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자의 신이 키우는 축구단-110화 (110/422)

110화. 돌아가야 할 곳으로 (4)

아직 열기가 다 가시지 않은 그라운드에서, 브라이언은 생각했다.

‘혹시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시야가 조금 뿌옇다. 그러니 어쩌면 꿈일지도 모르지만 차마 확인할 수는 없었다. 혹시라도 정말 꿈이면, 깨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만큼 눈앞의 풍경은, 브라이언이 아주 오랫동안 꿈꿔오던 풍경이었다.

그가 유소년 시절을 보냈던 팀, 그리고 프로로 데뷔했던 팀은 프리미어리그의 선덜랜드였다. 그러니까···.

경기장의 대형 스크린에 글자가 떠올랐다.

[선덜랜드가 프리미어리그로 돌아갑니다!]

‘이날을 매일 꿈꿨었지.’

컵을 닦거나 잔디를 깎거나, 혹은 바에 갇힌 채 축구를 보면서도 매일같이 생각했었다. 어떻게 해야 이 팀을 프리미어리그로 돌려놓을 수 있을지를.

만일 자기가 팀의 감독이라면 어떻게 했을지. 어떤 전술을 짜고, 어떻게 선수들을 배치했을지를 매일 연구하던 시절이 있었다.

유스 시절부터의 친구, 이희성이 돌아오기 전까지는 그저 공상에 그쳐야 했던 생각이었다.

친구가 와주기 전까지, 브라이언은 줄곧 갇혀 있었다. 그리고 그를 가뒀던 장본인은···.

“웃기지 마! 내 전술은 완벽했어. 틀리지 않았어.”

머리를 감싸쥔 라일 파커를 흘끗 바라보며, 브라이언은 무덤덤하게 이야기했다.

“네, 나쁜 전술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브라이언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2년 전, 매일같이 라일 파커의 전술을 분석했기에 단언할 수 있었다.

라일 파커의 전술은 결코 나쁘지 않았다. 그저 완벽히 읽혔을 뿐이다.

물론, 브라이언이 라일 파커의 전술을 완벽히 파악한 계기는 파커의 태업 때문이었으니, 따지고 보면 자업자득이긴 하다.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한 파커가 눈을 번뜩였다.

“선수빨이야.”

“네, 선수빨이죠.”

“쓰리백에, 쓰리톱을 써서 일대일 경합을 시킨다고? 그거 그냥 뻥축구 아닌가? 그냥 너희 선수들이 더 빨라서 이긴 거잖아. 그렇잖아.”

“네, 맞습니다. 선수들이 칭찬받아야죠. 축구는 원래 그런 스포츠 아닙니까?”

브라이언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승부의 분수령이 되었던 후반의 세 골째, 사실상 우승을 확정 지은 이후인데도 선수들은 조금도 방심하지 않았고, 휘슬이 세 번 울릴 때까지 칼날 같은 집중력을 유지했다.

“거짓말이야. 내가 전력분석관 따위에게 질 리가···.”

그때, 브라이언의 등 뒤에서 나직하지만 힘찬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은 코치요. 파커 씨.”

천천히 걸어 나오는 노장, 로저스 감독을 향해 파커가 곧바로 대거리를 했다.

“바지감독 주제에.”

모욕적인 발언에 브라이언이 발끈하려는 찰나, 어깨에 손길이 느껴졌다. 딱딱하고 거친, 하지만 따스한 손길이.

“바지감독? 하긴, 틀린 말은 아니로군.”

로저스 감독이 빙긋 웃었다.

“전술을 짜는 건 이 친구고, 팀의 미래 계획을 짜는 친구는 따로 있지. 내가 하는 건 별로 없소. 그냥 이 자리에 서서 선수들을 격려하는 게 전부요.”

말은 그렇게 하지만, 브라이언의 스승은 선수단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다. 코치에게 전폭적인 권한을 주면서도 선수들에게 얕잡혀 보이지 않는다는, 참으로 양립하기 힘든 업적을 해낸 감독이다.

‘아무도 감독님을 바지라고 생각하지 않을 텐데요.’

벤치로 달려오는 선덜랜드 선수들의 모습을 보며, 브라이언은 미소를 지었다.

“감독님 나오세요! 헹가래 쳐야죠!”

“살살 해라. 감독님도 연세가 있으셔서···.”

“코치님도 해 드릴까요?”

