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자의 신이 키우는 축구단-106화 (106/422)

106화. 라스트 댄스 (6)

“··· 라고 하더라고. 포지션이 다른데도 말이야.”

페르난데스가 해리슨에게 남긴 이야기를 전하며, 브라이언은 입매를 일그러트렸다.

“감독님은 뭐라고 하셔?”

“함께 지낼 시간이 많았다면 천천히 가르칠 수 있겠지만, 남겨진 시간이 얼마 없어서 일부러 말로 전하는 거 같다고 하셨어. 라스트 워드, 선수로서의 유언 같은 거라고.”

“그렇구나.”

“듣고 보니 감독님 말씀이 딱 맞더라. 그러니까 페르난데스가 굳이 자기 신인 때 이야기를 해리슨에게 들려준 거겠지··· 안 그래, 브로?”

나는 대답 대신 브라이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왜,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자기가 지금 듣고 있는 이야기가 무엇인지를, 브라이언은 눈치 못 채는 게 낫다. 불과 얼마 전, 브라이언은 자기가 은사를 밀어내는 것 같다며 굴을 팠던 전적이 있다.

“시즌 마무리 이야기나 하자.”

“오케이, 브로··· 44라운드 상대는 셰필드인데 말이지.”

셰필드는 시즌 초부터 우리와 유력한 1위 경쟁 상대였다. 비록 우리와의 맞대결에서는 침몰했지만, 이후 우리가 EFL 컵에 올인하는 사이 야금야금 승점을 쌓았다.

현재는 챔피언십 1위, 우리와의 승점 차이는··· 3점이다.

“1위 결정전이나 마찬가지네.”

만일 우리가 진다면, 셰필드와의 승점 차이는 6점으로 벌어진다. 46라운드까지 치러지는 리그 특성을 고려하면, 사실상 우승 경쟁도 함께 끝나게 된다.

반대로 우리가 이긴다면?

승점은 동률이고, 골득실은 우리가 우세하다. 따라서 리그 1위 자리를 빼앗아올 수 있다.

즉, 자력 우승의 가능성이 열린다.

덕분에 44라운드는 여러모로 뜨거울 것 같다. 마침 스탠드를 새로 늘린 후 처음 치르는 경기이기도 하고.

희주가 눈을 빛냈다.

“1위 결정전이니까, 팀에서도 잔뜩 준비해야겠네?”

“당연하지.”

사이드라인 안에서 벌어지는 일에, 나는 개입하지 못한다. 하다못해 전술적인 도움조차 줄 방법이 없다.

전술은 브라이언과 샐리에게. 선수단 관리는 로저스 감독에게. 그리고 경기 자체는, 어디까지나 선수들에게 맡길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다. 팀의 우승이 달린 문제인데.

경기장을 뜨겁게 달굴 것이다. 모처럼 SNS 전담 인력도 새로 구했고, 스폰서로 넷플릭스도 확보했으니까.

원정 지옥,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를 더 가혹하게.

아예 불지옥으로 만들어야지.

* * *

“캡틴.”

페르난데스가 천천히 돌아보자,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넣은 에디의 모습이 보였다.

멈춰서자 에디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꼬맹이에게 전하고 싶은 게 있다면, 행동으로 보여주세요. 말로 하지 말고요··· 금방 가버릴 사람처럼 보이잖아요.”

페르난데스는 희미하게 웃었다.

‘금방 가버릴 사람이라 그런 건데.’

올 시즌이 끝나면 골키퍼 장갑을 벗을 생각이었다.

주위에서는 여전히 변함없는 신뢰를 보내 주지만, 페르난데스 스스로는 기량이 예전 같지 않다고 느꼈다.

다음 시즌, 마침내 6년 만에 프리미어리그로 돌아가는 팀의 발목을 잡고 싶지 않았다.

‘도핑이라도 하지 않으면, 1부에서는 버틸 수가 없겠지.’

예전, 어느 슈퍼스타가 그렇게 말한 적이 있다. 자신이 사용한 유일한 도핑은, 끊임없는 노력이라고. 페르난데스보다도 윗세대의 선수가 남긴 말이다.

