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재능이라는 이름의 장벽 (2)
졸지에 물벼락을 맞은 관광객들은 당황했지만, 혼란은 길지 않았다. 곧바로 관광객들의 얼굴에 분노가 피어올랐다.
“아니, 이 아줌마가 미쳤나!”
요니는 재빨리 관광객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선수치고 왜소하다는 평가를 받는 요니였지만, 그래도 명색이 프로 운동선수의 몸은 일반인과는 확연히 다르다. 그런 요니가 가로막자 관광객들은 조금 주춤거렸다.
그리고 주위에서 선덜랜드 주민들이 끼어들었다.
“충고하는데, 그 아주머니 머리칼 하나라도 건드리면 몸 성히 돌아가기 힘들 거요. 잭의 어머니거든.”
그러자 관광객들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그런데 왜 지나가는 사람에게 시비를 걸고···.”
“시비는 당신들이 걸었지. 남의 아들한테 뭐? 독일 놈?”
“아니, 뭔가 오해한 것 같은데. 아주머니, 우린 잭이 주장이 되어야 한다고 했어요. 그 독일 놈 말고···.”
등 뒤에서 또다시 험악한 기운이 피어오르는 것 같아서 요니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관광객이 사라 여사에게 달려들지 못하게 막아설 게 아니라, 사라 여사가 관광객들에게 달려들지 못하게 막아야 하는 게 아닐까?
망설임은 짧았다. 요나스 뮐러는 공간지각, 그리고 판단력을 무기로 삼는 선수, 따라서 생각의 속도라는 점에서 요니는 누구보다 빨랐다.
자신을 마치 친아들처럼 스스럼없이 대하지만, 사라 여사는 그를 절대 떠밀거나 하지는 않는다. 잭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프로 선수잖니? 몸으로 벌어 먹고사는 거니까, 소중히 관리해야지!]
그러니 사라 여사는 말로 설득할 수 있다고, 요니는 그렇게 생각했다.
“어머님, 저는 괜찮습니다.”
“내가 안 괜찮아! 누가 독일 놈이야? 얘는, 우리 요니는 열한 살부터 시티 오브 선덜랜드에서 살았어. 내가 만든 음식을 먹고 자란 내 아들이라고.”
슬슬 상황을 파악한 관광객들이 요니의 얼굴을 흘끔거리기 시작했다.
“저기··· 혹시 요나스 뮐러 선수?”
“네, 독일 놈입니다. 사인이라도 해 드릴까요?”
분위기를 누그러뜨릴 겸 싱긋 웃으며 말했더니, 곧바로 정수리에 뜨끔한 충격이 느껴졌다. 사라 여사에게 슬쩍 한 대 쥐어박힌 모양이었다.
그사이, 주위의 선덜랜드 주민들이 하나둘씩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말인데, 형씨들. 사라 아주머니한테 감사하는 게 좋을 거야. 솔직히 아주머니 아니었으면 우리부터 가만 안 있을 참이었거든.”
“뭐, 물에 홀딱 젖은 사람 두들겨 패는 취미는 없으니까 말이지.”
“선덜랜드 밖에서는 뭐라고 떠들어도 상관없지만, 여기선 조심하쇼. 우리 요니는, 선덜랜드의 아들이니까··· 자, 이걸로 몸 닦고.”
요니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러지 않으면, 뭔가가 밖으로 흘러내릴 것만 같아서.
[솔직히 말하면, 내 생각에 로컬 보이인지 아닌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
‘그러게요, 코치님. 정말 그러네요.’
잭을 주장으로 삼을 거라는 통보를 받은 이후, 줄곧 가슴이 진정되지 않았다. 구단의 입장은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분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명치 부근이 뜨겁고 자꾸만 욱신거려서, 어떻게든 토해내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그래서 정처 없이 달렸다. 어릴 때부터 친숙한 이 도시를.
이젠 안다. 여전히 가슴 속에서는 무언가가 끓고 있지만, 그 안에 서운함은 조금도 들어있지 않다는 것을.
자신이 로컬 보이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시티 오브 선덜랜드는 결코 요니를 이방인으로 취급하지 않으니까.
그런데도 가슴속 한구석에선 여전히 무언가가 끓고 있었다. 그 감정의 이름을, 요니는 간신히 짐작할 수 있었다.
