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자의 신이 키우는 축구단-109화 (109/422)

109화. 돌아가야 할 곳으로 (3)

스토크의 미드필더, 앨런은 생각했다. 압박이 통한다고.

‘선덜랜드도 별거 없네.’

앨런은 오늘의 경기 준비를 되새겼다.

[선덜랜드의 공격 방침은 기본적으로 패스 앤 무브다. 다시 말해, 그들은 공을 끌지 않는다. 가끔 잭이나 스티븐이 무섭게 돌진해 오지만, 전부 눈속임이다.]

신임 감독 파커의 목소리에는 힘이 실려 있었다.

[중요한 건 요니를 어떻게 막아내는가. 그리고 요니를 서포트하는 잭을 어떻게 제어하는가···.]

파커는 주위의 시선을 즐기기라도 하듯, 한 차례 선수단을 둘러보며 빙긋 웃었다.

[요니는 2선치고는 공을 극단적으로 적게 만진다. 그리고 잭은 역동적인 선수지만, 온 더 볼에는 약점이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파커는 곧바로 전술 보드에 마커를 올려두며 압박할 포인트를 지목했다. 일목요연해서 알아듣기 쉬운 지시였다.

‘어차피 복잡한 전술은 당분간 쓰지 못하겠지. 팀에 합류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

그 간단한 지시만으로, EFL컵 챔피언 상대로 대등하게 싸울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이런 사람이 명장인 건가.’

파커가 한때 리그 원 최고의 명장이라고 불렸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앨런에게 있어, 그것은 결코 칭찬의 의미는 아니었다.

지난 십여 년간 스토크는 줄곧 프리미어리그에 머물던 팀이었고, 몰락해버린 지금에 와서도 챔피언십 아래로는 내려간 적이 없다.

리그 원, 다시 말해 영국 3부 리그 따위에서나 ‘명장’ 소리 듣는 감독, 파커에 대한 기대치는 빈말로도 높지 않았다.

그런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파커의 목소리에는 힘이 있었고, 전술은 효과적이었다. 그야말로 명장의 말에는 힘이 있다는 옛 격언 그대로다.

앨런은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사이드라인 너머, 테크니컬 에어리어 쪽으로.

그곳에는 힘차게 선수들을 독려하는 스토크 감독 파커와, 차분하게 지시를 내리는 선덜랜드 코치 브라이언의 모습이 보였다.

‘인연을 청산하고 싶은가 보네.’

두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는 앨런도 대충 알고 있었다. 선덜랜드에서 감독과 전력분석관으로 함께 했던 사이라고.

자세한 사연까지는 몰라도, 썩 우호적인 관계가 아니라는 것쯤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선덜랜드에 대해 말할 때마다 라일 파커의 입술 끝은 살짝 일그러졌고, 눈동자에는 기묘한 번들거림이 엿보였으니까.

마찬가지로, 선덜랜드가 로저스 감독 대신 브라이언을 전면에 내세운 것 또한 감정적인 이유일 것이다.

어차피 앨런의 관심사는 아니었지만.

‘뭐, 둘 사이의 관계는 관심 없고, 오늘 이기게만 해 주면 좋겠는데··· 우리는 돌아가야 하니까.’

오늘 이긴다면 스토크는 안정적으로 6위, 플레이오프에 발을 걸칠 수 있게 된다. 프리미어리그 승격을 놓고 계속 싸울 기회를 붙잡을 수 있다.

‘프리미어리그로.’

이제 겨우 15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어쩐지 플레이오프 진출이 코앞에 보이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앨런은 기분 좋게 웃었다.

EFL컵 챔피언 선덜랜드 상대로, 원정 지옥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에서 대등한 경기를 펼치는 중이었으니까. 그러니까···.

“플랜 B.”

사이드라인 쪽에서 들려온 낮은 목소리가 앨런의 귀에 파고들었다. 선덜랜드 코치 브라이언의 것이었다.

작고 낮지만, 틀림없이 힘이 실린 소리에 앨런은 마치 홀린 듯 빠져들었다.

‘어···?’

공이 없다. 그리고 요니가 없다.

틀림없이 스토크가 준비한 압박의 한가운데서 허우적거리고 있어야 할 요니를 순간적으로 놓친, 앨런의 몸이 긴장으로 굳어졌다.

“저기, 있잖아. 혹시 나는 안 보고 싶었어?”