그 말을 신조로 삼아, 페르난데스 또한 노력했었다. 닭가슴살 셰이크로 식사를 해결하면서··· 이제 그 노력에 마침표를 찍을 때가 온 것이다.

페르난데스는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

“왜, 내가 없어지면 네 세상 아니었냐, 에디?”

“지금도 제 세상입니다만.”

재능 넘치는 젊은 센터백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천재라고 불리는 어린 선수들이 대부분 그렇듯, 에디 역시 강한 자의식을 가진 선수였다. 페르난데스 상대로는 퍽 고분고분하게 굴고 있지만, 다른 선수들 상대로는 아주 볼만할 것이다.

‘내가 사라지고 나면···.’

페르난데스는 물끄러미 에디를 바라보았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목에서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참 이상하지? 미련은 별로 없다고 생각했는데.’

선덜랜드에 오기 전부터 이미 결심했었던 은퇴였었다. 진작에 끝났어야 할 선수 생명에 2시즌의 덤이 주어진 거나 마찬가지인데. 미련이 남을 리가 없는데.

그런데도 자꾸, 어린 선수들을 보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생긴다.

“왜요, 캡틴. 저한테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전하고 싶은 건 행동으로 보이라면서.”

그러자 에디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저는 꼬맹이가 아니니까요.”

내가 보기엔 마찬가지인데, 라는 말을 꾹 억누르면서, 페르난데스는 웃었다.

그리고, 그냥 그렇게만 말했다.

“올 시즌도 이제 세 경기 남았지? 이기자. 전부.”

에디에게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어쩐지 젊은 센터백의 입가가 꿈틀거리는 것 같아서, 페르난데스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 * *

챔피언십 44라운드, 선덜랜드 대 셰필드.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는 그야말로 용광로처럼 달아올랐다.

사실상의 1위 결정전이라는 빅매치에 더해, SNS상의 무차별 홍보가 이어졌기 때문이다.

[뉴캐슬이 챔피언십에서 오만이천 명을 동원한 적이 있다던데··· 그 기록, 깰 수 있을까? @선덜랜드_오피셜]

[자력 우승의 마지막 기회. 이 경기 놓치는 블랙앵거스 없겠지? @선덜랜드_오피셜]

@축잘알 아벨의 맹활약에, 넷플릭스도 호응했다. 몇 번이고 승격의 문턱에서 좌절해 눈물 흘리던 다큐 영상을 총집편으로 틀어버린 것이다.

풋볼 스퀘어에서, 24시간 내내.

[블랙캣츠 스탠드가 궁금하시다고요? 스타디움 투어를 이용해보세요. 스타디움 VR 투어 (베타) 운영 개시 @선덜랜드_CS팀]

ㄴ 그런데, 투어는 44라운드 끝나고 할 거야. 블랙캣츠 스탠드를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기회는 오직! 44라운드 직관 팬들 한정이라구. @선덜랜드_오피셜

음, 좋은 관종이다. 잘 데려왔네. 덕분에 우리 팬들은 달아올랐고,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는 단숨에 만석이 되었다.

그렇게 뜨거워진 경기 분위기는, 스타팅 라인업 발표에서 정점을 찍었다.

[드디어 감격의 첫 출전! 크리그 & 해리슨. 챔피언십 초토화 가즈아! @선덜랜드_오피셜]

* * *

44라운드는, 해리슨과 크리그를 처음으로 동시에 기용한 경기였다.

내부적으로 우려의 목소리도 있었다. 크리그와 해리슨은 서로 잘 맞지 않는다는 평가 때문이었다.

실제로 연습에서도 둘의 패스는 거의 연결되지 않았었다. 수비의 허점을 찔러 빈 공간에 패스를 찔러넣는 해리슨과, 좋은 패스를 기다리는 크리그의 상성이 썩 좋지 못한 탓이다.

게다가 그 두 사람은 수비 상황에서는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 타입의 선수들이다. 바꿔 말하면 리스크가 있다.