선수로서의 호승심.
‘난, 잭에게 지고 싶지 않은 거였구나.’
무심코 시선이 돌아간다. 스타디움 쪽으로, 지금쯤 구단주실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그의 친구를 향해.
‘먼저 가 있어. 금방 따라잡을 테니까.’
요니는 백팩을 고쳐 멨다. 어깨에 전해지는 소시지의 무게, 그 무게만큼의 묵직한 애정이 느껴졌다.
사라 여사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힘내렴.”
“네, 어머님.”
빙긋 미소 지으며, 요니는 천천히 달리기 시작했다.
아카데미를 향해.
* * *
그때, 잭은 요니의 예상대로 구단주실에 있었다.
로저스 감독, 그리고 구단주 이희성의 호출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교사 역이 감독님, 학부모 역은 구단주님인가?’
그럼, 언제나 구단주 근처에 머무르는 비서 이희주는···.
‘두 가지 의미로 실례되는 생각이네.’
그런 실없는 생각을 떠올리며, 잭은 입술을 핥았다.
긴장을 풀려는 사소한 노력이었다. 이적시장이 열릴 무렵, 구단주실에 불려온다는 것은 선수로서는 썩 기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곧바로 눈앞에 음료가 세 잔 놓였다. 그와 로저스 감독에게는 주스가, 구단주 앞에는 제로 콜라가.
그에 더해, 구단주 비서는 종이로 된 작은 상자 한 개를 테이블에 올려둔 후에야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구단주님, 이게 뭡니까?”
그러자 대답 대신, 열어보라는 듯한 시선이 돌아왔다. 잭은 조심스럽게 상자를 열었고, 내용물을 발견한 순간부터는 말을 잇지 못했다.
상자에 든 것은, 선덜랜드의 주장 완장이었다.
“조만간 정식으로 발표하겠지만, 당사자는 미리 알고 있어야겠지. 그래서 불렀네.”
“축하한다. 이제 네가 팀의 주장이야.”
“··· 톰슨 씨가 하시는 게 맞지 않슴까?”
커리어로 봐도 그렇고, 당장의 실력도 그렇다. 언젠가는 교차하게 되겠지만, 지금의 톰슨은 아직 잭보다 위에 있는 선수다. 적어도 잭은 그렇게 판단하고 있었다.
그러자 잠시 구단주와 서로 시선을 교환한 다음, 로저스 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톰슨은 지금처럼 팀의 부주장으로서, 자네를 많이 도와줄 걸세.”
잭은 물끄러미 주장 완장을 내려다보았다.
구단 유소년 출신 로컬 보이가 꿈꿀 수 있는 최고의 자리, 인생에서 누릴 수 있는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에 속한다.
잭은 조심스럽게 주장 완장을 꺼내 들었다.
재질을 따지면 고작 천 조각에 불과할 완장이, 어째서인지 무척이나 무겁고, 또한 뜨거웠다. 무슨 핫팩이라도 붙인 것처럼.
“차 봐도 되겠슴까?”
그러자 구단주 이희성이 웃었다.
“물론. 기왕이면 유니폼도 준비해 놓을 걸 그랬네.”
“괜찮슴다. 팔에 맞는지만 보려는 검다.”
“꼭 맞을 거야.”
하긴, 선덜랜드가 하는 일이다. 누구보다 꼼꼼한 구단주, 그리고 프로페셔널한 스태프를 가진 팀은, 당연히 잭이 착용할 주장 완장의 사이즈 또한 완벽하게 조정했을 것이다.
예상대로 딱 맞는다.
“팔에 닿는 느낌이 엄청 좋고 편함다. 뭔가 기능성 원단 쓰신 검까?”
“혹시 몰라서 안쪽에 구단 엠블럼을 넣었거든.”
잭은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함다. 죽기 살기로, 열심히 해보겠슴다.”
“그래.”
“그럼 가봐도 되겠슴까? 유니폼 갈아입고 나서 다시 차보고 싶슴다.”
본심을 말하자면, 일단 무작정 달리고 싶었다. 가슴 속이 터져나갈 것 같아서.