목소리가 들려온 쪽은 오른쪽 측면이었다. 앨런은 그곳에서, 마치 풀백처럼 질주하는 에디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놓쳤던 공도.

‘에디가 왜 여기에···? 그렇군. 요니의 압박을 풀어주려고?’

압박을 풀어내는 방법은 보통 두 가지로 압축된다.

압박에 갇힌 선수 개인의 탁월한 테크닉으로 해결하거나, 혹은 팀 차원에서 근처에 선수를 늘려 주는 것이다.

선덜랜드는 후자를 택한 모양이었다.

효과는 절대적이었고, 덕분에 라일 파커가 준비한 ‘요니 봉쇄’는 곧바로 풀려 버리고 말았다.

물론, 파커는 다음 수를 이미 준비한 상태였다.

[혹시 측면을 내주어도, 절대 당황하지 마라. 그 팀 공격진에는 높이가 부족하니까. 그러니 그냥 아래로 내려앉으면 된다. 괜히 끌려나가서 공간 내주지 말고.]

[감독님, 내려앉으면 크리그의 숨통이 트일 텐데요.]

[크리그는 신경 쓰지 마. 그건 반쪽짜리 공격수니까.]

합리적인 지시였다. 적어도 스토크 선수들은 모두 그렇게 믿었다. 잭도, 요니도, 심지어 크리그도 제공력이 좋은 선수는 아니었으니.

그 생각이 바뀌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특별 퀴즈! 지금 공은 나한테 있지? 그러면··· 공의 전 주인은 지금 어디 있을까?”

대답할 겨를도 없이, 에디가 곧바로 공을 길게 걷어찼다. 자신이 있던 반대쪽, 스토크의 왼쪽 측면으로.

앨런은 그곳에서 자신이 놓쳤던 요니의 모습을 발견했다.

문득, 공을 건네받은 요니가 웃었다고 생각했다. 거의 동시에, 에디의 히죽거림이 들렸다.

“두 번째 퀴즈! 지금 요니가 머무르는 저 자리 말인데··· 저기 주인은 지금 어디 있을까?”

이번에도 대답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요니의 발을 떠난 공이 박스 안쪽을 향해 둥실 떠올랐다.

시선 끝에서 앨런은 공을 향해 뛰어오르는 붉은 유니폼을 확인했다. 줄곧 측면에만 머물렀기에 경계당하지 않았던 선수, 26번 스티븐의 모습을.

원래 센터백을 볼 수도 있을 정도의 체격에 더해, 기습 침투라는 상황은 스티븐에게 압도적인 높이를 부여했다.

수비보다 한 뼘이나 높이 뛰어오르는 스티븐의 모습에, 앨런은 그만 눈을 질끈 감아버리고 말았다.

잠시 후, 무심코 귀를 막고 싶어질 만큼의 환호가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를 가득 메웠다.

[선덜랜드 1 - 0 스토크]

* * *

전반 15분, 스티븐의 강렬한 헤더로 골네트를 흔든 우리는, 이후에도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다.

크리그의 추가 골이 터지기까지는 딱 7분이 더 걸렸을 뿐이다.

[선덜랜드 2 - 0 스토크]

We are Sunderland. Say we are Sunderland.

최상의 경기력에 팬들은 열광했고,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리고 옆에서 희주는 눈을 깜빡거렸다.

“이상하다? 분명히 초반엔 비등비등한 느낌이었는데···.”

“확인한 거겠지.”

라일 파커의 축구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아는 브라이언이지만, 그래도 확인 절차는 거쳐야 했을 것이다.

오늘은 무슨 패턴을 들고나왔는지, 어떻게 빌드업하고 어떻게 압박하는지, 어느 공간을 지키고 어느 공간을 내주는지를 꼼꼼하게 체크했을 것이다.

전반 15분은 일종의 탐색전이었다.

물론 브라이언이 15분간 손 놓고 구경만 했던 건 아니다. 전술에 미세한 조정을 가하며 확인하는 과정을 거쳤다. 지금 만나는 파커는, 자신이 아는 그 파커가 맞는지. 혹시 달라진 점은 없는지를.

그리고 15분 만에 확인을 마친 브라이언은 곧바로 두 골을 뽑아냈다. 분석 끝났다는 신호다.

“그럼 이제 두들겨줄 일만 남은 거네?”

“맞아.”