웃으며 감독에게 안겨들거나, 코치와 하이파이브를 나누는 선수들을 바라보며, 브라이언은 생각했다.

꿈이 아니라고. 정말로 꿈이 아니라고.

* * *

“당분간 콜라는 안 마셔도 괜찮겠네?”

희주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짧게 대답했다.

“그러게. 탄산이 과하겠어.”

“기왕 탄산 터진 김에 조금만 더 터지지. 파커 저 인간. 경질 같은 거 안 당하려나?”

“오래는 못 갈걸.”

파커가 스토크에 급히 불려온 것은 어디까지나 소방수로서의 역할이었다. 강팀을 잘 잡는 전술 스타일과, 선덜랜드를 잘 안다는 배경 때문에.

그의 임무는 선덜랜드를 잡아내는 것이었다.

파커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그것도 무려 다섯 골 차이로 대패하면서 실패했다. 그리고, 두 시즌간 구단주 노릇을 해 보며 느낀 거지만···.

세상에 관대한 구단주는 없다.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팀에 기여한 바도 없는 감독을 그대로 앉혀두는 건, 관대함이 아니라 무책임함이다.

“시즌오프와 동시에 경질될 거야.”

“진짜?”

“스토크 구단주는 돈이 없지, 책임감이 없을 것 같진 않거든.”

“그 사람도 돈 많··· 아, 오빠 기준이면 세상에 돈 많은 구단주는 별로 없겠네. 그래서, 파커 저 인간 정말로 잘려?”

반색하는 희주를 향해 슬쩍 덧붙였다.

“의혹까지 따라다니면, 확실히 짐 싸야겠지.”

“의혹?”

대답 대신 나는 빙긋 웃기만 했다. 그러자 희주가 수상하다는 시선을 보냈다.

“오빠, 혹시 파커 자료 풀었어?”

“아주 일부만.”

정확히 말하면, 브라이언의 미담을 풀었다. 팀이 힘들던 시절, 낮에는 잔디를 깎고 밤에는 바를 운영했으며, 그 와중에 짬을 내어 전술 연구까지 해냈었다고.

“응, 브라이언 씨는 확실히 칭찬받을 만했지. 오늘 맞대결로 이기기까지 했으니까··· 그런데?”

“그 정도 정보만 가지고 태업이라는 배후 정황까지는 읽어내기 어렵겠지만, 그래도 한 가지는 확실하잖아?”

나는 빙긋 웃었다.

“라일 파커는 오늘, 자기가 홀대했던 전력분석관에게 완패했다고.”

사실상 파커의 감독 생명은 오늘 끝난 거나 마찬가지다. 그러니 조만간 돌아가게 되겠지··· 실업자 신세로.

그리고 선덜랜드는 프리미어리그로 돌아갈 거고.

프리미어리그.

그 단어를 떠올리자마자, 머릿속에 오만 가지 생각이 둥둥 떠다녔다.

우선, 언론 문제를 각별히 신경 써야겠지.

이제부터는 메이저 언론사를 상대하게 될 것이고, 세계 각지의 주목을 받게 될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리그에 돌아가는 거니까. 그러니 새로 유입되는 팬도 많아질 것이다. 스탠드를 늘리고, 미디어 노출을 늘리고, 굿즈를 더 개발하고···.

매력적인 축구를 해야 한다. 시티 오브 선덜랜드를 넘어, 영국 전체에서, 혹은 다른 나라에서 관중이 찾아올 수 있을 정도로.

물론, 힘들 때 팀을 지지해준 기존 팬들을 위한 서비스도 꼼꼼하게 챙겨야 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당연히 선수단의 강화다.

부족한 포지션을 영입하고, 팀을 떠날 선수들의 공백을 메꾸고··· 그리고, 그리고.

안 되겠어. 지금은 도저히 생각이 정리되지 않아.

구단주실이 아니라 경기장에 있으니까. 함성 소리가 끊이지 않으니까. 자꾸만 가슴이 뛰니까.

그러니 나도 구단주실로 돌아가야겠지만, 그래도 지금은, 조금 더 지켜보고 싶었다.

옆에서 손길이 느껴졌다. 희주가 속삭였다.

“하루쯤은 괜찮을 거야. 오늘은, 꿈을 이룬 날이니까.”

“아니, 이제 겨우 출발선에 선 거야. 라인 위에.”