다만, 솔직히 이야기하면 곱지 못한 시선이 돌아올 게 뻔했기에 잭은 슬쩍 목적을 얼버무렸다. 시즌오프는 어디까지나 휴식기이고, 선덜랜드는 선수의 오버 트레이닝에 무척 예민한 구단이다.
이희성이 빙긋 웃었다.
“축구화 신고 뛸 거면 그라운드에서만. 밖에서 뛰는 건 금지야.”
“··· 어떻게 아셨슴까?”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 게 오히려 신기한데.”
머리를 긁적이는 잭을 향해, 감독과 구단주의 미소가 돌아왔다. 하루 정도는 눈감아줄 수 있다는 신호에, 잭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그러려 했다.
테이블 구석에 올려진 서류가 그의 눈을 잡아끌었다. 앉아 있을 때도 서류인 줄은 알았지만, 내용까지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그 문서는 바로 선수의 명단이었다.
선덜랜드 선수의 이름은 들어있지 않았다. 그보다 훨씬 유명하고, 축구 잘하는 선수들의 이름이 가득하다. 비록 ‘축구의 신’ 의 이름은 명단에 없었지만···.
‘영입 후보 명단이구나.’
잭은 무심코 숨을 삼켰다.
물론 저들 모두를 하루아침에 다 데려올 수는 없을 것이다. 상대 구단의 의향은 물론, 선수의 마음도 중요할 테니. 그리고 선덜랜드는 선수를 휙휙 갈아치우는 팀은 아니다.
아마 두 명, 많아야 세 명 정도가 새로 들어오겠지.
‘팀이 바뀌었어. 예전 같으면 넘보지도 못했을 선수인데.’
바꿔 말하면, 저 명단의 누군가는 선덜랜드에 온다는 이야기가 된다. 잭은 그렇게 생각했다.
‘내가 저 사람들을 통솔할 수 있을까?’
잭은 문득, 떠나간 페르난데스가 얼마나 위대한 주장이었는지를 실감했다. 실력은 물론, 존경할만한 인품과 세계적 레전드라는 위상까지 갖춘 그의 전임자는, 심지어 리더십마저 훌륭했다.
반면 잭은 3부리그에서 프로 생활을 시작한, 어린 선수에 불과하다.
잭은 무심코 왼팔에 매달린 주장 완장을 쓰다듬었다. 그저 천 조각에 불과할 텐데도, 팔에 전해지는 묵직함에 왼팔이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무게만큼의 부담감이 느껴졌다.
“톰슨도 있으니까 크게 달라질 건 없을 거야. 너는 지금처럼 그저, 열심히 뛰기만 하면 돼.”
“힘내요.”
구단주 남매의 격려를 받으며, 잭은 천천히 구단주실을 빠져나왔다. 웃음은 나오지 않았다. 오랜 세월 꾸던 꿈이 이루어진 날인데도.
그래서, 잭은 달려 나갔다.
아카데미를 향해.
* * *
잭이 돌아간 다음, 로저스 감독이 한숨을 쉬었다.
“부담스러워하는 모양이군. 너무 무리하지 않으면 좋겠는데.”
나는 곧바로 대답했다.
“잘해줄 겁니다. 혼자가 아니니까요.”
일단 우리 팀에는 여전히 톰슨이 남아 있다. 그는 무뚝뚝하지만, 절대 책임감 없는 성격은 아니다. 자기 입으로 향후 팀의 미래가 될 어린 선수에게 주장 완장을 맡기라고 말했으니, 잭이 힘들어하는 걸 보고만 있진 않을 것이다.
“하긴, 잭의 곁에는 요니도 있지··· 그럼, 이제 리빌딩 이야기를 하게 되나?”
“그 전에··· 제 생각보다 풀백이 훨씬 귀하더군요.”
요즘 축구판에서, 풀백은 기본적으로 희귀한 포지션이 되었다. 나와 브라이언이 유스로 뛰던 시절과는 퍽 다르게.
좋은 풀백이 귀한 원인은 뻔하다.
이것저것 다양한 능력이 요구되지만, 정작 그런 능력을 다 갖춘 선수라면 풀백보다 좀 더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포지션에서 뛰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미드필더, 아니면 윙포워드 같은.
덕분에 좋은 풀백은 언제나 품귀 상태다. 따라서 풀백을 사려고 해도 쉽지가 않았다.