멈출 생각은 없다. 오늘 경기는 여러모로 특별하니까.

“오늘은, 압도적으로 이길 거야.”

올 시즌 마지막 홈 경기이자 챔피언십에서 치르는 마지막 경기다. 길었던 하부 리그 생활을 청산하고,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곳으로 향하는 마지막 관문이다. 그러니까···.

“1점도 내주지 마.”

문득 예전의 일이 떠올랐다.

2년 전 여름, 리그 원 마지막 경기가. 내가 알고 있던 그 팀이 아닌 것만 같았던, 무기력한 선덜랜드의 모습이.

승격 최종전 라스트 미닛 골 탈락이, 백투백 강등이, 이 팀이 하부 리그에서 겪었던 모든 비극이.

그 과거와 완전히 결별했음을, 오만삼천 명의 팬들 앞에서 똑똑히 보여주고 싶었다.

“더 넣어, 브라이언.”

기분 탓인지 꼭, 브라이언이 웃는 것만 같았다.

[오케이, 브로!]

환청처럼 들리는 친구의 대답에, 팬들의 목소리가 섞인다.

Sunderland! Sunderland! Sunderland!

이윽고,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에는 함성만이 남았다. 승격의 열망을 담은 외침, 우승을 갈망하는 팬들의 목소리.

그 이외의 다른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 * *

We are Sunderland. Say we are Sunderland.

잭은 고개를 들었다. 북동부의 맑고 푸른 하늘 아래, 붉은 물결이 눈에 들어왔다. 오늘도 변함없이 관중석을 가득 메운 팬들의 모습이다.

그 안에서, 잭은 낯익은 얼굴들을 찾아냈다.

‘정말로 변한 게 없네. 우리 팬들은.’

지금도, 그리고 2년 전에도 변함없이 성원을 보내주는 팬들이었다. 유일하게 달라진 점이라면, 요즘은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는 점이었을까.

잭으로서는 만족스러운 변화였다. 그는, 팬들의 눈물을 정말로 싫어하는 선수였으니까.

그런 만큼 2년 전, 팬들의 눈에서 피눈물을 쏟게 만든 전임 감독, 라일 파커에 대한 잭의 감정은 썩 좋지 못했다.

‘두 골로는 성에 안 차. 아직 부족한데.’

마음 같아서는 다섯 골쯤 넣어주고 싶었다. 다행히 아직 시간은 많이 남아 있다. 이제야 후반전이 막 시작했을 뿐이었으니.

잭은 하프라인 건너편, 스토크 진영을 노려보며 킥오프를 준비했다. 그런 잭의 곁에서 요니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쓰리백이네?”

“그러게. 평생 안 쓸 것처럼 말하더니.”

라일 파커가 이끄는 스토크는 후반 들어 쓰리백을 들고나왔다. 잭의 눈에는 꼭 3-4-1-2 같았다.

‘평생 안 쓰던 쓰리백··· 어떻게든 우리 허점을 찌르려는 거겠지?’

잭은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어쩌나, 그 전술은 이미 알고 있는데.’

후반 시작을 알리는 휘슬과 동시에, 잭은 센터서클에 놓은 공을 크리그 쪽으로 밀었다. 그리고 곧바로 전방을 향해 달렸다.

슬쩍 곁눈질로 확인했더니 요니도, 스티븐도 똑같이 움직이는 중이었다.

[플랜 에프. 만약 스토크가 쓰리백으로 나올 경우···.]

곧바로 쓰리톱으로 대응하도록 이야기가 끝난 상태였다. 발 빠른 잭과 스티븐, 그리고 신출귀몰한 요니를 최전방에 세워서.

그리고 굳이 후방을 확인하지는 않았지만, 잭은 지금쯤이면 톰슨과 에디가 좌우 측면으로 완전히 벌려 섰을 것임을 확신했다. 마치 풀백처럼.

선덜랜드의 그런 모습은, 마치 물어보는 것처럼 보였다.

[전방 압박 좋아하지? 공격 축구에 목숨 걸었다며? 자신 있으면 한번 들어와 봐.]

라일 파커의 피를 거꾸로 솟게 할 만한 전술이었다. 그리고 사실, 스토크에게 다른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그들은 이미 두 골 뒤진 팀이었고, 전진 이외의 다른 행동은 불가능했다.

