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자의 신이 키우는 축구단-105화 (105/422)

105화. 라스트 댄스 (5)

재능의 편린은 딱 한순간의 반짝임으로 끝났다.

해리슨은 어시스트 이후에도 또다시 무수한 턴오버를 양산했고, 70분이 지날 무렵에는 교체 아웃되었다.

단, 질책성 교체는 아니었고 오히려 무리하지 않도록 배려하는 느낌에 가까웠다. 열여섯 살짜리 선수에게 1군 경기의 풀타임은 다소 가혹하니까.

사이드라인을 떠나는 해리슨에게, 우리 팬들의 따스한 박수가 쏟아졌다. 아, 물론 나도 쳤다. 기립박수로.

옆에서 희주가 불쑥 말했다.

“이래서는 세상의 무관심을 유도하기 힘들겠네.”

“뭐, 그렇겠지.”

보는 눈이 없는 팬이라면, 해리슨은 기복이 심한 선수라고 생각할 것이다. 수많은 턴오버 끝에 어쩌다 한 방, 일종의 럭키 펀치를 성공시켰다는 느낌으로.

딱 그 정도만으로도 팬들에게 기대감을 주기는 충분할 정도인데, 보는 눈이 있는 팬이라면 해리슨이 만들어낸 어시스트가 무척 비범하다는 걸 눈치채지 못할 리 없다.

조만간 해리슨에 대한 소문이 온 사방에 퍼져나가겠지. 다른 팀들의 눈에도 띌 것이고, 그러다 보면 경계당하거나 약점을 공략당하기도 할 것이다.

혹은, 가로채려 들거나.

나는 벤치로 돌아간 해리슨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앞으로 내가 지켜내야 할 재능, 팀의 미래가 될 유망주를.

혹은, 몸이 식지 않도록 유니폼 위에 이것저것 걸친 채 다시 열여섯다운 표정을 지으며 주위를 둘러보는 어린 선수를.

로저스 감독의 굳은 얼굴에 미소가 피었다. 해리슨의 어깨를 두드리고 머리에 살짝 손을 올렸다. 그러자 해리슨의 얼굴에 살짝 미소가 피었다.

“어머, 귀여워라!”

호들갑을 떠는 희주의 곁에서 나도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해리슨이 떠난 직후, 잭이 또다시 득점을 올렸다. 선덜랜드 특유의 역습으로.

경기는 그렇게 우리의 두 골 차 승리로 끝났다. 아쉽게도 1위와의 승점 차이가 좁혀지지는 않았지만, 추격의 불씨는 여전히 꺼지지 않았다.

믹스드 존에는 로저스 감독과 주장 페르난데스가 섰다.

기자들은 불만스러워 보였다. 개중에는 팬들의 관심이··· 같은 이야기를 하면서 입을 삐죽거리는 부류도 있었다.

“해리슨을 보고 싶었던 모양이네요.”

어차피 오늘 어시스트를 성공시킨 순간, 숨기고 있을 수만은 없게 되었다. 그러니 이제 적당히 정보를 풀어줄 필요도 있을 것 같았지만, 프레스 팀장 애니가 격렬하게 반대했다.

“해리슨은 당분간 인터뷰 안 시킬 거야.”

“하긴, 경험이 부족한 어린 선수죠.”

경기 경험은 물론, 인터뷰 스킬도 부족하다. 괜히 언론에 휘둘리게 두는 것보다는, 우리가 싸고도는 게 훨씬 낫지 싶었다.

애니가 서늘하게 웃었다.

“그렇기도 하지만, 가장 부족한 건 채찍이야. 남의 팀 유망주의 데뷔전을 망쳐놓고도 계속 편하게 인터뷰할 거라고 믿었으면, 너무 나이브한 거지.”

그렇게 얼빠진 기자들은 빨리 접는 게 낫다며 애니는 미소를 지었지만, 눈은 조금도 웃고 있지 않았다.

살짝 살기까지 느껴질 정도라 조금 무섭다. 그러고 보니 애니도 기자 출신, 심지어 선덜랜드 데일리 시절엔 편집장하고 친구 먹던 베테랑이었다.

“솔직히 페르난데스나 톰슨 같은 베테랑 들쑤시는 거야 우리도 딱히 터치 안 해. 그런데 열여섯 살짜리 건드리는 건 선 넘었지. 데뷔전을 망칠 뻔했잖아. 저렇게 잘하는 애가.”

