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재능이라는 이름의 장벽 (1)
<모든 단점은, 장점이 될 수 있다. - 리오넬 메시>
선덜랜드 클럽 박물관을 찾은 수잔 베일리를, CS팀 직원이 반갑게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다시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머, 저 기억하세요?”
괜히 하는 소리가 아닌가 싶어서 물어보자, CS팀 직원이 상냥한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작년, 클럽 박물관 개장 직후 방문해 주셨죠? 제가 직접 안내해 드렸고요.”
놀라운 기억력에 수잔이 속으로 혀를 내두르는 사이, CS팀 직원의 친절한 설명이 이어졌다.
“아시다시피 이번에 트로피 두 개가 늘었습니다. 지금이라면 가까이에서 보실 수 있는데요. 투어 어떠세요?”
수잔은 고개를 끄덕이려다 멈췄다.
“네, 니오. 일행이 있어서요. 기다렸다가 같이 들어가고 싶은데요.”
“알겠습니다. 그러시다면 잠시 로비에서 기다리시면 어떠실까요? 계속 서 계시기는 불편할 것 같은데요.”
CS팀 직원의 눈이 수잔의 발치 쪽 하이힐에 향했다. 같은 여성이니 할 수 있는 세심한 배려였고, 평소 힐을 신지 않는 수잔으로서는 마침 반가운 제안이기도 했다.
수잔이 안으로 들어가려던 찰나, 친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미안, 기다리게 해서.”
“괜찮아요. 방금 왔거든요.”
마일즈를 미소로 반긴 수잔은, CS팀 직원에게 시선을 옮겼다.
“일행이 왔어요. 안내 도와주시겠어요?”
“알겠습니다. 시즌권 보유자와 그 동행자 1인은 무료로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혹시 일행분께서는 시즌권 보유자가 아니신가요?”
그러자 마일즈가 시즌권을 꺼내 내밀었다. 티타늄으로 만들어진 VIP 시즌권을 받아든 CS팀 직원이 미소를 지었다.
“아아. 그··· 마일즈 우드 고객님이셨군요.”
문득 수잔은, 어쩐지 직원의 눈길이 따스하다고 느꼈다. 꼭 남동생을 바라보는 누나, 혹은 조카를 바라보는 이모라도 된 것 같은 흐뭇한 표정이었다.
“지금부터 투어 시작하겠습니다. 안내를 맡은 저는, 선덜랜드 CS팀의 에이미입니다. 정식 투어 코스는 따로 있지만, 오늘은 트로피부터 보여 드리고자 합니다. 마침 고객님께는 약속드린 기억이 있어서요.”
“네? 아아··· 그랬었죠.”
수잔은 살짝 고민했다. 혹시 에이미는 선덜랜드가 개발한 인공지능 안내로봇이 아닌지를.
마일즈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소리야?”
“고객님께, 챔피언십에서도 의미 있는 결과를 만들겠다고 약속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 약속을 지킬 수 있어 기쁩니다.”
미소를 지으며, 에이미는 두 사람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작년엔 크레파스 그림만 걸렸던 공간에는, 새로운 트로피 두 개가 늘었다. EFL컵, 그리고 챔피언십의 우승 트로피다.
“풋볼 클럽 선덜랜드는 EFL 컵, 그리고 챔피언십의 디펜딩 챔피언으로서, 1년간 트로피를 보유할 권리를 얻었습니다.”
“1년이 지나면 어떻게 되나요?”
“진품 트로피는 반납하고, 이후에는 복제품을 진열하게 됩니다.”
그러고 보니, 작년에 차지했던 리그 원 트로피가 기억보다 조금 작았다. 복제품으로 바뀐 모양이다.
에이미가 미소를 지었다.
“함께해주신 팬 여러분의 덕분입니다. 그러니, 부디.”
“네. 앞으로도 함께할게요.”
아직 클럽 박물관에는 공간이 남아 있었고, 팀의 목표를 그린 크레파스 그림 또한 여전히 벽에 걸려 있었다.
FA컵 우승, 프리미어리그 우승, 챔피언스 리그 우승··· 그리고 트레블까지.
그리고 그 뒤에는, 문이 보였다. 일명 제 5 게이트, 선덜랜드 메가 스토어로 이어지는 통로다.
선덜랜드 팬들 사이에서도 유명해진 통로였다.
[혹시라도 메가 스토어 갈 거라면, 그날은 절대 클럽 박물관에 가지 마라. 제 5 게이트는 마계의 입구다.]