오퍼를 넣을 때마다, 꼭 그런 기분이 든다.
‘얼마까지 알아보고 오셨어요?’
그나마 투자자라는 직업 덕에 가격 협상에 익숙한 나는 괜찮지만, 정찰제 매장에서만 쇼핑하던 희주는 아주 난리였다. 도둑놈들이라고.
이마에 가격이 보이는 특성 덕분에 오버페이는 절대 하지 않겠지만, 대신 이적시장이 실시간으로 미쳤다는 건 확실히 알겠다.
게다가, 아직 우리 선덜랜드는 프리미어리그 선수들에게 썩 매력적인 선택지는 아니었다.
‘선덜랜드? 제가 거길 왜 갑니까?’
‘어··· 비전은 마음에 드는군요. 챔스 나가게 되면 다시 의논해 봅시다.’
그런 식이다. 거액의 주급을 퍼주면 어떻게든 설득할 수는 있겠지만, 자칫하면 팀의 주급 체계가 무너진다.
하다못해 선덜랜드를 1부 리그급 선수들에게 좀 더 매력적인 선택으로 포장할 수만 있다면···.
상황을 파악한 로저스 감독이 미소를 지었다.
“어린 선수를 데려와 천천히 키워보는 것도 방법이지. 아니면··· 브라이언과 샐리를 불러서 새 전술을 준비할 수도 있네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풀백 못 구해서 전술을 바꾼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죠. 어떻게든 구해 올 겁니다. 이적시장은 기니까요.”
‘가진 자원에 맞는 전술을 짠다.’ 감독으로서는 무척 이상적인 덕목이긴 하다. 하지만, 구단주로서의 입장은 조금 다르다.
풀백을 사올 자신이 없으니 전술을 고쳐달라고 말하기는 너무 민망하기도 하고, 영입 자금 아끼다가 혹시 강등이라도 당하면 오히려 손실이 크다.
풀백은 반드시 데려올 것이고, 그 외에도 한두 명 정도 보강할 생각이다.
희주가 눈을 빛냈다.
“오빠, 좋은 생각이 났어. 헨도 씨나 톰슨 선수는 아직도 현역이잖아? 그러니까···.”
“커피 사줄까? 잠이 깰 만큼 독한 놈으로.”
“어? 그렇게 나쁜 생각 같진 않았는데···.”
“나보고 풀백 뛰라는 소리 아니냐?”
그러자 희주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런 소리 안 해.”
아니면 다행이지만···.
“내 추천은 브라이언 씨. 현역 시절 풀백이었다면서?”
“그건 적자야.”
삼백억 가치가 붙은 코치를 잃어버리는 대가로, 삼십억 원짜리 풀백을 얻게 된다.
그것만으로도 기적의 역연금술 소리를 들을 텐데, 심지어 그 삼십억 원짜리 풀백이 전성기가 진작에 지난 선수라면 눈물 날 노릇이다.
덕분에 다시 확신할 수 있었다. 요즘 들어 경기 보는 눈은 꽤 좋아진 모양이지만, 희주 얘는 여전히 축구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는 걸.
로저스 감독이 부드럽게 웃었다.
“사람은 각자 잘하는 게 다른 법이고, 보통 자기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을 할 때 행복한 법이라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동감입니다. 그러니까 희주 너도 잘하는 업무에나 집중해라.”
“쇼핑?”
“대충 비슷해.”
희주는 시원하게 지르는 걸 가장 잘하고, 다음으로는 스케줄 조정이나 계약 문제 같은 업무를 깔끔하게 처리할 수 있는 인재다.
그리고 내가 제일 잘하는 건, 당연하게도 투자다.
나는 천천히 테이블 위의 명단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유명 선수들의 이름이 즐비한 그 명단으로.
희주와 로저스 감독의 시선이 따라왔다.
“전부 연락할까?”
“응, 전부.”
그러자 로저스 감독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렇게 무리할 필요는 없네만··· 게다가 시즌마다 선수를 여러 명 갈아치우면 선수단의 결속 문제도 생기고···.”
나는 감독을 안심시킬 겸 부드럽게 웃었다.
“걱정 마시죠, 감독님. 이건 영입 명단이 아니니까요.”