선덜랜드 프레스 팀장으로서의 대응이라기보다는, 순수하게 축구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의 분노에 가까워 보인다. 공감이 가서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떠오른 사실을 그녀에게 물었다.

“그런데, 언론은 그렇다 치더라도··· 팬들에게는 어느 정도 정보를 줘야 할 것 같은데요.”

“그건 너무 걱정하지 마. 다 생각이 있거든.”

잠시 후 구단 SNS 채널에 메시지가 떴다.

[여러분이 기다리시던 해리슨과의 Q&A 시간입니다! 질문 마구 보내주세요! @선덜랜드_오피셜]

동시에 스트리밍 생중계가 해리슨의 모습을 비췄다.

팬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기습적인 인터뷰인데도.

확실히 전직 @축잘알, 아벨로서는 역시 지금처럼 판을 시끄럽게 만드는 게 특기겠지.

- 요니는 기숙사 산다던데··· 너도 그래?

“네! 기숙사에서 살아요.”

영상 중간에, 잠시 자료 화면으로 우리 구단 ‘기숙사’의 시설이 흘러나왔다. 이번에 싹 리모델링한 기숙사가 반짝거렸다.

혹시라도 인터뷰를 보고 있을 다른 구단 관계자를 견제하기 위한 용도였다. 다른 건 몰라도, 선수 대우나 복지로 흔들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고.

- 시설은 좋긴 한데··· 그래도 기숙사라고? 밖에서 지내는 게 편하지 않아? 혹시 주급이 짠가?

“그게, 계약 관련 이야기는 발설 못 하게 되어 있는데···.”

음, 아직 어린데도 교육 잘 받았네. 이런 건 유소년팀 감독에게 배웠으려나?

“그래도 구단에서 집도 제공해주기로 되어 있어요. 실제로 벌써 두 채나 사 줬고요. 한번 보실래요?”

해리슨은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집 두 채 사진을 자신의 태블릿에 띄워 내밀었고, 팬들은 뒤집어졌다.

- 레고 아니냐?

“네! 구단에서 선물해준 건데요. 만들긴 제가 만들었지만요. 구단에선 저한테 정말로 잘해줘요. 차도 줬고요.”

- 차? 하는 거 보니까 RC카겠지.

ㄴ 미니카일지도 몰라.

또다시 자료 영상이 떠올랐다. 미끈한 로드스터가.

아직 해리슨에게 면허가 없어서 주차장에만 있다는 자막과 함께, 구단은 무면허 운전을 엄하게 단속할 거라는 안내도 함께 내보냈다.

미니카 드립은 곧바로 잠잠해졌다.

아무튼, 기자들과 달리 우리 팬들이고 SNS 채널을 이용하다 보니 전반적으로 질문들이 가볍다. 축구 관련 이야기는 거의 나오지 않았고, 대부분이 사담 위주다.

지나치게 쓸데없는 질문은 아마 프레스 팀에서 거르고 있겠지만··· 뭐, 해리슨에게는 딱 이렇게 부담 없고 가벼운 인터뷰가 좋을 것 같다.

잠시 후, 오늘의 마지막 질문이 올라왔다.

- 어린 선수의 장래를 함부로 재단하려는 건 아니지만, 오늘 경기에서 보여준 모습은 스트라이커라는 느낌은 아니었지. 그런데도 9번을 지망하는 이유가 있어?

하긴, 9번은 주로 공격수, 그것도 정통 스트라이커들이 선호하는 번호긴 하다. 해리슨의 스타일에 어울리는 느낌은 아니었다.

잠시 망설이던 해리슨은, 일단 ‘저는 99번인데요.’라면서 서두를 뗐다. 자기는 감히 9번을 달 수는 없다면서.

“그래도 정말 동경하는 번호거든요. 선수 시절에는 팀에서 9번을 달았고, 선수를 그만둔 다음에도 팀에 돌아와 헌신하는 분의 상징이니까요.”

나이얼 퀸의 팬인가. 샐리가 들으면 좋아하겠네.

옆에서 희주 녀석이 히죽거렸다.

“그거 완전 오빠···.”