선덜랜드가 준비한 노림수대로 스토크는 곧바로 전진했고, 톰슨과 에디는 번갈아 롱 패스를 찔러넣으며 스토크의 후방을 노렸다.

그때마다 선덜랜드의 쓰리톱 - 잭과 요니, 그리고 스티븐이 무서운 속도로 달려나갔음은 물론이다.

후반 56분, 마침내 잭이 추가골을 성공시켰다.

[선덜랜드 3 - 0 스토크]

뜨겁게 끓어오르는 팬들의 함성 속에서, 잭은 그대로 스토크 골네트를 향해 달렸다. 그리고 공을 회수해서 하프라인으로 돌아왔다.

세레머니는 하지 않았다.

‘부족해. 아직 점수가 부족해.’

후방에서 에디가 잭을 마중이라도 하듯 달려 나왔지만, 잭은 무뚝뚝하게 응수했다.

“네 자리로 돌아가. 세레머니 할 시간 없어.”

그러자 에디가 히죽 웃었다.

“알아. 멍청아. 세레머니 같은 거 꿈도 꾸지 말라고 하려고 온 거야.”

옆에서 요니가 응수했다.

“이야, 시즌 최종전쯤 되면 너도 철이라는 게 드는 건가. 오래 살고 볼 일이네.”

“됐고, 뛰기나 해. 오늘은 무조건 클린시트다. 혹시라도 점수 내주는 얼간이는 내가 죽여버릴 거야.”

“너만 잘하면 되겠는데.”

입씨름하는 요니와 에디를 바라보며, 잭은 생각했다.

‘정말로, 많은 게 바뀌었어.’

잭은, 아직도 라일 파커 시절을 기억하고 있었다. 휘슬이 울리기도 전에 발을 멈추던, 무기력하던 팀을.

그 팀은 이제 어디에도 없다. 지금의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에는, 경기가 끝날 때까지 죽기 살기로 뛰는 열한 명의 전사들이 있을 뿐이다.

[선덜랜드 4 - 0 스토크]

네 골로 벌어지는 추가 골에 팬들이 환호하는 와중에도.

[선덜랜드 5 - 0 스토크]

다섯 골째를 내준 라일 파커가 머리를 감싸 쥔 채 고개를 떨구는 동안에도.

선덜랜드 선수들은 아무도 발을 멈추지 않았다. 선덜랜드 선수라면, 누구나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이야기가 있기에.

[발을 멈추지 마라. 고개를 떨어뜨리지 마라. 휘슬이 세 번 울릴 때까지 아무것도 멈추지 마라.]

잭은 생각했다. 정말로 많은 게 달라졌다고.

구단주도, 감독도, 코치도, 구단 직원들도, 그리고 선수들도···. 달라지지 않은 건, 빛의 경기장을 가득 메운 함성, 팬들의 목소리뿐이었다.

Be the light.

팀이 힘들 때도, 절망적일 때도 한 번도 멈추지 않았던 그 소리가.

마침내 휘슬이 세 번 울렸다.

[경기 끝났습니다! 마침내 선덜랜드가 챔피언십 트로피와 함께! 돌아가야 할 곳으로 돌아갑니다!]

장내 아나운서의 열정적인 외침이 절규처럼 울렸지만, 오래가지는 못했다. 팬들의 함성에 곧바로 묻혀 버렸기 때문이다.

관중석에서, 풋볼 스퀘어에서, 그 너머 축구 펍들에서 울려 퍼진 소리가 점차 합창처럼 커져 나갔다.

Wise man say, only fools rush in.

But I can’t help falling in love with you.

울려 퍼지는 노랫소리를 들으며, 잭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올려다본 하늘이 이상하게 뿌옇다. 틀림없이 맑은 날이었는데도.

기분 탓인지, 꼭 울음소리가 나는 것 같다. 두 번 다시 팬들을 울리지 않겠다고 약속했는데. 오늘은 정말 기쁜 날인데. 팬들이 울 리가 없는데.

‘아니구나, 내가 우는 거구나.’

함성은 멈추지 않았다. 선덜랜드 팬들이 사랑하는 로컬 보이가 울면서 웃는 묘기를 선보이는 동안에도.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Sunderland! Sunderland! Sunderland!

오늘도 어김없이 빛의 경기장,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에 가득한 뜨거운 함성은, 영원히 멈추지 않을 것처럼 이어졌다.

시티 오브 선덜랜드 전체를 가득 메울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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