게이트를 응시하던 마일즈가 마침내 결심이 선 것처럼 단호한 목소리를 냈다.
“오늘 하루쯤은 괜찮겠지? 우승했으니까.”
“네, 이제는 예산도 두 배니까요.”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커플을 향해, 에이미가 상냥한 목소리로 안내를 시작했다.
“마침, 우승 기념 세일 중이랍니다.”
“그렇군요. 신제품도 있나요?”
“챔피언십 우승 기념으로, 인장 반지가 나왔습니다. 커플분들께 인기라고 하던데요··· 한번 보시겠어요?”
“반지···!”
눈을 빛내는 수잔을 향해 에이미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조금 씁쓸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그밖에는, 요즘은 페르난데스 관련 상품이 가장 잘 팔린다고 들었습니다.”
* * *
구단주실에서, 나는 페르난데스와 나란히 마주했다.
“톰슨은 주장을 맡지 않겠다고 하더군요.”
그러자 페르난데스가 쓴웃음을 지었다.
“톰슨이라면 여러모로 적당하다고 생각했는데요. 본인에게도 영광스러운 이야기일 텐데···.”
톰슨. 유소년 시절부터 천재로 불리며 인정받았고, 빅클럽에서도 오랫동안 활약하던 선수다.
팀의 주장을 맡기 충분한 그릇이지만, 정작 프로 무대에서 클럽 캡틴을 맡아본 적은 한 번도 없다. 그가 뛰던 시절, 그의 친정팀에는 톰슨보다 우선순위가 높은 선수가 둘이나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 팀에서는··· 같은 시즌에 페르난데스가 영입되었고.
“팀의 장래를 위해서라면, 자주 주장이 바뀌는 건 좋지 않다고 단언하더군요.”
꾸준한 관리를 받으며 무릎에 대한 불안감은 이제 가신 것 같지만, 그래도 톰슨이 선수로서 적지 않은 나이임에는 변함이 없다.
골키퍼라면 몰라도, 필드 플레이어의 수명은 그리 길지 않다. 앞으로 2, 3년 후면 톰슨은 유니폼을 벗게 될 것이다.
페르난데스가 쓴웃음을 지었다.
“구단주님, 혹시 저 들으라고 하시는 말씀이십니까? 죄송하지만, 은퇴는 번복 안 합니다.”
“네, 압니다. 그냥 아쉬움의 표현이라고 넘어가 주시죠.”
트로피를 들어 올렸던 날. 페르난데스는 선수단 모두의 앞에서 물러나겠다고 선언했고, 주장 완장을 풀어 반납했다. 구단주실에서도 명확히 밝혔다. 재계약 없이 은퇴하겠다고.
“진로 문제는 결정하셨습니까?”
“조금만 더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네. 마음이 정해지면 꼭 알려주십시오.”
그가 정말로 원하는 자리라면, 최대한 만들어줄 생각이다. 설령 그것이 스페인 축구협회장 자리라고 하더라도.
페르난데스가 웃었다.
“알겠습니다. 좀 더 생각해보고 싶으니, 지금은 제 후임 이야기나 하시죠··· 톰슨이 거절했으면, 역시 젊은 선수여야 명분이 서겠군요.”
“그렇습니다.”
잠시 생각에 잠기던 페르난데스가 진지한 표정으로 내 눈을 응시했다.
“5년만 시간이 있었다면 에디를 추천했을 겁니다.”
“에디요?”
의외의 인선에 눈을 깜빡이자, 페르난데스가 미소를 지었다.
“그때쯤이면 센터백으로서의 기량이 물오를 겁니다. 에디 특유의 강한 자의식은 절대 낫지 않겠지만, 팀에 융화되면 그 또한 일종의 리더십이 되겠죠.”
하긴, 에디는 이적 동기랍시고 수시로 스티븐을 챙기기도 하고, 잭이나 요니와도 가깝게 지낸다. 말하는 모양새가 좀 그렇긴 해도, 성격만 봐서는 리더 타입이다.
센터백이라는 포지션 특성상, 로테이션 없이 소화할 수 있는 경기가 많다는 점도 장점이다.
다만, 5년이 필요하다는 표현처럼, 에디는 아직 팀에 완전히 녹아들었다고 보기 어렵다. 페르난데스 역시 에디를 당장 주장감으로 추천한 것은 아니었는지 표정을 풀었다.
“당장은 잭과 요니인데, 명분만 보면 잭이 훨씬 나을 겁니다. 로컬 보이라는 신분도 그렇고, 투쟁심도 인상적이더군요. 피범벅이 된 얼굴로 웃으며 뛰었다면서요.”