“시끄러워. 어디 가서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사백억 원의 재능을 가진 유망주가, 프로조차 되지 못한 채 유소년 선수로 끝난 나를 동경한다고? 그건 너무 자의식 과잉이지.

아무튼, 그날부터 해리슨에 대한 세상의 관심이 폭발했다.

“구.단.주.님? 아스널에서 문의가 들어왔는데요.”

“거절해.”

“내용도 안 들어보고?”

“뻔하지 뭐. 해리슨 팔라는 소리잖아?”

어휴, 연락 빠른 것 좀 보소. 누가 유망주 밝히는 구단 아니랄까 봐 이적 시장 열리기도 전에 달려드네.

“가격은 최대한 맞춰주겠다는데?”

“에미레이츠 스타디움 얹어줄 거 아니면, 그냥 해리슨 피규어나 사가라고 해.”

물론 싸우자는 건 아니니까, 외교적 수사를 듬뿍 섞어서.

희주는 비교적 온건한 회신을 보냈고, 피규어 운운하는 내용은 한 마디도 담지 않았다. 알고 보니 해리슨은 신인이라, 피규어가 아직 안 나왔다는 이유였지만···.

그날부터 아스널 이외에도 이적, 임대 문의가 쇄도해, 모조리 거절하느라 진땀을 빼야 했다.

한편, 나는 내부 직원들 상대로도 진땀을 빼야 했다.

[우리의 넘버 99, 마침내 피규어 라인업에 등장!]

신상품기획팀장 아드리안이 회심의 역작을 들고 찾아왔기 때문에.

“구단주님, 그동안 많이 고민했습니다. 매년 새 피규어를 팔고 싶은 구단의 마음과, 지나친 상혼이라 비난하는 팬의 마음을 모두 지킬 수는 없을까를요.”

매년 신상품을 팔고 싶은 주체는 구단이 아니라 아드리안 본인인 것 같은데.

“그래서 제 결론은, 더욱 열심히, 최선을 다해, 혼신의 노력으로 피규어를 만들자는 것이었습니다.”

해리슨 피규어에는 정말 혼신의 노력이 들어가기는 했다. 주로 얼굴 쪽에.

아드리안이 스마트폰 화면을 내밀었다. 며칠 전, SNS에서 다이렉트로 인터뷰하던 해리슨의 얼굴 부분을 클로즈업했다.

“재현도가 놀랍지 않습니까?”

“정말 놀랍군요··· 특히 어린 티를 제대로 살린 부분이요.”

사실은 돈독이 가장 놀랍다. 어린 선수들은 얼굴이 금방금방 변할 테니, 매년 새 피규어를 만들어도 욕먹지는 않을 것이라는 계산이겠지.

[네! 구단에서 선물해준 건데요. 만들긴 제가 만들었지만요. 구단에선 저한테 정말로 잘해줘요. 차도 줬고요.]

해맑게 웃는 해리슨을 바라보는 아드리안의 시선이 탐욕으로 번들거렸다. 조만간 해리슨 버전 레고 하우스나, 해리슨 RC카 같은 굿즈를 팔아먹으려는 속셈이 틀림없다.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RC카는 안 됩니다.”

“알겠습니다, 구단주님.”

흔쾌히 대답하는 아드리안을 바라보며 나는 잠시 고민했다. 혹시 미니카도 팔지 말라고 말해둬야 하는지를.

한편, 41라운드부터는 크리그가 부상에서 복귀했고, SNS는 더욱 뜨겁게 끓어올랐다.

- 크리그에 해리슨이라니, 공격력 지리겠다.

ㄴ 해리슨 패스를 크리그가 받으면 솔직히 챔피언십에서는 치트키 조합 아니냐?

그렇게 기대한 팬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둘이 동시에 출전하지는 않았다. 부상에서 갓 돌아온 크리그도, 아직 어린 해리슨도 당장 풀타임을 뛰게 시키기는 좀 그렇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는 둘을 서로의 교체 대상으로 써먹었다.

크리그는 복귀전에서 골을 넣었고, 해리슨 역시 공격포인트를 기록하며 활약을 이어나갔다.

우리 팀은 그렇게 연승행진을 계속했다.

여전히 순위는 2위였지만, 어느새 1위와의 승점도 3점 차이, 그야말로 바짝 따라잡았다.