그런데도 굳이 선덜랜드가 해리슨과 크리그를 같이 기용한 이유는 자명했다.

[승리가 아니면 차라리 패배를. 무승부는 필요 없다.]

해리슨은 데뷔전을 제외하면 경기마다 꾸준히 어시스트를 기록하고 있다. 그만큼 턴오버도 많지만, 일단 1점을 만들어낼 수 있는 선수다.

그리고 크리그는 선덜랜드의 간판 공격수, 주득점원이다. 이 두 사람을 동시에 기용한다는 것은, 어떻게든 점수를 가져오겠다는 확고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동시에, 수비진에 대한 신뢰의 표현이기도 했다.

1점만 가져오면 이길 수 있다고, 우리 수비진은 절대 실점하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기에 가능한 포진이었다.

페르난데스가 이끄는 선덜랜드 수비진은, 코치진의 신뢰에 부응했다.

전방에서 해리슨이 패스미스를 범하거나, 크리그의 슛을 빗나갈 때마다 셰필드가 날카로운 역습으로 반격했지만, 페르난데스는 1점도 허용하지 않았다.

“팬들이 보고 있다! 정신 똑바로 차려!”

페르난데스가 쉼 없이 목소리를 높이자, 마치 그의 외침에 호응하듯, 관중석에서도 뜨거운 함성이 울려 퍼졌다.

We are Sunderland. Say we are Sunderland.

그렇게 경기는 70분간 팽팽하게 흘러갔다.

서로 날카로운 공세를 주고받던 중, 셰필드가 찬스를 맞이했다. 페널티박스 바로 앞까지 밀고 올라온 셰필드 공격수가 날카로운 슛을 날렸다.

공이 날아왔고, 페르난데스는 반사적으로 몸을 날렸다.

잡을 수 있다고 믿었던 코스인데, 어째서인지 공은 손안에 빨려들어오지 않았다.

생각보다 스핀이 걸려 있었던 건지, 아니면 페르난데스의 악력이 줄어든 건지··· 혹은, 단순히 반응 속도가 늦어진 것인지.

판단할 겨를은 없었다. 세컨볼을 처리해야 했기에.

처음부터 펀칭할 생각으로 멀리 쳐냈으면 좋았겠지만, 잡으려다 놓친 공은 여전히 박스 안쪽에 머물렀다.

걷어내려던 수비와 셰필드의 공격수가 거칠게 뒤엉킨다.

휘슬이 울렸고, 달려온 심판이 페널티 스팟을 손으로 가리켰다.

“이게 무슨 페널티입니까! 눈은 붙어 있는 겁니까? 라식 치료비 보태 드릴까요!?”

톰슨을 시작으로, 선덜랜드 수비진의 격렬한 항의가 이어졌다.

원래대로라면, 심판 상대로 항의하는 것은 주장인 페르난데스의 역할이었다.

비록 규칙에 명시된 특권은 아니지만, 그래도 팀의 주장이 하는 항의에 대해서는 심판들도 조금 더 관대해지는 경향이 있다. 축구계에 존재하는 일종의 불문율이다.

주장 외의 선수라면, 항의가 조금만 길어져도 곧바로 카드를 먹는 수가 있다.

제지하려는 찰나, 톰슨과 눈이 마주쳤다.

톰슨의 표정은 심판을 향할 때와는 달리 무척 온화했고, 냉정했으며, 심지어 차분하기까지 했다. 그 얼굴을 본 순간, 페르난데스는 톰슨의 의도를 간파할 수 있었다.

자긴 괜찮다고. 그러니까 마음을 가다듬고 페널티 킥을 대비하라고.

‘고맙다.’

고개를 끄덕이며 페르난데스는 숨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슬쩍 고개를 돌려 벤치를 바라보았다.

선덜랜드 벤치는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는 않았다. 로저스 감독이 부심에게 격렬히 항의를 퍼붓는 것 이외에는.

‘바꾸지 않는 건가?’