한때 잭에게 ‘살인마 잭’이라는 무시무시한 별명이 붙게 만든 원동력이었다. 다만··· 페르난데스는 그 시절에 팀에 없었는데?
“들었습니다. 세르히오에게요.”
아, 그러고 보니 잭이 피범벅이 된 그 경기의 상대는 페르난데스의 친정팀 레알이었다. 친분이 있는 선수들에게 전해 들었어도 이상한 일은 아니겠지.
“물론 잭에게도 결점은 있습니다. 열정과 투지는 미덕이지만, 때로는 양날의 칼이 될 수 있으니까요.”
“하긴, 잭은 치즈를 좀 자주 먹죠.”
다이렉트 레드는 아예 없었으며, 옐로카드 두 장 누적은 단 한 번뿐이었다. 그렇지만 기본적으로 카드 자체는 적지 않게 먹는 선수다··· 아마, 우리 팀에서 가장 많이 받겠지.
“만일 잭이라면··· 페르난데스 선수와는 정반대 타입의 주장이 되겠군요.”
“그렇습니다. 어쩌면 요니에게도 성장의 기회가 되지 않을까 싶군요. 동료가 한 걸음 앞서 나가는 모양이 될 테니까요.”
“으음···.”
사실 나는 잭보다 요니가 더 크게 성장할 선수라고 믿는다. 내 눈에 보이는 잠재가치가 더 크기 때문에.
그렇다고 잭을 홀대하겠다는 건 아니다. 잭의 재능은 프리미어리그에서 뛰기 충분하며, 팀에 대한 애정만으로도 사랑받아 마땅할 선수다.
다만, 앞으로 4년이나 5년 후가 염려스럽다.
언젠가 잭이, 재능이라는 이름의 장벽을 맞이하게 될 때, 그의 팔에 매달린 주장 완장이 오히려 부담되지 않을까 신경이 쓰였다.
그 밖의 고민이 있다면, 역시 요니가 걸린다.
로컬 보이가 아니라는 이유 하나만 제외하면, 요니 역시 당당한 성골 유스다. 브라이언의 표현을 빌리자면, 잭은 그냥 이곳에서 태어난 거지만, 요니는 스스로 선덜랜드를 선택한 선수다.
출신지 때문에 밀렸다는 느낌만은 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
페르난데스가 웃었다.
“고민이신 모양이군요, 구단주님. 그럼 원점으로 돌아와서 생각해 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어떤 축구를 보고 싶은지.”
어떤 축구를 보고 싶은가?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생각에 잠겨 있을 무렵, 페르난데스가 덧붙였다.
“요니는 냉정하고, 잭은 열정적이죠. 누구를 주장으로 삼느냐에 따라 팀의 컬러도 달라질 겁니다··· 어떤 축구를 원하십니까?”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대답하기 쉽군요.”
내가 보고 싶은 축구가 뭔지, 선덜랜드가 해야 할 축구가 무엇인지.
답은 정해져 있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투지와, 보는 것만으로도 팬들의 가슴이 뛰는 열정.
그 기준이라면··· 골라야 할 선수는 정해져 있다.
* * *
선수단은 휴가를 떠났지만, 변함없이 구단에 남아 있는 선수도 있었다. 요니 역시 그중 한 명이었다. 기숙사에서 지내는 신분 때문이었다.
시즌이 끝난 직후라 요니는 조금 나태하게 보내는 중이었다. 구체적으로는 침대와 한 몸이 되어서.
그때 노크 소리가 났고, 곧바로 요니의 스마트폰에 방문자의 얼굴이 표시되었다. 코치 브라이언이었다.
곧바로 앱에서 ‘문 열림’ 버튼을 누르며, 요니는 스프링처럼 튕겨 일어났다.
잠시 후, 요니는 브라이언과 손님용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아직 확정은 아니지만, 너한테 꼭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찾아온 거야.”
“네, 코치님.”
“이번에 페르난데스가 은퇴하는 건 알지? 그래서 말인데···.”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브라이언의 모습에서, 요니는 곧바로 그의 용건을 짐작해냈다.
“잭이 주장이 되겠네요. 그렇죠?”
“어··· 맞아. 어떻게 알았어?”
눈앞의 코치는 놀라울 정도의 축잘알이지만, 사이드라인 바깥의 일에는 어두운 편이었다.
요니는 빙긋 미소 지었다. 쓴웃음으로 보이지 않기 위한 약간의 노력을 더해.