대답한 다음, 웃으며 덧붙였다.

“그래도 뭐, 하루쯤은 괜찮겠지. 우승한 날이니까.”

나는 경기장을 내려다보았다.

로저스 감독과 브라이언을 헹가래 치는 선수들의 모습을. 함께 웃고, 함께 우는 그라운드를.

이제 선수가 아닌 나는 돌아갈 수 없는 풍경을.

Wise man say, only fools rush in.

But I can’t help falling in love with you.

그럼에도, 영원히 사랑할 수밖에 없는 축구공과, 선덜랜드의 붉은 유니폼을.

Sunderland! Sunderland! Sunderland!

함성 속에서, 천천히 경기장에 들어오는 우승컵을.

* * *

“클린시트 축하드립니다.”

“축하합니다.”

에디를 시작으로 주위에서 축하가 쏟아졌다. 페르난데스는 슬쩍 너스레를 떨었다.

“축하는 무슨. 샤워를 할지 말지도 살짝 헷갈리는 마당에.”

스토크의 유효슈팅은 거의 없었고, 페르난데스는 덕분에 꽤 편안한 경기를 치렀다. 잔디 위에 몸을 날리는 일은 드물었고, 공을 만질 일도 몇 번 없었다.

초반까지는 비교적 팽팽하게 흘러간 경기 흐름을 고려하면, 이는 당연히 선덜랜드 수비진의 분투 덕분이었다.

이제 홈팬들 앞에서 트로피를 들어 올려야 할 주장의 커리어 마지막 경기. 그 기록에 실점의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는 필사적인 저항의 결과였다.

눈이 마주치자, 에디가 검지를 세워 콧등을 긁었다.

“캡틴, 그냥 제가 너무 대단해서 유효슈팅 안 내준 거라고 대충 넘어가 주시면 안 될까요?”

“그러지.”

입꼬리가 잠시 씰룩거렸지만, 페르난데스는 끝내 표정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아직, 그에게는 할 일이 남아 있었기에.

페르난데스는 천천히 동료들에게서 몸을 돌렸고, 그가 작년에 들었던 것보다 훨씬 거대한 트로피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두툼한 골키퍼 장갑을 낀 채로.

“캡틴, 장갑 끼고 드실 겁니까?”

톰슨의 질문에, 페르난데스는 짧게 대답했다.

“골키퍼니까.”

이제 곧 그 의무를 내려놓게 되겠지만, 아직까지는 골키퍼이자 팀의 주장이다. 그러니 감동으로 떨리는 손도, 거칠게 뛰는 심장도, 전부 감춰야 한다.

두툼한 골키퍼 장갑 아래에.

[FC 선덜랜드, EFL 챔피언십 우승]

트로피를 머리 위로 들어 올리기 직전, 페르난데스는 잠시 손을 멈췄다. 자신의 행동이 어떤 의미인지를 알고 있었기에.

챔피언십의 한 시즌을 매듭짓는 행위이자 선덜랜드에게는 너무나 길었던 6년간의 기다림이 끝났음을 알리는 선언이다.

그리고 출발을 알리는 신호이기도 했다.

이제 곧, 돌아갈 것이다. 이 팀은 프리미어리그로.

그리고, 그는.

Shall I stay? Would it be a sin.

If I can’t help falling in love with you.

팬들의 노랫소리에, 다른 목소리가 섞이는 것 같았다.

[정말로 당신은 지금 은퇴해도 만족할 수 있습니까?]

‘네, 이제는.’

팬에게는 과분한 사랑을, 동료들에게는 갚지 못할 헌신을, 그리고 구단으로부터는 최고의 예우를 받았다.

마지막까지 1군 경기에서 뛰며,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리고 떠나는 것. 축구 선수가 꿈꿀 수 있는 최고의 은퇴다.

Sunderland! Sunderland! Sunderland!

온 사방에서 쏟아져내리는 함성의 한가운데서, 페르난데스가 마침내 트로피를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잠시 후, 함성이 시티 오브 선덜랜드 전체를 가득 메웠다.

* * *

우승 다음 날은 무척 정신없이 보냈다. 언론의 취재 요청은 물론, 각지에서 축하가 이어졌기 때문이다.

심지어 시장까지 꽃다발을 보냈을 정도다.

그래서, 친구들과 함께 블랙캣츠에서 술 한잔 나눌 기회는 저녁까지 미뤄야만 했다.