여전히 선덜랜드 선수들은 항의 중이었고, 교체 카드도 남아 있었다. 지금이라면 아직 골키퍼를 바꿀 수 있다. 그리고, 페널티 킥은 예전부터 하퍼가 페르난데스보다 나았다.

그런데도 몸을 풀며 준비하는 세컨 키퍼의 모습 같은 건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두 손을 모은 채, 마치 기도하는 듯한 시선으로 골마우스를 바라보는 하퍼만이 보였을 뿐.

하퍼의 시선이 마치 물어보는 것 같았다. 이번에도 팀을, 패배로부터 지켜낼 수 있겠느냐고.

확신은 없었다.

페르난데스는 커리어 통산 스물세 개의 페널티를 막아냈고, 일흔일곱 번을 놓쳤다. 지금까지의 페널티는 공교롭게도 딱 백 번.

이제, 백한 번째 페널티킥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골라인에 서서, 페르난데스는 차분히 자신의 장갑을 내려다보았다.

이제, 막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반응이 한 박자 늦을지도 모른다. 지금의 그는 은퇴를 앞둔 노장이고, 더 이상 ‘기적의 사나이’가 아니기에.

그래도 팀은, 자신이 막아내 줄 거라고 한 치의 의심조차 보이지 않는 채 기다리고 있다.

관중들의 함성도 변함없이 뜨거웠다. 하퍼로 바꾸라거나 하는 이야기는, 한 마디도 없었다.

We're Black Cats supporters.

Loyal through and through. Over and over, We will follow you.

마침내 키커가 페르난데스의 앞에 섰다.

[행동으로 보여주세요. 말로 하지 말고요.]

천천히 공을 향해 달려오는 키커의 모습이, 신뢰가 가득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동료들의 얼굴이 무척이나 친숙하다. 이미 백 번이나 경험해본 장면이기에.

키커의 모습이 기억 속의 풍경과 겹친다고 생각한 순간, 페르난데스는 몸을 날렸다.

‘왼쪽!’

손끝에 무언가 걸리는 느낌에, 땅 위를 구르며 자세를 가다듬었다. 소리를 질렀다.

“걷어내!”

“아이, 아이, 캡틴!”

세컨볼에 가장 먼저 달려든 선수는 에디였다. 잠시 후, 에디가 몸을 돌려 공을 길게 걷어찼다. 하프라인 쪽으로 공이 높이 떠올랐다.

“대답이 너무 길어.”

“그 시간이면 골 넣고 세레머니까지 끝내려나요?”

“알면 앞으론 더 줄여··· 올라가! 반격이다!”

“예써!”

페르난데스는 떠오른 공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올려다본 하늘이 눈이 부셨다.

눈을 몇 번 깜빡인 다음, 바라보았다.

영국이라고는 믿기 힘들 만큼 화창하고 맑은, 노스이스트 타인위어의 봄 하늘을.

그 아래 일제히 달려 나가는 붉은 물결을.

저 등을.

‘이 풍경을, 얼마나 더 지켜볼 수 있을까?’

선수 생활의 끝이 코앞까지 다가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에서 뛸 수 있는 시간도 이제 겨우 두 경기··· 아니, 한 경기와 20분이 남아 있을 뿐.

그렇기에, 마지막까지.

“달려! 등 뒤엔 내가 있다!”

마지막까지 몸을 날릴 것이다. 골라인 앞에서 춤출 것이다. 그러기 위해 모두의 등 뒤에 서 있는 게 아니었던가?

팀의 패배를 막기 위해, 자신을 이기게 만들어 줄 팀메이트를 위해, 그들의 등을 지키기 위해.

I know I am. I’m sure I am.

‘내가 사용한 유일한 도핑은.’

아마 감정일 거야. 너희의 존재가, 팬들의 목소리가 힘을 주니까.

I’m Sunderland ’til I die.

페르난데스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경기장을 가득 메운 팬들의 함성에 지지 않도록.

“무승부는 필요 없다! 골을 넣어! 승점 3점을 가져와!”

주장의 독려에, 열 명의 붉은 유니폼이 일제히 전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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