“반대였다면 아마 코치님은 잭을 찾아가셨을 테니까요. 그리고 저는 감독님이나, 구단주님 호출을 받았겠죠.”
“그럼 이야기가 빠르겠네, 요니. 오해하지 말고 들어.”
“네.”
“솔직히 말하면, 내 생각에 로컬 보이인지 아닌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
“네.”
“내가 어릴 때 유스로 뛰던 친구 중, 가장 재능 있었던 로컬 보이는 다른 팀에 가 버렸거든.”
“네.”
“그리고 이 팀을 되살린 사람은, 로컬 보이가 아닌 외국인이고. 그러니까···.”
더듬거리는 브라이언의 모습을 보며, 요니는 그만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
“예전이라면 굴 팠을지도 모르지만, 이젠 저도 알아요. 신경 안 씁니다. 그리고 주장 자리는 저보다는 잭이 어울리죠. 성격만 보더라도 그렇잖아요?”
요니는 조금도 흐트러짐 없는 환한 미소로 브라이언을 돌려보냈다.
그리고 사실, 요니는 딱히 거짓말을 하지도 않았다. 주장으로서 잭이 낫다는 것도, 로컬 보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말도 전부 요니의 진심이었다.
다만···.
“그렇다고 분하지 않은 건 아닌데요.”
닫힌 문을 응시하던 요니는 문득, 가슴 속에서, 뭔가가 끓어오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정신을 차렸을 때, 요니는 자신이 달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경기장 주변, 시티 오브 선덜랜드의 거리를.
“요니!”
소리가 난 쪽을 돌아보자, 사과가 날아들었다. 요니는 웃으며 사과를 받아들고 한 입 베어물었다.
“고마워요, 아저씨. 맛있네요.”
“무릎 안 나가게 조심하고!”
“걱정 마시고요.”
벌써 10년도 넘게 머무른 거리는, 그에게는 무척이나 친숙했다. 노점상 아주머니도, 과일 가게 아저씨도 전부 오랜 이웃처럼 느껴졌다.
그런 이웃 중에는, 좀 더 가까운 사이가 있다. 예를 들면···.
“요니!”
자신을 향해 손짓하는 잭의 어머니, 사라 맥그리거 여사를 발견한 요니의 얼굴에 티 없는 미소가 떠올랐다.
눈이 마주치자 사라 여사는 곧바로 툴툴거리기 시작했다.
“뭘 그리 멍하게 서 있어? 와서 받지 않고!”
“네? 네.”
요니가 다가가자, 사라 여사는 곧바로 등에 진 백팩을 풀어 건넸다. 백팩에서는 고소한 냄새가 났고, 꽤 묵직했다. 요니가 어릴 때부터 즐겨 먹던, 수제 컴버랜드 소시지의 냄새였다.
“모처럼 소시지 구웠는데, 잭 이 녀석은 그새 어딜 가버렸지 뭐니.”
“어휴, 어머님. 그렇다고 여기까지 들고 오셨어요? 부르셨으면 제가 갔을 텐데···.”
“식으면 맛이 없잖니. 얘, 빨리 받아. 무거워 죽겠다.”
요니는 곧바로 백팩을 받아들고 등에 멨다.
“기숙사에 있다고 끼니 거르지 말고.”
“밥 잘 나와요, 어머님.”
“밥이야 잘 나오겠지. 네가 툭하면 끼니 거르는 게 문제지. 너, 시즌 끝나면 관리 안 하잖아.”
그때였다.
캡모자와 선글라스, 허리에 찬 전대까지··· 전형적인 관광객처럼 보이는 두 청년이 요니와 사라 여사의 곁을 스쳐 지났다.
“아 맞다. 이번에 페르난데스 은퇴한다면서? 선덜랜드 다음 주장은 누구래?”
“글쎄, 잭 아닐까? 역시 로컬 보이가 최우선 아니겠어?”
“하긴, 독일 놈한테 영국 팀의 주장 자리를 주기는 좀 그렇지.”
자신을 독일 놈이라고 지칭하는 관광객들보다, 험악해지는 사라 여사의 얼굴이 훨씬 신경 쓰였다. 요니는 황급히 고개를 흔들었다.
“어머님. 저는 신경 안 써요. 그러니까···.”
요니의 만류는 조금 늦었다. 사라 여사가 물이 가득 든 양동이를 확보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곧바로 관광객들을 물에 젖은 생쥐 꼴로 만들어 놓은 사라 여사가 일갈했다.
“감히 어디서 그따위 되먹지 못한 소릴 하는 거야! 남의 아들보고, 뭐? 독일 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