일단 체크는 해볼게.”
“그래.”
잠시 후 우리의 선축으로 경기가 시작되었고, 경기 초반, 해리슨의 경기력은 우리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아니, 쟤는 왜 저렇게 자꾸 공을 흘리는 거야?”
“아직 어리니까.”
정확히는, 프로 수준의 판단력을 갖추지 못했으니까.
“무슨무슨 턴 하는 거 보면 개인기가 나쁜 선수는 아닌데··· 그 좌우로 쉭쉭 하는 거는 못 하는 거야? 헛다리나.”
좌우로 쉭쉭? 라 크로케타를 말하는 걸까, 아니면 플립 플랩? 나는 무심코 실소하고 말았다.
하긴, 위로 올라가면, 그런 타입의 드리블러도 한 명쯤 필요하긴 하겠다.
그동안 우리의 돌파는 주로 역습 상황에서 상대의 대열이 무너진 틈을 노려 속도로 뚫어내는 방식이었다. 화려한 개인기보다는 간결한 움직임이 훨씬 중요했다.
이젠 다르겠지. 프리미어리그 팀들이 작정하고 내려앉아 수비하기 시작하면 정말로 단단해지니까.
수비에 균열을 낼 드리블러 한 명 정도는 구해와야 한다. 그리고, 해리슨의 패스를 받아줄 선수도.
거기까지 생각하니, 무심코 웃음이 나왔다. 옆에서 희주가 갸웃거렸다.
“오빠, 왜 웃어?··· 아, 알겠다. 쟤 패스가 어이없어서 그러는구나?”
마침 해리슨이 또다시 패스미스를 해버린 참이었다.
재능의 편린을 드러냈다고는 하지만, 이제 겨우 열여섯. 아직 유망주에 불과한 해리슨이, 팀의 찬스메이커로 개화할 때까지는 더 오랜 시간이 필요할 텐데···.
“기대가 없어서 그런지 야유도 없네? 우리 팬도 그렇지만, 카디프 팬들도 생각보다 얌전해.”
“축구팬들은 의외로 단순하니까.”
아무리 상대 팀이라도, 겨우 열여섯 살 유망주에게 야유를 퍼붓거나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 유망주가 무슨 라마시아 메친놈이 아닌 이상에야.
“아, 또 흘렸다.”
희주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오늘 카디프의 수비에서 특별한 허점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심지어 관중석, 익스클루시브 박스에서 경기장 전체를 내려다보는데도 쉽게 빈틈을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래서일까. 해리슨은 경기 내내 줄기차게 턴오버를 반복했다. 그가 패스미스, 혹은 트래핑 미스처럼 보이는 잔실수를 반복할 때마다 공은 카디프 소유로 넘어갔다.
어떤 의미로는 꿋꿋할 정도였다. 해리슨의 재능에 대한 확신, 그리고 팀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진작에 그를 교체했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해리슨이 공을 흘릴 때마다 최전방에서는 요니가 상대 센터백과 골키퍼를 거세게 압박했고, 중원에서는 톰슨과 잭이 철통같이 지켜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전반이 끝나고 후반 55분이 될 무렵··· 우리의 유망주가 마침내 팀원의 신뢰와 헌신에 보답했다.
* * *
카디프의 센터백, 션은 해리슨을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저 꼬맹이가 요니 대신이고, 요니가 크리그 대신이란 말이지?’
요니를 크리그 대신으로 쓰는 건, 최상의 선택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이해할 수는 있는 결단이었다.
‘요니 그놈은, 꼭 장어처럼 요리조리 헤집고 다니니까 말이지. 잘 불잡히지도 않고.’
하지만 해리슨을 요니 대신 정말로 이해하기 힘든 결단이었다. 일단 다른걸 다 떠나서, 가만히 기다리면 공이 줄줄 새니까.
조금 전에도 해리슨은 괜히 바람개비처럼 빙글빙글 돌다가 공을 흘렸다. 덕분에 손쉽게 공을 주웠다.
‘뭐, 우리야 상대하기 편해서 좋지만.’
그의 동료 베넷도 마찬가지 생각인지, 해리슨과 요니를 번갈아 바라보며 입맛을 다셨다.
“선덜랜드도 참 어지간하네. 돈도 많으면서··· 솔직히 나 같았으면 진작에 크리그 로테이션 돌릴 멤버 샀겠다.”