“괜찮아, 썬. 원래 바는 저녁에나 여니까.”

“맞아, 브로.”

먼저 도착한 브라이언과 톰슨이 자기들끼리 술잔을 기울이는 중이었다.

등에 가려 술의 정체는 확인하기 어려웠지만, 그래도 짐작은 갔다. 톰슨은 보나 마나 본드식 마티니를 주문했을 테고, 브라이언은 ‘마티니’라는 이름이 붙은 괴음료를 마시는 중이겠지.

“구단주님은 뭘로 드릴까요?”

“아무거나요··· 오늘은 콜라 안 넣어도 됩니다.”

요 며칠간은 정말로 탄산이 과하니까 말이지.

적당히 주문한 다음 자리에 앉자, 톰슨이 볼멘소리를 냈다.

“그래서 오늘은 왜 나까지 불러낸 거냐.”

그러자 브라이언이 곧바로 목소리를 높였다.

“톰슨, 무슨 말을 그렇게 섭하게 해? 친구끼리!”

그러자 톰슨이 히죽 웃었다.

“아니, 그냥 선수 불러내서 술 먹이는 보드진과 코칭스태프는 처음 본다는 뜻이었는데.”

“시즌오프니까 한잔쯤은 괜찮지 않을까?”

적당히 대답하자, 톰슨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래서, 왜 불러낸 건데. 빨리 털어놔.”

“톰슨! 브로는 어디까지나 같이 축배를 들자고···.”

대신 항변하는 브라이언의 곁에서, 나는 무심하게 대답했다.

“주장의 공백을 메울 필요가 생겼으니까.”

“어, 그냥 조촐하게 셋이서 우승 기념으로 술 한잔하는 자리 아니었어?”

눈을 깜빡거리는 브라이언의 곁에서, 톰슨이 다시 웃었다.

“하긴, 이제 곧 이적시장이 열릴 테니까. 본격적인 영입에 앞서, 선수단의 중심을 잡고 싶긴 하겠지.”

아무래도 이제 1부 리그에 돌아가는 만큼, 데려오는 선수들의 이름값도 자연히 높아지기 마련이다. 자칫하면 굴러온 돌과 박힌 돌이 서로 충돌하는 수가 생길 테니, 확실한 주장감이 필요하다.

최적임자인 페르난데스가 물러나는 이상, 현재로서는 톰슨이 가장 적당한 주장 후보였다. 적어도 나와 로저스 감독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톰슨 본인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뭐 하러 멀리 돌아가는 길을 택해?”

“돌아가는 길이라니?”

“내가 여기서 뛰면 얼마나 더 뛰겠냐. 지금 날 주장으로 삼아 봐야, 기껏해야 1, 2년 뒤면 또 다음 주장 뽑아야 하잖아. 안 그래?”

내가 생각에 잠긴 사이, 브라이언이 끼어들었다.

“이봐 톰슨. 올 시즌은 프리미어리그에서 뛸 선수를 영입하는 거야. 굴러온 돌에 밀리지 않으려면 네임밸류가 필요해.”

“의미 없어. 내후년은 다를 것 같아? 그때쯤이면 챔스급 선수를 데려올 텐데?”

“야, 너 지금 2년 만에 챔스 나가라고 압박 주는 거지? 우리 구단주도 그런 압박은 안 하는데··· 선수가 압박을 해? 말세다. 말세.”

“챔스 나가든 못 나가든, 챔스급 선수 사온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지. 구단주가 썬이잖아.”

뭐, 톰슨 말에도 일리는 있다. 돈 아낄 생각은 처음부터 별로 없었고, 우리는 계속 선수를 데려올 것이다.

“으음···.”

브라이언을 침묵시킨 톰슨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웃음이 피었다.

“지금의 네임밸류 말고, 다른 정통성을 만들어.”

“다른 정통성?”

브라이언은 이해하지 못한 것 같지만, 나는 톰슨의 암시를 바로 알아들었다.

축구계에는, 네임밸류 이상의 정통성이 존재하니까.

팀의 유소년 출신.

다른 유니폼을 몸에 걸친 적 없는 순혈의 성골 유스 이상 가는 정통성은 축구계에 존재하지 않는다.

‘잭, 혹은··· 요니인가.’

조건에 맞는 후보 두 명의 얼굴을 떠올리며,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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