올 시즌 챔피언십의 순위는 아마, 44라운드 홈 경기에서 판가름 날 게 틀림없었다.

블랙캣츠 스탠드가 열리는 날이기도 하다.

* * *

드레싱룸에서, 해리슨은 팀메이트들을 두리번거렸다.

동료라고는 해도, 작게는 형뻘 크게는 삼촌뻘이다. 심지어 페르난데스의 경우는 사실 해리슨의 부모와 연배가 비슷하다.

“오늘도 아주 잘했어. 잘했는데··· 왜 나한테 패스 줄 때는 타이밍이 꼬이냐?”

“스스로의 움직임을 반성해, 잭. 신인 괴롭히지 말고··· 진짜 패스 좋았어, 해리.”

한마디씩 격려하는 팀메이트 사이에서, 주장 페르난데스가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어시스트는 아주 좋았지만, 다듬어야 할 점도 많았다.”

“네, 네.”

“잭에게 주려던 패스 말인데, 타이밍이 서로 맞지 않았어. 너도 알지?”

“네, 네.”

저도 모르게 긴장한 해리슨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페르난데스가 빙긋 웃었다.

“그렇다고 긴장하진 말고. 누가 너 잡아먹냐. 잭도 요니도, 스티븐도 절대 널 잡아먹지 않으니까···.”

“아니, 주장님 저는 왜 빼십니까?”

“센터백은 얘한테 패스받을 일 없잖아?”

에디의 사소한 투정을 가볍게 일축하면서, 페르난데스는 차분한 미소를 유지했다.

“이건, 내가 1군이 된 직후의 이야기인데.”

그렇게 운을 떼는 페르난데스를 바라보며, 해리슨은 어색하게 웃었다.

눈앞의 레전드는 젊다 못해 어린 나이부터 클럽과 국가대표의 주전을 차지했던 사람이다. 당연히 신인 시절도 겪었겠지만, 실감이 나지는 않았다.

영국 여왕이 2차대전 때 참전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어도, 실감이 나지는 않는 것처럼.

그런데도 페르난데스는 그립다는 듯, 자신의 예전 이야기를 꺼내놓기 시작했다.

“내가 데뷔했을 무렵, 우리 팀 주장은 센터백이었어. 그런데 어느 날, 수비라인 쪽에 공이 애매하게 굴러오는 거야. 고민이 되더라고. 망설이는 사이 상황이 끝나 버렸지.”

“그건··· 정말 난처하셨겠네요.”

“음? 뭐가 문제죠? 그냥 시키면 되잖아요?”

자기 일처럼 곤란한 표정을 짓는 해리슨과, 무슨 말인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듯한 에디를 향해, 선덜랜드의 주장은 부드럽게 웃었다.

“주장은 아무 말 안 했지만, 옆에서 다른 센터백이 노발대발하더군. 너는 골키퍼가 입이 없냐며. 그래서 다음번에 비슷한 상황일 때는 재빨리 말했지.”

페르난데스의 얼굴에, 장난기가 떠올랐다. 잠시 후 그가 성대모사를 시도했다.

“존경하는 캡틴, 제발 공을 걷어내 주시지 않겠습니까? ···경기 끝나고 눈물 쏙 빠지게 욕을 먹었지. 뭐 그리 말이 기냐고. 공격수 골 넣고 세레머니까지 끝냈겠다고.”

존칭을 붙였다고 해도 그 정도는 아니었을 것을, 해리슨은 이미 알고 있었다. 아무리 길게 말했다 쳐도, ‘걷어내요! 캡틴’ 정도였겠지.

그래도 페르난데스가 일부러 과장된 표현을 쓴 이유를 모르지는 않았기에, 해리슨은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주장에게 혼났던 건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어. 내가 그 사람과 같이 뛰었던 기간은 썩 길지는 않았지만···.”

페르난데스가 해리슨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목소리를 내. 팀원과 의사소통을 해. 경기 시작 전에도, 중간에도, 그리고 끝나고 나서도 계속.”

그러다 보면 동료와 타이밍이 맞지 않는 일은 없어질 거라며, 페르난데스는 무척 부드럽고 자상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해리슨은 문득, 자신을 바라보는 주장의 표정이 무척 친숙하다고 느꼈다.

그 눈빛은, 로저스 감독이 이따금 보이는 것과 닮아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