“알뜰한 거지. 자기들이 챔피언십에 머무르는 기간은 딱 한 시즌뿐이라고 정했을 테니까.”
프리미어리그에서도 뛸 수 있을 공격수라면 챔피언십 팀에 와줄 리가 없을 뿐더러, 설령 온다 쳐도 크리그의 백업으로 만족할 리는 없다.
그렇다고 지금 크리그의 백업 자리를 순순히 받아들일 공격수를 사온다면, 승격 후에는 쓸모가 없어질 것이다. 심지어 크리그조차 1부 리그 팀 상대로는 고전 중이었으니.
‘어쩌면 방출될지도 모르겠군··· 그래도 챔피언십에서는 수준급 선수니까, 우리 팀에 와 주면 좋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선덜랜드의 해리슨이 공을 건네받았다. 션이 접근하자, 해리슨은 이번에도 또 바람개비 흉내를 냈다.
‘이번엔 저절로 흘려주지 않으려나.’
문득 실없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해리슨의 턴은 퍽 능숙했고, 공을 빼앗기는 쉽지 않았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저절로 흘리기를 기다릴 수밖에···.
‘공이 어디 갔지?’
문득, 션은 등골이 오싹해졌음을 깨달았다.
공이 없다. 그리고 요니도 없다.
션이 황급히 몸을 돌리자 그의 등 뒤는 텅 비어 있었고, 질주하는 선덜랜드의 19번 유니폼과 공의 모습이 보였을 뿐이었다.
* * *
해리슨은 포백라인 바로 앞까지 전진했지만, 그렇다고 센터백을 돌파하려 도전하지는 않았다. 그저, 수비로부터 공을 지켜내려는 듯 움직였을 뿐이다.
지금까지 늘 그래왔던 것처럼. 빙글, 빙글.
다음 순간, 공은 해리슨의 발에 남아있지 않았다. 포백라인을 확실하게 지나간 공은, 마치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카디프 수비라인 뒤를 힘없이 굴렀다.
꿈틀, 무심코 무릎에 힘이 들어가서 그만 자리에서 일어나고 말았다. 알고 있는 종류의 패스였기에.
유소년 시절의 내가 받아본 적이 있던, 발만 가져다 대면 득점으로 바뀌는 패스··· 공격수를 저절로 달려들게 만드는 패스다.
오프사이드를 피해 포백라인 부근에 머물던 요니가 단숨에 안으로 파고든 것은, 해리슨의 몸이 완전히 한 바퀴를 회전했을 때와 동시였다.
춤사위를 끝내는 피날레처럼.
“말도 안 돼! 어떻게 저런 플레이가···.”
옆에서 들리는 희주의 멍한 중얼거림을 신호로, 선덜랜드 팬들의 조금 뒤늦은 함성이 터져나왔다.
We do what we want. We do what we want.
득점까지의 장면은 순식간에 일어났다. 화려한 개인기나 압도적인 속도는 필요 없었다. 요니는 그저 공간을 파고든 다음, 달려나오는 골키퍼를 피해 공을 살짝 밀어넣기만 했을 뿐이다.
[카디프 0 - 1 선덜랜드]
선덜랜드 원정팬의 조금 뒤늦은 함성 속에서, 요니는 곧바로 해리슨에게 달려들어 머리칼을 마구 헝클어트렸다.
팬들의 환호 속에서.
We are Sunderland. Say we are Sunderland.
하나둘씩 달려드는 붉은 유니폼의 물결, 그 한가운데서 어깨를 살짝 움츠린 채 곤란한 것처럼 어색하게 웃는 해리슨을 바라보며··· 나는 무심코 중얼거리고 말았다.
“그래서, 계속 빙글빙글 돌았구나.”
수비의 압박을 피해 공을 지켜내려는 의도도 있었겠지만, 주된 목적은 아마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턴 계열 개인기를 쓰는 동안엔, 필연적으로 시선 또한 사방으로 돌리게 되니까.
그렇게 해리슨은 경기장의 정보를 쉼 없이 파악했을 것이다. 자기 뒤에 누가 있고, 앞에는 누가 있는지.
모든 정보를 종합했을 때, 공간이 어디에 생겨날 것인지.
“오빠, SNS 아주 난리 난 거 같은데?”
감추려고, 아끼려고 주머니 속에 넣어 두었더니 그만 삐죽 튀어나와 버린다. 예리한 송곳처럼.
재능은 예기치 못한 순간 모습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존재하기만 한다면, 반드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